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1980년대 서울 적선동 「문학사상」 사무실에서 만난 문우들이 大家로 성장.
金東里·徐永恩·金承鈺·崔仁浩·金春洙·孫素熙 선생과의 인연, 잊을 수 없어』
내 남편 李御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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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나 더 많은 길을 걸어야 인간이 되나?」
姜仁淑(강인숙·73·건국大 명예교수) 선생은 이따금 밥 딜런의 「블로잉 인 더 윈드」를 부르면 그런 생각이 든다고 한다. 삶에는 이정표가 없다. 거칠고 험한 길을 걸어왔지만 도무지 얼마나 더 걸어야 할지 알 수 없다.
李御寧(이어령)·姜仁淑 부부는 서울大 국문과 동급생으로 만나 평생을 의지하며 살아왔다.
지난 11월4일 오후 姜선생이 관장으로 있는 서울 평창동 「寧仁(영인)문학관」을 찾았다. 「寧仁」은 두 사람 이름에서 한 자씩 따온 말이다. 고급 주택가를 꼬불꼬불 찾아가는 굴곡의 길이 낯설기만 했다.
姜仁淑 선생은 남편을 「李御寧 선생」으로 불렀다. 그 말은 조금 미묘하고 담백하게 들렸다. 세월의 愛憎(애증)을 뛰어넘었다고나 할까. 그녀는 그렇게 곱게 물들어 가고 있었다. 그녀의 남편 李御寧 선생 이야기부터 꺼냈다.
―李御寧 선생의 성격은 어떤가요.
『성격이 굉장히 급하고 완벽주의자입니다. 저는 이날 이때까지 야단만 맞고 살았습니다. 당신이 보기에 뭔가가 부족하니까 칭찬보다는 야단을 쳐요. 불완전함을 못 참는 분입니다. 하지만 저렇게 감각이 예민하시니 얼마나 고달플까 하는 생각도 들어요. 저렇게 살 수도 있구나 저 양반은 마지막까지 눈이 보이는 날까지 안 늙겠구나, 하고 감탄하고 있습니다』
―벌컥벌컥 화를 내기도 하십니까.
『예민한 감각을 가지고 사시니 (제가) 사는 게 힘이 들어요. 마땅치 않은 게 많으니 전기 고치는 사람, 컴퓨터 고치는 사람들이 사흘 밤낮으로 드나들어요. 심지어 전자회사에서 신제품을 만들면 제일 먼저 우리 집에 가져와 시험을 합니다. 李선생이 첫 사용자로서 결함을 지적하면 고쳐서 팔 정도예요』
강인숙·이어령 부부.
―李선생은 식습관도 까다롭습니까.
『된장찌개, 김치찌개, 김이나 김치 같은 것만 먹어요. 충청도 산골에서 사셨기 때문인지, 자반구이만 들고 육식도 별로예요. 그런 덕택에 충청도 음식만 얻어먹고 삽니다』
언젠가 외국에 사는 손자들이 일주일간 머물고 갔는데 빈 숟가락을 물고, 『먹을 게 없다』고 하더란다. 李御寧 선생의 입맛은 유별나 외국 출장길에도 어김없다고 한다.
『외국에 가셔도 한국음식만 드세요』
―외국에 있는 한국식당을 찾는다는 말인가요.
『아뇨. 제가 택배로 보내 줘요. 일주일에 한 번, 어떨 때는 두 번씩 보내 준 적도 있어요. 요즘은 진공 반찬통이 있지만 예전에는 김칫국물이 샐까 봐 깡통에 땜질해서 담아 보냈어요. 얼마 전 건강검진을 했는데, 비타민 과잉 판정이 나왔어요. 과일도 별로 안 드시는데, 김치를 많이 드시니 그런 것 같아요』
그러면서 李御寧 선생의 흉을 하나 더 봤다.
『지하 서재에서 노상 시간을 보내요. 저는 허리 디스크가 있어 두 시간 이상 앉아 있질 못하는데, 아침부터 저녁까지 뻣뻣하게 앉아 있어요. 식탁에서 밥만 먹고, 다시 지하로 쏙 내려가요. 「저 양반 척추가 참 튼튼하구나」 하는 생각을 해요.
하지만 지하실에 난방시설을 하지 않아 겨울 내내 감기가 안 떨어져요. 더우면 졸리고 자고 싶어 안 된다고 해요. 추워야 정신이 바짝 난다며. 어떤 의미에서 보면 사는 게 아니지요. 한 가지만 할 뿐이에요. 주변사람을 돌본다거나, 집안일에 손 대는 일은 없고 오로지 책 읽고 컴퓨터 들여다보고, 글쓰는 게 전부입니다』
文學思想과 이어령, 강인숙
영인문학관은 개관 이후「문인 육필원고·애장품전」,「文人交信展」등 각종 전시회를 열었다. 강인숙 선생이 전시회를 둘러보고 있다.
이야기는 「李御寧과 文學思想」 시절로 옮겨갔다. 李선생이 1972년 10월 「문학사상」誌를 창간한 뒤 1985년 주간에서 물러날 때까지 13년간의 이야기다. 그 시절은 그야말로 한국 현대문학이 본격 발화한 시기로 문학사상이 배출한 신인들이 굵직한 巨木이(거목) 돼 있다.
李御寧이 만든 문학사상은 정실주의와 파벌주의를 철저히 배격했다. 李선생이나 姜선생은 예총이니 「민족작가회의」니 하는 그룹에 끼지 않았다.
『문학사상은 세계적으로 손색없는 잡지라고 자부합니다. 다시는 그 수준까지 못 갈 것 같아요. 표지화, 작품 삽화를 그렸고 古典 발굴을 계속해 왔습니다. 李선생은 자기 派(파)가 없으신 분이에요. 그러니 굉장히 작품에 엄격했습니다. 작품이 좋지 않으면 아무리 개인적으로 친해도 싣지 않았어요. 작품이 좋으면 지나가는 사람도 데려다 쓰게 했어요.
작품 위주의 독특한 심사가 특징인데, 그때 문학사상에 실린 글들이 지금 웬만한 작가의 대표작으로 통합니다. 장편소설로는 朴景利(박경리)의 「토지」나 朴婉緖(박완서)의 「도시의 흉년」이 애착이 갑니다』
文人들의 사랑방
이어령│송정연 作.
―당시 문학사상 사무실이 문인들의 사랑방으로 통했다고 들었습니다.
『서울 종로구 적선동에 있던 한옥이 마음에 들어 제가 구입했습니다. 한옥은 주간실로 쓰고, 옆 건물인 양옥은 편집실로 썼어요. 한옥이 편하니까 문인들이 죄다 주간실로 몰려들었습니다. 꼭 용건이 있다기보다 문인들이 지나가다 들르는 사랑방이었지요.
1970년대 가난한 작가들이 주로 그 부근에 살았는데, 때가 되면 자장면을 시켜 잡숫고 문학논쟁을 벌이기도 했어요. 그때 나눈 이야기를 에밀 졸라의 「木曜談話」(목요담화: 목요일마다 모여 문인들의 얘기를 채록한 책)처럼 모아 두었다면, 대단한 재료가 됐을 거라고 생각해 봅니다』
―그때 자주 찾아오셨던 문인들은 누구입니까.
『너무 많아 일일이 세기 어려워요. 崔仁浩(최인호) 선생이 계셨고, 劉賢鍾(유현종)·趙海一(조해일)·韓水山(한수산)·趙善作(조선작)·黃晳暎(황석영)·朴景利·朴婉緖·宋影(송영) 같은 분들이 자주 왔습니다.
당시 그분들은 문학적으로 볼 때 어리고 애띤 「젊은 작가」들이었어요. 제가 가끔 주간실에 들르면 너무 재미있어 하루 종일 웃고 즐거웠어요. 하지만 李御寧 선생이 술을 못 하시니 술판을 벌이거나 서로 술주정하는 일은 없었습니다』
박완서│사진·한영희
黃晳暎의 회고
서울 종로구 평창동에 있는 영인문학관 전경.
소설가 黃晳暎에게도 「李御寧과 문학사상」 시절은 잊을 수 없는 추억이다. 1974년인가, 그의 나이 30代 초반으로 첫 창작집 「客地(객지)」를 출판한 직후였다. 그해 낳은 딸이 대학을 나와 시집 갈 나이가 됐다. 그의 말이다.
『李御寧이 문학사상을 창간해 놓았는데, 나도 단편소설 몇 편을 발표하면서 그와 인사를 하게 됐다. 李御寧은 사람이 찾아가면 주위에 앉혀 놓고 담론하기를 즐겼다. 나는 그의 단순하고 솔직한 성격과 다변을 긍정적으로 생각했다. 그는 돌려서 나의 현실주의적 시선을 비꼬는 적도 있었지만 다른 벗들의 얘기를 들어 보면 언제나 내 재간을 인정해 주었다고 한다. 「버릇은 없지만 잘 쓰는데 어쩌느냐」 라고 했다나…』
시인 송수권의 커리커처│김영태 作.
시인 宋秀權(송수권) 역시 문학사상을 통해 1975년 2월 등단했다. 宋秀權은 한 해 전 詩 14편을 투고했으나 소식이 깜깜했다. 詩人이 되긴 글렀구나, 하고 문학을 접고 시골로 돌아갔다. 그런데 꼭 1년 뒤 李御寧에게서 연락이 왔다. 그의 말이다.
『당시 문예지가 별로 없어 작품을 보내는 이들이 얼마나 많았겠습니까. 시답잖은 작품들은 대체로 휴지통으로 직행을 했어요. 그런데 편집 책임자였던 李御寧 선생께서 어느 날 사무실 휴지통에 버려진 종이들을 보며 「저게 뭐냐」고 물으셨더니, 편집부 기자가 「원고지를 쓸 줄도 모르는 이들의 응모작입니다」라고 대답했답니다.
아마 가엾게 보셨는지 그 원고지를 쓸 줄도 모르는 응모작들을 심사하셨는데 저의 작품이 눈에 들어왔던가 봅니다. 그러니 1년 전 응모작을 수소문해서 사람이 직접 찾아오게 된 거죠. 그때 저는 시골로 내려가 직장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휴지통에서 빛을 본 작품이 저의 데뷔작 「山門에 기대어」입니다』
金東里와 徐永恩
소설가 김승옥.
문학사상에는 金東里(김동리)의 부인이었던 소설가 徐永恩(서영은)이 편집부장을 맡은 적도 있었다. 그래서 姜선생에겐 金東里와 徐永恩에 대한 기억이 많고 애틋하다.
―金東里와 徐永恩 선생님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金東里 선생은 경마와 화투치기를 좋아하셨어요. 돈도 손수 챙기고 열쇠도 간수하는 등 大家답지 않은 현실적인 측면도 있었습니다.
박물관을 하려고 골동품을 살 때는 돈을 아끼지 않으셨는데, 일상에선 돈을 너무 아껴서 휴지 대신에 글을 쓰다 남은 화선지 쪼가리로 땀을 닦는 모습을 뵌 적도 있어요. 에어컨만 있었어도 쓰러지지 않았을 텐데…. 반면 손도 마음 씀씀이도 큰, 徐永恩씨는 캠코더 같은 물건을 자기 돈으로 사 버리는 분입니다.
徐여사는 사람을 묘하게 끌어당기는 능력이 있어 친하게 지냈습니다. 金선생님이 쓰러지신 후 전처 자식들과 분쟁이 있었는데, 호랑이 같은 자식들 사이에 힘없는 젊은 아내를 놓고 가면서 보호 장치를 하나도 만들어 놓지 않았어요.
그래서 徐여사만 보면 「악연이야. 잊어버려」하고 오금을 박곤했어요. 하지만 이 여인은 한 번도 「그 분」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 고난으로 인해 하나님을 만났다면서 환하게 웃는 거예요. 徐여사를 보고 있으면, 「사랑하였으므로 행복하였네라」 라는 말이 실감으로 다가와요』
감금당해서 글 쓴 金承鈺
박경리│사진·한영희
―다른 문인들과의 에피소드가 있으면 들려주세요.
『소설가 金承鈺(김승옥) 선생이 기억에 남습니다. 李御寧 선생은 金承鈺의 재주를 아깝게 여겨 소설 집필 기회를 여러 번 만들어 주었어요. 그 결과로 만들어진 작품이 바로 「서울 달빛 0장」입니다.
李선생은 당시 최고급 호텔에 방을 잡아놓고 金承鈺을 감금하다시피 해 글을 쓰게 했습니다. 한 번은 장충단공원 근처에 있던 파크호텔에 방을 둘 잡아 놓고, 한 방에는 金承鈺에게 소설을 쓰게 하고, 다른 방에는 당시 문학사상 편집부장이던 徐永恩씨와 편집부 기자이던 이명자씨를 투숙시켜 도주를 막게 했어요』
―「서울 달빛 0장」은 호텔에서 쓴 작품이군요.
『아닙니다. 金承鈺 선생은 또다시 도망쳤어요. 화장실에 간다고 나와 줄행랑을 친 겁니다. 그날 저녁 무렵 집으로 전화가 왔어요. 李선생은 안 받으려 하시더라구요. 제가 그랬죠. 「글을 안 썼더라도 전화를 걸 사람이니, 전화를 받아 보라」고 했어요. 아니나 다를까 못 썼다는 전화였어요.
그런데 金承鈺 왈, 「선생님, 목소리가 너무 듣고 싶어 전화를 걸었어요. 원고가 안 써져요」 그래요. 하지만 그런 우여곡절을 몇 차례 거친 뒤 결국 작품을 썼습니다. 그 작품이 1회 李箱(이상) 문학상을 탔어요』
소설가 최인호
―소설가 崔仁浩의 글씨체를 두고 악필이란 소문이 많은데.
『崔仁浩 선생의 글씨를 악필이라고 하는데, 그것은 틀린 말입니다. 악필이라면 글이 밉게 보이는데, 그의 글은 동글동글하고 회화적이기까지 합니다. 흘려 써서 그렇지 글씨의 선들은 범상해요. 1970년대 말인가 崔선생이 문학사상 편집실에 들렀는데 女기자가 그가 쓴 원고지 行間(행간)에 무언가를 쓰고 있더랍니다.
崔선생이 「남의 원고를 마음대로 고치다니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거냐」는 생각이 들어 따졌다고 해요. 그러나 얼마 안 가 편집실이 웃음바다가 됐습니다. 그 기자는 崔선생의 원고 전담이었는데, 워낙 글씨를 알아볼 수 없어 인쇄소 조판공을 위해 원고 行間에 반듯하게 글씨를 다시 쓴 것이라는 얘기였어요』
청담동 자택에서 김동리(가운데)와 아내 서영은.
사료 발굴 노력
문학사상은 창간 초기부터 사료발굴에 적극적이었다. 전문가를 직원으로 채용, 국문학사적 가치가 높은 자료들을 적지 않게 모았다. 尹東柱(윤동주)·李箱·金素月(김소월) 등의 육필원고가 있으며, 「인목대비 술회문」 등 고전문학 자료가 많았다. 이와 함께 1970년대 작가들이 문학사상에 투고한 원고도 많았다. 당시엔 워드프로세서나 타자기가 없어 직접 원고지에 쓴 자필원고가 대부분이었다.
―尹東柱·李箱·金素月 등의 원고들은 어떻게 해서 모으셨나요.
『어느 날 李선생의 차를 얻어 탈까 해서 사무실에 들렀어요. 그런데 직원들이 원고지를 차에 싣고 있더군요. 적선동 한옥엔 창고가 없어 그냥 파쇄기로 분쇄해 버린다고 해요. 아깝다는 생각이 들어 우리 집에 그때부터 갔다 놨지요. 아이들이 커서 하나둘씩 집을 떠나가 그 방에다 원고를 쌓아 두었어요. 그 달 그 달 원고가 몇 박스나 됩니다. 한 해만 모으면 방 한가득 원고가 가득합니다. 장편소설 원고 한 편이 사람 허리춤까지 됩니다』
姜선생은 『가까이 모셨던 문인과 서예가들이 하나둘 돌아가셨다』며 문인들에 대한 추억을 꺼냈다. 그는 『한 분 한 분이 다 그렇다. 그냥 피로 맺어진 인연은 마디로 쉬는데, 문학으로 맺은 이들은 다 가족 같고 가슴 아프다』고 했다. 시인 김상옥│김세환 作.
그러고 보니, 그의 나이도 이제 일흔이 넘었다. 영인문학관에서 현재 전시 중인 故 金相沃(김상옥·2004년 작고) 시인의 유묵에 대해 『선생님의 부채를 보고 있으면 눈물겹다. 詩와 글씨와 그림이 모두 어울려 만들어 내는 典雅(전아)한 세계가 무너져 가고 있는 것 같다』며 아쉬워했다.
―기억에 남는 문인들에 대한 얘기를 해주세요.
『한국예술원 회원을 지내셨던 趙敬姬(조경희·2005년 작고) 선생은 지난해 가을까지도 뵈었어요. 몇달 전 편찮으시다고 해서 집에 찾아가 용돈을 조금 드렸더니, 굳이 안 받으시겠다고 해요. 당시 영인문학관일로 바빴어요. 일주일 후 연락을 드리니 불통이었어요. 혼자 사시는 노인이 전화를 안 받으시면 연락할 방도가 없었어요. 그땐 이미 병원에 입원해서 돌아가셨더라구요』
세상 떠난 文人들과의 추억
강인숙 영인문학관 관장.
그는 향년 75세로 지난 7월30일 별세한 徐基源 前 KBS 사장도 떠올렸다. 故人은 「암사지도」를 비롯해 「오늘과 내일」, 「잉태기」 등 다수의 작품을 남겼으며, 현대문학상·동인문학상을 수상했다.
『徐基源 선생님은 우리 또래인데, 그 양반 생각하면 가슴 아파요. 돌아가시기 2주일 전인가 전화로 글을 청탁하니 기어드는 목소리로 「내가, 지금… 글을 못 써」 하시더라구요. 그렇게 갑작스레 저 세상으로 가실 줄 몰랐습니다』
姜선생은 예술원 회원이자 여류문인회장을 역임한 소설가 孫素熙(손소희·1987년 작고)에 대해 「신세를 진 분」으로 기억했다.
『그분은 가슴하고 입이 한데 붙은 양반이라, 칭찬도 하셨지만 누굴 야단도 잘 치셨어요. 제가 여류작가에 대한 30매짜리 짤막한 글을 썼는데, 孫선생님 이름을 빠트렸어요. 어느 행사장에서 뵈었는데, 「내가 살고 있는 것을 알고는 있어?」 그래요. 너무 놀랐어요. 「어떻게 자기감정을 저렇게 노출시킬 수 있나」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어요. 하지만, 제가 어려운 일을 당하니 발 벗고 나서 도우셨어요.
나중에 암 투병을 하시는 모습을 보고 충격을 받았습니다. 병문안을 갔는데 일주일 전까지 멀쩡히 있던 머리칼이 모두 빠져 있더라구요. 같이 갔던 李御寧 선생을 병실에 들여보내지 않았습니다. 제가 孫선생께 「李御寧 못 들어오게 했어. 잘했지?」하니, 「그래, 아주 잘했어」 그래요. 제가 「I love you」 하니, 「me too」 라고 말하셨습니다. 그분에게 들은 마지막 소리가 「나도 사랑해」였어요』
김춘수│사진·한영희
金春洙(김춘수·2004년 작고) 詩人에 대해선 진한 그리움과 아쉬움을 토로했다.
『선생님의 팔순 잔치에 갔더니 문인들이 아무도 안 왔더라구요. 그분은 대구에 계실 때부터 사교적이지 않으셨어요. 하지만 문인들이 그러면 안 되는데….
1982년인가 문학사상 10주년 행사를 李御寧 선생을 대신해 제가 맡은 적이 있어요. 당시 金春洙 선생님은 국회의원이셨어요. 그땐 직능 대표로 누군가 한 분은 맡아야 하는 자리였습니다. 사실 어느 누구도 하라고 하면, 안 할 사람이 있나요? 대부분 했을 거예요. 행사를 마치고 차량을 배정하니, 金春洙 선생이 탄 차에는 아무도 안 타요. 할 수 없이 제가 함께 타고 갔어요.
이번에 영인문학관에서 작고 문인 코너를 만들어 金선생님의 유품을 전시했어요. 그걸 보고 있노라면, 하나의 왕국이 무너진 것 같아 쓸쓸하기 그지없습니다. 가깝게 모시진 않았지만 「과꽃」·「꽃밭에서」를 지은 아동문학가 魚孝善(어효선·2004년 작고)이나 趙炳華(조병화·2003년 작고) 선생 등도 여기 오셨던 분들이에요. 朴花城(박화성·1988년 작고) 선생도 외롭게 돌아가셨어요』
「특질고」 필화사건
서영은│이현 作.
문단의 요란한 필화사건의 하나였던 「特質考(특질고)」 논란도 빠뜨릴 수 없다. 소설가 吳永壽(오영수·1979년 작고)가 1979년 문학사상 1월호에 발표했던 「특질고」는, 여러 지방의 특질적인 성격을 묘사하면서 호남인들을 「표리부동하고 신의가 없다」고 폄하했다가 문인협회에서 제명당하고 절필선언까지 해야만 했다. 吳永壽는 그 충격으로 결국 그해 5월 사망했다.
『사실 吳선생님은 李御寧 선생에게 굉장히 피해를 끼친 분입니다. 「특질고 사건」으로 사과문을 내는 데 이화女大 교수 10년 연봉이 들었습니다. 사건을 무마시키기 위해 그를 제명결정을 했어요. 하지만 제명은 그에게 사망선고와 마찬가지였어요. 가슴 아파하시더라구요. 제게 「내는 뭐가 제일 행복하냐면 서점에 가서 내가 쓴 책이 꽂혀 있는 게 제일 좋은데, 절필하라는 것은 내보고 죽으라 카는 것과 마찬가진기라」고 하셨어요.
당신이 남에게 해를 끼친 것은 생각 안 하시고, 어린애처럼 자기가 입은 해는 너무 아픈 거예요. 그런 자기 중심주의가 문인이 되는 代價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걸 빼면 문인이 아니겠지요』
―文人들의 성품은 어떴습니까. 괴팍하고 고약하지 않습니까.
『문인들이 대체로 다 까다로워요. 특히 草汀 선생(金相沃)이 까다로웠어요. 그 양반은 詩人이란 한국에서 阮堂(완당·김정희)·靑馬(청마·유치환)·未堂(미당·서정주)밖에 없다고 생각하시는 분입니다.
생전에 서화를 받아 놓으려고 詩 10편을 보내드렸더니 세 분 작품만 빼고 다 던져 버려요. 자기가 좋아하는 詩人만 쓰고… 어찌보면 편협하셨어요. 漢詩(한시)도 좋아하는 구절이 있으면 그것만 둥글게 써봤다가 네모지게 써봤다가 할 뿐 많은 걸 안 쓰시더라구요. 그분이 인정하는 작품은 몇 개 안 돼요』
―외국작가보다 한국작가가 더 유별납니까.
『성격이 못됐고 자기중심적이고 세상에 작품은 자기 것이 최고고, 거룩하기는 또 왜 그렇게 거룩한지 다 마찬가지예요. 작품이 좋은 사람일수록 까다롭고 고약해요. 하지만 뒤가 없고 순진합니다. 제가 아는 어떤 문인은 나이 쉰이 돼도 여자를 첫사랑같이 사랑하는 분이 있어요. 요새 그런 남자가 있나요? 적당히 놀고 마는데 정말로 사랑하시더군요. 어른이 됐는데 어른이 안 되니, 얼마나 대단한 일이에요』
문학평론가 姜仁淑
조경희│조문자 作.
姜仁淑 선생은 1965년 현대문학을 통해 등단한 문학평론가다. 건국大 국문과 교수로 재직하다 정년퇴직하고 명예교수로 있다. 그는 한국 근대문학의 思潮인 자연주의 연구에 천착해 왔다. 평론집 중에는 「자연주의 문학론1·2」, 「한국현대소설 정착과정 연구」, 「金東仁의 생애와 문학」 등 자연주의 연구서들이 많은 편이다.
―작가가 되지 못하고 평론가로 들어서게 된 계기가 있습니까.
『소설을 쓰고는 싶었는데… 작가는 타고나야 합니다. 평론가는 머리로 하지만, 소설은 감성으로 하니 아무나 하는 게 아니지요』
姜선생은 젊은 시절 「그에게서는 비누 냄새가 난다」로 시작되는 강신재의 「젊은 느티나무」를 읽고 작가의 꿈을 접었다고 한다. 비누 냄새가 상징하는 行間(행간)의 밀도에 압도됐다는 것이다.
―학창 시절 좋아하는 작가가 있었습니까.
『도스토예프스키를 좋아했어요. 경기女高 1학년 때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을 읽었는데, 그게 문학에 눈뜨게 했어요. 물론 친구들끼리 풍속소설까지 서로 빌려서 읽곤 했는데, 도스토예프스키를 읽은 뒤론 다른 책을 못 보겠더라구요. 올해 다시 그 책을 읽었는데 이렇게 재미없는 글을 당시 어떻게 읽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어요. 군소리가 많잖아요. 가다가 딴 곳으로 빠지고(웃음).
한국작가로는 朴景利·朴婉緖·徐永恩·최윤 선생의 글을 좋아합니다. 특히 朴婉緖는 평론집(「박완서 소설에 나타난 도시와 모성」)까지 냈어요』
강인숙│이종상 作.
―요즘도 평론활동을 하십니까.
『논문은 자리에서 써야 하는데 10년째 주무르고 있어요. 일본에 교환교수 갔을 때 프로젝트가 모더니즘 연구였습니다. 일본에서 모더니즘을 연구하고 나서, 한국 모더니즘을 연구하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일본에서 이상하게 된 모더니즘이 한국에 와서 어떻게 변형됐냐를 아무도 연구하지 않아요.
그런데 뇌에 뭐가 생겨 수술하느라 중도에 돌아왔어요. 일본 부분만 3분의 2 정도 썼는데 문학사상에 연재했습니다. 마지막 200매 정도가 남았는데, 잘 안 써지네요. 영인문학관을 하느라 쓸 수 없어요. 올 겨울엔 다시 펜을 들 생각입니다』
그러면서 그는 다시 강단으로 돌아간 듯 목소리를 높였다.
『참, 문제인 게 廉想涉(염상섭)의 자연주의는 「일본 자연주의」지, 「서구 자연주의」가 아니에요. 제가 두꺼운 연구서적을 두 권이나 냈는데, 교과서에서 서구 자연주의라고 해요. 최소한 일본식 자연주의라고 고쳐야 해요. 서구 자연주의는 한마디로 과학주의입니다.
일본에선 고백체가 일본 소설의 본령이고, 그것이 고백체 소설이 된 것입니다. 고백체 자연주의는 全세계에 없습니다. 廉想涉·金東仁·에밀 졸라와 일본 고백체 소설을 비교 연구한 것인데 아직까지 고쳐지지 않았어요. 아직 못 쓴 모더니즘 논문을 끝내놓고 죽어야겠다는 생각입니다』
코드가 지배하는 평단
―요즘 평단을 어떻게 보십니까.
『詩人이나 소설은 몰라도 평단은 문제가 많은 것 같아요. 소위 코드에 맞는 사람들이 평단을 잡고 있어요. 거의 양쪽이 아니라 일면적으로 다룬다는 느낌도 들어요.
아닌 말로 별사람이 다 북한에 가는데 저나 李선생 같은 경우에는 빈말이라도 「북한에 같이 가자」는 사람 하나 없어요. 우리나라가 이렇게 돼 가고 있어요. 왜 그렇게 배타적인지 이해가 안 돼요. 문학인데, 정치가 아니고 문학인데』
姜선생은 지난해 4월 「아버지와의 만남」이란 242쪽 분량의 에세이를 썼다. 책 서두에서 「나는 삶의 첫머리에서 아주 난해한 어른을 만났다. 아버지다」라고 쓰면서 「우리에게 삶의 이정표 읽기를 가르쳐 주는 것은 주변에 있는 어른들」이라고 했다. 칠순의 그가 평생의 삶을 되돌아보며 내뱉은 말이 「어른」에 대한 기억이라는 사실이 놀라웠다.
그는 인터뷰 말미에 정지용의 「유리창」이라는 詩를 제일 좋아한다고 했다. 자식을 잃은 슬픔을 노래한 詩를 낮은 목소리로 읊었다. 먼저 간 부모의 마음을 더듬는 것일까.
〈유리에 차고 슬픈 것이 어른거린다.
열없이 붙어 서서 입김을 흐리우니
길들은 양 언 날개를 파닥거린다.
지우고 보고 지우고 보아도
새까만 밤이 밀려나가고 밀려와 부딪히고,
물 먹은 별이, 반짝, 보석처럼 박힌다.
밤에 홀로 유리를 닦는 것은
외로운 황홀한 심사이어니
고운 폐혈관이 찢어진 채로
아아, 너는 산새처럼 날아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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姜仁淑
1933년 함경남도 갑산 출생. 경기여고·서울大 국문과 졸업(문학박사). 문학평론가. 現 건국大 국문과 명예교수, 영인문학관 관장. 평론집으로 「자연주의 문학론 1·2」, 「박완서 소설에 나타난 도시의 모성」, 수필집으로 「언어로 그린 연륜」, 「아버지와의 만남」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