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 / 박목월

 


지상에는

아홉 켤레의 신발

아니 현관에는 아니 들깐에는

아니 어느 시인의 가정에는

알전등이 켜질 무렵을

문수(文數)가 다른 아홉 켤레의 신발을.

 

내 신발은

십구문반(十九文半)

눈과 얼음의 길을 걸어

그들 옆에 벗으면

육문삼(六文三)의 코가 납작한

귀염둥아 귀염둥아

우리 막내둥아

 

미소하는

내 얼굴을 보아라

얼음과 눈으로 벽(壁)을 짜올린

여기는 지상

연민한 삶의 길이여

내 신발은 십구문반(十九文半).

 

아랫목에 모인

아홉 마리의 강아지야

강아지 같은 것들아.

굴욕과 굶주림과 추운 길을 걸어

내가 왔다.

아버지가 왔다

아니 십구문반의 신발이 왔다.

아니 지상에는

아버지라는 어설픈 것이

존재한다.

미소하는

내 얼굴을 보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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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족에 대한 책임감에 눌려 고단한 삶을 살아가지만 동시에 그들에 대한 애정이 진하게 배인 시는 중학교 2학년 국어교과서에도 소개되어 있다. 시에서 '내 신발'이 어떤 의미인지를 묻는 질문 따위가 더러 시험문제로 출제된다. 신발이란 제재는 현대시에서 자주 등장하는 편인데 대개는 살아온 인생과 고난의 과정을 상징한다. 여기서도 아버지의 삶이 신발을 통해 형상화되었다.

 

 요즘은 이런 용어를 전혀 듣지 못하는데 신발의 ‘문수’는 신의 크기를 나타내는 단위다. 1문은 약 2.4cm로 특히 설이 가까워올 무렵의 신발가게에서는 분답하게 오갔던 흥정의 수치였다. 아이들의 손을 붙들고 나온 어머니는 발에 딱 맞는 문수보다는 신발의 앞부분을 쿡 눌러보고 늘 한 치수 여유가 있는 신발을 고르곤 했다. 아이를 대동 못한 어머니들은 뼘으로 잰 길이를 맞추어보거나 미리 잰 끈을 갖고 와서 신발에다 대는 모습도 볼 수 있었다.

 

 가장으로서의 아버지의 길은 언제나 ‘눈과 얼음의 길’이었으며 가팔랐다. ‘굴욕과 굶주림과 추운 길을 걸어’ 당도한 문간에서 올망졸망한 신발 아홉 켤레를 보며 울컥 자녀들과 가정을 굳게 지켜나가겠다는 다짐을 한다. ‘십구문반’이나 되는 큰 신발임에도 어설프고 후줄근한 자신을 연민하지만 식솔들에겐 구차한 변명을 늘어놓고 싶지 않다. 숨어서 미소하며 희망의 나래를 퍼득인다. 그것이 아버지의 심정이고 그 시대 아버지의 권위였던 것이다.

 

 5~60년대의 어린 시절을 보낸 사람이라면 대개 그때의 남루와 가족 사랑을 떠올리며 유년의 뜰에 가닿을 것이다. 아이들이 사랑스럽고 가난할수록 가정에 대한 애틋한 정이 더 물씬해지는 법이다. 그때도 그랬을 것이다. 어느 해 설을 며칠 앞두고 자고 있는 나를 깨우지 않고 몰래 손뼘으로 잰 문수로 신발을 사주셨던 어머니와 실물기억으론 한 번도 내 손을 잡아준 적이 없는 아버지께서 생애 처음 끈 달린 운동화의 첫 끈을 묶어주셨던 기억이 시를 읽으면서 몇 번이나 오버랩되었다.

 

 

ACT4

 

 아버지 - 장사익

출처 : 시하늘
글쓴이 : 제4막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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