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나의 살던 고향은
나의 살던 고향은
김필녀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 봄이 왔지만 봄 같지 않다는 말이 실감나는 요즘이다. 내우외환(內憂外患)을 겪고 있는 대한민국의 앞날이 걱정되는 것은 농부들도 마찬가지다. 땅을 일구며 살아가는 순박한 이들이 기댈 데라고는 몸 사리지 말고 열심히 씨앗을 뿌려 가꾸는 일밖에는 없는 듯하다. 세상은 늘 수더분한 이들이 지켜내듯이, 이 난국도 결국에는 질박한 삶을 꾸려가는 서민들이 힘을 합해서 지켜낼 것이리라.
아무리 세상이 어수선해도 봄은 제 갈 길을 가고 있다. 꽃샘추위가 시샘을 해보지만 봉정사 만세루 옆 청매화도 해탈한 듯 말간 얼굴로 인사를 건넨다. 개나리와 산수유가 피고, 무거운 털옷을 벗은 목련도 수줍은 듯 뽀얀 속살을 들어내기 시작한다. 낙동강 변에 벚꽃이 활짝 피면 그야말로 만화방창이겠다.
어설픈 우리 꽃밭에도 봄이 찾아왔다. 무거운 흙을 뚫고 상사화가 쏘옥 고개를 내밀고, 모란도 메말랐던 가지 위에 붉은 새순을 매달았다. 올해는 꽃밭을 예쁘게 가꾸어보려고 어머니가 좋아하던 꽃씨를 준비해 두었다. 봄비가 촉촉이 내리고 나면 백일홍, 봉숭아, 분꽃, 맨드라미 씨앗을 뿌려 꽃이 피면 친정엄마 만난 듯이 반겨야겠다.
내 고향에도 봄이 왔으리라. 어머니와 함께 고향은 늘 그리움의 대상이다. 추운 겨울을 이긴 봄꽃들이 여기저기 피어나면 더욱 그립다. 나지막하게 불러보는 ‘고향의 봄’과 함께 어린 시절의 고향 풍경이 낡은 영화필름처럼 끊어졌다 이어지기를 반복한다.
새벽마다 마당을 쓰는 아버지의 고른 비질 소리에 눈을 뜨곤 했다. 부지런한 어머니의 무쇠 솥 여닫는 소리와 함께 구수한 밥 냄새가 솔솔 풍기던 고향집. 봄이 되면 넓은 마당가에 옥매화가 피고 복사꽃과 살구꽃, 앵두꽃이 다투어 피면서 꽃대궐을 이루었다. 햇살 가득한 마당에서 냉이와 꽃다지를 뜯어 사금파리 위에 올려놓고 소꿉놀이 하던 시절이 아득하다. 고향집은 헐어 없어졌지만 앵두나무, 모과나무, 감나무는 그대로 남아 반겨주고 있다.
늪실 양지마을은 꿈에도 잊지 못할 내 고향의 지명이다. 비보(裨補)처럼 마을 앞을 지키고 있는 당산나무 아래 큰 연못이 있었다고 해서 예전에는 연곡(蓮谷)이라고도 불렀다. 조상대대로 터를 잡고 오순도순 살아가는 동성마을이기에 대부분이 일가친척들이었다. 어릴 때부터 대소가 어른들로부터 예의범절을 익히며 자랐기에 토담 틔워 서로 살갑게들 지냈다.
해마다 정월 열나흘 밤 자정 무렵이면 마을 어른들은 당집에서 고사를 지내며 마을의 안녕을 빌었다. 아버지께서도 찬물로 세수를 하신 다음 횃댓보 안에 고이 걸어두었던 도포를 입고 갓을 정제하고 참석하셨다. 안방에서 조신하게 기다리던 어머니는 고사가 끝났음을 알리는 소지(燒紙) 올리는 불빛을 확인한 뒤에야 당집 아래 있는 샘물을 길러 와서 찰밥을 지었다. 새마을운동이 한창이던 시절에 당집에 원인모를 불이 나고 없어진 자리에 교회가 들어서서 격제지감을 느끼게 한다.
지금은 없어졌지만 마을 앞에는 널찍한 공동우물이 있었다. 학교 갈 시간이면 새로 입학한 일학년부터 육학년까지 다들 모여서 출발을 했다. 여학생들은 책보자기를 허리에 매고, 남학생들은 등에 대각선으로 맨 채, 철 필통을 딸각거리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높은 재를 넘어 한 시간여를 걸어가야 하는 등굣길이었지만 함께여서 힘든 줄 모르고 다녔다. 늘 혼자였던 나는 언니와 오빠가 여럿 있는 친구들이 가장 부러웠다.
학교 가는 길은 서둘렀지만, 수업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은 지각할 일이 없으니 느긋했다. 신작로 미루나무 그늘 아래 앉아 공기놀이와 땅따먹기, 줄넘기도 하면서 시간 가는 줄 몰랐다. 놀다가 배가 고프면 찔레순도 꺾어 먹고, 입술과 혓바닥이 새파랗도록 참꽃을 따먹기도 했던 시절. 다시는 돌아올 수 없기에 더욱 그립다.
고향을 찾을 때마다 옛 모습이 하나둘 사라지고 있어 아쉬움이 크다. 젊은이들은 다들 객지에 나가 살고, 집집마다 노인들만 남아 집을 지키다 돌아가시고 나면 헐리고 있다. 마을 앞을 지키며 동네 악동들의 놀이터 역할을 하던 동뫼산 마저 없어지고 나니 허탈감마저 들었다. 조상 대대로 있던 산을 깎아 흙을 팔아야만 했던 깊은 속내를 알 수는 없지만 참으로 섭섭했다.
기억이 더 흐릿해지기 전에 고향의 산과 들, 마을 이름들을 소재로 글을 써보려고 마을 어른들과 친지들에게 자문을 구해가며 애를 쓰고 있다. 친정 부모님 산소가 있는 뒷산에는 지금도 참꽃이 숭어리로 피고 있겠지. 시제를 지내러 다니던 큰삿갓과 작은삿갓, 서풍받이에 있던 조상님들 산소도 잘 보존되어 있으리라. 종다래끼 옆에 끼고 봄나물을 뜯으러 다니던 늠메뜰, 가네미, 오끼네, 동뫼너머, 골마, 뒷골, 진밭골도 많이 변했을까. 양지마, 음지마, 새마, 골마, 버드실에 살던 친구들의 안부도 몹시 궁겁다.
마을 앞에 있던 동뫼산에서 함께 놀던 동갑내기 친구들도 어느덧 이순을 맞았다. 꽃 피는 봄날을 즈음해서 회갑여행을 떠난다고 들떠서 기다리고들 있다. 어릴 적 고향친구들을 만나면 허물없이 대할 수 있어 더욱 반갑다. 육십갑자를 열심히 살았으니 남은 세월은 덤이라고 생각하며 살아온 날들보다 건강하고 행복하기를 빌어본다.
고향을 그리며 쓴 자작시, ‘내 고향 늪실’을 조용히 암송하며 행복했던 시절을 다시금 회상해본다.
시린 세월 끌고
먼 길 휘돌아 찾아든 늪실
정겹던 초가지붕 하나 없이
낯선 동구 앞
반기며 우뚝 선 느티나무 아래
정월 열나흘 밤
당집 밝히던 불빛은
교회당 뾰족한 십자가로 빛나고
토담 틔워 넘나들며 살던 이웃
다정하던 모습들 다
아스라한 세월 너머로 숨었다
더께진 시간 걷어내면
어느 골목길에서
어린 날의 그 그리운 얼굴들
까르르 웃음처럼 번져 나올 듯
수숫대 흔들리는 밭이랑 돌아가
들국화 한 아름 꺾어 안으면
그리운 네 모습 찾아질까
- 향토문화의 사랑방 안동지 2017년 3,4월호(통권 167호)
- 김필녀시인의 농장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