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너도바람꽃/ 황구하
너도바람꽃/ 황구하
겨우내 잠복해 있다가 불쑥
꽃대궁 밀어 올리는 건
땅속 어둠 때문만은 아니리
은밀히 점령한 추운 기억들
그만 버리고 싶은 것
이렇게 먼 길 걸어오기까지
부은 발 따뜻이 씻어주지 못하리
자꾸만 욱신거리는 몸
결국은 스스로 제 살 찢고
신음소리 내는 것이리
전 생애를 다 바쳐
꽃숭어리 하나 펼쳐 보이는 길
얼마나 처절했기에
저리 환하게 맺혔단 말인가
세상살이 자주 꺾이던
바람은 연둣빛이었으리
무너지는 담장에 기댄
붉은 종양덩어리
너 사는 날까지만 살으리
- 시집 『물에 뜬 달』(시에,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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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꽃이란 이름의 꽃이 있다는 것을 15년 전에야 알았다. 그것도 처음엔 꽃이 아니라 한 인터넷 동호회에서 ‘바람꽃’이란 별명을 가진 한 여성회원을 통해서다.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가 사랑한 아도니스가 죽을 때 흘린 피에서 탄생했다는 ‘아네모네’가 바람꽃의 다른 이름이란 사실을 안 것도 그 무렵이었다. 그 바람꽃이 우리나라에만도 각기 다른 이름으로 18종류가 서식한다. 변산바람꽃, 만주바람꽃, 바이칼바람꽃, 가래바람꽃, 꿩의바람꽃, 쌍동바람꽃, 외대바람꽃, 홀아비바람꽃, 회리바람꽃, 남방바람꽃, 나도바람꽃, 너도바람꽃......
바람꽃의 피는 시기는 각기 다르다. 그중 ‘너도바람꽃’은 우리나라에 분포하는 모든 야생화 가운데서도 복수초 다음으로 일찍 피는 꽃이다. ‘절분초’란 다른 이름도 갖고 있는데 겨울과 봄의 계절(節)을 나누는(分) 풀(草)이란 뜻으로 그렇게 불렸다고 한다. 꽃이 작아 잘 보이지 않지만 이맘때면 대궁을 밀고 올라오는 꽃의 앙증맞은 아름다움을 볼 수 있다. 응달의 눈 속에서 버티는 걸 보면 대단한 생명력이 느껴진다. 저 작은 것의 ‘스스로 제 살 찢고 신음소리 내는’ 생명의 환희라니.
세상의 모든 봄기운이 총력을 기울여 꽃 하나 피우는 걸 돕고, 줄탁동시로 너도바람꽃 역시 ‘전 생애를 다 바쳐 꽃숭어리 하나 펼쳐 보이는 길’을 연다. 하지만 태생적으로 바람꽃은 연약하다. 바람이 조금만 불어도 파르르 잎을 떨고 날씨가 침통해지면 따라서 고개를 푹 숙인다. 그토록 애처롭게 보호본능을 자극하는 신분인 까닭일까. 한국과 만주, 아무르 등에만 분포한다는 이 꽃은 국내에서도 멸종위기 희귀종으로 지정되어 각별한 보호를 받는다. 그리고 그 연약함 뒤에 어떤 비의가 숨겨져 있는지 꽃말이 '사랑의 비밀' '사랑의 괴로움'이다.
그러고 보니 그 바람의 발음이 발암(發癌)으로 들린다. ‘무너지는 담장에 기댄 붉은 종양덩어리’에서 시한부 삶의 으스스함을 느낀다. 그런데 ‘너 사는 날까지만 살으리’는 누구의 목소리인가. ‘너도바람꽃’이 죽으면 ‘나도바람꽃’ 나도 같이 따라 죽겠다는 소리일까. 햐, 아도니스의 사랑인가. 여기에도 슬픈 ‘사랑의 괴로움’이 있구나. 뜨거운 사랑의 몸살이 있었구나. 생의 가치는 얼마나 오래 살았느냐에 있지 않고 어떻게 살아가느냐에 있다고 한다면 '너도바람꽃'이 피워올린 그 꽃길만큼 환하기도 어려우리라.
권순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