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호흡 / 문태준

 

꽃이 피고 지는 그 사이를

한 호흡이라 부르자

제 몸을 울려 꽃을 피우고

피어난 꽃은 한 번 더 울려

꽃잎을 떨어뜨려 버리는 그 사이를

한 호흡이라 부르자

꽃나무에게도 뻘처럼 펼쳐진 허파가 있어

썰물이 왔다가 가버리는 한 호흡

바람에 차르르 키를 한 번 흔들어 보이는 한 호흡

예순 갑자를 돌아나온 아버지처럼

그 홍역 같은 삶을 한 호흡이라 부르자.

 

- 시집『맨발』(창비,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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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장 짧은 시간의 단위를 일상에서는 ‘순간’ 혹은 ‘찰나’라고 말한다. 순간은 ‘순식간’의 준말로 ‘눈 깜짝 할 사이’와 같은 의미로 이해되지만, '순식'은 그저 막연히 짧은 정도가 아니라 구체적인 수치단위이기도 하다. 그리고 '찰나'는 '순식'보다 100배나 더 짧은 시간의 단위를 의미한다. 과거 대구세계육상대회에서 우사인 볼트가 인간의 반응속도를 넘어선 0.1초 내 부정출발로 인한 실격은 그야말로 찰나의 충격이라 할만하다. 이런 순간이나 찰나에 비해 숨 한번 들이쉬는 사이 ‘한 호흡’의 구간은 얼마나 느긋한 시간인가. ‘꽃이 피고 지는 그 사이를 한 호흡이라’ 부른다 해도 동의할만하다.

 

 ‘썰물이 왔다가 가버리는’ 사이, 계절이 오고 가는 사이, 우리 인생에서 한 매듭을 짓고 다시 한숨 돌리는 사이를 모두 한 호흡이라 해도 되겠다. 순간이나 찰나보다는 조금 길게 숨 한번 크게 쉬는 사이 돈도 권세도 사랑도 영화도 단 한번 왔다가지 않는가. 한 호흡지간에 꽃 피고 지듯 사람도 피었다 지리. 그 사이 내 눈앞의 삼라만상이 모두 들고나는 사이, 애면글면 그대와 만났다 헤어지는 사이, 한해가 시작되고 끝나는 사이, 순환되는 우주원리 속에서 그야말로 한 호흡 들이마시고 내쉬는 동안이 우리의 삶이거늘. 날마다 알람시계에 맞춰 허겁지겁 눈비비고 일어나 잠들 때까지 시간의 노예로 살 것인가.

 

 시간에는 두 종류가 있다. 세슘원자의 92억 번 진동을 1초로 정한 객관화된 양적 시간인 ‘크로노스’와 질적이고 주체적인 시간을 뜻하는 ‘카이로스’가 있다. 크로노스는 가만있어도 똑딱 똑딱 흘러가지만 카이로스는 염원과 갈망에 의해 흘러간다. 즉 카이로스는 자신의 존재의미를 느끼는 상대적인 시간이다. 나이 들수록 관성과 타성으로 점점 매사가 시들해지면서 크로노스의 시간만으로 살지는 않는지. 그래서 옛날이 더 그립다며 ‘응답하라’며 복고에 기대어 카이로스에의 귀향을 꿈꾸는 건 아닌지. 물론 그렇다고 수구를 지지할리야 있을까만 자칫 정신이 혼미해진다면 존재의 의미를 느끼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럴 때 하늘 한번 보고 작은 숨 한번 쉬는 여유의 시간은 얼마나 소중한가, 하늘에는 왜 별들이 반짝거리는지, 바람은 어디서 불어오는지, 삶이 한철이라면 나는 왜 하필 이곳으로 와서 이렇게 머물다 가는지를 한 호흡의 구간에서 묵상한다. 사람의 육체는 풀과 같아서 금방 시들어 가는데 그 극복을 위해서는 늘 자신을 성찰하며 카이로스의 시간을 사는 수밖에. 카이로스는 더불어 사는 삶과의 관계로 연대성 안에 있는 시간이다. ‘예순 갑자를 돌아나온 아버지처럼’ 그 진창의 홍역 같은 삶을 다 건너 한 호흡 밖의 여분으로 사는 세상이란 또 얼마나 여유로운가. 다시 한 호흡 사이에 매운 칼바람이 불어와도 찡그리지 말 일이다.

 

 

권순진

 

 

 

출처 : 詩하늘 통신
글쓴이 : 제4막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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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남철/ 신영복

 

북극을 가리키는 지남철은 무엇이 두려운지
항상 그 바늘 끝을 떨고 있다.
여윈 바늘 끝이 떨고 있는 한 그 지남철은...
자기에게 지니워진 사명을 완수하려는 의사를
잊지 않고 있음이 분명하며
바늘이 가리키는 방향을 믿어도 좋다.
만일 그 바늘 끝이 불안스러워 보이는 전율을 멈추고
어느 한쪽에 고정될 때
우리는 그것을 버려야 한다.
이미 지남철이 아니기 때문이다.

 

- 신영복 『담론』(돌베개, 2015)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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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8년 통혁당 사건에 연루된 서울대 경제과 출신 27세의 대학 강사가 무기징역형을 선고받고 20년 간 감옥을 살고 나와서 옥중 서신을 모아 출간한 책이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이다. 이후 조용하면서도 견고한 정신세계로 다시 우리를 이끈 책이 <처음처럼>이며, 지난해 '마지막 강의'라는 부제로 펴낸 책이 <담론>이다. "처음으로 하늘을 만나는 어린 새처럼/ 처음으로 땅을 밟고 일어서는 새싹처럼/ 우리는 하루가 저무는 저녁 무렵에도/ 아침처럼/ 새봄처럼/ 처음처럼/ 다시 새날을 시작하고 있다." 이 시대 삶의 지침으로 자리매김한 '처음처럼'은 소주의 로고체로도 사용되어 이른바 ‘신영복체’ ‘어깨동무체’ 등으로 불렸다. 선생 특유의 따뜻한 인생관과 세계관이 묻어나는 글을 읽다보면 문장의 길이에 상관없이 긴 여운을 남기는 구절을 자주 만난다. 그래서 봤던 것을 가끔 다시 들추어 읽을 정도로 선생의 글을 좋아했고 선생을 존경해왔다.

 

  그런 선생께서 지난밤 10시 경 세상을 떠나셨다는 부음을 들었다. 2014년 희귀 피부암 진단을 받고 투병 중에 암이 다른 장기로 전이되면서 끝내 숨을 거두었다고 한다. 삶에 대한 사색, 생명에 대한 외경, 함께 사는 삶, 성찰과 희망에 대한 여러 글들이 깊은 가슴 속에서 일제히 전률하는 느낌이다. 살다보면 숱한 난관과 부딪히고 그때마다 초심을 잃지 않기 위해 '수많은 처음'을 만들어내면서 마음을 굳세게 하는데, 선생이 우리에게 들려준 일관된 주제가 바로 역경을 견디는 자세였다. "산다는 것은 수많은 처음을 만들어가는 끊임없는 시작"이라는 구절과 함께 <담론>가운데 한 대목인 '떨리는 지남철'에 관한 이야기가 가슴에 박힌다. 수많은 처음이란 결국 끊임없는 성찰이며, 날마다 갱신하는 삶을 살아가라는 뜻이리라. 양심과 각성을 함의한 '나침반의 바늘이 흔들리는 한 그 나침반은 틀리는 일이 없다'란 말은 원래 아라비아의 경구라고 한다.

 

  선생은 "지남철의 여윈 바늘 끝처럼 불안하게 전율하고 있어야 하는 존재가 지식인의 초상"이라고 했다. 어느 한쪽에 고정되면 이미 지남철이 아니며 참다운 지식인이 못 된다는 것이다. 지금이 어느 때보다 '사표로서의 지식인상이 절실히 요구되는 상황'이며, 지식인의 가장 중요한 품성은 단연 '양심'이라고 말했다. 양심은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인간학일 뿐 아니라 그 시대와 사회를 아울러 포용하는 세계관이며 관계를 조직하는 장이기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양심은 이처럼 인간과 세계를 아우르는 최고 형태의 관계론이면서 동시에 그것은 가장 연약한 심정에 뿌리 내리고 있는 지극히 인간적인 품성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집단적 지성'을 강조하면서 '일몰에서 일출을 읽을 수 있는 열린 정신이 바로 지식인의 참된 자세'라고 했다. 선생의 지혜에 많은 빚을 지고 있으면서도 우리는 아직 시대의 일출을 맞이하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선생의 타계가 더욱 마음을 무겁게 한다. 하지만 사람들의 가슴마다 '사표로서의 지식인상'으로 오래오래 기억될 것이다. 신영복 선생의 명복을 빈다.

 

 

권순진


Nearer My God To Thee

 

詩論, 입맞춤 / 이화은

 

 

여자는 키스할 때마다 그것이 이 生의 마지막 입맞춤인 듯

눈을 꼭 감고, 애인의 입 속으로 죽음처럼 미끄러져 들어간다는데

 

남자는 군데군데 눈을 떠

속눈썹의 떨림이며 흘러내린 머리카락이며

풍경의 변화와 춤추는 체온의 곡선까지 꼼꼼히 체크한다고 하니

 

누가 시인일까

 

독자는 여자 편에 설 것이고

시인은 당연히 남자 편에 설 것이다

몰입의 바닥에는 시가 없다

불타는 장작을 뒤집어 불길의 이면을 읽어야 하는 남자여

불쌍한 시인이여

 

키스가 끝날 때까지 한 번도 눈을 뜨지 않은 시인이거든

그대 당장 독자의 자리로 옮겨 앉아야 하리

그러나 시인의 발바닥은 완전 연소의 재 한 줌도 함부로 밟지 않는다

 

- 시집『미간』(문학수첩,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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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인슈타인은 키스에 관한 두 가지 명언을 남겼다. 좀 더 쉽게 ‘상대성 이론’을 설명해줄 것을 요구한 학생에게 그는 “사랑하는 여인과 키스를 하면 3분도 3초처럼 짧게 느껴지지만, 난로 위에 손을 얹어 놓으면 3초도 3분처럼 길다”라며 시간의 상대성을 말했다. 또 하나, 키스를 하며 운전하는 연인을 본 아인슈타인이 혀를 차며 “예쁜 여성과 키스를 하면서 안전하게 운전하는 것은 키스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고 한 말이다. 서로의 애정을 표현하며 최상의 느낌을 교감하는 짜릿한 순간에 몰입하지 않고 주의를 분산시키는 건 키스에 대한 모독이란 것이다.

 

 남자는 그 모독적인 행동을 서슴없이 저지른다. 눈을 뜨고 키스하면 초점이 잘 맞지 않음에도 여자가 자신의 키스에 만족하는지 굳이 알고 싶어 치사하게 한쪽 눈을 살짝 뜬다든가, 본 게임에 앞선 예비단계 쯤으로 인식하기 때문에 키스할 때 두 눈을 빤히 뜨고 껌뻑거리는 남성들이 적지 않다. 당연히 키스의 질은 여성에 비해 떨어질 수밖에 없다. 그런 키스가 ‘이 生의 마지막 입맞춤인 듯 눈을 꼭 감고, 애인의 입 속으로 죽음처럼 미끄러져 들어’가는 여자의 키스와 어찌 같으랴.

 

 그런데 맥박이 빨라지며 혈압은 오르고, 췌장에서 인슐린이 분비되며 부신은 아드레날린을 배출하는 강열한 화학반응을 실눈 뜨고 확인하는 남자의 치사한 짓거리가 ‘시론’에 비유되다니. 시가 무슨 캐미 실험의 연구 대상이란 말인가. 아니지만 종종 끈질긴 추적에서 시가 생성되기도 하며, 구체적인 곳에서부터 바짝 당겨 붙드는 흔적이 필요하긴 하다. <뼛속까지 내려가서 써라>의 저자 나탈리 골드버그는 ‘시는 삶의 현장인 동시에 꿈의 현실이고, 예술인 동시에 현실’이라면서 ‘두려움이나 벌거벗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도 무조건 더 깊이 뛰어들라’고 했다.

 

 그 에너지를 시각화시키는 것이 시라면, 키스할 때 ‘몰입의 바닥’에 빠지지 않고, ‘불타는 장작을 뒤집어 불길의 이면을 읽어야 하는’ 남자는 ‘불쌍한 시인’에 견줄 만하다. 만약 '키스가 끝날 때까지 한 번도 눈을 뜨지 않은 시인이거든' '독자의 자리로 옮겨 앉아야 하리' 절경은 시가 되지 않듯 황홀경에선 시가 필요치 않는 것도 사실이다. 그것에 탄복하고 빠져들기 보다는 르포기자처럼 타버린 재까지 들쑤시는 존재가 시인이다. 생활 속의 자아 말고 취장 언저리에 예술적 자아를 하나 더 키우라는 주문이다. 그러나 ‘시인의 발바닥은 완전 연소의 재 한 줌도 함부로 밟지 않는다.’는 점도 명심해 주기를.

 

 

권순진

 

 

Kiss Of A Fairy - Bandari

 

 

 

막스 에르만의 잠언시

 

 세상의 소란함과 서두름 속에서 너의 평온을 잃지 말라. 침묵 속에 어떤 평화가 있는지 기억하라. 너 자신을 포기하지 않고서도 가능한 한 모든 사람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라. 네가 알고 있는 진리를 조용히 그리고 분명하게 말하라. 다른 사람의 얘기가 지루하고 무지한 것일지라도 그것을 들어주라. 그들 역시 자신들만의 이야기를 가지고 있으므로. 소란하고 공격적인 사람을 피하라. 그들은 정신에 방해가 될 뿐이니까. 만일 너 자신을 남과 비교한다면 너는 무의미하고 괴로운 인생을 살 것이다. 세상에는 너보다 낫고 너보다 못한 사람들이 언제나 있기 마련이니까.

 

 네가 세운 계획뿐만 아니라 네가 하는 일이 아무리 보잘 것 없는 것일지라도 그 일에 열정을 쏟으라. 변화하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 그것이 진정한 재산이므로. 세상의 속임수에 조심하되 그것이 너를 장님으로 만들어 무엇이 덕인가를 못 보게 하지는 말라. 많은 사람들이 높은 이상을 위해 노력하고 있고 모든 곳에서 삶은 영웅주의로 가득하다. 하지만 너는 너 자신이 되도록 힘쓰라. 갑작스런 불행에 자신을 지킬 수 있도록 정신의 힘을 키우라. 하지만 상상의 고통들로 너 자신을 고통스럽게 하지는 말라.

 

 두려움은 피로와 외로움 속에서 나온다. 건강에 조심하되 무엇보다 너 자신을 괴롭히지 말라. 너는 우주의 자식이다. 그 점에선 나무와 별들과 다르지 않다. 넌 이곳에 있을 권리가 있다. 너의 일과 계획이 무엇일지라도 인생의 소란함과 혼란스러움 속에서 너의 영혼을 평화롭게 유지하라. 부끄럽고, 힘들고, 깨어진 꿈들 속에서도 아직 아름다운 세상이다. 즐겁게 살라. 행복하려고 노력하라. 특히 사랑을 꾸미지 말고 사랑에 냉소적이지도 말라. 왜냐하면 모든 무미건조하고 덧없는 것들 속에서 사랑은 풀잎처럼 영원한 것이니까.

 

- 막스 에르만 문집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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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느 하나 허투루 들을 수 없는 양식의 말씀인 이 잠언시는 1692년 볼티모어의 성 베드로 성당 생활규칙이 되었다. '즐겁게 살라. 행복하려고 노력하라'는 싱거운 듯한 이 말은 너무나 분명한 삶의 요체이다. 체스터 톤은 말했다. “행복을 찾아 나선 사람들이 그리는 행복은 모두 단순소박하다. 복잡한 무엇을 얻으려 애쓰는 것 같지만 단순함을 열망하며, 왕이 되려 하지만 사실은 목동을 꿈꾸고 있다.”

 

 최인훈은 소설 '광장' 서문에서 “광장은 대중의 밀실이며 밀실은 개인의 광장이다”라고 했다. 사람은 광장에 나서지 않고는 삶을 지탱하지 못하며, 동시에 밀실로 물러서지 않고서도 살아가지 못한다. 이 잠언시는 밀실의 소중함을 일깨우는 조언으로 가득하다. 밀실을 방치하지 않고 잘 가꾸는 것은 광장에서의 균형 잡힌 삶과 소통을 위해서도 중요하다. 남에게 그럴 듯하게 보이기보다는 스스로의 정신이 너덜거리지 않도록 신경 쓸 일이다.  

 

 사랑과 평화가 강물처럼 흐르는 세상을 꿈꾼다면, 많이 배웠고 가졌고 잘 났고 그래서 누리는 자가 좀 더 겸손해져야하리라. 반면에 가진 것이 적고 누리는 몫이 적을지라도 비굴하지 않고 당당해져야겠다. 자연스럽게 그런 풍토가 조성된다면 더 없이 바람직하겠지만 그 정신적 인프라 구축을 위해 무엇보다 국가의 역할이 중요한 것이다. 겸손과 당당은 남루한 밀실에서는 불가능한 덕목이며, 뻔뻔스러운 광장에서는 유통이 어렵다.

 

 인생의 소란과 혼란 속에서 영혼을 평화롭게 유지하고 정신의 힘을 키우기 위해 사색과 독서가 필요하다. 예술과 문학을 이해하려는 노력도 중요하다. ‘부끄럽고, 힘들고, 깨어진 꿈들 속에서도 아직 아름다운 세상’이지만 거미줄 창연한 밀실에서의 삶은 늘 패색이 짙을 수밖에 없다. 우리는 원하는 만큼 행복하며, 자신에게 허락하는 만큼 행복하다. 별은 쳐다봐 주지 않으면 반짝이려하지 않는다. 종은 누가 울리기 전에는 종이 아니며, 노래도 누군가 불러주어야 노래가 된다. 사랑과 평화도 열정이 옮겨붙기 전엔 죽도 밥도 아니리라.

 

  

권순진

 

May it be- Enya

 

                13세기 중엽의 석조 작품. 1763년에 부분적인 파손을 입은 것으로 사르트르 대성당 지하 납골소에 있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아기 예수 나심 / 박두진(1916-1998)

     오늘도 아기는 오시네
     눈이 내리는 마을에 오시네.

     우리들 오늘 누구나
     스스로의 삶의 의미 스스로가 모르는
     흔들리는 믿음과 불확실한 소망
     사람이 그 말씀대로
     사랑할 줄 모름으로 불행한 이 시대
     어둡고 외로운 쓸쓸한 영혼을 위해서 오시네.

     오늘도 아기는 오시네
     눈이 내리는 마을에 오시네.

     우리들 오늘 이 세계
     눌린 자와 갇힌 자
     빈곤과 질병과 무지에 시달리는 자
     심령이 가난하고 애통하는 자
     진리와 그 의를 위해 피 흘리는 자
     마음이 청결하고 화평케 하는 자를 위해 오시네.

     오늘도 아기는 오시네
     눈이 내리는 마을에 오시네.

     그 십자가
     우릴 위해 못 박히신 나무틀의 고난
     사랑이신 피 흘림의 영원하신 승리
     죽음의 그 심연에서 부활하신 승리
     성자 예수 그리스도 우리들의 구세주
     베들레헴 말구유에 오늘 오시네.

 

    

 

 

 

        소원시(所願詩) / 이어령(李御寧) 벼랑 끝에서 새해를 맞습니다 덕담 대신 날개를 주소서 어떻게 여기까지 온 사람들입니까 험난한 기아의 고개에서도 부모의 손을 뿌리친 적 없고 아무리 위험한 전란의 들판이라도 등에 업은 자식을 내려놓지 않았습니다 남들이 앉아 있을 때 걷고 그들이 걸으면 우리는 뛰었습니다 숨 가쁘게 달려와 이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 눈앞인데 그냥 추락할 수는 없습니다 벼랑인 줄도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어쩌다가 '북한이 핵을 만들어도 놀라지 않고 수출액이 5000억 달러를 넘어서도 웃지 않는 사람들이 되었습니까 거짓 선지자들을 믿은 죄입니까? 남의 눈치 보다 길을 잘못 든 탓입니까 정치의 기둥이 조금만 더 기울어도 시장경제의 지붕에 구멍 하나만 더 나도 법과 안보의 울타리보다 겁 없는 자들의 키가 한 치만 더 높아져도 그때는 천인단애의 나락입니다 비상(非常)은 비상(飛翔)이기도 합니다 싸움밖에 모르는 정치인들에게는 비둘기의 날개를 주시고 살기에 지친 서민에게는 독수리의 날개를 주십시오 주눅 들린 기업인들에게는 갈매기의 비행을 가르쳐 주시고 진흙 바닥의 지식인들에게는 구름보다 높이 나는 종달새의 날개를 보여 주소서 날게 하소서 뒤처진 자에게는 제비의 날개를 설빔을 입지못한 사람에게는 공작의 날개를 홀로 사는 노인에게는 학(鶴)과 같은 날개를 주소서 그리고 남남처럼 되어 가는 가족에는 원앙새의 깃털을 내려 주소서 이 사회가 갈등으로 더 이상 찢기기 전에 기러기처럼 나는 법을 가르쳐 주소서 소리를 내어 서로 격려하고 선두의 자리를 바꾸어 가며 대열을 이끌어 간다는 저 신비한 기러기처럼 우리 모두를 날게 하소서

 

하늘에 쓰네/ 고정희

 

그대 보지 않아도 나 그대 곁에 있다고

하늘에 쓰네

그대 오지 않아도 나 그대 속에 산다고

하늘에 쓰네

 

내 먼저 그대를 사랑함은

더 나중의 기쁨을 알고 있기 때문이며

내 나중까지 그대를 사랑함은

그대보다 더 먼저 즐거움의 싹을 땄기 때문이리니

 

가슴속 천봉에 눈물 젖는 사람이여

억조창생 물굽이에 달뜨는 사람이여

끝남이 없으니 시작도 없는 곳

시작이 없으니 멈춤 또한 없는 곳

 

수련꽃만 희게 희게 흔들리는 연못가에

오늘은 봉래산 학수레 날아와

하늘 난간에 적상포 걸어놓고

 

달나라 광한전 죽지사 열두 대의 비파에 실으니

천산의 매화향이 이와 같으랴

수묵색 그리움 만리를 적시도다

만리에 서린 사랑 오악을 감싸도다

 

그대 보지 않아도 나 그대 곁에 있다고

동트는 하늘에 쓰네

그대 오지 않아도 나 그대 속에 산다고

해지는 하늘에 쓰네

 

- 시집 『아름다운 사람하나』(푸른숲, 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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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을 하면 상대도 내만큼 나를 사랑할까? 애달아하고 확인하고픈 마음이 드는 것은 인지상정이다. 그런데 ‘그대 보지 않아도 그대 곁에 있다고’ ‘그대 오지 않아도 그대 속에 산다고’하니 이 무슨 거룩하고 초월적인 사랑인가. 더구나 세상사람 다 올려다보는 ‘동트는 하늘’과 ‘해지는 하늘’에다 대자보로 쓰다니 그밖에 다른 시선이나 소문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겠다는 태도이다. 저 혼신의 사랑과 믿음은 다짐이고 맹세이면서 어떠한 경우에도 흔들리지 않겠다는 의지적 표현이다. '가슴속 천봉에 눈물 젖'고 '억조창생 물굽이에 달뜨는 사람'이라니 그럴만도 하다.

 

 오늘날 우리의 사랑은 실시간 서로 확인 가능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뱃속을 까뒤집어서라도 그 믿음을 확인하려 들고 또 확인시켜 주어야 한다. 그걸 대신하기 위한 방편으로 물질적 증표를 나눠 갖기도 하는데 때로는 완벽한 알리바이와 물증이 필요한 경우까지 있다. 그러나 이 시에서는 사랑의 기쁨만을 온전히 노래하고 있다. ‘내 먼저 그대를 사랑’하고, ‘내 나중까지 그대를 사랑’하여 얻는 더 큰 즐거움을 알기 때문이란다. 내 사랑으로 내 기쁨이 되는 이 사랑의 대상은 어쩌면 시인이 평생 흠모했던 하느님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짐짓 모른 척 해야겠다.

 

 연시의 온도를 애써 식혀 서늘하게 만들 필요는 없겠다. 알싸한 감동의 물결을 부러 차단시킬 이유는 없는 것이다. 좀 더 냉정한 눈으로 시를 읽는 사람들은 그 사랑하는 이가 이승을 떠난 사람일 것이라고도 한다. '가슴속 천봉에 눈물 젖는' '억조창생 물굽이에 달뜨는 사람‘ 등의 시구가 그런 추측을 가능케 한다. '끝남이 없으니 시작도 없는 곳' '시작이 없으니 멈춤 또한 없는 곳' 무변광대한 사랑이니 이승이든 저승이든 무슨 상관이랴. 뚝뚝 흘린 눈물을 찍어 쓴 이 연시에서 시시때때로 떠오르는 그대 생각, 사무치는 그리움, 그리고 멈출 수 없는 지극한 사랑이 찌릿찌릿하게 전이되어 소름으로 돋는다. 

 

 

권순진

 

 

 

 

매미가 울면 나무는 절판된다/ 박지웅

 

 

붙어서 우는 것이 아니다

단단히 나무의 멱살을 잡고 우는 것이다

숨어서 우는 것이 아니다

반드시 들키려고 우는 것이다

 

배짱 한번 두둑하다

아예 울음으로 동네 하나 통째 걸어 잠근다

저 생명을 능가할 것은 이 여름에 없다

도무지 없다

 

붙어서 읽는 것이 아니다

단단히 나무의 멱살을 잡고 읽는 것이다

칠 년 만에 받은 목숨

매미는 그 목을 걸고 읽는 것이다

 

누가 이보다 더 뜨겁게 읽을 수 있으랴

매미가 울면 그 나무는 절판된다

말리지 마라

불씨 하나 나무에 떨어졌다

 

- 시집『구름과 집 사이를 걸었다』(문학동네,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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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매미의 울음이 밤낮없이 맹렬하다. 쨍쨍 햇빛이 내려쪼이고 더위가 절정에 달할수록 매미의 울음은 우렁차다. 매미의 발음 근육이 실룩거리며 만들어낸 소리를 공명실에서 증폭시킴으로써 쩌렁쩌렁 소리가 나오는데 비가 오거나 기온이 내려가면 활동이 시들해질 수밖에 없다. 매미울음의 위축은 그들 애정 전선에도 이상을 초래한다. 수컷의 울음은 암컷을 유혹하는 수단이며, 그들에겐 일생일대의 가장 화려하고 장렬한 과정이다. '다행히' 연일 36도를 오르내리며 밤중에도 식지않는 이 '대프리카'의 폭염 속에서 그들은 더욱 열정적이고 강렬하다.  

 

 매미로서는 살판이 났다. ‘단단히 나무의 멱살을 잡고’ ‘숨어서 우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들키려고’ 마구 울어재끼고 있다. 평균 7년간 굼벵이 유충으로 은둔생활을 하다 지상에 올라와 우화한 뒤 매미로서 길어봐야 4주밖에 살지 못하지만 이때 대를 잇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이다. 암컷을 부르는 수컷의 울음이 처절할 수밖에 없다. 밤이고 낮이고 분별도 없다. 그러니 ‘저 생명을 능가할 것은 이 여름에 없다’ ‘도무지 없다’

 

 그래봤자 교미가 끝나면 암컷은 나무에 알을 깐 뒤 죽고, 곧이어 수컷도 따라죽는다. 그러므로 매미에게 그 울음은 지고지순한 사랑의 시그널이다. 어차피 이 매미울음과 더불어 8월의 여름을 통과하지 않으면 안 된다. 어느 땐 귓속 이명인지 매미소리인지 분간이 어려울 정도다. 하지만 그 울음의 속사정을 이해한다면, 온 힘을 다해 짝을 찾는 매미의 열정을 오히려 응원하거나 혹은 연민하거나 그것도 아니면 최소한 그러려니 해야지 오만상 찡그리며 신경쇄약에 빠지는 일은 없어야겠다.

 

 시인은 매미가 운다고 했다가 나중엔 매미가 읽는다고 했다. ‘나무의 멱살을 잡고’ ‘목을 걸고 읽는’다고 했다. 그렇다. ‘누가 이보다 더 뜨겁게 읽을 수 있으랴’ 누가 이토록 겁나게 치열하게 바락바락 생을 읽겠는가. 그렇게 울어쌓는데 나무가 절판되지 않고 어이 배기랴. 그 불씨 일단 나무에 붙었다 하면 기어이 다 읽고 다 태우고 만다. 이 8월에 이만한 흥행이 어디 있을까. 그러나 절판은 되어도 결코 절단이 나진 않을 것이다.

 

 

권순진

 

 

Crying For Carmen - Oscar Lopez

출처 : 詩하늘 통신
글쓴이 : 제4막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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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은 보는 것과 볼 수 없는 것을 보게 하는 사람”

시 읽기의 즐거움 전파하는 장석주 시인

‘스무 살에 등단해 예순이 된 지금까지 시를 쓰는 사람, 읽을 수 있는 것에서 읽을 수 없는 것까지 읽어내는 독서광, 읽고 쓰는 것에 모든 것을 건 문장노동자’….

2007년부터 본지에 매달 ‘시와 시인을 찾아서’를 연재하는 시인 장석주는 ‘날마다 글을 읽고 쓰는 사람’이다. 그동안 100명에 가까운 시와 시인을 소개했지만 단 한 회도 거른 적이 없다. 그는 “9년간 연재를 하면서 지겨운 적이 단 한 차례도 없었다. 항상 즐거웠다”고 말했다.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옥타비오 파스의 말처럼 “선택받은 자들의 빵이자 저주받은 양식”인 시의 즐거움, 시의 정수를 독자에게 전달하고 싶다는 의욕은 여전히 강했다. 오히려 영상물이 대중문화의 주류가 되면서 ‘소수자의 위치’로 전락한 시 문학과 독자들이 잘 교감할 수 있도록 매개자가 되어야 한다는 소명의식은 더 커진 듯했다.

“시와 친해질 기회가 없었던 젊은 벗들이 더 많이 읽으면 좋겠어요. 천 편의 시는 천 가지의 방식으로 읽을 수 있어요. 저는 전문가적인 논리보다는 독자의 눈높이에서 사물을 보고 감성의 초점을 맞추려고 노력합니다.”

최근 장석주 시인은 본지에 기고한 글을 엮어 책으로 펴냈다. 《너무 일찍 철들어버린 청춘에게》 《누구나 가슴에 벼랑 하나쯤 품고 산다》(21세기북스) 두 권이다. 첫 번째 책에는 사랑과 이별, 청춘을 주제로 삼은 시들을, 두 번째 책에는 삶과 죽음, 인생을 주제로 한 시들을 소개했다. 시 읽는 즐거움을 독자들과 나누고 싶은 곡진한 마음이 곳곳에서 읽혔다. 20대부터 80대까지 다양한 연령대와 농부, 화물차 운전사, 교사, 의사 등 폭넓은 경험과 경력을 지닌 시인 60명의 시 60편이 장 시인의 감성적 해설과 더불어 펼쳐져 있다. 장 시인은 시인을 먼저 선택하고 그 시인의 시집을 전부 읽은 뒤 시를 정하고 글을 쓴다고 했다. 되도록 알려지지 않은 시인의 좋은 시를 찾아 소개할 때 더 보람이 크다고 말한다.


시는 ‘지적 근육’을 만드는 수단


장석주 시인은 열네 살 때 처음 시를 접하고 열다섯 살 때 〈겨울〉이란 시를 써서 〈학원〉지에 발표했다. 스물다섯 살 때 일간지 신춘문예에 시와 문학평론이 당선한 뒤 15권의 개인 시집을 냈다. 평론을 겸업하며 낸 평론집만도 10여 권에 이른다. 40년 동안 시를 읽고 썼지만, 그는 겸허하게 “시를 잘 모르겠다”고 말한다. 그만큼 시는 모호하고 심오한 것이라는 말인데, 시를 읽어야 하는 이유는 또렷하게 대답한다.

시는 전적으로 무의식에서 솟구치는 우연의 산물입니다. 아직도 시를 잘 모르겠지만 시인의 일이 영업판촉 분야 일과는 다르다는 것은 알죠. 영업판촉 인력은 자기가 팔아야 할 제품을 친절하게 설명하지만 시인들은 제가 쓰는 시의 소재인 사물과 세계, 그리고 현상에 대해 설명하지 않아요. 있는 그대로의 것들을 시를 통해 보여줄 뿐이죠. 또 하나 분명한 사실은 시를 읽지 않는 삶보다 시를 읽는 삶이 조금이라도 더 좋다는 겁니다.”

장 시인은 시를 “지적 근육을 만드는 수단”이라고 말한다. 시를 자주 읽으면 직관력이 생기고 직관을 훈련하면 통찰력과 투시력이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장 시인에게 시는 앎이고 구원이며 지혜이고 용기다. 시의 기능은 세상을 새롭게 보게 하는 데에 있으며 더 넓게는 세계를 바꾸는 혁명적인 것이지만, 그 이전 무지에서 깨어나는 기쁨을 주고, 정신 수련으로서 자신을 자유롭게 하는 방법이기도 하다.

“존재의 약동을 위해서나 정신의 유연함을 키우는 데 시는 반드시 필요해요. 시인은 상형문자와 같은 경험의 낱낱을 해독하고, 볼 수 있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보지 못하는 것들을 보고, 생각할 수 없는 것들을 생각하도록 독자를 이끌죠.”

장 시인 역시 시를 읽고 쓰면서 직관을 키우고, 자아의 점진적 진화를 이룬 것 같다고 했다. 그는 새벽 3시부터 4시 사이, 하루 중 가장 고요한 시간에 시를 쓴다.

“이성이 깨어나기 전 무의식 상태에서 시를 써요. 제 생각의 아주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언어들과 이미지들을 붙잡아내는 것이지요. 나중에 새벽에 끼적인 것을 읽어보면 제가 썼는데도 왜 이것을 썼지 하는 의문이 생기는 구절들이 있어요. 시의 초고는 이렇듯 비논리, 초논리 문구들이 산만하게 펼쳐져 엉망이죠(웃음). 그걸 이성적 사고가 활발한 낮에 리듬을 만들고 구조화될 수 있도록 다듬고 정리합니다.”

장 시인에게 좋은 시란 어떤 시일까? 좋은 시는 사물과 존재의 핵심을 성찰하되, 그 진실과 마주치는 고통의 순간을 미적 쾌감의 순간으로 바꿔놓는다. 아무리 끔찍한 내용이 담겼더라도 좋은 시를 읽고 난 뒤 기분이 좋아지는 것은 그 때문이라는 답이 돌아왔다.



독서는 나의 삶, 나의 힘


장석주 시인은 일간지 신춘문예에 당선된 해인 1979년 1월에 출판사 편집부에 취업한다. 몇 년 뒤 독립해 13여 년 동안 출판사 경영인으로 살았다. 그동안 출판편집자로 살며 만든 책이 총 800여 권이다. 숱한 책들이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그의 손을 거친 시집 《홀로서기》는 200만 부 이상 팔렸다. 30대 중반 출판사 경영에도 크게 성공해서 강남에 5층짜리 건물을 샀다. 출판사가 커지면서 직원도 몇 배나 늘었다. 그에게 ‘출판기획의 천재’ ‘미다스의 손’이라는 별칭이 붙기도 했다.

“운도 따랐지만 정말 일에 미친 듯이 자신을 다 바쳤죠. 눈뜨고 있는 동안은 오직 무슨 책을 어떻게 만들까 하는 생각만 했어요. 놀 줄도 몰랐고, 개인 시간도 없었고, 가족과 함께하는 시간도 거의 없었죠. 어느 날 제 인생의 초안이 떠올랐어요. 마음껏 책을 읽고 글을 쓰며 전업작가로 사는 게 제 인생의 목표였거든요. 출퇴근하는 생활이 더는 견딜 수 없을 만큼 지겨워졌어요. 그래서 미련 없이 사업을 접었습니다.”

출판사를 접은 뒤 시공사와 계약을 맺고 《20세기 한국문학의 탐구》 다섯 권을 서교동의 한 낡은 오피스텔에서 썼다. 1993년에 시작해서 2000년 11월에 완간했으니 7년이나 걸린 큰 작업이었다. 장 시인이 쓴 원고는 200자 원고지 1만5000장에 달했다.

“7년 동안 끝이 보이지 않는 글쓰기를 하면서 쓰는 것에 대한 공포감을 완전히 떨쳐냈어요. 그 이후 글쓰기에 탄력을 받아 전업작가가 될 수 있었죠.”

마흔 살에 서울생활을 정리하고 한적한 시골로 터전을 옮겼다. 사업을 정리하고 나니 수중에 남은 돈이 없었다. 출판사가 번창할 때 노후를 위해 사놓은 경기도 안성의 호수가 바라보이는 땅에 근처 농협에서 대출을 받아 집을 지었다.

“출판사를 정리할 때 몸만 나왔어요. 아무 생계수단도 없이 출판사를 접었으니 굉장히 막막했죠. 시골로 온 것은 실존적 결단이었어요. 스스로 낙후와 고립과 유폐를 선택한 거죠. 컨베이어 벨트처럼 돌아가는 문명세계에서 자발적으로 벗어난 겁니다. 가난해도 괜찮다고 생각했어요. 시골에 내려와 두 해 동안은 물(호수)만 바라보고 살았어요.”

장 시인은 시골에서 노자·장자 철학과 주역을 공부하며 새로운 지적 충전의 기회를 가졌다. 그에게 동양철학은 지적인 신세계였다. 동양철학과 더불어 니체와 하이데거, 그리고 들뢰즈·벤야민· 지그문트 바우만 등 서양 철학자들의 책에 빠져 살았다.

장 시인은 보통 사람이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엄청난 양의 책을 읽는다. 이런 독서 편력이 지적 자양분이 되어 전업작가로 나선 뒤 숱한 책을 쓰게 했다. 최근 그의 저술활동은 가히 활화산같이 폭발적이다. 올해 신작 10여 권이 나올 예정이다. 책의 종류는 문학평론·철학서·에세이·그림책 등 다양하다.

“올해 말 저서가 80권을 넘어설 거예요. 읽은 책들이 제 내면에서 융합하며 새로운 아이디어들이 솟아나죠. 왕성한 글쓰기가 가능한 이유입니다.”

장 시인은 날마다 눈뜨면 인터넷 서점에 들어가서 새로 나온 책들의 목록을 훑어보고 필요한 책들을 주문한다. 매주 1~2회 책을 주문하는데, 해마다 새 책이 1000여 권씩 는다고 한다. 책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읽고 분류해서 서가에 꽂는다. 어떤 책은 두세 번 거듭해서 읽기도 한다. ‘날마다 읽고 쓰는 사람’ 혹은 ‘독서광’이란 말이 과하지 않다.

“제 인생에서 지금이 가장 행복해요. 사과를 지하창고에 가득 갖고 있는 사람보다 손에 사과를 들고 씹어 먹는 사람이 더 행복합니다. 소유 욕심을 버리면 사는 일은 훨씬 더 자유로울 수 있어요. 저는 문학과 철학에서 낙관주의를 배웠습니다. 시와 문학이 새롭게 세계와 마주하는 젊은이에게도 용기를 줄 거라고 믿어요.”

장 시인은 책의 서문에서 “어린 아들이 있다면 등을 곧게 펴고 앉아 시를 읽게 하라”고 썼다. 그다음 단호한 문장이 이어진다. “허무에 쉬이 감염되는 나약한 아들 따위는 키울 필요 없다. 선승이 좌선하듯 시를 읽어라. 시와 좌선은 다 같이 본래 자기를 여미고, 여린 마음을 단련하도록 이끈다.” 날마다 ‘좌선하듯’ 시를 읽고 쓰는 장 시인의 모습이 두 책 속에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조사와 싸우다/ 정일근

 

 

내 시작의 버릇 하나를 말하자면

시를 퇴고할 때 조사는 추려내는 것

예를 들자면 이렇다, 이 시의 첫 문장

<내 시작의 버릇 하나를 말하자면>를 두고도

나는 오랫동안 고민할 것이다

<의>라는 조사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내 시작 버릇 하나를 말하자면>로 고치거나

<를>이란 조사가 불편하면

<내 시작의 버릇 하나 말하자면>으로

고칠 것이다, 그 두 문장을 두고

밀고 당기고 여러 날을 끙끙거릴 것이다

이 버릇은 사실 조사와 싸우는 일

지난 여름에는 시집 한 권을 묶으며

시 속에 별처럼 뿌려진 조사와 싸웠다

<은> <는> <이> <가> <을> <를> 을

죽였다 살렸다, 살렸다 죽였다

만나는 조사마다 시비를 걸며 싸웠다

시를 노래하는 것은 하늘의 일이고

시를 다듬는 것은 사람의 일인지라

반복되는 노역에 몸져눕기도 했는데

가까이 지켜보던 아내가 웃는다

당신이 무슨 부처 공부하는 사람이라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이냐, 며 웃는다

어이쿠! 답은 그 속에 있었구나

나는 전생에 부처 공부하다 만 땡초였는지

그놈 조사와 이렇게 싸우는구나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베고

부모를 만나면 부모도 베라고 했으니

나를 죽이는 일은 나를 살리는 일이다

조사를 죽여 시를 살리지도 못하면서

나는 죄 없는 조사와 싸우고만 있다

어디 보자, 이 시 속에도

시비 거는 조사 몇 놈 있을 것이니

나는 또 죽였다 살렸다 할 것이다

 

- 계간『실천문학』2003년 겨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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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현은 그의 예술기행에서 ‘책이 좋은 건 언제든지 그걸 덮어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마음대로 그가 읽은 책에서 해방될 수 있다는 것, 그것이 책이 갖고 있는 최대의 이점이다’라고 했다. 책은 상대와 은밀한 교호작용을 하지만 아니다 싶을 땐 그 책을 단박에 내팽개칠 자유 또한 독자에게 주어져 있다. 보다가 눈이 침침해지거나 하품이 나오거나 다른 볼일이 생겼을 땐 특별히 양해를 구하지 않고 책을 덮어도 무방하다. 일반 독자는 물론이고 글을 전문적으로 쓰는 작가의 책읽기도 참으로 부담이 없어 오히려 일종의 해방감마저 느낀다.

 

 하지만 남의 글을 편하게 읽을 때와 자기가 직접 글을 쓸 때의 태도나 부담은 하늘과 땅 차이다. 간단한 잡문에서 문학작품에 이르기까지 글쓰기의 부담을 느끼지 않는 문학인은 없다. 특히 시 창작은 더욱 그렇다. 자연이 일러주고 생활에서 보여주는 것들을 그냥 받아쓰기 했을 뿐이라며 천연덕스레 얘기하는 시인도 있지만 실상은 말처럼 수월할 리가 없다. 완성된 시는 그저 편하게 읽히는 것도 시작 과정에서 겪었을 고독과 고뇌 그리고 고통, 한 단어씩 어렵게 밀고나갔을 글 노동을 생각하면 그리 호락호락한 노동 강도가 아니다.

 

 글을 쓰기 위해 고민하고 끙끙거리며 보낸 시간들, 글을 쓰다가 앞이 캄캄하거나 머리가 먹통이 될 때도 허다했을 것이다. 자음과 모음을 적절히 조합하여 의미를 담은 글을 만들어내야 하는 작업이 쉽지 않음은 당연하다. 시인은 시에서 토씨와 싸우는 퇴고의 과정을 소상히 재미나게 설명했다. 이는 시작 공정 가운데 바둑으로 말하면 끝내기 수순이고 이발로 치면 '시야게'에 해당한다. ‘시를 노래하는 것은 하늘의 일이고 시를 다듬는 것은 사람의 일이다’ 이러한 시를 다듬는 공정을 거쳐야지만 비로소 예술작품으로 빚어지는 것이다.

 

 조사는 체언 등에 붙어 말과 말 사이의 관계를 표시하거나 그 말의 뜻을 도와주는 품사이다. 문장에서 사람이나 사물의 상황과 행위와의 관계를 표현할 때 조사의 역할은 매우 중요하다. 앞뒤의 낱말을 연결시켜 관계를 설정해 주는 조사를 잘못 사용할 경우 뜻이 왜곡되거나 의미 전달이 제대로 안될 수도 있다. 조사 하나의 유무에 따라 분쟁이 일어날 수 있고 외교 마찰이 빚어지는 경우까지 있다. 시에서 조사는 마치 고가구의 경첩과 같아 바르게 달리면 아귀가 맞아 매끄럽게 여닫이가 되지만 그렇지 않으면 거추장스럽게 삐걱거리는 소음만 낼 뿐이다.

 

 

권순진

 

 

Never Before & Never Ag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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