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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도꼬마리씨 하나/ 임영조

아정 김필녀 2015. 1. 21. 11:49

 

 

도꼬마리씨 하나/ 임영조


멀고 긴 산행길

어느덧 해도 저물어

이제 그만 돌아와 하루를 턴다

아찔한 벼랑을 지나

덤불 속 같은 세월에 할퀸

쓰라린 상흔과 기억을 턴다

그런데 가만! 이게 누구지?

아무리 털어도 떨어지지 않는

억센 가시손 하나

나의 남루한 바짓가랑이

한 자락 단단히 움켜쥐고 따라온

도꼬마리씨 하나

왜 하필 내게 붙어 왔을까?

내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무작정 예까지 따라온 여자 같은

어디에 그만 안녕 떼어놓지 못하고

이러구러 함께 온 도꼬마리씨 같은

아내여, 내친 김에 그냥

갈 데까지 가보는 거다

서로가 서로에게 빚이 있다면

할부금 갚듯 정 주고 사는 거지 뭐

그리고 깨끗하게 늙는 일이다


- 시집 『귀로 웃는 집』(창작과비평사, 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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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사는 아파트 14층 거실에서 눈꺼풀을 조금만 내려 깔면 곧장 겨울강가다. 사람들이 많이 줄기는 했으나 동촌 강둑에는 드문드문 오가는 발길이 보이고 한갖진 습지강가에는 겨울철새들의 날개짓이 평화롭다. 창밖의 유혹으로 뛰쳐나가고 싶은 생각이 퍼뜩 들어 두터운 겉옷 하나를 더 걸치고선 집을 나섰다. 익숙한 길을 한참 걷는데 한 노인이 강가 마른 숲 덤불 사이에서 무언가를 열심히 채취하는 광경을 목격했다.

 

 노인께 다가가 물었더니 ‘창이자’라고 한다. 노느니 염불한다고 열매를 따다가 약재상에 가져갈 것이란다. 짙은 갈색의 바짝 마른 열매란 다름 아닌 여름철 강가에 지천으로 널려 성가시게 달라붙던 그 ‘도꼬마리’였다. 도꼬마리는 고약한 성질머리로 자주 시의 질료로 등장하는데, 특히 이 시처럼 부부관계와 그 인연을 말할 때 요긴하게 차용된다. ‘이게 누구지’ ‘왜 하필 나이고 당신인가’ ‘우연인가 숙명인가’ 라면서 사유를 이끌어낸다.

 

 결혼이란 전생의 원수가 다시 만나 한평생 함께 살면서 서로 원수 갚는 일, 빚 갚는 일이라는 기왕의 말이 있다. 허구한 날 지지고 볶으면서도 ‘이러구러 함께 온 도꼬마리씨 같은’ 그 운명을 받아들이며 살아가는 것이다. 문정희 시인의 ‘남편’이란 시에서처럼 ‘이 무슨 웬수인가’ 싶다가도 ‘지구를 다 돌아다녀도 내가 낳은 새끼들을 제일로 사랑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오늘도 저녁을 짓고 저녁밥을 맛있게 나눠먹는다.

 

 도꼬마리의 꽃말은 애교, 고집이다. 그리고 창이자는 알려진 약효만도 감기, 해열, 두통은 기본이고 종기나 뾰루지 치료에도 쓰인다. 그 밖에 항암과 노화방지에도 효과가 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제 아무리 만병을 통치한들 도통 효험 없는 불량종자도 있는 것이고, 촘촘히 박힌 가시손이 무지막지한 고집으로 내내 깔쥐어뜯으면 그만 안녕 떼어놓고 싶을 때도 있긴 있다. '깨끗하게 늙는 일'에 방해되고 성가시기만 한 도꼬마리 씨도 있는 것이다.

 

권순진

 

 

 


출처 : 詩하늘 통신
글쓴이 : 제4막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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