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던진 물수제비가 그대에게 건너갈 때/ 권혁웅

 

 

그날 내가 던진 물수제비가 그대에게 건너갈 때

물결이 물결을 불러 그대에게 먼저 가 닿았습니다

입술과 입술이 만나듯 물결과 물결이 만나

한 세상 열어 보일 듯했습니다

연한 세월을 흩어 날리는 파랑의 길을 따라

그대에게 건너갈 때 그대는 흔들렸던가요

그 물결무늬를 가슴에 새겨 두었던가요

내가 던진 물수제비가 그대에게 건너갈 때

강물은 잠시 멈추어 제 몸을 열어 보였습니다

그대 역시 그처럼 열리리라 생각한 걸까요

공연히 들떠서 그대 마음 쪽으로 철벅거렸지만

어째서 수심은 몸으로만 겪는 걸까요

내가 던진 물수제비가 그대에게 건너갈 때

이 삶의 대안이 그대라 생각했던 마음은

오래 가지 못했습니다 없는 돌다리를

두들기며 건너던 나의 물수제비,

그대에게 닿지 못하고 쉽게 가라앉았지요

그 위로 세월이 흘렀구요

물결과 물결이 만나듯 우리는 흔들렸을 뿐입니다


- 시집「황금나무 아래서」(문학세계사.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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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디 가서 앞에 잔잔한 수면이 있고 주위에 돌이 있으면 남자들은 물수제비를 한 번씩 떠보는 것인데요. 그것도 곁에 여성동무라도 있다면, 사이드암스로로 던지는 어깨에 유난스레 힘이 들어가는 법이지요. 아시겠지만 이건 돌팔매질과는 다르고요, 유년시절 추억의 놀이로만 한정된 아이템도 아니지요. 

 

 조용히 흐르는 강물에 힘껏 던졌던 돌이 수면 위를 찰방찰방 긴 곡선으로 물수제비가 원활하게 떠질 때면, 당연히 기분도 좋아지는데요. 그대를 향해 언더스로우로 던진 내 마음이 우아하게 그대의 가슴에 연착륙되는 것 같아 썩 흐뭇해지기도 하는 것이지요. ‘입술과 입술이 만나듯 물결과 물결이 만나 한 세상 열어 보일 듯’ 말입니다.

 

 스밈과 번짐으로 ‘내가 던진 물수제비’ ‘그대에게 건너갈 때’ ‘그대는 흔들렸던가요’ 내 마음 같이 ‘그 물결무늬를 가슴에 새겨 두었던가요’ 이제 다시 그 마음을 좇아 강가로 나가 그리움을 던져 봅니다. 그때 생각하며 납작한 비행접시를 닮은 돌멩이 하나 주워듭니다. ‘공연히 들떠서 그대 마음 쪽으로 철벅거려’보는 것인데요.

 

 물결과 물결이 파문을 일으키며 ‘잠시 멈추어 제 몸을 열어 보였지만’ 점점이 사라지는 말없음표처럼 흐르는 강물은 이내 개의치 않고 무심히 흘러갑니다. 내 사랑도 넓게 파문을 내지 못하고 순간 수직으로 잠기었을 겁니다. 그대에게 가닿기 전에 세월은 흘렀고요. 그렇게 ‘물결과 물결이 만나듯 우리는 흔들렸을 뿐’이었겠지요.

 

 

ACT4

 


출처 : 시하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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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춘이 엄마/ 윤제림

 


재춘이 엄마가 이 바닷가에 조개구이 집을 낼 때

생각이 모자라서, 그보다 더 멋진 이름이 없어서

그냥 '재춘이네' 라는 간판을 단 것은 아니다

재춘이 엄마뿐이 아니다

보아라, 저/ 갑수네, 병섭이네, 상규네, 병호네,

 

재춘이 엄마가 저 간월암(看月巖) 같은 절에 가서

기왓장에 이름을 쓸 때

생각나는 이름이 재춘이 밖에 없어서

'김재춘'이라고만 써놓고 오는 것은 아니다

재춘이 엄마만 그러는게 아니다

가서 보아라, 갑수 엄마가 쓴 최갑수, 병섭이 엄마가 쓴 서병섭,

상규엄마가 쓴 김상규, 병호 엄마가 쓴 엄병호,


재춘아. 공부 잘해라!


- 시집 <그는 걸어서 왔다> (문학동네,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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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년 전 ‘당신이 행복입니다’란 SK그룹의 기업이미지광고가 있었다. 그기에 재춘이네가 나오고 이 시의 내용이 소개되었다. 광고멘트는 ‘조개구이 집을 낼 때 생각이 모자라서, 그보다 멋진 이름이 없어서 그냥 재춘이네라는 간판을 단 게 아니다. 자식의 이름으로 사는 게 그게 엄마 행복인 게다 …’ 이 광고는 '2009 올해의 좋은 광고상'에 선정되었다.

 

 한적한 항구마을 바닷가 조개구이 집, 아들의 이름을 걸고 장사하는 어머니의 밝은 얼굴이 시청자와 독자로 하여금 아릿한 감동을 자아내게 했고 참신하다는 반응을 얻었던 것이다. 재춘이네 구이집이 실재하는지는 잘 모르겠고, 다만 이 시를 쓴 윤제림 시인이 바로 광고카피라이터이기 때문에 아마 그 연줄로 시가 차용된 게 아닐까 짐작된다. 

 

 과거 여성들은 시집가면 자신이 태어난 고향 이름을 붙여 택호로 불리거나 아이가 태어나면 누구의 엄마로 불리었다. 특히 자식 이름 앞에 두고 아무개네로 불리는 우리 어머니들의 삶을 자식에 대한 사랑으로 미화시킨 면도 있는데 지금의 관점으로는 자기 이름을 내세우지 못한 그 전통이 고루하고 못마땅하게 여겨지기도 할 것이다.

 

 자식 사랑의 농도야 예나 지금이나 별반 차이가 있을까만 자기 이름 대신 누구네 엄마로 자꾸 불리다보면 부지불식간 자식이 전부라는 인식도 함께 배어들 것이다. 하지만 이것을 여권신장이란 명분으로 가차 없이 폐기해야 옳은지는 역시 의문이다. 이 시는 그 의문에 대해 따뜻한 시선으로 답하고 있다.

 

 누구 엄마로 불리는 걸 아무런 저항 없이 수용하여 자식의 이름으로 사는 게 엄마의 행복이라고 증거 하는 것이다. 어디 엄마들 만일까. 세상의 많은 착한 아빠들도 이에 호응하여 간판제목에 ‘갑수네, 병섭이네, 상규네, 병호네’가 붙은 것 아니겠나. 다 그 자식들이 한 집안의 대표브랜드란 인식이 통했기 때문이리라.

 

 

ACT4

 


출처 : 시하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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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연

 

정채봉


 

나는 없어져도 좋다
너는 행복하여라
없어진 것도 아닌
행복한 것도 아닌
너와 나는 다시 약속한다
나는 없어져도 좋다
너는 행복하여라


 


인 연

 

도종환    



너와 내가 떠도는 마음이었을 때
풀씨 하나로 만나
뿌린 듯 꽃들을 이 들에 피웠다
아름답던 시절은 짧고
떠돌던 시절의 넓은 바람과 하늘 못 잊어
너 먼저 내 곁을 떠나기 시작했고
나 또한 너 아닌 곳을 오래 헤매었다
세월이 흐르고
나도 가없이 그렇게 흐르다
옛적 만나던 자리에 돌아오니
가을 햇볕 속에 고요히 파인 발자국
누군가 꽃 들고 기다리다가 문드러진 흔적 하나
내 걸어오던 길쪽을 향해 버려져 있었다





인연 

 

이외수


                  

안개꽃은
싸락눈을 연상시킵니다
그대가 싸락눈 내리는 날
거리에서
고백도 하기 전에 작별한 사랑은
어느 날 해묵은 기억의 서랍을 떠나
이 세상 어딘가에 안개꽃으로 피어나게 됩니다
아무리 방황해 보아도
겨울은 끝나지 않습니다
불면 속에서
도시는 눈보라에 함몰하고
작별은 오래도록 아물지 않은 상처가 됩니다
그러나 정말로
이 세상 모든 사랑이
꽃으로 피어나게 된다면
그대가
싸락눈 내리는 날 거리에서
고백도 하기 전에 작별한 사랑은
아무래도 안개꽃으로 피어나게 되지 않을까요





인연

 

조선윤 
                         

세상에 태어나서
가는 길은 다르지만
만나고 헤어지는 만남 속에
스치는 인연도 있고
마음에 담아두는 인연도 있고
잊지 못할 인연도 있다


언제 어느 때 다시 만난다 해도
다시 반기는 인연 되어
서로가 아픔으로 외면하지 않기를  
인생길 가는 길에
아름다운 일만 기억되어
사랑하고 싶은 사람으로 남아있기를



 

인연

 

박건호

                     

바람은 구름을 흐르게 하고
구름은 하늘을 흐르게 하고
하늘은 강물을 흐르게 하고
강물은 역사를 흐르게 하고
역사는 사람을 흐르게 하고
사람은 바람을 흐르게 하고





인연

 

김지헌


                          
눈 비벼 크게 떠 보아도
보이지 않는
질긴 끈 하나
너는 나의
태초의 바람
산맥을 가르고
바다를 가로 질러 내게로 왔구나


 


인연설

 

한용운 
                    

함께 영원히 있을 수 없음을
슬퍼 말고
잠시라도 같이 있을 수 없음을
노여워말고
이만큼 좋아해 주는 것에 만족하고
나만 애태운다고 원망 말고
애처롭기까지 한 사랑할 수 없음을
감사하고
주기만 하는 사랑이라 지치지 말고
더 많이 줄 수 없음을 아파하고
남과 함께 즐거워한다고
질투하지 말고
그의 기쁨이라 여겨 함께
기뻐할 줄 알고
이룰 수 없는 사랑이라 일찍
포기하지 말고
깨끗한 사랑으로 오래 간직할 수 있는
나는 당신을 그렇게 사랑하렵니다.





꽃잎 인연

 

도종환

                       

몸끝을 스치고 간 이는 몇이었을까
마음을 흔들고 간 이는 몇이었을까
저녁하늘과 만나고 간 기러기 수만큼이었을까
앞강에 흔들리던 보름달 수만큼이었을까
가지 끝에 모여와 주는 오늘 저 수천 개 꽃잎도
때가 되면 비 오고 바람 불어 속절없이 흩어지리
살아 있는 동안은 바람 불어 언제나 쓸쓸하고
사람과 사람끼리 만나고 헤어지는 일들도
빗발과 꽃나무들 만나고 헤어지는 일과 같으리



 

스치는 인연


 

배은미                       

 

스쳐가야 한다면
그래야 만이 그도 살고 나도 살길이라면
아니, 나는 아니더라도
그만이라도 살수 있다면
스쳐가겠습니다
보낼수 없어 놓을 수 없어
그렇게 사랑한다고 잡고 싶지만
우리에게 허락된 인연이 아니라서
정녕 그가 나락으로 떨어지게 된다면
스쳐가겠습니다
그러니 부디
그 만이라도 거두어 보살펴 주십시오

 

 

 ♬ 그 사람 / 이승철 ♬



 

 

가정 / 박목월

 


지상에는

아홉 켤레의 신발

아니 현관에는 아니 들깐에는

아니 어느 시인의 가정에는

알전등이 켜질 무렵을

문수(文數)가 다른 아홉 켤레의 신발을.

 

내 신발은

십구문반(十九文半)

눈과 얼음의 길을 걸어

그들 옆에 벗으면

육문삼(六文三)의 코가 납작한

귀염둥아 귀염둥아

우리 막내둥아

 

미소하는

내 얼굴을 보아라

얼음과 눈으로 벽(壁)을 짜올린

여기는 지상

연민한 삶의 길이여

내 신발은 십구문반(十九文半).

 

아랫목에 모인

아홉 마리의 강아지야

강아지 같은 것들아.

굴욕과 굶주림과 추운 길을 걸어

내가 왔다.

아버지가 왔다

아니 십구문반의 신발이 왔다.

아니 지상에는

아버지라는 어설픈 것이

존재한다.

미소하는

내 얼굴을 보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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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족에 대한 책임감에 눌려 고단한 삶을 살아가지만 동시에 그들에 대한 애정이 진하게 배인 시는 중학교 2학년 국어교과서에도 소개되어 있다. 시에서 '내 신발'이 어떤 의미인지를 묻는 질문 따위가 더러 시험문제로 출제된다. 신발이란 제재는 현대시에서 자주 등장하는 편인데 대개는 살아온 인생과 고난의 과정을 상징한다. 여기서도 아버지의 삶이 신발을 통해 형상화되었다.

 

 요즘은 이런 용어를 전혀 듣지 못하는데 신발의 ‘문수’는 신의 크기를 나타내는 단위다. 1문은 약 2.4cm로 특히 설이 가까워올 무렵의 신발가게에서는 분답하게 오갔던 흥정의 수치였다. 아이들의 손을 붙들고 나온 어머니는 발에 딱 맞는 문수보다는 신발의 앞부분을 쿡 눌러보고 늘 한 치수 여유가 있는 신발을 고르곤 했다. 아이를 대동 못한 어머니들은 뼘으로 잰 길이를 맞추어보거나 미리 잰 끈을 갖고 와서 신발에다 대는 모습도 볼 수 있었다.

 

 가장으로서의 아버지의 길은 언제나 ‘눈과 얼음의 길’이었으며 가팔랐다. ‘굴욕과 굶주림과 추운 길을 걸어’ 당도한 문간에서 올망졸망한 신발 아홉 켤레를 보며 울컥 자녀들과 가정을 굳게 지켜나가겠다는 다짐을 한다. ‘십구문반’이나 되는 큰 신발임에도 어설프고 후줄근한 자신을 연민하지만 식솔들에겐 구차한 변명을 늘어놓고 싶지 않다. 숨어서 미소하며 희망의 나래를 퍼득인다. 그것이 아버지의 심정이고 그 시대 아버지의 권위였던 것이다.

 

 5~60년대의 어린 시절을 보낸 사람이라면 대개 그때의 남루와 가족 사랑을 떠올리며 유년의 뜰에 가닿을 것이다. 아이들이 사랑스럽고 가난할수록 가정에 대한 애틋한 정이 더 물씬해지는 법이다. 그때도 그랬을 것이다. 어느 해 설을 며칠 앞두고 자고 있는 나를 깨우지 않고 몰래 손뼘으로 잰 문수로 신발을 사주셨던 어머니와 실물기억으론 한 번도 내 손을 잡아준 적이 없는 아버지께서 생애 처음 끈 달린 운동화의 첫 끈을 묶어주셨던 기억이 시를 읽으면서 몇 번이나 오버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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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버지 - 장사익

출처 : 시하늘
글쓴이 : 제4막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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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속의 바다 건너 / 유안진


풀잎 하나에 가을이 내려와 주고

비누 방울에도 무지개가 걸려 주는 이 땅에 태어나

병 되는 줄 알면서도 사랑을 하고

죽을 줄 알면서도 살아들 가는 중에 나도 끼여 있다

인생을 사느라 인생을 팔았고

시간을 아끼느라 시간을 낭비했던

열정은 수난의 맨발이었고

그리움은 눈먼 황홀이었다

여기를 보고 있어도 저기를 보는

뜬눈보다 보다 멀리 보는 눈먼 큰 눈을

딱부리 사팔뜨기 사발눈이라고들 하지만

눈 속에 출렁이는 바다는 아무도 보지 못한다

밤마다 외눈등대에는 불이 켜지고

태풍이 불고 파도가 끓어 넘쳐 뒤집히기도 한다

나의 왕국은 여기 아닌 끓는 바다건너 저기니까

나의 시대는 훗날 언제이니까

눈동자 너머의 저기로 가는 희망 봄

새 우주 새 행성의 신대륙으로 가는 길

물길 외에는 다른 길이 없다

뜨거운 내 눈물, 그 외길 밖에는,

 

- 시집<거짓말로 참말하기>(천년의시작,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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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란지교를 꿈꾸었던 유안진 시인의 좀 ‘연식’이 지난 시점에서 쓴 삶에 대한 성찰이다. 그리고 이 시는 구도자로서의 삶과 문학을 일치시키고자 평생을 애쓰신 구상 시인을 기리고자 제정한 <구상 문학상> 제2회 본상 수상자의 자선 대표작이다. 되도 않은 말을 잇기 보다는 상의 심사위원장인 문학평론가 임헌영의 심사평을 붙이는 게 더 마땅하다 싶어 일부를 소개한다.

 

 “1970년 첫 시집 <달하>에서 ‘내명(內命)한 사람’으로‘끝없는 겸손과 여성적인 섬세한 몸가짐’의 시인이란 평을 시의 스승 박목월로부터 얻은 유안진 교수의 전공은 교육심리학, 그 중 한국전통 유아 및 아동교육이다. 저 면면한 전통문화에 대한 심도 있는 탐구를 통하여 유 시인은 고전적인 정서에 바탕 삼은 현대적인 삶의 조화를 추구하면서 문학세계를 구축해 왔다. 유안진의 시는 인간과 사물과 신을 두루 사랑하려다 겪은 실패와 절망과 분노의 부끄러움이 준 ‘아픔’을 치유하려는 진아(眞我)찾기이다. 그 도정에서 유 시인은 ‘구름의 딸’이자 ‘바람의 연인’으로 ‘세상의 누이’가 되고자 몸을 한껏 낮춘다. 아픔을 지닌 모든 존재와 구원을 위한 영혼의 방생(放生)을 이루고자 ‘대승의 경지'에 이르는‘지도책(知道冊)’, 그게 바로 유안진의 시정신이다.”

 

 수상자인 유안진 시인은 수상소감에서 ‘지금 여기’ 아닌 ‘훗날 거기’를 지향하며, 거기가 하느님 나라거나 꿈속 이상향이거나간에 분명 현재의 상태는 아니라는 생각으로 시를 써왔다면서 상금으로 받은 5천만 원의 절반을 그간 조금씩 지원해 왔던 장애인들의 집<안동재활원>에 보내겠다고 말했다.

 

 

ACT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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