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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차 소리를 듣고 싶다 / 김용락

아정 김필녀 2012. 4. 3. 10:32

 

기차 소리를 듣고 싶다 / 김용락

 

 

기차소리를 듣고 싶다

아니, 기적소리가 듣고 싶다

가을비에 젖어 다소 처량하게

비극적 음색으로 나를 때리는

그 새벽 기적소리를 듣고 싶다

방문을 열면 바로 눈앞에 있던

단풍이 비에 젖은 채로 이마에 달라붙는

시골 역전 싸구려 여인숙에서

낡은 카시미론 이불 밑에 발을 파묻고

밤새 안주도 없이 깡소주를 마시던

20대의 어느 날 바로 그날 밤

양철지붕을 쉬지 않고 두들기던 바람

아, 그 바람소리와 빗줄기를 다시 안아보고 싶다

인생에 대하여, 혹은 문학에 대하여

내용조차 불분명하던 거대 담론으로

불을 밝히기라도 할양이면

다음날의 태양은 얼마나 찬란하게 우리를 축복하던가

그날은 가고 기적을 울리며 낯선 곳을 향해

이미 떠난 기차처럼 청춘은 가고

낯선 플랫폼에 덩그러니 선 나무처럼

빈 들판에 혼자 서서

아아 나는 오늘밤 슬픈 기적소리를 듣고 싶다

 

- 시집 <기차소리를 듣고 싶다> (창작과비평사,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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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이 듣고 싶어 하는 기차소리는 그 옛날 증기기관차의 천지를 뒤흔들며 포효하는 묵직한 금속음과 기적소리였을 것이다. 정해진 철로 위로 가야할 길을 거침없이 내달릴 때 내는 기차소리는 모든 만물을 준동케 했으며 함께 호흡토록 했다. 새벽녘 기적소리 우렁차면 멀리 잠자던 개도 벌떡 일어나 발악처럼 짖어댔고 창문은 바르르 흔들렸다. 문풍지도 소리의 진동과 함께 떨었으며 벽지 속에서는 마른 흙이 주르르 흘러내리는 소리가 들렸다. ‘역전 싸구려 여인숙에서 낡은 카시미론 이불’이 뒤척였을 것이고, 누군가는 떠난 임을 생각하며 망연히 눈동자를 허공에 멈추고 공초에 불을 붙였을 것이다.

 

 기차소리 들리기 시작하면 십리 둘레의 모든 것들은 원래 제 목소리가 그것인양 함께 울리면서 진동을 보태어 더 깊은 울림을 주곤 했다. 우물곁에서는 우물의 메아리가 기적소리의 깊이를 더했고, 돌담 사이를 걷다 보면 돌들이 기적소리의 울림을 머금었다가 여운을 길게 늘이는데 돌들의 결속을 더욱 공고히 했다. 그럴 때 ‘인생에 대하여, 혹은 문학에 대하여’ ‘ 내용조차 불분명’했지만 ‘거대 담론으로 불을 밝혀’본 적이 있는가. 그때 ‘다음날의 태양은 얼마나 찬란하게 우리를 축복하던가.’ 가히 그때의 기차소리는 충분히 사려가 깊었고 중후했으며 마치 광야를 달리는 말발굽 소리와도 같았다.

 

 시인은 기차소리가 주는 얼마간의 감성적 애절함의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에게 뭔가 하고 싶은 말이 더 있는 듯하다. 현실에 대한 진지한 개입이나 강력한 발언이겠는데, 답답하고 모순된 현실에 저항하고 사회적 약자의 처지에 동감하는 정의롭고 참된 목소리를 기적소리처럼 내고 싶은 것이다. 어쩌면 다산 정약용의 말처럼 ‘나라와 백성들의 어려운 처지에 대해 걱정하지 않으면 시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면서 시인은 최근 그 기차소리와 기적소리를 기적(奇蹟)처럼 희망의 새벽밥 익어가는 소리처럼 다시 듣고 싶은 것이다. 우리사회에서 기적은 늘 우리 곁에서 일어나고 있고, 또 일어나야만 한다.

 

 

권순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