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詩 당선작



▲윤혜연


애인 / 유수연


애인은 여당을 찍고 왔고 나는 야당을 찍었다

서로의 이해는 아귀가 맞지 않았으므로 나는 왼손으로 문을 열고 너는 오른손으로 문을 닫는다

손을 잡으면 옮겨오는 불편을 참으며 나는 등을 돌리고 자고 너는 벽을 보며 자기를 원했다

악몽을 꾸다 침대에서 깨어나면 나는 생각한다

나를 바라보고 있는 애인을 바라보며 우리의 꿈이 다르다는 것을

나는 수많은 악몽 중 하나였지만 금방 잊혀졌다

벽마다 액자가 걸렸던 흔적들이 피부병처럼 번진다 벽마다 뽑지 않은 굽은 못들이 벽을 견디고 있다

더는 넘길 게 없는 달력을 바라보며 너는 평화, 말하고 나는 자유, 말한다

우리의 입에는 답이 없다 우리는 안과 밖

벽을 넘어 다를 게 없었다

나는 나를 견디고 너는 너를 견딘다

어둠과 한낮 속에서 침대에 누워있었다 티브이를 끄지 않았으므로 뉴스가 나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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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 부문 심사평] '무엇이 우리 삶의 진실인가' 질문을 던지다


     ▲ 문정희(시인)                   ▲ 정호승(시인)

오늘날 한국 시의 큰 병폐 중 하나로 소통의 결핍과 부재를 들 수 있다. 시를 쓴 사람과 시를 읽는 사람이 서로 소통되지 않는 원인은 무엇일까. 그것은 현실적 삶과 동떨어진 비구체성, 환상과 몽상의 방법으로 인간의 고통을 이해하고 해결하려는 언어적 태도, 개인의 자폐적 내면세계에 대한 지나친 산문적 천착 등으로 규정할 수 있다. 따라서 가능한 한 이러한 시들을 제외하고 시적 형성력의 구체성이 높은 작품을 우선하기로 먼저 논의했다.
본심에 오른 15명의 작품 중 최종적으로 거론된 작품은 곽문영의 ‘마법사 K’, 이광청의 ‘초콜릿’, 이은총의 ‘야간비행’, 노경재의 ‘캐치볼’, 신성률의 ‘신제품’, 유수연의 ‘애인’ 등이었다. 이 중에서 ‘신제품’과 ‘애인’을 두고 장시간 고심했다. ‘신제품’은 구멍가게를 하며 늙어가는 한 내외의 삶을 신제품에 빗댄 시다. 옛것을 통해 오늘을 살아갈 수 있다는 인생의 아이러니를 이야기하고 있는 시로, 발상은 신선하나 진술에 지나치게 의존한 산문적 안정감이 오히려 시적 형성력과 신선미를 잃고 있다고 판단했다.
‘애인’은 시대적 삶의 투시력이 엿보이는 시다. 오늘의 정치 현실을 통해 무엇이 우리 삶의 진실인가 질문을 던지는 시다. 그러나 단순히 정치 현실을 바탕으로 세태를 풍자한 시라기보다는 인간관계로 이루어지는 총체적인 삶의 진실을 추구한 시다. 여와 야, 적과 동지, 승자와 패자로 나뉘어 서로 적대하는 관계가 오늘의 정치 현실적 관계라면, 이 시는 “나는 나를 견디고 너는 너를 견딘다”와 “더는 넘길 게 없는 달력을 바라보며 너는 평화, 말하고 나는 자유, 말한다”에서 알 수 있듯 인내를 통한 평화와 자유의 관계가 현실적 삶의 진정한 원동력임을 이야기하고 있다. “애인은 여당을 찍고 왔고 나는 야당을 찍었다”에서도 갈등과 분열의 모습을 드러내는 듯하지만 실은 그 가치의 공존성을 역설적으로 드러낸다. 오늘 우리의 삶을 애인 관계의 공생성에서 찾아내 부정을 긍정으로 전환하는 데에 성공한 이 시를 통해 내일 우리의 삶은 분명 사랑과 희망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詩 당선소감] 답장 없는 편지…첫 답장을 받았습니다

답장 없는 편지를 쓰다 처음 답장을 받은 마음입니다. 이 느낌이 신기해 꽃병에 넣어 기르고 싶습니다. 물을 주고 또 지켜보고 싶습니다. 잘 묶어 친구들한테 보여주고 싶습니다.
문정희 선생님, 정호승 선생님 감사합니다. 축하해주실 때 칭찬받은 아이가 된 것 같았습니다. 윤한로 선생님, 배은별 선생님, 김유미 선생님. 처음 시를 쓰는 재미를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자주 찾아뵙지 못해 죄송합니다. 남진우 교수님, 박상수 교수님, 천수호 교수님. 교수님들의 강의를 들을 수 있어 영광이었습니다.
지윤아, 은경아, 유수야. 매번 나 반겨줘서 고마워. 원석아 네 방 더러워서 내가 청소하고 나온 거 잘했지? 깨끗하게 나랑 오래 만나자. 의석이 형, 태희 형, 윤희 누나, 다영 누나, 형·누나로 나한테 있어줘서 고마워. 성원아, 가원아 맛있는 곳 있으면 소개해줘. 다 같이 가서 맛있게 먹자.
도훈이 형, 철용아 우리 계속 시를 쓰자. 호숫가 여인숙에서 바라보던 철길처럼 오래오래 이어지자. 종연이 형 고등학교 때부터 같이 시 쓰고 읽어준 거 정말 고마워요. 성연아, 재한아 이제 좋은 형이 아니라 좋은 친구가 되고 싶어. 사랑해. 다희야 술 마셔줘서 고맙고, 지원아 네가 우체국을 찾았기에 이 공모를 낼 수 있었다. 꼭 만나자. 상원아 매일 밤 내 얘기 들어줘서 고마워. 말이 꿈이 되었다.
안또니오 신부님, 레문도 수녀님 군생활 힘이 되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가브리엘 학사님 시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아 버지 안드레아, 엄마 데레사, 형 이냐시오와 시몬, 이유 없이 사랑해주기에 항상 미안합니다.
마지막으로 제 시를 읽어줄 사람들에게 감사 인사 드립니다. 당신이 오늘의 사람일지 내일의 사람일지 내가 죽은 후의 사람일지는 모르겠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것뿐입니다.

 

―1994년 강원도 춘천 출생
―안양예술고 졸업
―명지대 문예창작과 3학년 휴학
―육군 복무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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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마 캐는 시인, 김필녀 시인의 아정농원
글쓴이 : 김필녀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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쓴맛이 사는 맛*/ 최정란

 

통이 비었다 쓰지 않는다 생각했는데

이따금 큰 숟갈로 썼구나

시간이 없는데 식탁을 차려야할 때

급한 불을 끄듯 설탕을 더한다

 

그때마다 요리를 망친다

손쉬운 달콤함에 기댄 대가다

 

마음이 허전하고 다급할 때

각설탕 껍질을 벗기듯

손쉬운 위로의 말을 찾는다

 

내가 나를 망치는 줄도 모르고

임시방편의 달콤함에 귀가 썩는 줄도 모르고

 

생의 시간을 털어가는 달콤한 약속들은

내 안이 텅 비어

무언가 기댈 것이 필요할 때

정확히 도착한다

 

내 안에 달콤함을 삼키는 블랙홀이 있다

주의하지 않으면

언젠가 생을 통째로 삼킬 것이다.


* 경남 양산 서창 효암고등학교 앞 큰 돌에 새겨져 있다

 

- 시집 사슴목발 애인(산지니,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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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쓴맛이 사는 맛'은 경남 양산의 기숙형 자율학교인 효암고등학교 앞 큰 돌에 새겨져 있는 글이다. 이 학교의 재단법인 효암학원 이사장은 우리에게 ‘거리의 철학자’, ‘당대의 기인’, ‘파격의 인간’이라 불리며 시대의 어른으로 존경을 받아온 채현국 선생이다. 대구 부농의 독자로 태어난 그와 관련한 여러 일화들이 전해지는데 <창작과 비평>의 운영비가 바닥날 때마다 뒤를 봐준 후원자였으며, 셋방살이하는 해직기자들에게 집을 사준 파격적인 분이었다. 김지하, 황석영, 고은 등 유신시절 수배자들에게 은신처를 제공하고 여러 민주화운동 단체에 자금을 댄 익명의 운동가이기도 하다.

  이 돌은 원래 교명을 쓰려고 가져왔는데 한 귀퉁이가 깨져있었다고 한다. 깨진 돌에 교명 쓰는 게 뭣해서 다른 말 한마디를 새겨볼까 하다가 그 말이 생각났다고 한다. 비관론처럼 들릴 수도 있지만 채 선생은 적극적인 긍정론이라고 했다. 쓴맛조차도 사는 맛이고, 오히려 인생이 쓸 때 거기서 삶이 깊어지니까 그게 다 사람 사는 맛 아니겠냐는 것이다. 누구나 세상을 살다보면 숱한 어려움에 직면하게 마련이다. 쓰다고 뱉어버릴 수 없는 것이 인생이라면 말씀처럼 쓴맛도 사는 맛이라고 생각하며 끌어안으려는 적극적인 자세가 필요하리라.

  채현국 선생의 삶 자체가 고난과 굴곡이었다. 하지만 선생처럼 굴종과 타협을 강요받았던 시대에도 당당히 자신의 길을 걸어온 분은 그리 많지 않다. 서울대 철학과를 나온 선생의 생활철학은 ‘시시하게 살면 행복해질 수 있다’이다. ‘쓴맛이 사는 맛’이란 말과도 일맥상통한다. 선생은 부지런하지 않으면서 한가로운 것이 행복의 원천이라고 말한다. 몸이든 의식이든 행동이든 모두가 한가해야 행복해진다는 말이다. “적게 쓰고 가난하게 살고 발전이란 소리에 속지 말고, 훨씬 더 소박하게 살라.”며 파격적인 조언을 한다.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쓴맛보다는 단맛을 추구한다. 남들이 가볍게 내뱉는 달콤한 말도 귀를 즐겁게 한다. 지금의 어려움을 넘기면 언젠간 달콤한 삶이 열릴 것이라는 믿음이 우리 생을 지탱한다. 하지만 그 믿음에 대한 집착마저도 끊을 수 있어야한다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세속의 욕망에 영혼을 팔지 않는 정신뿐. 72년 유신이 선포되자 잘나가는 탄광 사업을 정리하여 직원들에게 모두 나눠준 뒤, 군사독재 무너뜨리고 인간이 인간답게 살아야 한다는 생각을 지금껏 일관되게 견지해온 그였다. 
 
  ‘내 안에 달콤함을 삼키는 블랙홀이’있어 ‘돈 쓰는 재미’못지않게 ‘돈 버는 재미’의 달콤함에 빠져들면 자신이 썩는 길이라고 여겼다. 정의고 나발이고, 삶의 목적도 다 부수적이 된다는 것이다. 돈 버는 게 장땡이고 권력이, 명예가 신앙이 된다고 했다. 모든 건 예외 없이 이기면 썩는다. 돈이나 권력은 마술 같아서 아무리 사소할지라도 자기가 휘두르기 시작하면 썩는다. 제일 고약한 것은 갈등이 있어야 자신의 설 자리가 생기는 정치인들이다. 채현국 선생은 ‘손쉬운 달콤함에 기대’고, 그것에 휘말려들면 ‘언젠가 생을 통째로 삼킬 것’이란 걸 진작 깨달았던 것이다.

권순진


 

Another World - Jean Michel Jarre

출처 : 마 캐는 시인, 김필녀 시인의 아정농원
글쓴이 : 김필녀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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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격 / 안도현

   

숲을 멀리서 바라보고 있을 때는 몰랐다.

나무와 나무가 모여

어깨와 어깨를 대고

숲을 이루는 줄 알았다.

나무와 나무 사이

넓거나 좁은 간격이 있다는 걸

생각하지 못했다.

벌어질 대로 최대한 벌어진,

한데 붙으면 도저히 안 되는,

기어이 떨어져 서 있어야 하는,

나무와 나무 사이

그 간격과 간격이 모여

울울창창 숲을 이룬다는 것을

산불이 휩쓸고 지나간

숲에 들어가 보고서야 알았다.

 

- 시집너에게 가려고 강을 만들었다(창비,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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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연의 현상을 노래한 많은 시가 그 상징과 비유를 통해 인간의 삶을 대변하고 있다. 이 시도 숲을 원경으로 바라보았을 때의 인식과 실제 숲속에 들어가서 본 본디의 모습이 다른데서 얻은 깨달음으로 삶의 방식을 제시하고 있다. 멀리 떨어져 보았을 때는 나무들 간격의 빼곡한 밀착으로 숲을 이룬다고 믿었으나, 불 타버린 숲의 한가운데 들어서서 보았더니 나무와 나무 사이 그 간격과 간격이 모여 울울창창 숲을 이룬다는 것을깨닫게 되었다는 내용이다.

  여기서 숲은 사람들이 모여 이루는 공동체로, 나무와 나무는 공동체의 구성원인 개개인을 일컫는다. 이 나무들의 모습에서 인간사회의 바람직한 관계를 발견한다. ‘어깨와 어깨를 대고있다는 것은 얼핏 간격 없이 붙어있기에 결속과 일사 분란함이 가능하고, 그것으로 울창한 숲을 이룬다고 생각했으나 사실은 그와 달랐다. 촘촘하지 않고 넓거나 좁은적절한 간격, ‘한데 붙으면 도저히 안 되는, 기어이 떨어져 서 있어야 하는그 이유로 각각의 나무는 성장하고, 그 간격들이 모여 울창한 숲을 이룬다는 것을 발견했다.

  이는 우리들 삶의 모습에도 적용된다. 진정한 사랑이나 우정은 맹목적인 밀착(혹은 집착)이 아니라 한 발짝 떨어진 위치에서 바라보는 여유와 조화로서 완성되는 것이다. 나무들 사이의 적당한 간격처럼 사람들 사이에도 이만한 간격은 필요하고, 사람이 사람을 대할 때도 한발 떨어진 위치에서 관조할 수 있는 여유는 있어야한다는 의미이다. 그 간격으로 바람이 통하고 햇빛도 들며 조화의 아름다움도 유지되는 것이다.

  그렇지 못할 경우 자칫 서로에게 상처를 줄 수도 있고, 상처가 깊어지면 필경 사단이 나고 만다. 이런 간격의 소중함에 대한 잠언은 칼릴 지브란의 결혼에 관하여란 시에도 볼 수 있다. “너희는 함께 있되 거리를 두라. 그래서 하늘 바람이 너희 사이에서 춤추게 하라. 서로 사랑하라. 그러나 사랑으로 구속하지는 마라. 그보다 너희 혼과 혼 두 언덕사이에서 출렁이는 바다를 놓아두라” “함께 있으라, 그러나 너무 가까이는 말라. 사원의 기둥들도 서로 떨어져 서있고 참나무와 참나무는 서로의 그늘 속에선 자랄 수 없으니...”

  그 적절함과 적당함이 대충 대강으로 들리기도 할 것이다. 적당히 사랑해야 적당히 아플 수 있다는 말도 있다. 이해타산을 따지지는 않는 우정도 보기 드물다. 얼핏 인간적 순수성의 결여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지혜롭지 못한 맹목의 사랑과 우정, 믿음과 밀착은 사달이 났을 경우 그 폐해는 산불이 휩쓸고 지나간것처럼 너무나 크고 광범위하다. 맹목으로 윗도리 아랫도리 홀딱 벗고 누군가에게 다가가는 자, 반드시 심장을 잃게 되고 말리라.


 

권순진


 

Immortal Beauty - Aeoliah

 

출처 : 마 캐는 시인, 김필녀 시인의 아정농원
글쓴이 : 김필녀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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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은 애인/ 문모근


 

81세 된 할머니가

호계장 칼국수 집 아주머니에게

조심조심 낮은 목소리로

넥타이 가게를 묻는다

 

할매, 영감님 안계시잖소

넥타이 가게는 신천에 가믄 있는데요

할매는 힘들어 못가요

다음 장에 사소

근데 누 줄라꼬예?

말하지 마라

애인 줄끼요?

어허, 말하지 말라카이

 

붉어진 얼굴을 감추고 할머니가

눈을 흘기며 문을 나선다

 

가을 하늘이 파랗다

 

- 시집『새벽비』(이웃,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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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회에서 사회생활 하는 남자는 신체의 두 곳을 묶고 산다. 혁대로 허리를 묶고 넥타이로 목을 묶는다. 혁대는 남자로 하여금 허리띠를 조여 가며 가족을 부양하라는 의미가 담겨 있으며, 따라서 고단한 삶의 상징이기도 하다. 물론 삶에 대한 자세를 다잡고 각오를 새롭게 한다는 뜻도 있다. 넥타이는 화이트컬러의 징표이고 남성의 품위로 기능하지만, 이것을 선물할 때에는 또 다른 의미로 그 뜻이 확장된다. 사랑하는 이에게 보내는 넥타이는 그 순간 사랑의 상징물이 된다. 오래전 백악관 스캔들의 르윈스키가 넥타이를 클린턴에게 선물하면서 당신이 이 넥타이를 매고 있는 동안은 내가 당신에게서 가장 가까운 곳에 있다고 생각할 거예요라고 말했다지 않은가.


  누군가에게 넥타이를 선물하려고 넥타이 파는 가게를 묻는 할머니, 재래시장 칼국수 집 아주머니로서는 충분히 놀려 먹을 만하다. 하지만 요즘 같은 백세 운운하는 시대에 이제 겨우’ 80줄에 들어선 할머니인데 연애하지 말란 법은 없다. 그 감정 밭의 지력이 쇠해서 연정의 풀 한포기 돋지 않을 것이라 여기지만 마음만은 청춘인 어르신들이다. 마음만이 아니라 온기 남은 그 밭에 청춘의 영롱한 씨앗이 숨어있어서 싹을 틔울 기회만 기다리는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수두룩하게 계신다. 어쨌거나 몸은 늙어도 사랑의 감정은 마르지 않아, 이는 곧 사람에게 있어 희망이자 고통이라 하겠다. 가능만 하다면야 양로원 휠체어에서 고랑고랑 홀로 살다 죽는 것 보다 얼마나 벅찬 희망인가.


  황혼의 연애감정을 다룬 <마른 꽃>이라는 박완서의 단편소설이 있다. 남편과 사별하고 혼자 사는 주인공이 우연히 고속버스에서 한 노신사와 나란히 앉게 된다. 두 사람은 흘러간 영화, 좋아하는 배우나 음악 이야기를 나누면서 동년배로서의 진한 연대감을 느낀다. 한마디로 대화가 통한 것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서로에 대한 호감과 호기심이 싹트고, 여성은 남자 앞에서 소녀처럼 들떠 재잘거리며 깔깔거리는 자신의 모습에 놀란다. 오래 전에 잊어버렸던, 잃어버렸다고 생각했던 여성성이 되살아난 것이다. 흑백화면 같던 여성의 삶은 총천연색시네마스코프로 빛나고 마른 꽃 같았던 여성의 존재에는 생기가 넘친다. 신중년이라 일컫는 60대 남성들에게 가장 데이트하고 싶은 상대로 꼽힌 탤런트 박정수는 정을영 PD10년째 공개 열애중이다.


  고령화 시대에 사별이나 이별 후 홀로 사는 노인들이 많아지고 홀로 사는 기간도 길어지고 있다. 긴 세월 하루하루 살아갈 뿐인 삶에 이런 연애감정이 찾아온다면 일약 활기를 띄고 생기가 돌 것은 명약관화한 이치다. 황혼의 연애는 단순히 외로움을 덜어주는 이상의 효과가 있다. 넥타이를 고르면서 어떤 색이 어울릴까 가슴 두근거리는 행복감은 분명 뇌에서 좋은 화학물질을 분비시켜 신체기능도 향상시킬 것이다. 어쩌면 할머니의 넥타이를 맬 주인공은 늙은 애인이 아니라 첫 출근하는 젊은 손자일지도 모른다. 그렇다하더라도 그 반응의 양상이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어느 경우이든 할머니의 마음 밭은 가을하늘처럼 파랗다.



권순진


 

Sunset one The Hills - Andante





출처 : 詩하늘 통신
글쓴이 : 제4막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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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연서설 / 문병란


꽃이 꽃을 향하여 피어나듯이
사람과 사람이 서로 사랑하는 것은
그렇게 묵묵히 서로를 바라보는 일이다.

 

물을 찾는 뿌리를 안으로 감춘 채
원망과 그리움을 불길로 건네며
너는 나의 애달픈 꽃이 되고
나는 너의 서러운 꽃이 된다.

 

사랑은
저만치 피어 있는 한 송이 풀꽃
이 애틋한 몸짓
서로의 빛깔과 냄새를 나누어 가지며
사랑은 가진 것 하나씩 잃어 가는 일이다.

 

각기 다른 인연의 한 끝에 서서
눈물에 젖은 눈빛 하늘거리며
바람결에도 곱게 무늬 지는 가슴
사랑은 서로의 눈물 속에 젖어 가는 일이다.

 

오가는 인생길에 애틋이 피어났던
너와 나의 애달픈 연분도
가시덤불 찔레꽃으로 어우러지고,
다하지 못한 그리움


사랑은 하나가 되려나
마침내 부서진 가슴 핏빛 노을로 타오르나니

이 밤도 파도는 밀려와
잠 못 드는 바닷가에 모래알로 부서지고
사랑은 서로의 가슴에 가서 고이 죽어 가는 일이다.

 

 

 



 

 





고향길 / 신경림


아무도 찾지 않으려네

내 살던 집 툇마루에 앉으면

벽에는 아직도 쥐오줌 얼룩져 있으리

담 너머로 늙은 수유나뭇잎 날리거든

두레박으로 우물물 한 모금 떠 마시고

가위소리 요란한 엿장수 되어

고추잠자리 새빨간 노을길 서성이려네

감석 깔린 장길은 피하려네

내 좋아하던 고무신집 딸아이가

수틀 끼고 앉았던 가겟방도 피하려네

두엄더비 수북한 쇠전마당을

금줄기 찾는 허망한 금전꾼되어

초저녁 하얀 달 보며 거닐려네

장국밥으로 깊은 허기 채우고

읍내로 가는 버스에 오르려네

쫓기듯 도망치듯 살아온 이에게만

삶은 때로 애닯기만 하리

긴 능선 검은 하늘에 박힌 별 보며

길 잘못 든 나그네 되어 떠나려네


- 시집 달넘세(창작과비평사,19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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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린 시절 냇가에서 물장구치며 물고기 잡고 뒷산에 올라 산딸기 따먹고 동무들과 이리저리 날뛰며 토끼몰이 했던 추억들, 지서 뒤 미루나무 위의 까치집과 툭하면 걸려 넘어지던 높은 문지방, 솔잎 때는 연기의 매캐한 냄새를 기억하는 이들에게 ‘고향’이란 그냥 상투적으로 흘려듣고 말 낱말이 아니다. 하지만 지금은 냇가를 찰방거리는 아이들 보기 어렵고 뒷산 토끼와 다람쥐들도 죄다 어디론가 사라졌다. 사람 떠난 집 몇 ‘벽에는 아직도 쥐오줌 얼룩져 있’겠으나, ‘우물물’도 ‘쇠전마당’도 그리움을 되살릴 그 무엇도 제대로 남은 것이 없다.


 종이에 풍년초를 말아 성냥불을 긋던 얄궂은 불장난, 몇 모금 빨다가 캑캑거리며 호들갑 떨다 짚단을 태웠던 일, 불이 번진 짚단 위로 반딧불처럼 불티들이 어지럽게 휘날릴 때 당혹감 뒤에 숨겨진 은은한 황홀감, 이윽고 어른들에게 불려가 몽당싸리비로 직싸게 얻어맞고 다음날 잠자리에서 오줌을 지렸던 일 따위의 눅눅한 기억들. 다행히 ‘담 너머로 늙은 수유나뭇잎’ 우수수 몇 흩날리면, 떠나온 그 날을 힘겹게 회억할 따름이다. 다들 대처로 가서 살아야지만 사람구실을 한다고 여겼던 탓에 내남할 것 없이 떠나왔던 고향 아닌가.


 두고 온 고향마을은 서늘함이 감돌아 이맘때면 뉘 집이든 툇마루에 노인들 쪼그리고 앉아 담배연기 빠끔빠끔 뿜어대며 내 손주들 하마 오나 마을입구만 연신 바라보는 게 일이겠거니. 이렇듯 고향은 아득하고 원초적인 체험들로 넘실거리고, 사람들에게 잠재해 있는 생태적인 감동을 부르는 말이다. 그러나 '고향'은 고향을 잃은 자의 회한 속에서 발견하는 개념이지, 그곳을 지키고 그곳의 흙을 밟고 사는 사람이 떠올리는 개념은 아니다. 고향은 멀리 떨어져 있어도 끈이 이어져 있음을 느끼게 하고 어디 있더라도 자꾸 돌아가고 싶게 하는 정겨운 곳이기는 하다.


 ‘쫓기듯 도망치듯 살아온 이에게 삶은 때로 애닮’지만 돌아갈 고향이 있다는 것은 행복이다. 하지만 ‘장국밥으로 깊은 허기 채우고’ 서둘러 ‘읍내로 가는 버스에’올라 ‘쫓기듯 도망치듯’ 애달프게 ‘긴 능선 검은 하늘에 박힌 별 보며’ ‘길 잘못 든 나그네’처럼 떠나야만 하는 곳이기도 하다. 진한 추억은 애써 피해가고 싶었던 신경림 시인. 설레발치며 이 사람 저사람 찾아다니면서 공연히 고향 사람들 도분 나게 할 넉살은 없었으리라. 기껏 한해 두어 번 어정쩡한 귀향과 귀경을 되풀이해가지고는 결코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으리라.



 아무리 고향을 그리워한데도 고향은 아무 때나 덮어놓고 받아주지는 않는다. 고향엔 당산나무 같은 난해하고 지엄한 어떤 기운이 서려있다. 고향으로 되돌아가기 위해서는 어쩌면 떠나 산만큼의 대가를 지불해야할지 모른다. 고향에다 무슨 선심을 서라거나 물질적인 보상을 하라는 것이 아니다. 그곳의 사람들은 물론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에게도 자신과 동화되도록 따뜻한 마음을 바쳐야 한다. 그런 절차와 과정 없이 어찌 고향을 넘보랴. ‘긴 능선 검은 하늘에 박힌 별 보며’ 기어이 ‘길 잘못 든 나그네 되어 떠나’지 않을 수 없으리라.



권순진


 

Pavane For A Winter Bird - Stewart Dudley

출처 : 詩하늘 통신
글쓴이 : 제4막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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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한 여름/ 김종길


소나기 멎자
매미소리

젖은 뜰을
다시 적신다.

비 오다
멎고,

매미소리
그쳤다 다시 일고,

또 한여름
이렇게 지나가는가.

소나기 소리
매미소리에

아직은 성한 귀
기울이며

또 한여름
이렇게 지나보내는가.



- 201085일 중앙일보 "시가 있는 아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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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매년 덥지 않은 여름은 없었지만 눈앞의 현실이라 올해는 유난히 더운 것 같다. 이것도 지구온난화의 가속화 영향인가. 과학자들은 지구온도가 2도 상승하면 지구상의 생물이 최소 20% 이상은 멸종할 것으로 내다봤다. 아프리카 사막은 점점 넓어지고 있으며 초원으로 뒤덮였던 몽골고원은 사막화가 빠르게 진행 중이다. 지구의 환경은 엄숙하고 아름답지만 그 환경이 사람과 동식물에게 맞춰주진 않는다, 모든 생물은 알아서 환경에 적응하고 견디며 살아야 한다. 나이 들면 자연에 대한 적응력도 떨어져 조신하게 여름을 견딜 수밖에 없겠다.


  소나기 멎자 창문을 여니 폭포처럼 쏟아지는 매미소리, 세상에 나와 한 달도 채 못살고 생을 마감해야할 운명이니 저렇게 바락바락 가열 차게 우는 것도 이해 가고 용납이 된다. 26년생 노 시인은 또 한여름 이렇게 지나가는가.’라며 한 계절이 가고 있음을 아직은 성한 귀를 기울여 소나기 소리와 매미 소리를 통해 감각한다. 불볕더위가 이어지고 마음을 잠시 풀어헤친 사이 화분이 마르고 나뭇잎이 타들어간다. 이사 오면서 다 버리고 화분 몇 개 가져온 것마저 어머니의 부재동안 다 말라죽고 하나 남은 산스베리아에 바가지 물을 주었다.


  중국의 양귀비는 더위를 많이 타서 여름을 무척 싫어했다고 한다. 여름이 되면 양귀비는 빙잠(氷蠶)이라 하여 대설산(大雪山)의 눈 속에서 자라는 누에고치 실로 짠 옷을 입고 지냈다고 한다. 이것도 모자라서 더위를 이기기 위해 빙병(氷屛)이라는 얼음병풍을 두르고 선차(扇車)라는 물레방아 부채를 돌리는 시원한 궁전에 살면서도 더위에 얼굴을 찡그렸다. 지금은 냉방기구가 있어 양귀비보다 더 더위를 타는 사람도 무난하게 여름을 견딜 수 있는 세상이다. 하지만 여름 내내 에어컨이 있는 실내에만 머물 수는 없는 노릇이다.


  양귀비처럼 한곳에만 틀어박혀 지낼 수도 없고, 매미소리와 소나기 소리나 들으면서 애잔하게 여름을 소일하지도 못할 것이므로 도리 없이 높은 기온에 노출이 되고 땀도 많이 흘리게 된다. 이로 인해 사람의 몸도 수분이 부족해지고 인체가 스트레스를 받는다. 더위에 지쳐 생기를 잃고 식욕이 떨어지기도 한다. 이런 지경을 더위 먹는다고 하는데 자칫 만사가 귀찮아진다. 인체의 변화는 자연과 같이 변화한다. 그래서 인체를 소우주라 표현을 한다. 인체는 자연의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면 음양의 평형을 잃는다.


  한의사들은 양생의 비결을 계절의 변화에 순응하여 섭생과 생활을 조절할 것을 권한다. 무더위도 자연의 법칙에 따라 인체의 생리활동을 잘 조절하면 별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요란법석 떨지 않고 보양식이나 과일도 먹을 기회가 있든지 구미에 당기면 먹고, 자고 싶으면 자고 에어컨을 털어놓고 TV드라마를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은 듯하다. 다산도 뜨거운 날 졸음에 겨워 책읽기 싫어서 손님 모아 바둑 구경하는 것도 괜찮은 방법이라고 했고 욕심 끊고 한가로운 이야기 나눔도 더위를 견디는 방법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저 그럭저럭 또 한 여름을 견디는 것이다.



권순진


Night In That Land - Nightnoi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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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라, 거짓 사랑아/ 문정희


 

꽃아, 너도 거짓말을 하는구나

어제 그 모습은 무엇이었지?

사랑한다고 말하던 그 붉은 입술과 향기

오늘은 모두 사라지고 없구나.

꽃아, 그래도 또 오너라.

거짓 사랑아.

 

- 시집 오라, 거짓 사랑아(민음사,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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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꽃도 꽃 나름이고 사람도 사람 나름이다. 어떤 이에겐 단 하룻밤 사랑이지만 다른 어떤 사람에겐 12년일 수 있고 10년 넘어 갈 수도 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세월이 가면 사랑이란 감정은 변하기 마련이다. 그것이 불변의 진리이며 사랑이 갖는 환멸적 속성이다. 처음의 그 느낌을 그대로 지속시키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그러므로 누군가 변치 않는 영원한 사랑을 맹세했다면 그건 100% 거짓이라고 보면 된다. 이 시대의 사랑은 그 유효기간마저 점점 짧아진다고 한다. 사랑은 결국 속고 속이는 게임이며 순간의 진실만 남는다. 육체의 욕망에서 비롯한 순간의 진실만이라도 오롯하면 다행이겠는데, 그 순간마저도 그렇지 못한 경우가 있다.


  한 순간의 열정과 도취나 뭣도 아닌 처음부터 쾌락과 계산으로 거래를 턴 것이라 거짓 사랑이라 둘러대지도 못할 처지다. 지난 두 달 사이 연예인들의 성 추문이 끊이지 않아 방송가와 연예가는 바짝 긴장하고 있다. 혹시나 숨어있던 다른 추문들이 고개를 들어 향후 제작할 드라마에 피해를 주지 않을까 하는 우려 때문이다. 톱클래스의 연예인까지 논란에 휩싸이다보니 누구도 안심할 수 없다는 분위기다. 최근의 성 추문과 관련해 누구도 고소했으니 나도 질러보자라는 심리가 일부 작용했다는 분석도 있다. ‘누가 연예인과 성 추문을 터트리고 몇 억 원을 받았다는 확인되지 않은 낭설이 고소를 부추길 수 있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사정이야 어찌됐든 성 추문은 그 특성상 진위를 떠나 일단 추문에 휩싸이는 것만으로 당사자는 큰 타격을 입는다. 아무리 사회의 성 인식이 자유롭게 바뀌면서 관련 범죄도 늘었다지만 대중의 사랑을 먹고사는 연예인이 먼저 그 분위기에 휩쓸리는 것은 옳지 않다. 유명 연예인의 경우 마음만 먹으면 주위에 여성들이 널려있고 늘 자신은 사랑을 받고 있다는 착각에 빠지기 쉽지만 그 유혹을 견디지 못하면 스타의 자격이 없다. ‘좌회분란(坐懷不亂)’이란 말이 있다. 춘추전국시대의 고사로 미인을 품에 안고도 흐트러지지 않는다는 뜻이다. 황진이의 온갖 유혹을 물리친 화담정도면 모를까 보통 남자로서는 거의 불가능한 노릇이다. 하지만 왕관의 무게를 견디듯 그들은 그것을 견뎌낼 수 있어야 한다.


  문정희 시인은 같은 시집 <러브호텔>이란 시에서 내 몸 안에 러브호텔이 있다/ 나는 그 호텔에 자주 드나든다/ 상대를 묻지 말기를 바란다/ 수시로 바뀔 수도 있으니까라고 했다. “러브호텔에는 진정한 사랑이 있을까의혹을 품으면서도 오지 않는 사랑을 갈구하며/ 나는 오늘도 러브호텔로 들어간다며 지극히 본능적이고 원초적인 사랑의 영역으로 성큼 발을 옮긴다. 미심쩍은 거짓 사랑이지만 따뜻하게 받아들이겠다는 달관과 아량이 배어 있다. 사랑의 기저에 설령 거짓이 있다고 해도 무가치하거나 불필요한 것은 아니다. 살갗의 노출과 함께 사랑에 노출되기도 쉬운 계절이다. '거짓 사랑'이라도 불러들이고 싶은 심정 또한 없지 않다.


 그러나 비록 거짓사랑일지언정 더운 심장 가진 사람으로서 한번이라도 노을빛으로 가슴을 데운 사랑이라면 다음날 바로 원수로 돌변하는 일만은 없어야겠다육체에 대한 욕망은 채워지면 바로 결핍의 자리로 돌아눕기 마련이다. 결핍은 이내 새로운 욕망을 부르고, 또 다시 결핍이 된다. 그렇듯 세상의 모든 연애는 타오르는 불꽃과 서로에게 싫증을 느끼는 권태가 반복된다. 너무 쉽게 만났기 때문에 헤어짐도 쉬울 수 있고 한순간 사랑이 싸늘해질 수도 있는 것이다. 오늘의 나는 어제의 내가 아니고 내일의 나는 오늘의 내가 아닐지도 모른다. 하지만 거짓사랑을 포함해 이 세상 모든 사랑이 무죄가 되려면 적어도 함께한 시간을 단박에 폐허로 처박을 수는 없는 것이다.



권순진

 
Feel the Blu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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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의 그륵 - 표준어를 부끄럽게 만든 사투리


어머니의 그륵 

어머니는 그륵이라 쓰고 읽으신다 
그륵이 아니라 그릇이 바른 말이지만 
어머니에게 그릇은 그륵이다 
물을 담아 오신 어머니의 그륵을 앞에 두고 
그륵, 그륵 중얼거려보면 
그륵에 담긴 물이 편안한 수평을 찾고 
어머니의 그륵에 담겨졌던 모든 것들이 
사람의 체온처럼 따뜻했다는 것을 깨닫는다 
나는 학교에서 그릇이라 배웠지만 
어머니는 인생을 통해 그륵이라 배웠다 
그래서 내가 담는 한 그릇의 물과 
어머니가 담는 한 그륵의 물은 다르다 
말 하나가 살아남아 빛나기 위해서는 
말과 하나가 되는 사랑이 있어야 하는데 
어머니는 어머니의 삶을 통해 말을 만드셨고 
나는 사전을 통해 쉽게 말을 찾았다 
무릇 시인이라면 하찮은 것들의 이름이라도 
뜨겁게 살아있도록 불러 주어야 하는데 
두툼한 개정판 국어사전을 자랑처럼 옆에 두고 
서정시를 쓰는 내가 부끄러워진다 

- 2001년 ‘현대시학’, 정일근(鄭一根, 1958년~    )       

어(言語)를 뜻하는 영어 ‘language’의 뿌리는 ‘혀’를 뜻하는 라틴어 ‘lingua’다. 구조주의 언어학을 개척한 스위스의 언어학자 페르디낭 드 소쉬르(Ferdinand de Saussure)는 언어를 현실적으로 사용하는 개인적 발화(發話) 즉 ‘파롤(Parole)’과 그 개인적 발화에 의미를 부여하고 발화행위를 가능케 하는 추상적 체계 즉 ‘랑그(Langue)’로 나누어 설명했었다. 언어를 말하는 사람의 머릿속에 있는 체계나 규칙이 랑그라면 그게 입안에서 혀로 만들어져 입 밖으로 나오는 것을 파롤, 한자어 ‘언어(言語)’도 그런 주장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말해준다. 한자 말씀 언(言)은 혀 설(舌)이 변해 만들어진 것, 그걸 우리[吾]가 주고받으면 ‘어(語)’가 된다. 머릿속에 어떤 의미를 떠올린 후 입 안에서 혀를 놀려 만들어내는 음이 ‘言’이라면 그걸 너와 내가 같은 의미로 알아들을 때 비로소 ‘語’가 된다는 말이다. 또 입 안에서 혀를 놀려 말을 만들어내는 것을 언어의 ‘자의성(恣意性)’이라고 한다면 그걸 사회적으로 인정하여 함부로 바꾸지 않는 것을 ‘언어의 사회성(社會性)’이라고 한다. 

사회성이 지역적 또는 계층적으로 한정된 언어를 ‘방언(方言, 사투리, dialect)’라고 한다. 'dialect'의 뿌리는 ‘담화’를 뜻하는 고대 그리스어 ‘diálektos’로서 특정한 무리가 자기네들만 의사소통하기 위해 사용하는 은어(隱語)나 아직은 사회적 언어체계를 습득하지 못해 간단한 음성체계로 의사를 전달하는 유아어(乳兒語)등과는 다르다. 그 방언이 개인에 한정되어 나타나는 것을 ‘idiolect(굳이 번역하자면 ‘개인어’)’라고 하는데, 같은 말이라도 혀가 짧은 사람과 긴 사람 또는 성격이 느긋한 사람과 급한 사람 등등 개인적 차이에 의해 다르게 나타나는 바, ‘개인어’를 보면 그 개인의 성장 과정이나 성격이나 사회적 수준이 보인다. 그래서 어떤 언어학자들은 “어떤 언어는 그 자체가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게 아니라 그 언어 집단에 속한 개인어의 총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한국은 나라는 손바닥만 하지만 높은 산이 울타리처럼 막힌 데다 오랫동안 농경정착문화를 유지해온 탓에 사투리가 유난히 많다. 지금도 경상도와 전라도 말씨가 다르고 제주도 사람들의 말씨를 육지 사람들이 잘 알아듣지 못한다. 그 만큼 외부와의 단절이 오래 지속됐다는 증거다. 사투리가 표준어를 뛰어넘지 못하는 것은 ‘지역감정’이라는 고질병이 말해주듯 지역 사람들이 지역적 한계를 넘어서지 못하기 때문이겠지만, 사투리를 조탁(彫琢)하여 시어(詩語)의 차원으로 끌어올린 사례 또한 적지 않다. 전라북도 고창 출신의 서정주(徐廷柱)는 전라도 사투리를 토속적 분위기를 고조시키는 양념으로 사용하는 데 탁월한 재주를 보였고, 경상북도 경주 출신의 박목월(朴木月)은 아예 <경상도의 가랑잎>(1968년 민중서관)이라는 시집을 펴내기도 했다. 많은 시인들이 토속적 분위기 또는 향수(鄕愁)를 손쉽게 환기하기 위해 사투리 사용을 마다하지 않았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효과는 미지수였던 것 같다. 박목월은 <경상도 가랑잎>에 실린 ‘사투리’라는 작품에서 “우리고장에서는/ 오빠를/ 오라베라 했다./ 그 무뚝뚝하고 왁살스런 악센트로/ 오오라베 부르면/ 나는 앞이 칵 막히도록 좋았다”고 읊었지만 다른 지역 사람들 또한 그 시를 읽으면서 “앞이 칵 막히도록” 좋았을까? 다른 지역의 독자들에게는 생소한 사투리를 자신의 고향 특산물인 것처럼 애용하는 한국의 시인들이 곰곰이 따져봐야 할 대목이 아닌가 싶다. 영어가 처음 유행하던 시절 한국어 대신 영어 몇 개 삽입해놓고는 영어 자체가 ‘모더니즘’인 것처럼 착각했던 사이비 모더니스트들과 별반 다를 게 없어 보인다. 

정일근의 첫 시집 '바다가 바라다....'
1987년, 창작과 비평사
사투리를 시어의 차원으로 끌어올리려면 사투리 자체보다도 그 사투리에 담긴 인간 보편적 정서에 초점이 맞춰야 한다는 것은 두말하면 잔소리, 그런 점에 유의한다면 1958년 경상남도 양산에서 태어나 경남대학교를 나온 후 1985년 한국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등단한 시인 정일근(鄭一根; 1958년- )이야말로 시 속에 사투리를 자유자재로 쓸 자격이 있어 보인다. 그의 대표작 ‘어머니의 그륵’을 읽노라면 시인들에게 ‘사투리 시어 사용법’을 가르쳐주는 시인인 것 같은 생각이 든다. ‘그륵’이라는 경상도 사투리 하나로 이 세상의 모든 아들들을 포근하게 감싸는 것은 물론 이 세상의 모든 삶의 깊이 보다 더 깊은 ‘어머니의 그륵’ 깊이를 가슴으로 느끼게 한다. ‘그륵’이라는 경상도 사투리를 어머니의 ‘개인어’로 재인식하여 모정(母情)이라는 인류 보편적인 정서를 넉넉하게 담아내는 시재(詩才)가 놀랍다. ‘어머니의 그륵’이 “무릇 시인이라면 하찮은 것들의 이름이라도/ 뜨겁게 살아있도록 불러 주어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주고 “두툼한 개정판 국어사전을 자랑처럼 옆에 두고” 서정시를 쓰는 시인을 부끄럽게 만들었다는 대목에서는 사투리가 표준어보다 상위에 서는 것 같은 느낌도 든다. 

시인 각자가 떠올린 시상(詩想)을 시인 각자가 선택한 시어로 표현하는 게 시, 그런 점에서 본다면 시 또한 일종의 사투리이고 개인어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시상이 먼저이지 시어가 먼저는 아니라는 점을 까먹어서는 안 된다. 비슷비슷한 산물(産物)인데도 ‘특산물(特産物)’이랍시고 비싸게 팔아먹는 장사치처럼 사투리를 ‘특산물’로 애용해온 시인들이 정일근의 ‘어머니의 그륵’을 외우고 또 외우면서 한 수 배웠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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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마 캐는 시인, 김필녀 시인의 아정농원
글쓴이 : 김필녀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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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림/ 이성복



날 버리시면 어쩌나 생각진 않지만

이제나저제나 당신 오는 곳만 바라봅니다

나는 팔도 다리도 없어 당신에게 가지 못하고

당신에게 드릴 말씀 전해 줄 친구도 없으니

오다가다 당신은 나를 잊으셨겠지요

당신을 보고 싶어도 나는 갈 수 없지만

당신이 원하시면 언제라도 오셔요

당신이 머물고 싶은 만큼 머물다 가셔요

나는 팔도 다리도 없으니 당신을 잡을 수 없고

잡을 힘도 마음도 내겐 없답니다

날 버리시면 어쩌나 생각진 않지만

이제나저제나 당신 오는 곳만 바라보니

첩첩 가로누운 산들이 눈사태처럼 쏟아집니다


- 시집『그 여름의 끝』(문학과지성사, 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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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해 12월 이사하고서 겨를이 없어 아직 책 정리를 제대로 못했다. 집을 절반으로 줄인 관계로 버릴 건 버리고 박스에 넣어 처박아둘 것은 두었는데도 좁은 서가에는 책들이 어지럽게 흩어져 있다. 우선 시집은 따로 정리할 요량에 지리멸렬하게 누워 쌓인 책들을 주섬주섬 가려내는데 한 시집에 눈길이 머물렀다. 그 전에도 출처를 알지 못한 채 내 집으로 흘러들어온 시집이 있고, 이해인의 '민들레 영토' 등 누군가로 부터 선물로 받은 시집도 있긴 있었지만, 내가 직접 돈을 지불하고 황동규의 시집과 함께 최초로 구입한 이성복의 시집이었다. '남해 금산'에 이은 이성복의 제3시집 '그 여름의 끝'을 두고 평론가 남진우는 소월과 만해의 시적 계보를 잇는 연애시의 새 진경이라고 했다. 어쩌면 그런 시평의 영향으로 시집을 구입했을지도 모르겠다.


 시집에는 ‘당신’을 향한 사랑노래가 빼곡하여 독자들도 그를 연애시인으로 자리매김하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남해 금산'의 ‘편지 1’에서 “당신을 사랑합니다, 떠날래야 떠날 수가 없습니다.”라고 이미 토로한 바 있지만, 이 시집의 ‘서시’에서는 “사랑하는 사람이여, 당신이 맞은 편 골목에서 문득 나를 알아볼 때까지 나는 정처 없습니다.” “당신이 나를 알아볼 때까지 나는 정처 없습니다.” “사방에서 새소리 번쩍이며 흘러내리고 어두워지며 몸 뒤트는 풀밭 당신을 부르는 내 목소리 키 큰 미루나무 사이로 잎잎이 춤춥니다.” 이처럼 사유는 더 심화되었고 감정은 더욱 절절해졌다. 시집에 수록된 시들은 기본적으로 ‘나’와 ‘당신’의 관계가 바탕 되어 ‘당신’의 실재와 부재 사이에 내재한 삶의 비밀을 캐물어 가는 사랑노래였다.


 나의 삶에는 부재하는 당신이라는 그리움의 존재, 그리고 이 같은 그리움이 삶을 흐르게 한다는 사실, 흐르는 삶의 길 위에서 내가 당신을 향해 부르는 사랑노래. ‘숨길 수 없는 노래 2’에서도 “아직 내가 서러운 것은 나의 사랑이 그대의 부재를 채우지 못했기 때문”이며, “나의 사랑이 그대의 부재를 채우지 못하면 서러움이 나의 사랑을 채우리라”고 했다. 사랑은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 그리움이며, 그 그리움은 기다림으로, 기다림은 때때로 서러움의 봉분이 된다. “이제나저제나 당신 오는 곳만 바라보니” 기다리는 동안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혹독한 기다림으로 망부석이 될 도리밖에. 당신의 사랑이 없는 나는 정처 없으므로 의미 없는 삶의 강물 위로 그저 흐를 뿐. 당신 오기만을 기다리며 “첩첩 가로누운 산들이 눈사태처럼 쏟아집니다”


 하지만 다시 읽어보니 이 시는 단지 사랑의 기다림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가 쓰진 시기가 80년대인 점을 환기하고, '그 여름의 끝'이 그렇듯 그 시대의 절망을 상징한다면 그 '기다림'은 희망의 간구일 수도 있겠다. '시인의 산문'에서 시인은 이렇게 말했다. "대체로 우리는 아픔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우리 몸 어딘가가 썩어 들어가는데도 아프지 않다면, 이보다 더 난처한 일이 있을까? 문제는 우리의 아픔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아프게 하는 것들에 있다. 오히려 아픔은 <살아 있음>의 징조이며, <살아야겠음>의 경보라고나 할 것이다. 정신의 아픔은 육체의 아픔에 비해 잘 감지되지 않기 때문에, 우리의 정신은 병들어 있으면서 알아채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정신의 아픔, 그것만 해도 다행이 아닐 수 없다. 자신이 병들어 있음을 아는 것은, 치유가 아니라 할지라도 치유의 첫 단계일 수는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아픔만을 강조하게 되면, 그 아픔을 가져오게 한 것들을 은폐하거나 신비화하게 될지도 모른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자신을 속이지 않고 얻을 수 있는 하나의 진실은 우리가 지금 <아프다>는 사실이다. 그 진실 옆에 있다는 확실한 느낌과, 그로부터 언제 떨어져나갈지 모른다는 불안한 느낌의 뒤범벅이 우리의 행복감일 것이다. 망각은 삶의 죽음이고, 아픔은 죽음의 삶이다." 미쳐 돌아가고 있는 이즈음의 '눈사태'같은 절망들에 많이 아프다.


 염치없고 실마리 없음에도 내게도 사랑이 오긴 오겠는지, '기다림'은 유효한 것인지. 칼릴 지브란의 ‘예언자’는 큰 소리로 말했다. ‘사랑이 그대들에게 따라오라 손짓하면 주저 말고 그를 따라가라’ ‘그 길이 비록 험하고 가파를지라도 사랑의 날개가 그대들을 감싸 안을 때면 모든 것을 맡기라’ 사랑은 사랑으로 충분하며 완전하리라. 그래서 ‘사무치는 그리움 때문에 사랑의 아픔이 무엇인지 알게 되기를’ ‘진정으로 사랑하였기에 상처받게 되기를’ ‘상처로 피 흘리면서도 사랑을 위하여 마음은 늘 기쁨에 차 있기를...’ 별로 먼지가 앉은 것 같진 않았으나 '그 여름의 끝'을 두어 번 툭툭 털어 서가의 가장 잘 보이는 선반에 꽂아두었다.


권순진

 

   May it be / Enya (반지의 제왕 O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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