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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화양연화(花樣年華)/ 이병률

아정 김필녀 2015. 2. 11. 10:09

 

 

 

화양연화(花樣年華)/ 이병률

 

줄자와 연필이 놓여 있는 거리

그 거리에 바람이 오면 경계가 서고

묵직한 잡지 귀퉁이와 주전자 뚜껑 사이

그 사이에 먼지가 앉으면 소식이 되는데

뭐 하러 집기를 다 덜어내고 마음을 닫는가

 

전파사와 미장원을 나누는 붉은 벽

그 새로 담쟁이 넝쿨이 오르면 알몸의 고양이가 울고

디스켓과 리모컨의 한 자 안 되는

그 길에 선을 그으면 아이들이 뛰어노는데

뭣 때문에 빛도 들어오지 않는 마음에다

돌을 져 나르는가

 

빈집과 새로 이사한 집 가운데 난 길

그 길목에 눈을 뿌리면 발자국이 사라지고

전봇대와 옥탑방 나란한 키를 따라

비행기가 날면 새들이 내려와 둥지를 돌보건만

무엇 하러 일 나갔다 일찌감치 되돌아와

어둔 방 불도 켜지 않고

퉁퉁 눈이 붓도록 울어쌌는가

 

- 시집『당신은 어딘가로 가려 한다』(문학동네,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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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양연화’는 '인생에서 가장 아름답고 행복한 순간'이라는 뜻을 담고 있는 왕가위의 영화 제목이다. 영화는 상해에서 홍콩으로 이주한 사람들이 주로 거주하는 한 아파트에 두 가구가 이사를 오면서 시작되는데, 서막의 분위기에서 이미 지루함을 예고하고 있다. 이 두 가구는 지역신문 데일리 뉴스 편집장 차우(양조위)부부와 작은 무역회사 비서로 일하는 리첸(장만옥)부부다. 남편이 사업상 일본 출장이 잦은 리첸과 아내가 호텔 근무로 자주 집을 비우는 차우는 아파트 주위에서 자주 얼굴을 부딪치면서 꽤 친근한 이웃으로 발전한다.

 

 그러던 어느 날 차우는 리첸의 핸드백이 아내의 것과 같음을 발견하고, 리첸 역시 차우의 넥타이가 남편의 것과 같다는 사실을 확인하면서 두 사람은 자신들의 배우자가 서로 사귀고 있는 사이임을 눈치 챈다. 배신감에 흐느끼는 리첸을 위로하면서 차우는 그녀에게 사랑의 감정을 갖게 되고, 리첸 역시 그런 차우에게 점점 마음이 기운다. 이쯤 되면 스토리는 뻔할 뻔자 노름인 듯싶지만 영화는 시종일관 느릿한 전개로 별다른 정점에 이르지 못한다. 시간이 흐를수록 자꾸만 뒤쳐지는 지친 마라토너의 시간과도 같아 보인다.

 

 이 작품은 왕가위 감독이 과거 '중경삼림'이나 '해피 투게더'에서 보여준 고속촬영 방식이 아닌 슬로 모션과 스톱 모션을 반복적으로 사용하여 늘어짐의 미학을 보여주는 듯하다. 또 주위의 모든 곁가지들은 걷어내고 오로지 두 인물에만 초점을 맞춘 거라든지 배경이나 심리 묘사 등에서 왠지 프랑스적인 분위기가 느껴졌다. 아니나 다를까 이 영화는 2000년에 프랑스와 합작하여 그해 칸영화제 남우주연상과 기술대상을 수상한 사실을 나중에야 알았다.

 

 영화에서 유난히 눈에 들어오는 장면은 바로 '치파오'라는 몸에 딱 달라붙는 스타일의 중국 전통 원피스를 입은 리첸의 모습이다. 이는 곡선미를 살려낸 개량 의상으로서 중국 기생의 옷에서 발전한 것이라 한다. 싱가폴 항공 여승무원의 제복으로도 유명한데, 한때 '싱가폴은 잊어도 싱가폴에어라인은 잊지 못한다'란 광고 카피는 이 옷을 입은 여승무원이 통로를 지날 때 슥 비벼대며 승객들에게 베푸는 스킨십 서비스가 유명해서 나온 말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 항공기를 이용하는 남성이 창가 쪽을 원한다고 하면 ‘촌놈’ 소리를 듣는다.

 

 장만옥이 입은 이 옷은 그냥 눈요기가 아니라 60년대 홍콩을 배경으로 한 이 영화에서 리첸이라는 인물을 형상화하고 왕가위식 화양연화를 표현하는 가장 중요한 매개체로 활용되고 있다. 영화에서 리첸이 입은 원색의 화려한 치파오는 전부 26벌에 달한다고 한다. 이 26벌의 원색 치파오를 통해 감독이 의미하고자 했던 화양연화란 결국 껍질뿐인 아름다움 혹은 행복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은유한다. 어두운 골목길을 배경으로 국수통을 들고 다가오는 화려하고 부드러운 곡선미의 치파오를 입은 리첸과 아내가 부재중이라고는 믿기 어려울 정도의 말끔한 정장에 역시 화려한 무늬의 넥타이 차림을 한 차우의 스침.

 

 ‘고독을 이기는 유일한 방법은 더 큰 고독에 빠져 드는 것’이라는 어느 시인의 말처럼 더 나은 화양연화를 위해 두 사람의 화려한 의상은 과연 그들의 외로움과 사랑을 도울 수 있을까? 두 사람의 사랑은 그들의 의복처럼 단정하고 격식을 차리면서 느리게 지속되긴 하지만 현실적 이유로 헤어질 수밖에 없다. 불가에서는 좋은 인연임에도 불구하고 지속되지 않는데서 오는 고통을 인간이 기본적으로 갖는 여덟 가지 고통중의 하나라고 했다. 이 영화는 바로 그런 고통을 아름답게 담고 있다.

 

 그리고 또 하나, 이 영화는 음악이 기가 막히게 딱 맞아떨어져 좋았다. 첸과 차우가 친해지기 전 계단을 올라가고 내려가면서 스쳐지나갈 때 나오는 테마음악은 이 영화의 분위기를 성격 짓는 것 같다. 발걸음마다 리듬을 주는 음악이 힘 있고 들뜨게 하면서도 쓸쓸하고 서럽고 안타까운 느낌을 주었다. (우리 영화 ‘접속’에서도 이런 느낌을 주는 대목이 있다) 첸과 차우가 처음으로 마주앉아 서로의 눈을 바라보며 식사를 할 때 흐르는 음악이 냇킹콜의 'Quizas, quizas, quizas'인데 많은 이들에게 영화를 두고두고 기억케 했다. 첸의 "잘못한 것도 없는데 죄지은 것 같아요"라는 대사도 오래 기억에 남는다.

 

 남들과는 다른 사랑임을 위안 삼으며 쿨한 이별연습을 해보지만 그들은 함께 울어버린다. 모든 것이 사랑이었고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때는 그렇게 지나갔다. 세월은 흘러 차우가 첸을 찾아가지만 '애 딸린 여자 하나'가 산다는 말에 그만 돌아선다. 감추고 싶은 비밀이 있을 땐 산에 가서 나무에 구멍을 뚫고 그 속에다 말을 하고 진흙으로 막았다는 옛이야기로 마음을 달랜다. 그리고 차우는 이국땅 캄보디아에 첸과의 비밀을 묻어둔다. 첸도 차우를 못 잊어 전화로 찾지만 아무 말도 못하고 수화기를 천천히 내려놓는다. 그의 목소리를 들은 것으로 다였다. 그것으로 아름다웠던 한 시절은 짙은 노을빛 신화로 물들어갔다.

 

 같은 제목의 시를 빌미로 영화이야기가 너무 길었나 보다. 이 시는 영화의 이미지를 차용하고 풍경의 일단을 스케치했을 뿐 스토리와 큰 상관없는 시인 개인의 기억과 인연의 퍼즐로 읽힌다. 시인은 인연을 생각하다가, 인연과 세월을 떠돌다가, 인연과 세월과 풍경을 바라보는 시간까지 왔다고 한다. 돌이킬 수 없는 것들을, 여전히 만져지지 않는 아름다움을, 스침으로 상처가 된 내력들을 다 내려놓지 못하는 것이 어찌 시와 영화뿐이고, 차우와 첸과 시인만의 추억일 수 있으랴.

 

 

권순진

 

  

출처 : 詩하늘 통신
글쓴이 : 제4막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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