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장화
김필녀
후텁지근한 장마철이다. 꿉꿉한 마음을 활짝 피어 웃고 있는 능소화가 달래준다. 너무 고와서 질투심 많은 이들이 지어낸 이야기였을 뿐. 주황색의 화려함 뒤에 숨겨진 소화의 슬픈 전설은 아무리 찾아봐도 없다. 통꽃으로 떨어져 누운 자태마저 넋을 잃을 만큼 아름답다.
장맛비 덕분에 쉬는 날이 많아졌다. 비오는 날이 농부들의 휴일인 만큼 이참에 푹 쉬면서 재충전을 할 참이다. 주인이 쉬고 있으니 농장에 나갈 때면 수족처럼 따라다니던 모자와 장화도 망중한을 달래고 있다.
농부의 아내가 되고부터 복장도 많이 달라졌다. 구두나 운동화보다는 장화를 신는 날이 많아지고, 햇빛에 노출되어 일을 하다 보니 챙이 넓은 모자는 필수품이 되었다. 처음에는 멋모르고 예쁜 것을 찾았지만, 일하기 편한 기능성 신제품이 출시될 때마다 사 모으다 보니 가짓수도 점점 늘어났다.
창고 농사용 신발장 윗간에는 예쁜 장화 한 켤레가 자리하고 있다. 잔잔한 꽃무늬와 굽이 높은 디자인이 비오는 날 멋쟁이들이 신고 다니는 패션장화다. 어쩌면 이 꽃장화가 매개체가 되어 땅을 일구는 농부의 아내로 살아가는 것이 아닐까 싶다.
시골로 이사를 해서 몇 년 동안은 학원에서 논술강사로 아이들을 가르치다 주말이면 농장에 나가 남편을 도왔다. 운동화에 흙을 잔뜩 묻힌 채 어설픈 자세로 풀을 뽑는 아내가 안쓰러웠는지 장화를 샀다며 불쑥 내밀었다. 실용성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여러 종류의 장화 가운데서 가장 예쁜 장화를 골라 선물했던 남편의 마음에 감동을 했었다.
레인부츠라 불리는 장화의 정확한 명칭은 웰링턴 부츠(Wellington boot)다. 웰링턴 부츠에서 웰링턴은 특정 인물의 이름을 따온 것이다. 18세기 워터루 전쟁에서 나폴레옹을 물리쳤던 웰링턴 공작이 세계1차 대전 때 영국군의 군화로 사용하면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고 한다.
애초에 웰링턴 부츠는 가죽으로 만들어졌지만 1852년 프랑스의 히람 허친슨이 고무 경화 과정을 개발해 타이어를 만들던 굿이어와 만나게 되면서 오늘날의 완벽한 방수가 되는 고무장화가 만들어졌다. 레인부츠는 각 나라마다 부르는 명칭이 따로 있는데 영국에서는 웰링턴 부츠, 웰리스 부츠라고 부르고 호주에서는 검 부츠(gum boots)로 불린다. 우리나라에선 통상적으로 레인부츠라고 한다.
요즘에는 레인부츠도 고가에 수입이 되어 멋쟁이들의 장마철 패션으로 인기가 많다고 한다. 농부들이 위생과 안전을 위해 신는 쓰임새와는 전혀 다르다. 머지않아 나에게도 여유로운 삶을 마음껏 누릴 날이 올 것이다. 그때가 되면 신발장에 잠자고 있는 꽃장화를 신고서 옛말하며 멋진 워킹을 해볼 요량이다.
사람의 욕심이 끝이 없듯이 농사도 마찬가지다. 처음 농사를 시작할 때는 텃밭을 일구어 우리 먹을 푸성귀만 가꾸기로 했는데 차츰 농사에 자신이 생기면서 대농이 되어버렸다. 바쁠 때는 일손을 사서 하지만 주인이 감당해야 할 몫이 몇 배로 더 커갔다. 바쁜 만큼 수입이 늘어났지만 그만큼 몸과 마음이 고되다보니 여유로운 전원생활과는 점점 거리가 멀어졌다.
누구보다 열심히 땅을 일구며 살았던 우리 부부도 너무 큰 욕심은 내려놓기로 했다. 둘이서 일에 쫓기지 않고 적당하게 땀 흘린 대가만큼만 거두기로 했다. 그동안 바빠서 미루어 두었던 여행도 하고, 좋아하는 책도 마음껏 읽을 생각을 하니 저절로 미소가 번진다.
결혼생활 삼십오 년 중에서 농사를 짓고 살았던 때가 우리 부부에게는 가장 한마음 한뜻이 되어 살았다고 할 수 있다. 농사에는 둘 다 왕초보였으니 서로의 뜻을 모을 수밖에 없었다. 살아가면서 두고두고 우려먹어도 남을 만큼 초보농사꾼 부부의 웃지 못 할 일화는 훗날 글로 쓸 계획이다.
모진 시집살이를 걱정하며 꽃가마를 타고 시집가는 신부는 없을 것이다. 땅을 일구는 일이 힘든 일인 줄 몰랐기 때문에 꽃장화를 신고 남편의 뜻을 따라 정성껏 씨를 묻었는지도 모른다. 바빠도 바쁘지 않게, 둘이서 오순도순 땀 흘려 가꾼 만큼만 거두어들여 이웃과 나누어먹을 줄 아는 여유로운 농촌생활을 그려본다.
잠시 비가 그친 사이 텃밭으로 나가 호박잎을 한 아름 따왔다. 이맘때쯤 어머니가 즐겨 드셨던 호박잎쌈. 푹 쪄낸 호박잎을 척척 접어 찐 감자와 날된장을 함께 싸서 입이 미어지도록 먹을 생각을 하니 입에 침이 고인다.(끝)
- 향토문화의 사랑방 안동지 / 2016년 7,8월호(통권 163호)
- 김필녀시인의 농장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