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필녀의 삶과 문학/김필녀의삶의뜨락
[스크랩] 이수익 시 감상
아정 김필녀
2008. 9. 8. 22:29
![]() * 봄날에 2 - 이수익 화냥기처럼 설레는 봄, 봄날이다. 종다리는 까무라치게 자꾸 울어쌓고 산마다 피가끓어 꽃들 피는데 아, 나는 사랑도 말로 못하는 버어리 사내 봄밤 꿈에서만 너를 끌어안고 죄를 짓느니...... * 봄날에 - 이수익
봄에는 혼자서는 외롭다, 둘이라야 한다, 혹은 둘 이상이라야 한다. 물은 물끼리 만나고 꽃은 꽃끼리 피어나고 하늘에 구름은 구름끼리 흐르는데 자꾸만 부푸는 피를 안고 혼자서 어떻게 사나, 이 찬란한 봄날 가슴이 터져서 어떻게 사나. 그대는 물 건너 아득한 섬으로만 떠 있는데……. * 한잔의 기쁨 위에 - 이수익
초봄에는 가만히 앉았어도 왠지 눈물겹다 봄풀이 돋아나도 그렇고 강물이 풀려도 그렇다 말없이 서러운 것들 제가끔 제자리로 돌아오고 있는 이 길목의 하루는 반가움에 온몸이 젖어 덩실덩실 일어나 춤이라도 추고 싶다 바람같이 언덕을 달리고 싶다 오오, 환생하는 것들 어리면 어릴수록 약하면 약할수록 나를 설레이게 하는 만남의 희열이여, 무한 축복이여 초봄에는 가만히 앉았어도 왠지 눈물겹다 한잔의 기쁨 위에 또 한잔의 슬픔처럼 ![]() * 순결 - 이수익
새 흙과 기름을 준비하고 묵은 盆은 갈아 주어야지, 解冬의 볕살 부신 양지에 앉아 아내와 나는 분갈이를 한다. 쇠망치와 금속성이 몇 번 盆의 허리께를 울리자 마침내 土器의 집은 해체되고 그 속에 푸른 잎새를 떨치고 싶던 나무는 겨울에서 봄으로 걸어 나온다. 바로 그때! 우리는 본다,어둠 속에 부드러운 흙으로 아랫도리를 가린 하얀 뿌리들이 갑자기 햇볕에 맨살을 드러내자 제 몸을 움츠리며 떠는 것을 아, 우리는 그만 무심코 그 純潔을 들여다보고 만 것이다. * 그리고 너를 위하여 - 이수익
타오르는 한자루 촛불에는 내 사랑의 몸짓들이 들어있다. 오로지 한사람만을 위하여 끓어오르는 백열의 침묵속에 올리는 기도, 벅찬 환희로 펄럭이는 가눌길 없는 육체의 황홀한 춤, 오오 가득한 비애와 한숨으로 얼룩지는 눈물, 그리고 너를 위하여 조금씩 줄어드는 내 목숨의 길이. * 천 년의 사랑 - 이수익 산이 깊은 호수에 잠겨 있습니다. 호수가 산을 그 가슴으로 조용히 끌어안고 있습니다. 천 년 세월 그러합니다. 이따금 선착장을 떠난 쾌속보트가 흰 물보라를 날리며 호수 위를 씽씽 달립니다. 천 년 호수의 눈동자에 한 줄기 그림자가 흔들립니다. 그러나 잠시…… 그뿐입니다. 다시 산이 깊은 호수에 잠겨 있습니다. 호수는 지아비를 우러러보는 지어미처럼 산을 그윽한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습니다. 아름다운 交合의 풍경입니다. ![]() * 과수원 - 이수익
1 과수원에 가면 나도 한 마리 벌레가 되고 싶다 해맑은 아침이슬 먹고 푸른 달빛 먹고 흠뻑 향기가 무르익어가는 과일과 과일, 그 열망에 빛나는 눈빛 사이를 느리게, 아주 느리게 기어다니고 싶다 2 과수원에 바람 부는 날은 잎새에 매달려 춤이나 추고 과수원에 비 내리면 후둑후둑 빗소리에 가슴을 열고 과수원에 번개치면 날은 깜깜한 맹목으로 엎드려 있으면서 나도 자랄 것이다. 조금씩 키가 크는 아이처럼 3 그리고 마침내 단물이 흘러넘쳐 무거워진 과일이 제 무게를 견디지 못해 뚜우뚝 떨어져내리면 나도 떨어져 스밀 것이다, 부드러운 흙 속에 내 향기로운 몸을 묻으면서 * 추락을 꿈꾸며 - 이수익 최고봉이 수직에 가까운 급경사를 이룸으로써 하늘의 뜻과 가까워지려는 듯, 萬年雪 덮인 해발 4,478미터의 마터호른 山은 오늘도 은빛 낭떠러지 빙벽에 매달린 알피니스트들을 조용히 거부하듯 밀어 내지만 저 죽음의 향기에 마취된 이들은 벼랑이 뿜는 현란한 추락의 상상력에 몸을 떨며 天刑처럼 암벽을 기어오른다. 세상의 때를 묻히고 싶지 않은 고고한 山이 날카롭게 세우는 죽음의 벼랑 아래로 아득하게, 죽음에 취한 이들이 걷는 길이 있다. * 안개꽃 - 이수익
불면 꺼질듯 꺼져서는 다시 피어날 듯
안개처럼 자욱히 서려 있는
꽃.
하나로는 제 모습을 떠올릴 수 없는
무엇이라 이름을 붙일 수도 없는
그런 막연한 안타까움으로 빛깔진
초변의
꽃
![]() * 상처 - 이수익
부러져도 아주 못쓰게 부러지지 않고 약간 금간 듯 부러진 分析의 따스한 美學 그 상처, 아픔으로 성숙해진 영혼이 깊어진 강처럼 고요히 눈을 뜨고 바라보는 세상은 불행의 重量만큼 여유가 있다. 이제는 더 완벽을 꿈꾸지 않을 상한 그릇 하나, 이제는 더 파괴를 부르지도 않을 상한 그릇 하나, 나는 마흔 다섯 상의 중년남자. * 나에겐 병이 있었노라 - 이수익 강물은 깊을수록 고요하고 괴로움은 깊을수록 말을 잃는 것. 다만 눈으로 말하고 돌아서면 홀로 입술 부르트는 연모의 질긴 뿌리 쑥물처럼 쓰디쓴 사랑의 지병을, 아는가...... 그대 머언 사람아. * 우울한 샹송 - 이수익 우체국에 가면 잃어버린 사랑을 찾을 수 있을까 그곳에서 발견한 내 사랑의 풀잎되어 젖어있는 비애를 지금은 혼미하여 내가 찾는다면 사랑은 또 처음의 의상으로 돌아올까 우체국에 오는 사람들은 가슴에 꽃을 달고 오는데 그 꽃들은 바람에 얼굴이 터져 웃고 있는데 어쩌면 나도 웃고 싶은 것일까 얼굴을 다치면서라도 소리내어 나도 웃고 싶은 것일까 사람들은 그리움을 가득 담은 편지 위에 애정의 핀을 꽂고 돌아들 간다 그때 그들 머리 위에서는 꽃불처럼 밝은 빛이 잠시 어리는데 그것은 저려오는 내 발등 위에 행복에 찬 글씨를 써서 보이는데 나는 자꾸만 어두워져서 읽질 못하고, 우체국에 가면 잃어버린 사랑을 찾을 수 있을까 그곳에서 발견한 내 사랑의 기진한 발걸음이 다시 도어를 노크하면, 그때 나는 어떤 미소를 띠어 돌아온 사랑을 맞이할까 ![]() * 어쩌다 한 번씩 달과 마주치면
달은 늙은 본처本妻. 간혹 찾아보면 늘 그 자리를 말없이 있다 * 근황 - 이수익
쉰 살이 되니까 나도 반쯤 귀신이 되어가는 모양이군. 자기 죽은 날 옛집을 찾아가는 귀신 눈에는 제삿상도 보인다던데 쉰 살이 되니까 내게도 지난 추억이란 추억들이 불을 켠 듯 환히 보이기 시작하는군. 그뿐인가, 쉰 살이 되니까 내가 앞으로 내처 가야 할 길도, 여럼풋이 보이기 시작하는군. 옛날에는 점술가한테서나 알아보던 그 길이...... 이런 일은 정말 몇 해 전만 해도 생각조차 할 수 없었는데 쉰 살이 되니까 나도 반쯤 귀신이 되어가는 모양이군
* 노인1(옹고집) - 이수익
나이 드니 고집밖에 없다. 고목에 핀 옹두리처럼
몹쓸 인상으로 굳어져버린 저만의
자폐 공간. 독거獨居하는 심술이
대창처럼 푸르고 꼿꼿하다. * 말 - 이수익
말이 죽었다. 간밤에 검고 슬픈 두 눈을 감아 버리고
노동의 뼈를 쓰러뜨리고
들리지 않는 엠마누엘의 성가 곁으로
조용히 그의 생애를
운반해 갔다.
오늘 아침에는 비가 내린다.
그를 덮는 아마포 위에
하늘에서 슬픈 전별이
* 이수익
1942년 경남 함안 출생.
서울대 사범대영문과 졸업. 63년 서울신문에 시가 당선되어 등단. 부산시 문학상(80') 대한민국문학상(88')수상. 현대문학상. 정지용문학상. 시집 <우울한 샹송> <슬픔의 핵> <야간열차> <그리고 너를 위하여> <푸른 추억의 빵(고려원)> 현대시동인. ![]() 유영주 그림...순서대로 봄의 노래, 그리움, 생명의 신비, 생명의 성숙, 꿈, 황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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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藝術村
글쓴이 : 촌장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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