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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급열차를 타고 가다가 / 신경림

아정 김필녀 2012. 5. 9. 11:48

 

 

특급열차를 타고 가다가 / 신경림

 

 

이렇게 서둘러 달려갈 일이 무언가

환한 봄 햇살 꽃그늘 속의 설렘도 보지 못하고

날아가듯 달려가 내가 할 일이 무언가

예순에 더 몇 해를 보아온 같은 풍경과 말들

종착역에서도 그것들이 기다리겠지

 

들판이 내려다보이는 산역에서 차를 버리자

그리고 걷자 발이 부르틀 때까지

복사꽃숲 나오면 들어가 낮잠도 자고

소매 잡는 이 있으면 하룻밤쯤 술로 지새면서

 

이르지 못한들 어떠랴 이르고자 한 곳에

풀씨들 날아가다 떨어져 몸을 묻은

산은 파랗고 강물은 저리 반짝이는데

 

- 시집<> (창작과비평사.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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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올해로 KTX 개통 8년을 맞았으니 이 시에서의 특급열차란 일단 KTX는 아니고 아마 새마을쯤 되지 않을까 싶다. 하지만 특급이란 칭호는 오랫동안 통일호열차에 붙여진 등급이어서 어쩌면 지금은 퇴출된 그 통일호를 지칭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적어도 통일호가 씽씽 달릴 때는 우등인 무궁화호 보다는 한 끗발 밀리지만 분명히 보통인 비둘기호 보다는 속도면에서 우위에 있었으니 말이다. 그리고 그 특급보통사이에 보통급행이란 등급의 열차도 있었던 것으로 흐릿하게 기억된다.

 

 어쨌거나 속도전의 바쁜 시대를 살아가는 지금에서 돌아보면 격세지감이 아니 들 수가 없다. 거침없이 탄탄대로를 달리며 오로지 목적지만을 향한 승승장구를 꿈꾸는 현대인들에겐 과거의 느려터진 답답한 교통수단들인데, 시인은 그마저도 산역에서 차를 버리자고 한다. 목적지만을 향해 질주하는 속도에 마비될 게 아니라 발이 부르트도록 종일 느리게 걸으면서 느긋하게 둘레의 풍경들에 감동할 것을 권한다. ‘복사꽃숲 나오면 들어가 낮잠도 자고 소매 잡는 이 있으면 하룻밤쯤 술로 지새는 여유로운 삶의 회복을 제안한다.

 

 꼭 특급 열차 안이 아니더라도 누구나 문득 자신의 삶을 돌아보게 될 때가 있다. '날아가듯 달려가'도 자신을 기다리는 것은 '같은 풍경과 말들밖에 없을 것이라 생각하며 목적 달성을 위한 삶에 회의를 느끼게 된다. 바람에 몸을 맡기고 아무 곳에나 떨어져 몸을 묻은 곳에서 발하는 풀씨들이 저토록 푸른 산을 이루고 강물은 저리도 반짝이는데 내 삶은 무어냐는 것이다. 인생의 목표란 대체 무엇이고, 과연 인생에서 중요한 것은 무얼까 생각하며 반성한다.

 

 바삐 살면서 잃어버린 소중한 것들은 없는지, 지나쳐버리고 외면했던 살가운 존재들은 없었는지 떠올려 본다. 이윽고 목표를 지워버리고 그 과정을 중요시했던 생각마저 던져버린다. '산은 파랗고 강물은 저리 반짝이는데'...

 

 

권순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