내 오늘 더운 눈물로 너를 보낸다/ 김철진

 

 

오랜 날을 두고

오뉴월 땡볕보다 뜨거운 눈총을 받았다

너를 사랑하는 죄 때문에

 

내 너를 떠날 수 없었던 것은

너로 하여 나는 꿈꿀 수 있었고

너로 하여 나는 행복했기 때문이었다

 

너는 늘 몽롱한 눈빛으로

내 가난한 영혼을 흔들어 깨웠고, 나는

알바트로스 되어 사색의 바다를 날 수 있었다

 

아내 없인 살아도 너 없인 못 산다 했는데

이제 너를 사랑할 힘이 없구나, 담배여!

내 오늘 더운 눈물로 너를 보낸다

 

- 다음 카페 <벽파 예술촌> 서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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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시에는 ‘2012년 광복절에 금연을 하며’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벽파 길철진 시인은 공초 오상순의 계보를 이을만한 문단의 애연가이며, 스스로는 공초보다 더 지독한 애연가라는 긍지(?)도 갖고 있었다. 공초가 몇 모금 빨고 꽁초를 만들어 갑수만 늘리는 습관성 애연가였다면 자신은 끝까지 야무지게 다 태우면서 하루 서너 갑을 40여 년 동안 애연했으니 진정성에서는 공초보다 한 끝빨 위였음을 인정해도 되겠다.

 

 담배와 턱수염과 붉은(혹은 초록)베레모의 조합은 시인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가장 먼저 떠올리는 시인의 트레이드마크이다. '금연은 일망이요, 단주는 이망, 기녀(棄女)는 삼망이고, 단식은 사망(死亡)'이라는 지론과 함께, 죽는 날까지 요한슈트라우스처럼 '술, 담배, 예술'을 사랑하다 갈 생각이라던 시인이 왜 갑자기 ‘아내 없인 살아도 너 없인 못 산다’던 그 담배를 끊기로 한 걸까. ‘오뉴월 땡볕보다 뜨거운 눈총’과 위축된 흡연권으로 탈진한 탓일까. ‘너를 사랑할 힘이 없’을 만큼 심각한 건강상의 이유라도 있었던 것일까.

 

 작가 공지영은 학생운동시절부터 해온 흡연을 재작년에 끊었다. 대학 2학년 때 데모하다 잡혀간 친구가 훈방되기를 경찰서 앞에서 기다리는 동안 너무 춥고 속상해서 담벼락에 기대어 친구들과 함께 피우기시작한 담배가 어느새 도반처럼 여겨졌고 심지어 이주일 씨가 폐암으로 사망하면서 금연을 강조할 때도 배신감을 느낄 정도였다는데, 우연히 한 신부님이 자기를 위해 금연기도중인걸 알았고 이후로 담배가 저절로 낯설어지더라고 했다.

 

 하지만 김철진 시인의 경우는 그로인해 ‘꿈꿀 수 있었고’ ‘사색의 바다를 날 수 있었다’고 할 만큼 담배를 사랑했고 ‘흡연의 의지’ 또한 워낙 강했기에 누구도 감히 시인의 금연을 위해 기도할 생각은 하지 못했다. 그저 ‘이제 끊으실 때도 되지 않았나요’라든가 ‘좀 줄이시지요’ 정도의 주위 권유였는데, 아뿔싸, 흡연이 직접적 원인이라고 단언할 수는 없겠으나 벽파 김철진 시인은 추석날 새벽 둥근달을 미처 보지 못한 채 그만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시인이 ‘더운 눈물로 너를 보낸’ 이유는 결국 자발적인 의사가 아니라 더는 사랑할 물리적 힘을 잃어버렸기 때문이었다. 금단증세로 괴로움을 호소할 여가도 없이, 담배를 끊고 나니 이렇게 자유롭다며 너스레를 떨 사이도 없이 그렇게 가셨다. 이제 그에겐 찌푸리는 눈살도 담뱃재가 키보드 안으로 자꾸 들어가는 불편도 사라졌지만 우리는 연기 자욱한 그의 글을 다시 볼 수 없게 됐다. 외로움을 자초하며 ‘정신적 비타민’으로 연명했던 시인을 떠나보내며 시인의 가는 길에 불붙인 담배 한 개비 놓아두어야겠다.

 

 

권순진

 


출처 : 詩하늘 통신
글쓴이 : 제4막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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