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정 김필녀
2007. 6. 19. 22:20
2007. 6. 19. 22:20
합죽선의 풍류와 멋
"여름 생색은 부채요, 겨울 생색은 달력이라"는 말이 있었다. 더위가 시작되는 단오에는 부채를 선물하고, 다가올
새해를 위해서는 동지에 달력을 선물하는 풍속을 이르는 말이다. 부채 중에 합죽선(合竹扇)이라는 것이 있다.
대나무의 겉대를 얇게
깎아 양면이 모두 겉대가 되게 서로 합하여 부레풀로 붙였다고 해서 생겨난 이름이다. 이 부채는 고려시대에 처음 만들었다고 하는데, 중국이나
일본에까지 그 기술이 전해져 고려선(高麗扇)으로 널리 알려졌다고 하니 우리나라 고유의 부채인 셈이다.
흔히 코카콜라병은 서양
여성의 외양을 표현한다고들 한다. 몸에 타이트하게 달라붙는 주름치마에서 영감을 얻어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합죽선은 훨씬 오래 전부터 우리네
여인들의 고유한 자태와 우아한 여성적 선(線)의 아름다움을 담고 있다.
전주의 부채 명장
이기동 옹(翁)에 따르면 합죽선은
고려시대 때 속세의 인연을 완전히 끊지 못하고 외롭게 수행 하던 한 스님이 노리개 감으로 만든 데서 비롯되었으며, 외양은 여체(女體)를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고 한다. 제일 위쪽의 동물 뼈로 만든 곳은 가채를 쓴 머리부분에 해당하고, 양쪽으로 연결된 고리는 비녀를 나타내며,
손잡이 부분은 한복의 윗저고리이며, 길쭉하게 뻗어 내린 부분은 치마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또 눈여겨 볼 것은 살과 마디에 인두로
새겨 넣은 문양이다. 합죽선의 살에는 박쥐를, 마디에는 국화를 새겨 넣는 것이 예로부터 전통이었다고 한다. 이 문양은 외형이 갖는 의미 즉
여체와 연관되게 낙죽(烙竹)을 놓아 흥미롭다. 박쥐문양은 남녀의 성적교합과 복을 염원하는 주술적 의미가 깃들어 있다.
박쥐가
야행성(夜行性) 동물이듯이 남녀간의 행위는 밤에 이루어지고, 박쥐를 한자로 복(蝠)이라고 하니 인간의 복(福)과 동일한 의미가 되는 것이다.
마디부분에 새긴 국화는 절개를 나타내는데 서리 올 때 피어 눈(雪)을 맞으며 지는 꽃이기 때문이다. 결국 낙죽(烙竹)한 국화의 의미는 합죽선을
소지한 남성 자신의 내부를 향한 강한 절개를 표현한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본다면 우리 선조들은 남녀간의 교합과 복을 염원하면서도
자기 수양의 방편으로 합죽선을 소지했음을 알 수 있다. 예로부터 규중의 여인들이 합죽선을 가까이 하지 않았던 이유도 이 때문이다. 동성연애의
상징적 의미를 담고 있었기 때문에 금기시되었다.
『동국세시기』에 단오절이 다가오면 공조(工曹)에서는 단오선(端午扇)을 만들어 궁에
바치는데 왕은 그것을 각 궁에 속한 하인들과 재상, 시종신(侍從臣) 등에게 나누어 주었다는 기록이 보인다. 합죽선이 진상품이었던 것이다.
그래서인지 예로부터 합죽선은 소지할 수 있는 사람이 상류계층으로 제한되었기 때문에 귀한 물건으로 대접받았다.
합죽선은 바람을
일으키는 일차적인 용도로만 사용하지 않았다. 여름뿐 아니라 겨울에도 허리춤에 꿰어 차고 다니다가 찬바람이나 먼지를 막기도 하고, 만나서 거북한
상대라도 부딪치게 되면 외면하지 않고 자연스레 부채로 얼굴을 가리기도 했다. 또 시조나 가곡이라도 한 곡 할라치면 부채로 장단을 맞추거나 펼쳤다
접었다 하면서 풍류와 멋을 즐기기도 했다.
외진 고갯마루에서 갑자지 불량배나 강도를 만났을 때에는 호신용으로도 도움이 되었다고
하니 선비들에게는 사철 애용물이었던 셈이다. 조선시대 여인들이 노래개나 은장도를 소지하듯 선비들은 합죽선을 소지했던 것이다.
“청초 우거진 골에 자는다 누웠는다. 홍안은 어디 두고 백골만 묻혔는다. 잔 잡아 권할 이
없으니 그를 슳어 하노라.” 선조 때 임재가 평안도 감찰사로 부임하던 길에 송도에서 명기 황 진이를 찾았으나 이미 죽었다 하므로
그를 추모하여, 지니고 있던 부채에 안타까운 마음을 적어 넣었다.
그러나 훗날 이 시가 유림의 문제가 되어 벼슬을 내놓게 되는
사태에 이르게 되자 “한겨울에 부채 선물을 이상히 생각하지 말라. 너는 아직 나이 어리니 어찌 능히 알겠냐만
한밤중 서로의 생각에 불이 나게 되면 무더운 여름 유월의 염천보다 더 뜨거울 것이다.” 고 적어 어린 기생에게 보낸 일이 있었다.
합죽선에 담은 선조들의 풍류와 멋을 알 것도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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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yesulch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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