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권태응의 감자꽃
지금 경제가 아무리 불황이라고 하지만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3끼 밥은 먹고 삽니다. 지금의 경제 불황에 대한 고민은 절대 가난이 아니라 상대적인 가난이 문제이지요. 하지만 60년대만 하더라도 절대적인 가난에 시달릴 때여서 끼니 걱정을 해야 하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그런 시절에 감자는 아주 요긴하게 가난한 사람들의 부족한 식량을 보충해주었습니다. 그만큼 감자는 가난한 사람들의 삶을 지탱하는 서민들의 감자였습니다. 이런 감자를 주제로 아주 쉽고 간단하면서도 우리 말 기본 가락 4.4 음보를 살린 권태응의 동시를 소개합니다.
감자꽃
자주 꽃 핀 건
자주 감자
파보나 마나
자주감자
하얀 꽃 핀 건
하얀 감자
파보나 마나
하얀 감자
탄금대에 있는 노래비
이 시는 별다른 설명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어린이를 위한 동시로 쓰여진 탓도 있지만, 아주 순수하게 감자 꽃을 보면서 느끼는 감정 그대로 흥얼거리듯이 지은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 동시를 읽으며 느끼는 감정은 그렇게 간단하지만 않습니다. 이 동시를 읽다보면 감자 꽃이 피어있었던 그 옛날의 농촌 풍경이 생각나기도 하고 배고픈 시절에 감자를 먹으며 끼니를 달래 곤 했던 60년대 농촌시절이 생각나기도 합니다. 감자 꽃은 이처럼 힘들었던 농촌에서 흙을 파며 젊은 시절을 보낸 우리의 어머니, 누이를 닮은 꽃이기도 합니다. 우리 가난한 서민과 닮은 감자 꽃이어서 아련한 옛 농촌을 생각하게 합니다.
권태응
권태응은 1918년 충북 충주에서 나서 경기고등과 일본 와세다 대학에서 수학을 하였습니다. 와세다 대학을 다니면서 도쿄에 유학 온 20여 명의 동기생을 모아 33회라는 비밀 결사를 조직하여 활동하다 일경에 체포되어 스가모 형무소에서 감옥살이를 하다 폐결핵 3기의 몸이 되어 병보석으로 출옥합니다. 그 후 동기생 홍순환과 함께 출소한 권태응은 도쿄 시에 있는 제국갱신회에 거주지를 제한당하고 와세다 대학에서는 1940년 4월 퇴학 처분을 받습니다. 귀국 후 농촌계몽운동 등을 하다 그때 얻은 폐결핵으로 인해 권태응은 인천 적십자요양원 등을 전전하다 1951년 젊은 나이에 죽음을 맞습니다. 주목할 점은 그의 동기생 중에 최규하 전 대통령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최규하는 항일운동에는 관심이 없었고 오직 공부만하다 졸업하고, 만주로 건너가 관리양성소인 대동학원을 졸업하고 만주국 정부 관리가 됩니다. 권태응은 식민지 체제에 저항하고 투옥 중 얻은 병든 몸을 추스르며 야학을 하고 농민들을 위해 일하고 있을 때, 최규하는 착실하게 공부만 하며 어떤 체제든 동화되어 거기서 주어진 일을 성실하게 최선을 다해 일하여 관료로서 승승장구하여 대통령까지 되었습니다.
감자꽃(일러스트 양혜원)
그래서 이 동시에는 식민지 체제에 항거하고 민족정신을 일깨우는 뜻이 숨어 있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콩 심은데 콩 나고 팥 심은데 팥 나듯이 일본인은 씨부터 일본인, 한국인은 씨부터 한국인인데 창씨개명까지 해 가면서 하얀 꽃 핀 감자를 자주감자라고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어린이나 어른이나 조선민족이라면 이 시를 읽고 노래하는 중에 민족혼을 불러 세우고 싶었던 그의 항일정신이 녹아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민족정신에 투철했던 그의 일생을 보면 수긍이 가는 해석입니다.
저는 이 시를 읽으면서 아주 짧은 시이면서도 운율이 살아 있고 감자꽃이 흐드러지게 핀 농촌 전경, 파도치는 감동을 느꼈습니다. 온갖 수사를 다버리고 감정에 충실하고 소박하게 쓰여 진 이 동시는 ‘시란 무엇인가?’에 대한 생각을 다시하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