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꽃삽과 북주기
꽃삽과 북주기
김필녀
모내기철이다. 새하얀 꽃을 가지마다 소복소복 뒤집어쓴 이팝꽃이 찰랑거리는 논물 안에서 춤을 춘다. 어린모를 심는 이앙기 위로 쏟아지는 오월 햇살이 눈부시다.
힘든 모심기를 하다 뜸이 잘든 이밥같이 생긴 꽃을 쳐다보면서 얼마나 배가 고팠을까. 아직 보리는 여물지 않았고 지난해 갈무리했던 양식은 거의 떨어져 나물죽으로 배를 채웠던 부모님들의 삶. 보릿고개를 벗어나기 위해 손발이 부르트도록 땅을 일구며 자식들 건사하던 부지런함을 잊지 말아야겠다.
이밥에 고깃국을 먹고, 비단옷을 입으며 고래 등 같은 기와집에 사는 것이 소원이던 시절이 그리 오래지 않았다. 1960년대만 해도 농촌에서는 쌀이 귀해서 보리밥과 조밥을 먹는 집이 많았다. 감자를 드문드문 섞은 보리밥이라도 굶지 않고 배불리 먹을 수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던 시절이었다. 지금은 쌀보다는 건강에 좋은 보리와 잡곡 값이 더 비싸졌으니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지금 농촌은 논농사도 많이 줄어들고, 모심기도 기계로 하니 그리 바쁘지 않지만 예전에는 모내기철이 가장 바빴다. 부지깽이도 일을 해야 할 만큼 바쁜 농번기에는 학교에서도 부모님을 도우라고 가정실습을 해서 며칠씩 쉬었다. 여학생들은 집에서 동생들을 돌보며 어머니를 돕기도 하고, 남학생들은 들판에 나가 어른들 잔심부름과 못줄을 잡으면서 한몫을 했다.
집집마다 품앗이를 하며 모내기를 하느라고 가정실습 기간에는 온 동네가 잔치분위기였다. 평소에는 먹어보지 못했던 하얀 쌀밥과 온갖 반찬을 커다란 다라이에 담아 머리에 이고 좁다란 논둑길로 줄을 서서 날랐다. 마을 어른들과 여럿이 둘러앉아서 먹던 들밥의 그 기막힌 맛은 고향이 농촌인 사람들은 알 것이다. 맨발로 오랜 시간 모를 심던 어른들 다리는 거머리에 뜯겨 피가 줄줄 흘러내렸지만 풍성한 가을을 꿈꾸며 막걸리 한사발로 피곤함을 달래곤 했다.
옛날에 비하면 요즘 농사는 기계화가 되어 한결 쉬워졌다. 하지만 손으로 해야 하는 일도 여전히 많아 농부들은 늘 바쁘다. 느지막하게 농사를 시작한 뿔농군 부부도 오년이라는 노하우가 쌓이면서 각종 농기구 쓰는 방법도 꽤나 익숙해졌다.
꽃삽과 호미는 농촌 여성들에게 가장 요긴하게 쓰이는 농기구다. 감자나 고구마를 심고 나서 북주기를 할 때 없어서는 안 되는 꽃삽과 쪼그려 앉아서 풀을 뽑을 때 주로 쓰는 호미는 신체구조상 남자들보다 여자들이 주로 사용한다. 남자들은 삽이나 괭이, 선호미처럼 주로 서서 일을 하는 농기구를 사용한다.
아파트에 살다가 마당이 있는 시골집으로 이사를 오면서 꽃밭을 가꾸려고 예쁜 꽃삽을 하나 장만했다. 처음에는 어머니가 좋아하시던 봉숭아, 백일홍, 맨드라미를 심어 가꾸는 재미에 푹 빠졌었다. 텃밭을 가꾸기 시작하면서 꽃보다는 감자와 고구마, 마를 심고 북주기를 하는데 더 많이 사용하게 되었다.
북주기란 흙으로 작물의 뿌리나 밑줄기를 두둑하게 덮어 주는 일이다. 그래야 줄기가 넘어지지 않고 알도 튼실하게 잘 든다. 파종시기인 3월 중순부터 5월까지 감자와 마, 고구마를 심고 나서 꽃삽으로 흙을 떠서 북을 주는 횟수가 대략 십만 번은 넘는다. 오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끝이 뾰족하던 꽃삽이 우묵하게 들어갈 정도로 닳았다.
닳고 닳아서 손에 익어 정이 더 가는 꽃삽. 귀한 인연으로 내 손에 들어와서 함께 일을 하면서 곳간도 그득해지고 텅 비었던 내면도 점점 채워졌다. 한쪽이 닳고 깎이는 동안 누군가의 부족하던 삶이 채워지는 세상이치를 꽃삽을 통해 배웠다.
일을 할 때는 반질반질 윤이 나서 살아있는 것 같던 꽃삽도 오랜 시간 쓰지 않으면 누렇게 녹이 슨다. 우리네 삶도 힘들지만 늘 갈고 닦아야 추구하던 꿈들을 이룰 수 있다. 무생물인 꽃삽이나 사람이 살아가는 이치가 별반 다를 게 없다.
화답하듯이 앞산과 뒷산에서 울어대는 뻐꾸기소리를 들으며 풀을 뽑다보면 무념무상으로 돌아갈 때가 많다. 손과 호미가 저절로 한 몸이 되면서 풀밭이 깨끗해지면 마음까지 개운해진다. 실타래처럼 엉킨 집안의 대소사도 하루가 다르게 크는 곡식들을 쳐다보며 이런저런 생각을 정리하다보면 저절로 풀린다.
꽃삽이나 호미를 들고 밭에 앉아 있는 시간은 나의 기도시간이라고 할 수 있다. 부족한 나를 성찰하고, 가족들의 건강과 행복을 위해 기도하고, 좀 더 나은 삶을 꿈꾸는 간절함이 함께 하는 시간이다. 늘 대소가와 가족들을 위해 헌신하셨던 내 어머니처럼, 나의 삶도 어머니를 닮아가고 싶은 가정의 달 오월이다.(끝)
- 향토문화의 사랑방 안동지 2017년 5,6월호(통권 167호)
- 김필녀시인의 농장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