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아침 1/1



    새해 첫 기적

    반칠환(1964~ )


    황새는 날아서
    말은 뛰어서
    거북이는 걸어서
    달팽이는 기어서
    굼벵이는 굴렀는데
    한 날 한 시 새해 첫날에 도착했다

    바위는 앉은 채로 도착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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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경기장이다. 날고 뛰고 걷는 선수가 있는가 하면, 기고 구르고 주저앉은 선수도 있다. 인간은 구경꾼인 것 같고. 삶의 속도는 다 다른데 모두 한날한시에 같은 곳에 도착했다. 삶의 시간이 같기 때문이다. 속도가 현상이라면 시간은 본질이라고 이 시는 모순을 숨기지 않고, 하지만 역설에 기대어 말한다. 꿈쩍도 않고 1등을 한 바위를 보라. 무엇을 얼마나 겪고 뭘 손에 쥐었느냐가 아니라 같은 세상에서 같은 1년을 산 것이 참가 자격이다. 생존의 경주를 잊은 생의 경연장에서는 날아다닌 황새나 자던 바위나 다를 게 없다. 같은 곳에 서서 새해를 맞으니, 출발부터가 기적이다. 삶은 기적 아니냐고 시인은 이렇게 우긴다. 또 한 해, 달려볼까? 그런데 인간은? 기적에 동참하지 않을 만큼 우리는 어리석지 않다. 어리석지 않을 것이다.


<이영광·시인·고려대 문예창작학과 교수>

출처 : 碧波 藝術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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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서울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작]


정말 먼 곳


박은지



멀다를 비싸다로 이해하곤 했다

우리의 능력이 허락하는 만큼 최대한

먼 곳으로 떠나기도 했지만

정말 먼 곳은 상상도 어려웠다


그 절벽은 매일 허물어지고 있어서

언제 사라질지 몰라 빨리 가봐야 해


정말 먼 곳은 매일 허물어지고 있었다

돌이 떨어지고 흙이 바스러지고

뿌리는 튀어나오고 견디지 못한 풀들은

툭 툭 바다로 떨어지고

매일 무언가 사라지는 소리는

파도에 파묻혀 들리지 않을 거야


정말 먼 곳을 상상하면 불안해졌다

우리가 상상을 잘하고 있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아무리 노력해도 우리의 상상이

맞았는지 틀렸는지 알 수 없었고

거짓에 가까워지는 것만 같았다


정말 먼 곳을 상상하는 사이 정말 가까운 곳은

매일 넘어지고 있었다 정말 가까운 곳은

상상을 벗어났다 우리는

돌부리에 걸리고 흙을 잃었으며 뿌리를 의심했다

견디는 일은 떨어지는 일이었다

떨어지는 소리는 너무 작아 들리지 않았다


그래도 우리는 정말 먼 곳을 상상하며 정말 가까운 곳에 서 있었다

그래야 절벽에서 떨어지지 않을 수 있었다




[당선소감]


詩가 준 위로, 나눌 수 있어 기쁘다

 

박은지

 

  10년 후 내 모습 같은 걸 그려보는 일은 어려웠다. 계획은 늘 틀어졌고, 예상치 못한 일은 자꾸 찾아왔다. 오늘을 무사히 견디자는 목표만이 살아남았다. 물론 자주 실패했다. 발밑이 무너지거나, 흩어진 나를 찾아 이리저리 뛰어다니거나, 가만히 울면서 오늘을 보낼 때도 있었다.


  그런 날엔 시의 힘을 빌렸다. 시를 읽거나 쓰면 내가 덜 초라하게 느껴졌고 덜 외로웠다. 시를 써야 내가 ‘나’ 같았고, 가끔은 근사해 보이기까지 했다.


  잘 쓰고 싶었고, 좋은 시를 쓰고 싶었으나 이 또한 자주 실패했다. 그냥 쓰는 수밖에. 시에게 잘 보이려는 마음을 버리고 그냥 쓰는 수밖에. 그러던 오늘 전화 한 통을 받았다. 10년 후 만난 내 모습이 꽤 마음에 든다. 오늘도 내일도 시의 힘을 빌려야지. 이 힘을 여러 사람들에게 나눠줄 수 있어 기쁘다.

 

  우리 엄마 허경숙, 엄마의 사랑으로 제가 살아 있습니다. 행복의 밀도를 높여주는 우리 가족, 특히 조카 박지성 고맙고, 사랑합니다. 우리는 더 많이 행복해져야 합니다.


  끝까지 저를 지켜봐 주신 박주택 교수님, 격려를 아끼지 않으신 김종회 교수님을 비롯한 경희대 국문과 교수님들, 프락시스연구회와 경희문예창작단, 현대문학연구회 선후배님들이 계셔서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감사합니다. 경환, 승원, 은영, 규진 더 많은 밥과 술을 함께합시다. 나의 가장 큰 위로인 의룡, 말로 다 할 수 없을 만큼 고마워.

 

  끝으로 이문재 선생님, 나희덕 선생님 감사합니다. 부족한 제게 내일로 나아갈 수 있는 힘을 주셨습니다. 많이 웃고 많이 울며 계속 쓰겠습니다.


■박은지 ▲1985년 서울 출생 ▲경희대 국어국문학과 졸업 ▲동대학원 박사과정 수료


 

[심사평] 


수사 과잉의 피로감 속 간결미 돋보여


  2000년대 이후 서정시의 갱신은 탈주체의 문제나 문법적 해체와 맞물려 진행되어 왔다. 본심에 올라온 열다섯 명의 작품들에서도 그런 변화가 확연히 느껴졌다.


  주체가 불분명한 진술들과 지나치게 비틀어서 소통 불가능할 정도의 문장들이 적지 않게 눈에 띄었다. 하지만 그러한 단절과 비약이 항상 새로움으로 느껴지는 것은 아닌 듯하다. 이규진, 남수우, 장희수, 박은지의 시들은 새로운 어법을 보여 주면서도 나름대로 보편성을 확보하고 있다고 여겨졌다.

 

  박은지의 ‘정말 먼 곳’을 당선작으로 뽑게 된 데에는 과잉된 수사가 주는 피로감 속에서 그의 간결하고 명징한 언어가 상대적으로 돋보였기 때문이다. 다른 투고자들보다 작품의 편차가 크지 않고 전체적으로 안정된 호흡을 지니고 있다는 점도 신뢰감을 갖게 했다.

 

  박은지의 시에는 특히 ‘장소성’에 대한 예민한 의식과 상상력이 두드러진다. “정말 먼 곳을 상상하는 사이 정말 가까운 곳은 매일 넘어지고 있었다”는 진술처럼, 시적 화자는 여기와 저기, 현실과 상상, 나타남과 사라짐 사이에서 진자운동을 계속한다. 서로 대립되는 사물이나 세계를 오가며 균형 잡힌 사유와 감각을 보여 주는 그의 시는 현실을 손쉽게 이월하지도, 거기에만 사로잡히지도 않는다.

 

  절벽과도 같은 현실을 견디면서 다른 세계를 상상하는 힘을 잃지 않는 것, 그 리드미컬한 힘으로 그는 ‘정말 먼 곳’까지 갈 것이다. 앞으로 펼쳐질 시적 여정을 기대하며 당선을 진심으로 축하드린다


심사위원 이문재·나희덕(오른쪽) 시인

 


출처 : 마 캐는 시인, 김필녀 시인의 아정농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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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별


김남조(金南祚)



낙엽은 가을의 수기(手記)
저리 흔들며 이별을 고한다

안녕히,
당신이 떠나는 길머리에
나도 작은 손을 흔들어 주마

가을은
뜨거운 마음을 숨기고
헤어지는 계절
버려진 듯 서 있는 이정표 앞에서
아픈 이별을 견디는 때란다
사랑하는 이를
사랑함으로 하여
보내는 계절이란다

화평한 영혼은
신이 켜 주시는 성총의 등불
그 불빛 당신께 있으라
빌어주마

사랑하면 무엇이나 주고 싶어진다
평생 바치며 살고 싶어진다
당신은 이 마음을 알 수 있는가
나뉘는 일도 주는 거란다
더 섧게 더 많이 주는 거란다
당신은 이 마음을 알 수 있는가

작은 손을 흔들며
하얀 꽃이 피리만큼
웃음 지어 볼까

사랑은
멀리서도 가까이 사는
마음이라고 믿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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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남조(金南祚) / 1927.9.26

경북 대구 출생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국문학과 졸업
숙명여자대학교 교수(1955-93)
현재 명예교수, 예술원 회원

시집 <목숨>(수문관, 1953), <나아드의 향유>(남광문화사, 1955),
<나무와 바람>(정양사, 1958), <정념의 기>(정양사, 1960),
<풍림의 음악>(정양사, 1963), <김남조 시집>(상아출판사, 1967),
<설일>(문원사, 1971), <동행>(서문당, 1976),
<빛과 고요>(서문당, 1982), <김남조 시전집>(서문당, 1983),
<시로 쓴 김대건신부>(성바오루출판사, 1985),
<바람셰례>(문학세계사, 1988)
<아름다운 사람들>을 간행

한국시인협회상
서울시문화상
대한민국 문화예술상
3·1문화상등을 수상.

                




출처 : 碧波 藝術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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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라는 섬이 있다


 

김승희

 

가장 낮은 곳에
젖은 낙엽보다 더 낮은 곳에
그래도라는 섬이 있다
그래도 살아가는 사람들
그래도 사랑의 불을 꺼트리지 않는 사람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섬, 그래도,
어떤 일이 있더라도
목숨을 끊지 말고 살아야 한다고
천사같은 김종삼, 박재삼,
그런 착한 마음을 버려선 못쓴다고

부도가 나서 길거리로 쫓겨나고
인기 여배우가 골방에서 목을 매고
뇌출혈로 쓰러져
말 한마디 못해도 가족을 만나면 반가운 마음,
중환자실 환자 옆에서도
힘을 내어 웃으며 살아가는 가족들의 마음속

그런 사람들이 모여 사는 섬, 그래도
그런 마음들이 모여 사는 섬, 그래도

그 가장 아름다운 것 속에
더 아름다운 피 묻은 이름,
그 가장 서러운 것 속에 더 타오르는 찬란한 꿈

누구나 다 그런 섬에 살면서도
세상의 어느 지도에도 알려지지 않은 섬,
그래서 더 신비한 섬,
그래서 더 가꾸고 싶은 섬 그래도,
그대 가슴속의 따스한 미소와 장밋빛 체온
이글이글 사랑에 눈이 부신 영광의 합성

그래도라는 섬에서
그래도 부둥켜안고
그래도 손만 놓지 않는다면
언젠가 강을 다 건너 빛의 뗏목에 올라서리라
어디엔가 걱정 근심 다 내려놓은 평화로운
그래도 거기에서 만날 수 있으리라


김승희 시인 

1952년 光州 출생.  1973년 〈경향신문〉신춘문예 시 당선. 1994년 〈동아일보〉신춘문예 단편소설 당선.

소설집 『산타페로 가는 사람』, 시집 『태양 미사』『왼손을 위한 협주곡』『미완성을 위한 연가』『달걀 속의 생』

『어떻게 밖으로 나갈까』『냄비는 둥둥』『희망이 외롭다』등. 현재 서강대학교 국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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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마음속에는 그래도 라는 신비한 섬이 있다. 평범한 접속사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접속사로 변주됨을 이

시를 통해서 느낀다. 그래도는 마음과 마음 사이에 놓여 있다. 삶을 긍정해야 하는 희망의 섬 그래-도(島). 세상살이에 지치거나 삶이 바닥을 드러낼 때 우리는 ‘지상의 가장 낮은 곳, 젖은 낙엽보다 더 낮은 곳’에 기거 하는 그래도에 기댄다. 절망 끝에 선 사람들 부도, 비상시국 앞에서도 결코 마음의 징검다리 그래도를 놓는 걸 잊지 않는다. 아무리 세상이 어수선스러워도 서로 손만 놓지 않는다면 슬픔의 강 건너 평화의 섬까지 도달할 수 있다. 그렇게 만드는 것이 그래도 라는 말이기 때문이다. 엄계옥 시인



출처 : 마 캐는 시인, 김필녀 시인의 아정농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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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62회 顯忠日


국군은 죽어서 말한다


-나는 광주 산곡을 헤매다가 문득
혼자 죽어 넘어진 국군을 만났다.

모윤숙


산 옆 외따른 골짜기에
혼자 누워 있는 국군을 본다.
아무 말, 아무 움직임 없이
하늘을 향해 눈을 감은 국군을 본다.

누른 유니폼 햇빛에 반짝이는 어깨의 표지
그대는 자랑스런 대한민국의 소위였고나.
가슴에선 아직도 더운 피가 뿜어 나온다.

장미 냄새보다 더 짙은 피의 향기여!
엎드려 그 젊은 주검을 통곡하며
나는 듣노라! 그대가 주고 간 마지막 말을

나는 죽었노라, 스물 다섯 젊은 나이에
대한민국의 아들로 나는 숨을 마치었노라.
질식하는 구름과 바람이 미쳐 날뛰는 조국의
산맥을 지키다가
드디어 드디어 나는 숨지었노라.

내 손에는 범치 못할 총자루, 내 머리엔
깨지지 않을 철모가 씌워져
원수와 싸우기에 한 번도 비겁하지 않았노라.
그보다도 내 핏 속엔 더 강한 대한의 혼이 소리쳐
나는 달리었노라. 산과 골짜기, 무덤 위와 가시 숲을

이 순신같이, 나폴레옹같이, 시이저같이
조국의 위험을 막기 위해 밤낮으로
앞으로 앞으로 진격! 진격!
원수를 밀어 가며 싸웠노라.
나는 더 가고 싶었노라. 저 원수의 하늘까지
밀어서 밀어서 폭풍우같이 모스크바 크레믈린탑까지
밀어 가고 싶었노라.

내게는 어머니, 아버지 귀여운 동생들도 있노라.
어여삐 사랑하는 소녀도 있었노라.
내 청춘은 봉우리지어 가까운 내 사람들과 함께
이땅에 피어 살고 싶었었나니
아름다운 저 하늘에 무수히 나르는
내 나라의 새들과 함께
나는 자라고 노래하고 싶었노라.
나는 그래서 더 용감히 싸웠노라. 그러다가 죽었노라.
아무도 나의 주검을 아는 이는 없으리라.
그러나 나의 조국, 나의 사랑이여!
숨지어 넘어진 내 얼굴의 땀방울을
지나가는 미풍이 이처럼 다정하게 씻어주고
저 하늘의 푸른 별들이 밤새 내 외롬을 위안
해 주지 않는가?

나는 조국의 군복을 입은 채
골짜기 풀숲에 유쾌히 쉬노라.
이제 나는 잠에 피곤한 몸을 쉬이고
저 하늘에 나르는 바람을 마시게 되었노라.
나는 자랑스런 내 어머니 조국을 위해 싸웠고
내 조국을 위해 또한 영광스리 숨지었노니
여기 내 몸 누운 곳 이름 모를 골짜기에
밤 이슬 내리는 풀숲에 나는 아무도 모르게 우는
나이팅게일의 영원한 짝이 되었노라.

바람이여! 저 이름 모를 새들이여!
그대들이 지나는 어느 길 위에서나
고생하는 내 나라의 동포를 만나거든
부디 일러 다오. 나를 위해 울지 말고 조국을
위해 울어 달라고
저 가볍게 날으는 봄나라 새여
혹시 네가 날으는 어느 창가에서
내 사랑하는 소녀를 만나거든
나를 그리워 울지 말고 거룩한 조국을 위해
울어 달라 일러다고.

조국이여! 동포여! 내 사랑하는 소녀여!
나는 그대들의 행복을 위해 간다.
내가 못 이룬 소원, 물리치지 못한 원수,
나를 위해 내 청춘을 위해 물리쳐 다오.
물러감은 비겁하다. 항복보다 노예보다 비겁하다.
둘러싼 군사가 다아 물러가도 대한민국 국군아!
너만은
이 땅에서 싸워야 이긴다. 이 땅에서 죽어야 산다.
한번 버린 조국은 다시 오지 않으리라,
다시 오지 않으리라.
보라! 폭풍이 온다. 대한민국이여!

이리와 사자 떼가 강과 산을 넘는다.
내 사랑하는 형과 아우는 서백리아 먼 길에
유랑을 떠난다.
운명이라 이 슬픔을 모른체 하려는가?
아니다. 운명이 아니다. 아니 운명이라도 좋다.
우리는 운명보다는 강하다. 강하다.

이 원수의 운명을 파괴하라. 내 친구여!
그 억센 팔 다리. 그 붉은 단군의 피와 혼,
싸울 곳에 주저말고 죽을 곳에 죽어서
숨지려는 조국의 생명을 불러 일으켜라.
조국을 위해선 이 몸이 숨길 무덤도 내 시체를 담을
작은 관도 사양하노라.

오래지 않아 거친 바람이 내 몸을 쓸어가고
저 땅의 벌레들이 내 몸을 쓸어가고
저 땅의 벌레들이 내 몸을 즐겨 뜯어가도
나는 즐거이 아들과 함께 벗이 되어 행복해질
조국을 기다리며
이 골짜기 내 나라 땅에 한 줌 흙이 되기 소원이노라.

산 옆 외따른 골짜기에
혼자 누워 있는 국군을 본다.
아무 말, 아무 움직임 없이
하늘을 향해 눈을 감은 국군을 본다.
누른 유니폼 햇빛에 반짝이는 어깨의 표지
그대는 자랑스런 대한민국의 소위였고나.
가슴에선 아직도 더운 피가 뿜어 나온다.
장미 냄새보다 더 짙은 피의 향기여!
엎드려 그 젊은 주검을 통곡하며
나는 듣노라! 그대가 주고 간 마지막 말을.



서백리아西伯利亞 : 시베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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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마 캐는 시인, 김필녀 시인의 아정농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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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 / 이성부

 


기다리지 않아도 오고

기다림마저 잃었을 때에도 너는 온다.

어디 뻘밭 구석이거나

썩은 물웅덩이 같은 데를 기웃거리다가

한눈 좀 팔고, 싸움도 한 판 하고,

지쳐 나자빠져 있다가

다급한 사연 들고 달려간 바람이

흔들어 깨우면

눈 부비며 너는 더디게 온다.

더디게 더디게 마침내 올 것이 온다.

너를 보면 눈부셔

일어나 맞이할 수가 없다.

입을 열어 외치지만 소리는 굳어

나는 아무것도 미리 알릴 수가 없다.

가까스로 두 팔을 벌려 껴안아보는

너, 먼데서 이기고 돌아온 사람아.


- 시집 우리들의 양식(민음사, 19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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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년 전 2월28일 그해 봄을 보지 못한 채 고인이 된 시인은 “잃어버린 말 잃어버린 웃음 잃어버린 날들이 많을수록 우리는 끝내 더 큰 획득에 이르지 않았더냐!”며 또 다른 시를 통해 큰 기쁨을 예견한 뒤 “이제 또 봄이다. 아픔을 나의 것으로 찾아가는 사람만이 가슴 뛰는 우리들의 봄이다. 외로움을 얻어 돌아오는 길. 더 빛나는 우리들의 봄이다”라며 봄을 찬양했다. 이제 또 봄이 와서 온전히 봄을 찬양해도 될지 확실치 않으나 여느 해 봄과는 다른 기쁨의 봄을 믿고 싶다.


 꿈은 노래되어야 하고, 정의는 반드시 실현되리라 믿으며, 승리는 머지않았다는 신념으로 줄곧 살아왔다. 98년 전 빼앗긴 봄의 3월, 사람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와 태극기 흔들며 만세를 외쳤을 때도 그러했고, 해방이후 봄이 위독한 지경에서 골골댈 때마다 민중의 노래로 봄을 흔들어 깨웠다. 봄이 짓밟힐 때면 ‘새날이 올 때까지 흔들리지 말자’며 어깨동무 하고 맹세했다. 그리하여 그 많은 기다림 끝에 봄은 기어이 오고야 말았다.

 

 먼데서 몰고 온 희망과 환희와 영광. 빙판 위 연아의 스케이트 칼날처럼 미끄러지듯 거침없이 봄이 오기도 했었다. 하지만 대체로 그저 찾아온 봄이 아니라 숱한 인내와 반드시 오리라는 믿음, 그리고 가없는 노력으로 쟁취한 봄이었다. 올 봄도 아직은 더러 쿨럭이며 재채기를 하고 있지만 이처럼 실감나는 봄은 없었다. ‘한눈 좀 팔고, 싸움도 한 판 하고, 지쳐 나자빠져 있다가’도 우리들 마음에 기가 막히게 찾아온 봄이다.


 한겨울 햇볕을 쬐지 못해 우울증에 빠진다는 북유럽 사람들처럼 지난겨울 잠시 소심하게 가라앉고 우울했던 적도 있었다. 그러나 남녘의 벙글 대로 다 벌어진 매화와 같이 봄의 순리를 거스르는 일은 없으리라. 퇴계 이황의 마지막 유언이 ‘저 매화나무에 물을 주라’였다고 한다. 물만 주면 매화나무는 어김없이 꽃을 피워 봄의 화신을 전한다. 서민의 지폐 천 원짜리엔 퇴계의 존영과 함께 도산서원의 매화나무가 그려져 있다.


 매화의 꽃말은 ‘고결한 마음, 기품, 인내’이다. 우리는 고결한 마음으로 기품을 유지했으며 저들의 망동에도 인내했다. 이제 곧 밭가는 쟁기꾼의 노래가 들판 가득 울려 퍼지리라. 복사꽃 살구꽃 핀 우리의 고향 마을마다 사랑의 눈짓들로 가득하리라. 정의와 진리가 강물처럼 흐르는 산하에 서슬 퍼런 대립과 투쟁의 깃발은 내려지고 봄볕같이 따뜻한 타협과 상생의 봄을 맞을 것이다. ‘가까스로 두 팔을 벌려 껴안아보는 너’ 사람 사는 동네로 그가 돌아오고 있다. 나긋나긋한 봄의 백성이 되어 오늘은 ‘먼데서 이기고 돌아온 사람’을 마중가자.



권순진



Tiempo De Primavera(Springtime)


출처 : 마 캐는 시인, 김필녀 시인의 아정농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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샛강에 서서/ 허정분


 

수수만년 누대를 흐른 강물에 눈이 내린다

눈보라치는 혹한 아랑곳없다는 듯

강물은 눈을 먹으며

촤르르, 촤르르, 제 몸에 죽비를 친다

분분한 눈발들이 적막에 길들여진 강기슭에

켜켜이 쌓이는 어스름 녘

가난을 제 부리에 묻힌 새 몇 마리가

직선과 곡선의 골격으로 허공을 받드는

아카시아 나무에서 졸고

자폭하듯 뛰어내리는 눈발들을 끌어안은 이 강물은

어느 산골짝 샛강 여울을 돌아 흘러

초경 터트리듯 저리 순결한 신음소리로 앓는 것일까

소리 벽을 치는 물살들로 깨어 있는

강바닥의 크고 작은 돌들이

제 몸의 무늬들을 선명히 마모시키며

둥글게 사는 법을 배워가는 이 강은

아직 강 밖 더러운 세상을 모른다

낙동강, 영산강, 금강, 남한강, 반도의 母川들을

한 물살로 수장시켜 죽이려는

운하인지 시궁창인지 그 음모를 모른다

다만 이렇게 깨어있는 정신으로

늘 새 물길로 흐르면서

주름 깊고 부드러운 어머니의 자궁 같은

큰 물길에 보태져서 그 젖줄에

삶의 호적을 둔 숱한 생들을 기르고

새파랗게 낯선 꿈을 날마다 흘려보낼 뿐이다

 

 

 

 

- 시집『울음소리가 희망이다』(고요아침,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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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정분 시인은 지하철을 그저 탈 수 있는 사회적 신분을 가진 분이다. 대뜸 나이를 들먹이는 무례를 감행한 이유는 그 나이에 제도권에서 특별히 문학공부를 한 바가 없음에도 이토록 치열한 시를 쓸 수 있다는 것이 우선 놀라웠기 때문이다. 좋은 시는 시를 쓴 사람의 신분이 베일에 가려져 있어야 한다는 말이 있다. 즉, 시를 봐가지고서는 20대가 쓴 시인지 60대가 쓴 시인지 분별이 어려워야 하고, 그 시인이 남성인지 여성인지도 아리송해야 한다는 것인데, 이 시가 꼭 그러하다.

 

세상을 살아가며 직접 보고 겪고 느낀 현상과 사물을 시인이 지닌 언어의 프리즘으로 반사하는 행위가 시를 쓰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허정분 시인이 지닌 그 프리즘의 성능은 예사롭지 않다. 시인은 1996년 등단하여 두 권의 시집을 낸 바 있고, 3년 전 세 번째 시집을 낼 때 깜냥도 안되고 자격도 미달인 내게 덜컥 시집 해설을 맡겨 곤혹스럽게 한 일이 있다. 하지만 시집 원고를 읽는 내내 그야말로 읽는 재미를 만끽했던 기억이 새롭다. 시적 역량을 오롯이 드러낸 제3시집의 시편들은 대충 훑어보고 넘길 시가 단 한 편도 없었다.

 

 

시인에게 시는 그리움과 꿈이 오롯이 담긴 생의 기도이며 처방전이다. 특히 허정분 시인 자신에겐 시가 종교이며 고독과 억압을 완화하는 상설 위로역이었다. 그리하여 시를 읽는 사람들에게까지 삶을 겸허와 공경으로 받들도록 전이시키고 있다. 그만큼 시인의 시에는 인격이 고스란히 구현되어 있어 융숭 깊은 혼이 느껴진다. 삶의 방편으로만 구실하지 않고 영육이 온전히 투신되었음을 편편에서 본다. 운명의 한 순간 혹은 영혼의 한 순간을 드러내는 시와 행간에서 시인의 밀도 높은 삶을 짐작할 수 있으며 삶에 대한 시인의 진정을 읽어낼 수 있었다.

 

 

시는 시인을 닮는다고 한다. 시품은 곧 인품에서 나온다는 말도 있다. 문단에서는 사람과 시를 별개로 취급하는 관용적 분위기가 실재하고 일정 부분 동의 못할 바도 아니지만, 미성년자 성폭행혐의 등으로 구속된 한 시인이 어린 제자에게 "사회적 금기를 넘을 줄 알아야 한다. 예전부터 금기를 넘는 건 오히려 사회지도층이었다. 너도 그런 세계로 초대해 주겠다" 이따위 궤변으로 못된 짓을 일삼은 사실 앞에서는 말문을 닫을 수밖에 없다. 사람의 등급에 따라 시의 등급도 매겨진다면 그의 시는 쓰레기인 반면에 감히 허정분의 시는 일등급이라 해도 좋으리라.

 

 

‘샛강에 서서’ 삶을 성찰하는 모습은 그에겐 일상의 포즈라 할 수 있다. 속살로 흐르는 강의 물길 위에서 자신의 존재에 대한 탐구와 삶에 대한 태도가 선명하게 읽힌다. 그리고 바탕의 정신에서 환경에 대한 염려를 들을 수 있고, 서정의 울림통 안에 담긴 세계관과 시인이 지향하는 가치도 어렴풋이 감지할 수 있었다. '이렇게 깨어있는 정신으로 늘 새 물길로 흐르면서 주름 깊고 부드러운 어머니의 자궁 같은' 시들이다. ‘순결한 신음소리’같은 울음이 희망임을 긍휼히 받아들이면서, 그 낱낱의 소망과 희망을 담은 글들이 모여 이 시집으로 묶여 나왔다. 

 

 


권순진

 

Inner Flame - Karunesh





출처 : 마 캐는 시인, 김필녀 시인의 아정농원
글쓴이 : 김필녀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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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가/ 천수호

 

이번 설에도

팔에 물집이 생겼다

달구어진 프라이팬 모서리를 스친 자국이다

명절 때마다 화상 자국이 생기는 것은

내 안의 기포들이 올라오면서

말 못할 속내를 드러내는 것이다

종가집 며느리의 고단한 기포들이

한꺼번에 끓어올라

물집을 밀어내는 거다

그 속내 드러내기 위해

화상을 입는 거라면

불은 이미 내 속에 있었던 것

그렇다면 물집은

폭발 후 떠오르는 버섯구름이다

까맣게 탄 속 긁어내어

보여주고 싶은

들끓는 몸부림이다

 

- 계간 열린시학2004년 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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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절이라고 모든 사람이 다 기꺼워하는 건 아니다. 언제나 그랬듯이 이번 설에도 귀향이 망설여지고 일가친척이 한자리에 모이는 게 달갑지 않은 사람이 있었으리라. 이런저런 이유로 물질적 심리적 부담을 느끼는 사람부터 명절증후군에 시달리는 주부에 이르기까지 그들에게 명절은 그저 난처한 상황일 따름이다. 명절이 지나고 나면 다양한 증상을 호소하며 병원을 찾는 사람이 많아진다고 한다. 이른바 명절증후군을 겪는 환자들이다. 이는 전통적인 관습과 평상시 현대적인 생활양식의 충돌로 인해 생기는 육체적, 심리적 고통이다.


 장거리 운전, 과식 과음, 가사 노동, 경제적 부담, 가족 간의 심적 갈등 등은 명절 증후군의 원인들이다. 명절을 치르면서 주부들이 가장 힘들어 하는 일이 전 부치기 같은 쪼그려 앉아서 하는 일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손목이 시큰거리고 앉았다 일어날 때면 무릎까지 뻐근하고 아프단다. 시에서처럼 프라이팬에 스치고 뜨거운 기름에 데이는 화상환자도 있다. 명절 뒤끝에 찾아오는 후유증도 있겠으나, 기억이 번뇌를 초래하여 명절만 다가오면 자신도 모르게 지난 명절에 겪었던 일들이 떠올라 걱정이 앞서 여러 스트레스 증상으로 나타난다.


 ‘고단한 기포들이 한꺼번에 끓어올라 물집을 밀어내는 거다’ 물론 이는 종가집 며느리에게만 국한된 현상은 아니다. 지금껏 많은 기혼 여성들이 겪어왔고 앓고 있는 몸살로 ‘며느리증후군’이라고도 한다. 이러한 증상은 핵가족화 된 가정의 주부들이 명절기간동안 대가족제도에 일시적으로 편입되면서 정신적·신체적 부적응에서 기인하는 스트레스이다. 명절은 온 가족이 함께 어울려 나누고 즐겨야 마땅하거늘, 며느리 된 ‘죄’로 차례음식을 도맡아 준비해야하는 까닭에 불만은 쌓여가고 달리 표현하진 못하고 안으로 삭여야만 한다는 사실에 그 화근이 잠복되어 있다.


 게다가 흩어져 있는 가족이 모이다 보니 시부모, 동서, 시누이들 간에 생기는 심리적인 갈등과 알력도 만만치 않다. 사실 여성들의 명절증후군은 육체적 노동도 큰 몫을 차지하지만, 더 큰 원인은 대부분의 남성들이 차려준 상 받아먹기만 하고 TV채널이나 돌려가면서 배부르거나 술에 취하면 드러누워 낮잠이나 자며 ‘나몰라’라 하는데 있다. 오직 여성들만 노동에 시달려야 하는 억울함이 심리적으로 압박하는데, 요즘은 이러한 현상이 점차 줄어드는 추세다. 까닥하다간 주부우울증으로 진행기도 하며 자칫 이혼을 당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종가 집 며느리의 스트레스 강도는 얼마간 편견인 것 같다. 노동량이야 일반가정보다 많겠으나 종부를 비롯한 가족구성원 모두가 가사노동 분담과 긍정적인 사고, 상호 이해와 세심한 배려, 협조가 있기에 증후군으로 번지는 사례는 극히 드물다. 내가 아는 양동 무첨당회재 이언적 종가의 종부인 신순임씨(시인이기도 한)의 경우만 보더라도 애당초 종가의 가문과 전통을 이을만한 품성과 솜씨인지를 확인하고 들여졌다고 하니 가끔 힘이 든다며 푸념을 할지언정 까맣게 탄 속 긁어내어 보여주고 싶은 들끓는 몸부림따위는 없는 것 같다.



권순진



소리길 - 김수철



 

 




출처 : 마 캐는 시인, 김필녀 시인의 아정농원
글쓴이 : 김필녀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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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문화일보 신춘문예 詩 당선작


    ▲ 일러스트 = 송재우 기자



    목판화 / 진창윤


    목판 위에 칼을 대면

    마을에 눈 내리는 소리가 들린다

    골목 안쪽으로 흘러들어 고이는 풍경들은 늘 배경이다

    늦은 밤 집으로 돌아오는 여자의  

    문 따는 소리를 들으려면 손목에 힘을 빼야 한다  

    칼은 골목을 따라 가로등을 세우고 지붕 위에 기와를 덮고  

    용마루 위의 길고양이 걸음을 붙들고  

    담장에 막혀 크는 감나무의 가지를 펼쳐준다 

    나는 여자의 발소리와 아이의  

    소리 없는 울음을 나무에 새겨 넣기 위해 

    밤이 골목 끝에서 떼쓰며 우는 것도 잊어야 한다 

    불 꺼진 문틈으로 냄비 타는 냄새가 새어나오더라도 

    칼을 놓지 않아야 한다, 그쯤 되면  

    밤 열두 시의 종소리도 새겨 넣을 수 있을 것이다 

    삶의 여백은 언제나 좁아서  

    칼이 지나간 움푹 팬 자리는 서럽고 아프다 

    지붕 위로 어두운 윤곽이 드러나면 드문드문 송곳을 찍어 

    마치 박다 만 못 자국처럼 별을 새겨 넣는다

    드디어 깜깜한 하늘에 귀가 없는 별이 뜬다

    여자는 퉁퉁 불은 이불을 아이의 턱밑까지 덮어주었다

    내 칼이 닿지 않는 곳마다 눈이 내리고 있다



[당선소감] 그냥 습관처럼 詩쓰며 무지렁이처럼 살 터


영상의 시대, 예술의 죽음을 선언한 시대, 문자의 힘으로 이룰 수 있는 것이 있다고 믿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것은 기도라고, 가려움에 견딜 수 없어 토하고 마는 어떤 묵상이라고 믿으며, 자꾸만 녹아 들어가는 빙산 위에 허수아비처럼 서 있는 한 사람이 있습니다.

기형도 때문이었습니다. 2년 정도를 아무것도 안 하고 시만 읽고 시만 썼습니다. 아니 시 흉내를 냈습니다. 색이 다른 단어가 만나는 경계에서 출렁거리는 낯선 감흥. 그 맛깔나는 단어들을 찾아 문장 속을 헤엄치다가 잠들다가 했습니다. 누군가는 말했습니다. 좀 더 간절해야 한다고, 좀 더 절박해야 한다고…상식이 통하지 않는 세상에서, 소설보다 더 소설 같은 일들이 일상이 되어버린 세상에서, 동화적 상상력으로 세상을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 어쩌면 무모한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잠깐 스쳤을 뿐인데, 뭐가 묻어난다는 말을 듣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자연에 대하여, 자신에 대하여 질문하며 살아가겠습니다. 어떡하면 지루한 얘기를 지루하지 않게 말할까 고민하겠습니다.

이제 돌아오지 못할 길에 들어섰습니다, 속절없이 주어진 시간을 무모하게 써 내려 가겠습니다. 부질없음을 탓하지 않고, 그냥 습관처럼 하던 일을 계속하며 무지렁이처럼 살아보겠다고 다짐해 봅니다, 거울 속의 나를 몰라보고 그냥 웃습니다. 들어가는 문은 있으나 나가는 문은 없습니다.

서툴기 짝이 없는 저를 뽑아주신 심사위원님들께 감사드립니다. 또한, 우석대 문창과 선생님들께 감사드립니다. 독하게 살겠습니다.

약력 △1965년 전북 군산 출생 △우석대 대학원 문예창작과 졸업 예정


[심사평] 조각 칼끝 따라 삶의 고단함 담아내… 詩的 형성력 완성



▲ 2017 문화일보 신춘문예 시 분야 본심위원인 황동규(오른쪽) 시인과 정호승 시인이 본심 대상작에 대한 의견을 나누고 있다.

/ 김동훈 기자


“언어를 다루는 말솜씨는 있다. 말들을 재미나게 쓰기는 썼다. 그래서 내용이 불확실하지만 싱겁지는 않다. 그렇지만 도대체 무슨

얘기를 하는지는 알 수 있어야 할 거 아니냐.”

“말재주만 가지고 시를 너무 쉽게 쓴다. 그런데 삶을 구체적으로 형상화시키지 않아서 말의 유희만 느껴진다. 전체적으로 무슨

이야기인지 모르겠다.”

이는 본심 심사 과정에서 심사위원들이 나눈 대화의 한 부분이다. 이 대화 속에 오늘날 신춘문예 투고 시의 문제점이 깊게 드러나

있다.

가능한 한 위의 문제점을 불식시킬 수 있는 작품을 고른 끝에 진창윤의 ‘목판화’, 고은진주의 ‘장어는 지글지글 속에 산다’, 이언주의 ‘사과를 깎다가’ 등 3편이 최종심에 올랐다.

‘장어는 지글지글 속에 산다’는 장어를 잡아 생계를 잇는 한 가족의 가난하지만 따뜻한 풍경이 그려져 있으나 시적 응집력이 약하고 산만하다는 결점이 두드러졌다.

‘사과를 깎다가’는 “사과를 깎다보면/ 툭, 껍질이 끊어지는 소리/ 꼭 눈길을 걷던 당신이/ 뒤를 돌아볼 것 같아” 등 서정적 개성이

두드러진 부분이 있으나 전체적으로 단순한 소품에 머무르고 있다는 점이 단점이었다.

‘목판화’는 ‘시로 쓴 목판화’의 구체적 풍경을 통해 시적 형성력을 완성시키고 있다는 점에서 우선 호감이 갔다.

목판을 깎는 조각도의 칼끝을 따라 눈 내리는 겨울밤 골목을 배경으로 삶의 고단한 한순간이 진솔하고 과장됨 없이 그려져 있다.

“불 꺼진 문틈으로 냄비 타는 냄새가 새어나오더라도/ 칼을 놓지 않아야 한다, 그쯤 되면/ 밤 열두 시의 종소리도 새겨 넣을 수 있을 것이다”라든가, “지붕 위로 어두운 윤곽이 드러나면 드문드문 송곳을 찍어/ 마치 박다 만 못 자국처럼 별을 새겨 넣는다” 등에서 알 수 있듯이 삶과 시가 유리되지 않고 일체화되어 있는 점에서 당선작으로 선정하게 되었다.

자폐적 언어의 유희화가 왜곡된 대세를 이루고 있는 오늘의 한국 시단에서 이러한 구체적 형성력의 높이를 지닌 시를 만난 것은 큰

기쁨이다.

심사위원 황동규·정호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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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마 캐는 시인, 김필녀 시인의 아정농원
글쓴이 : 김필녀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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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詩 당선작

 

 

손의 에세이 / 김기형



손을 안심시키기 위해서, 굿모닝 굿모닝



손에게 손을주거나 다른 것을 주지 말아야 한다


손을 없게 하자


침묵의 완전한 몸을 세우기 위해서 어느 순간 손을 높이,


높이 던지겠다



손이 손이 아닌 채로 돌아와 주면 좋을 일


손이 손이 아닌 것으로 나타나면 좋을 것이다 굿모닝 굿모닝



각오가 필요하다 '나에게 손이 필요 없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일종의



나는 아직 손을 예찬하고 나는 아직도 손을 사랑하고 있다 손의 지시와 손의 의지에
의존하여 손과 함께 가고 있다 손과 함께 머문 곳이 많다 사실이다 나는 손을 포기
하지 못하였다'제발 손이여' 라고 부르고 있다 '제발 손이여 너의 감각을 내게 다오,
너의 중간과 끝, 뭉뚝한 말들을 나에게 소리치게 해다오' 라고 외친다 손이 더 빠르게
가서 말할 때, 나는 손에게 경배하는 것이다



손의 탈출은 없다



다만 손들이 떨어진 골목을 찾고 있다


해안가에 앉아 손도 없고 목도 없는 생물들에게서 그들의 뱃가죽을 보면서 골목을 뒤진다


손의 이야기는 끝이 나지 않는다 손은 쉬지 않는다 손이 멈추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
손은 자신이 팔딱거리는 물고기 보다 훨씬 더 생동하고 멀리간다는 것을 증명하려고 한다



손이 말하는 불필요, 손이 가지려 하지 않는 얼굴



손은 얼굴을 때린다 친다 부순다 허물기 위하여 진흙을 바른다 손은 으깰 수 있다 손은
먼 곳으로 던질 힘이 있다 손이 손을 부른다 손이 나타나면 눈을 뜨고 있던 얼굴들이 모두
눈을 감고 손에게 고분하다 손에게 말하지 않고 손의 이야기를 기다린다 손은 다른 침묵을 가진다


손의 얼개가 거미줄 처럼


거미줄과 거미줄 그리고 또 그런 거미줄이 모여든 것처럼 내빼지 못할 통로를 연다


손 사이에서 망각한다 손 안에서 정신을 잃는다 손의 춤을 본다 그 춤을 보면서 죽어갈 것이다


스러져가는 얼굴들이 감기는 눈을 어쩌지 못한다 나는 손에게 조각이 난다


손을 감출 수 있도록 도와 달라고 울었지만 동그랗게 몸을 만 손이 어떤 불을 피우는지,

무엇을 터트리려고 굳세어지는지


이 공포 속에서 손에 대한 복종으로 계속 심장이 뛴다고 말한다



손을 놓고 가만히



탁자 앞으로 돌아온다 손이 응시한다 손이 그대로 있겠다고 한다


손이 뒤를 본다


손을 뗀다 반짝하고 떨어진다




[당선 소감] 

 

김기형 씨

 

유일한 것이 있다고 믿지 말았어야 했는데, 그런 것은 꼭 아픈 몸으로 나타나 사라지거나 반대 방향으로 달아나곤 했습니다. 그리고 허물지 못할 믿음, 시가 저와 있습니다. 제게 닿아있는 시는 저를 빈 방에 두는 손과 같습니다. 보이지 않는 것과 침묵에 대해서 얼마나 머물러 살아야 하는 것일지, 빈 몸을 생각합니다. 제가 가진 시선은 매우 조그마한 것들에 있어서 불온한 것들을 향해 마음이 늘 쓰였습니다.

마주하고 있는 것을, 손 위에 오른 것을, 모를 곳에서 날아온 날짐승의 몸을, 빛이 쏘고 떠난 빈 뜰을 불러들이고 싶습니다. 우리가 희미하지만 함께 있다는 사실을 시가 알려줄 것이라, 작게 열린 길을 더듬어 갑니다.

살아온 것이 놀라워서 오늘도 고요히, 하나님께 온 마음으로 감사합니다. 머물고 있는 것이 평안인지 신의 부재인지 가늠하기 어려웠던 저에게, 부드러운 손이 내려와 어딘가를 쓸고 갔다는 느낌으로 앉아 있습니다. 오늘의 저는 기쁘고 또 기쁩니다.  

사랑이 넘치는, 존경하는 엄마 아빠, 항상 고맙고 미안한 언니, 반짝이는 조카 민유와 오빠, 새언니, 제가 가진 것이 무엇일까요. 무엇이든 한아름 안겨주고 싶어요. 나와 닮은 친구, 은영 언니, 해선, 희연, 선정, 골목길을 돌며 만날 때마다 큰 위로를 얻어요. 고마워요.  

나의 아름다운 김행숙 시인, 투명해서 바람결에 만나보는 이원 시인, 나의 선생님들.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목소리가 식지 않도록 오늘도 자꾸, 계속해서 쓰겠습니다. 새로운 호명이 되겠습니다. 심사위원 선생님들께 마음 깊이 감사드립니다.  

 △1982년 서울 출생 △강남대 국문과 졸업 △건국대 국어교육과 석사
  

황현산 씨(왼쪽)와 김혜순 씨.



[심사평]  ▼ 손을 매개로 한 전개 ‘시적 사유’ 확장 돋보여 ▼ 
  
예심에 의해 선택된 작품들 중 5명의 시를 집중 검토했다. ‘아마이드 밤 골목’ 등 5편의 시는 작은 행위들을 모아 하나의 이국적이고 신화적인 공간을 축조해가는 시들이 재미있었다. 하지만 문장들을 주어, 서술어만으로 짧게 분절하자 오히려 행위들이 표현되지 않고 설명되는 것처럼 느껴졌다. 

‘부재의 형태’ 등 5편의 시는 같은 제목의 시를 쓴 그리스 시인 야니스 리초스와는 달리 사다리를 오르는 동작과 묘사를 통해 시공간의 안팎에서 부재의 형태를 발견해 나가는 시적 전개가 있었다. 그러나 같이 응모한 다른 시들의 긴장감이 떨어졌다.  

‘여름 자매’ 등 5편의 시는 소꿉놀이, 유년기의 자매애 같은 이야기들이 스며들어 있는 환한 시들이었다. 마치 ‘우리가 싫어하는 것들은 깊이 묻어 버린’ 세계, ‘계속해서 실종되는’ 세계를 불러오는 듯했지만 시적 국면이 조금 단순했다.

‘창문’ 등 5편의 시는 얼핏 보면 내부의 어둠, 검정을 성찰하는 시처럼 보이지만, 사실 이분법으로 나누어진 것들을 뭉개는 도형을 시가 그리려 한다고 느껴졌다.

응모된 시들이 고루 안정적이고, 스스로 발명한 문장들이 빛났다. ‘손의 에세이’ 등 5편의 시는 우선 다면적으로 시적 사유를 개진하는 힘이 있었다. 이를테면 손에 대해 생각하면서도, 손을 없애 보고, 손과 함께 머문 곳을 생각하고, 얼굴을 없앨 수 있는 손을 그려내고, 손의 얼개를 떠올리고, 손에 의해 부서지면서 손의 통치를 생각해 보는 전개가 돋보였다. 작은 지점들을 통과해 나가면서 큰 무늬를 그려내는 확장이 좋았다. 최종적으로 ‘창문’과 ‘손의 에세이’ 중에서 ‘손의 에세이’를 당선작으로 선했다. 
   
황현산 문학평론가·김혜순 시인(서울예대 문예창작과 교수)



 

 

 

출처 : 마 캐는 시인, 김필녀 시인의 아정농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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