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고은사에서

 

김필녀

 

 

댕그랑

댕그랑

무아의 경지에서만 낼 수 있는

저 청량한 소리

 

비울 겨를도 없이

다시 채워지는 욕심

언제쯤이면 말끔히

비워낼 수 있을까

 

비울수록 더 큰 울림을 주는

풍경소리에 귀 기울이며

옹이 박힌 상처들 하나둘 꺼내

겨울바람에 말끔히 헹구어본다




- 200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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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래깃국

 

김필녀

 

 

입동 무렵

사자갈퀴 같이 무성하게 자란

시퍼런 무청 잘라내어

뒤안 빨랫줄에 척척 걸쳐놓고

바지랑대로 높이 받쳐 놓았다

매서운 겨울바람에

얼었다 녹았다 반복하며

힘든 끈 부여잡고 몸부림치더니

푸르던 옷은 무채색으로 변하고

바스러질 것 같이 가뿐해졌다

함박눈 내리던 날

커다란 가마솥에 푹 삶아

날콩가루 묻혀 국을 끓이고

된장 넣어 조물조물

늦은 저녁상을 차린다

무슨 맛으로 먹을까 외면하던

구수한 고향 맛을 알기까지

육십년이 걸렸다

젊은 시절 아낌없이 다 내려놓고

거친 세파에 말라비틀어지다보면

거듭나 비상 할 수 있으리

 

- 190112

 

 

 

 

 

 

무궁무진한 생강의 효능

 

김필녀

 

 

첫눈이 온다는 절기 소설(小雪)이 지나고 이제 본격적인 한파가 시작될 전망이다. 이렇게 갑자기 기온이 내려가면서 목감기가 잦고 손발이 차가워 고생하고 있다면 따끈한 생강차 한 잔을 마시는 것도 도움이 된다.

 

생강은 몸을 따뜻하게 하므로 손발이 차가워지는 요즘 같은 시기에 먹으면 더욱 좋다. 농사짓느라 바쁜 나를 대신해서 올해도 음식솜씨 좋은 친구가 편강과 생강차를 만들어 주어 요긴하게 먹고 있다. 뿌린 것도 없는데 인복이 더 많아서 늘 감사한 마음이다.

 

가을걷이도 거의 끝이 났다. 메주콩 타작이 남았지만 수확해서 쌓아놓은 콩 가리를 쳐다보는 것만으로 배가 부르다. 지난여름 유례없는 가뭄과 폭염을 견디며 농작물을 건사하느라 힘이 들었는지 추수를 대충 마치고 나니 내 자신에게 상장이라도 주고 싶은 심정이다.

 

숨 고를 새도 없이 김장철이 눈앞에 다가왔다. 땅이 얼기 전에 무부터 뽑아 친지와 이웃에 나눔을 하고 남은 무는 썰어 볕에 말려서 곤짠지 담글 준비를 해놓았다. 배추도 속이 차면서 맛깔 나는 김장김치로 거듭날 날을 기다리고 있다. 속이 노란 배추고갱이로 배추 적을 부쳐 먹는 여유도 부려본다.

 

날씨 영향으로 올해는 농산물 가격이 많이 올랐다. 과일과 채소를 비롯해서 남아돌아 쌀 막걸리를 만들었던 쌀값마저 올라 서민들 살림살이가 더욱 팍팍해졌다. 김장을 담그는데 없어서는 안 되는 양념과 부재료 가격도 만만치가 않다. 그래도 추운 겨울을 날려면 김장이라도 넉넉하게 해놓아야 등 따시고 배가 부른데 오른 물가 때문에 주부들 지갑이 쉬이 열리지 않는다고들 한다.

 

농산물 가격이 오르면 농부들 곳간이 그득해야 하는데 그렇지를 못하다. 풍년이 들어 가격이 적당해야 판매도 잘되고, 소비자들도 구매를 많이 하는데 흉년으로 가격만 오른 셈이다. 이상기온으로 흉년이었던 국산 생강 가격이 김장철이 다가오자 고공행진을 거듭한다.

 

생강은 일반농가에서는 저장을 못하는 까다로운 작물이라 수확과 동시에 판매까지 마쳐야한다. 아정농원에서는 매년 수확한 생강의 대부분을 직거래로 판매하는데 올해는 양이 적어 일찍 판매를 마감하게 되었다. 여러 사정으로 미처 생강을 구입하지 못한 단골 고객으로부터 전화가 많이 왔지만 판매할 생강이 많이 부족했다.

 

생강 농사를 지은 지도 꽤 오래되었다. 특히 안동은 생강주산지며 품질을 철저하게 관리하고 있어 인기가 많아 수입이 짭짤한 효자 작물이다. 보통 10월 중순경부터 수확이 시작되지만 한 달 전부터 예약주문이 들어오기 시작한다. 올해는 생강 작황이 좋지 않아 가격 결정을 하는데 시간이 많이 걸려 판매기간이 짧았지만 가격이 좋아서 예년보다 수입은 더 짭짤했다.

 

생강의 효능은 무궁무진하다. 생강 마니아들은 햇생강이 날 때 많이 구입해서 편강이나 생강청, 생강효소를 담거나 말려서 상비약처럼 보관하면서 건강을 지키고 있다. 제초제를 치지 않고 잡초를 손으로 뽑으며 농약대신 미생물로 생강농사를 짓고 있는 것을 아는 단골 고객이 많아 해마다 선착순 예약판매를 하고 있을 만큼 자리가 잡혔다.

 

생강의 원산지는 인도로 그 역사는 생각보다 오래됐다. 3000년의 역사를 가진 인도 전통 의학서 '아유르베다(Ayurveda)'에서는 생강을 신이 내린 약재로 칭하며 만병통치약으로 사용해왔다. 또 철저한 채식주의자로 알려진 피타고라스(BC580~BC500 추정)도 소화를 잘 되게 하거나 장내 가스를 제거하기 위해 생강을 섭취했다.

 

유럽에서 페스트가 유행하면서 영국에선 런던 시민 4분의 1에 달하는 10만 명이 목숨을 잃었는데, 평소 생강을 자주 먹은 사람은 사망률이 현저히 낮았다는 얘기가 돌았다. 그래서 이 사실을 알게 된 헨리 8(1491~1547)가 런던 시장에게 진저브레드(생강빵)를 보급하도록 지시했고, 이를 계기로 영국을 비롯한 서양에서 진저쿠키나 진저에일, 진저비어 등 생강이 들어간 기호식품을 즐기게 되었다고 전해진다.

 

생강의 매운맛을 내는 주성분은 진저롤(gingerol)과 쇼가올(shogaols)이다. 이들은 강력한 항염증, 항산화 작용을 해 감기나 기관지염 등의 원인인 병원성 세균에 대한 살균효과가 뛰어나다. 장염 비브리오균을 살균하고 고래회충으로 알려진 아니사키스를 구충하는 효과까지 있어 생선회와 함께 먹으면 식중독 및 기생충 감염을 방지하는 효과도 있다.

 

진저롤과 쇼가올은 통증 완화에도 도움이 된다. 6주 동안 매일 생강 3g을 섭취한 여자 운동선수들이 그렇지 않은 선수들보다 근육통이 훨씬 덜하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 한 전문지에서는 생리불순을 겪는 여성들에게 생강가루를 복용하게 했더니 생리통 완화에 상당한 효과가 있었다고 밝히기도 했다.

 

감기 예방의 효능은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내용이다. 매운맛을 내는 성분이 혈관을 확장시켜 혈액 순환을 촉진하고 몸을 따뜻하게 만들어 주기 때문에 초기 감기 완화에 좋다. 그 밖에 혈액순환을 원활하게 하고 나쁜 콜레스테롤인 LDL 콜레스테롤 수치를 낮추는데도 도움이 된다.

 

아무리 좋은 생강도 가려서 섭취해야 한다. 열이 많아 땀을 많이 흘리는 체질은 따뜻한 성질인 생강이 몸에 맞지 않을 수 있다. 또 지나치게 많이 섭취할 경우 위산 과다 분비로 위 점막이 손상될 수 있으니 주의해야 한다. 생강은 혈관확장 효과가 뛰어나기 때문에 출혈이 있는 경우엔 섭취를 피하는 것이 좋다.

 

우리 몸에 좋은 생강농사를 짓고 있는 것에 은근히 자부심도 가지고 있다. 폭염이 한창일 때 뜨거운 햇볕에 타서 죽어가는 생강을 살리려고 차광막을 치던 때를 생각하니 생강 한 톨이 귀하게만 느껴진다. 내년에는 풍년이 들어 건강한 먹거리를 찾는 많은 분들께 적절한 가격에 보급할 수 있기를 바래본다.()

 

 

- 격월간지 '향토문화의 사랑방 안동' 2018년 11,12월호(통권 174호)

- 김필녀시인의 농장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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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물고추로 장아찌를 담그며

 

김필녀

 

가을이다. 물러서지 않을 것 같던 여름도 선들바람 앞에서는 슬쩍 꼬리를 내리고 말았다. 시작이 있으면 끝도 있는 법. 40도를 오르내리던 끔찍한 폭염을 견디어 낸 삼라만상이 그저 대견할 따름이다.

 

9월은 달빛이 곱다고 해서 가월(嘉月)’이란 예쁜 이름을 가진 달이다. 여름에서 가을로 계절이 바뀌는 철이며 우리 민족의 최대 명절인 추석이 들어 있어 더욱 풍성하게 다가온다. 여름이 제철이었던 곡식은 끝물이고, 가을이 제철인 곡식은 영양분을 차곡차곡 채워가고 있다.

여름작물인 고추도 이제는 끝물이다. 긴 가뭄과 폭염으로 목이 타들어갈 때마다 밤낮으로 물을 대던 주인의 발자국 소리를 들었던 것일까. 보답이라도 하려는 듯이 자고 일어나면 빨갛게 익은 고추를 화수분처럼 끊임없이 매달아 주었다.

 

시골로 이사를 와서 처음으로 고추 농사를 짓던 날들이 떠오른다. 넓은 옥상에서 태양초를 만들어 시집간 딸도 주고, 사돈댁에 선물도 하고, 형제들과 나눔을 하고 남으면 판매까지 하겠다는 희망에 부풀었다. 그저 빨간 고추를 따서 햇볕에 잘 말리기만 하면 되는 줄 알았다.

 

한 번도 고추를 심어본 경험이 없는 뿔농군 부부는 겁도 없이 300평이나 되는 밭에 고추를 심기로 결정했다. 고추 농사에 대한 대부분의 지식은 인터넷을 통해 터득하면서 박사가 다 된 듯이 일사천리로 진행시켰다. 안동장날, 품종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모종을 사와서 심기 시작했다.

 

인터넷으로 고추 심는 방법을 터득했으니 모든 과정이 어설펐다. 지주를 세우고 고추 대궁이 커갈 때마다 줄을 매는 일도 어려웠다. 삼복더위에 고추고랑에 앉아서 붉은 고추를 따는 일은 더욱 힘이 들었다. 약은 왜 그리 자주 쳐야하는지, 태양초를 만들겠다고 옥상에 고추를 널 때마다 비는 왜 그리 주기를 잘도 맞춰 오는지 짜증만 더해갔다. 고추밭에 가기만 하면 다투기 일쑤였다.

 

고추 농사가 얼마나 힘든지 실제로 농사를 지어본 뒤에야 깨닫게 되었다. 그 뒤로 5년 동안 고추를 심지 않았는데 농사를 지으면서 고추를 매년 사먹는 일이 마뜩찮아서 올해 재도전을 했다. 몇 년 동안 알게 모르게 농사에 대한 노하우가 많이 쌓였던 까닭인지 예전보다 많이 수월했다. 무엇보다 고추 가격이 좋은데다 풍년까지 들어 효자 작물이 되어 힘도 덜 들었다.

 

농사짓는 주변 여건도 5년 전보다 많이 좋아졌다. 붉은 고추를 딸 때 의자에 앉아서 앞으로 밀고 가면서 따는 고추 수확기도 개발되어 편리해졌다. 넓은 양산으로 햇볕도 가릴 수 있고 무거운 고추 포대를 일일이 들고 다니지 않아도 되어 일의 능률도 좋아졌다. 덕분에 연세 많은 할머니들도 앉아서 쉽게 고추를 딸 수 있어 일손 구하기도 쉬웠다. 그러나 고추 따는 일은 여전히 힘든 일이라서 품삯이 수월찮게 들어갔다.

 

머지않아 고추도 벼처럼 한 번에 기계로 수확하는 시대가 열릴 전망이라고 한다. 정부에서도 밭작물 기계화 촉진정책을 추진하고 있다고 한다. 기계수확에 적합한 품종을 선정하거나 기계수확을 위한 동시성숙 촉진 재배기술 등, 앞으로 많은 과제가 남아있지만 곧 이루어질 전망이라고 한다. 우리 민족에게 쌀만큼 고추도 꼭 필요한 양념으로 많이 소비하고 있으며 일손도 부족하니 빨리 선보일 것 같다.

 

기다릴 때는 안 오던 비가 가을 초입에 장마처럼 내리더니 고추대궁에 다시 물이 올라 꽃을 피웠다. 추석 연휴를 보내고 난 뒤에 고추 대궁을 뽑아 놓으면 빨리 붉어진다고 해서 뽑으려고 보니 꽃 진 자리마다 여린 끝물고추가 주렁주렁 달려 있는 것이 아닌가. 된서리 내리기 전에 붉어질리 없는 끝물고추는 또 다른 쓰임새로 우리 입맛을 돋운다.

 

장아찌와 고추부각, 삭히는 고추는 끝물고추로 만들어야 제 맛이 난다. 가을이 깊어지면 낮과 밤의 기온차가 많이 나면서 과육이 두툼해지고 단맛이 나며 아삭거려 씹는 맛이 일품이다. 고추 잎까지 훑어서 겨우내 먹을 밑반찬을 만들던 친정엄마의 손맛이 그리워서 장아찌를 담그려고 한 자루 따와서 손질을 했다.

 

마지막까지 버릴 것 없이 모두를 내어주는 고추의 쓰임새가 귀하기만 하다. 어쩌면 사람의 일생도 그 모습과 흡사하다는 생각을 해본다. 일생동안 나는 무엇을 남기고 갈 수 있을까. 내가 떠나고 없는 자리에서 남은 가족과 이웃이 부끄럽지 않는 좋은 기억으로 돌아볼지 두려움이 앞선다.

 

우리가 살아가는 날들도 가을 추수와 다를 바 없다. 들녘에서 사라져갈 하찮은 가을고추이지만 여러 가지 쓰임새의 가치를 남긴 것처럼 나의 일생도 그런 모습이고 싶다. 남아 있는 인생길에서 어떻게 자신을 이끌며 살아가야 할지 마음을 가다듬는다.

 

그냥두면 못쓰게 될 끝물고추도 사람의 손을 빌어 훌륭하게 탈바꿈 하는데, 하물며 만물의 영장인 사람으로서의 마지막 모습도 남은 자에게는 본보기가 되는 삶을 남겨야 하지 않겠는가. 무엇 하나 버릴 것 없이 알뜰히 주고 가는 끝물고추를 다듬으며 새로운 인생의 과제를 얻는다.()

 

 

- 격월간지 '향토문화의 사랑방 안동' 2018년 9,10월호(통권 173호)

- 김필녀시인의 농장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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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자삼락(農者三樂)

 

김필녀

 

 

여름은 더워야 제격이라지만 올 여름은 더워도 너무 덥다. 비다운 비 한번 내리지 않았던 마른장마에 이어 폭염이 보름 이상 지속되면서 사람도 산천초목도 축 늘어져 헤어나지를 못하고 있다. 연일 폭염경보 문자가 오고, 한낮에는 농장이나 외출을 자제해 달라는 마을 이장님의 방송이 매일 울려 퍼진다.

 

연노하신 어르신들은 냉방장치가 되어 있는 마을회관 무더위쉼터로 일치감치 출근을 하신다. 시원한 에어컨을 쐬며 이래 살기 좋은 세상이 오리라고 꿈에나 생각했겠느냐며 삼삼오오 모여앉아 어렵던 시절 이야기와 함께 십 원짜리 고스톱도 치면서 더위를 피하신다. 가끔 자제분들이 수박이라도 한통 사다주고 가면 어깨에 힘이 잔뜩 들어가는 어르신들. 집에도 에어컨이 설치되어 있지만 전기요금이 아까워 못 틀고 먼 거리를 걸어서 마을회관으로 모이신다.

 

우리 속담에 깐깐 5, 미끈 6, 어정 7, 건들 8, 동동 9이라는 말이 있다. 바쁜 농번기 5월은 매사 깐깐하게 살펴야 하고, 일하다보면 6월은 미끈하게 지나가고, 어정거리다 7, 건들거리다 8월 농한기를 보내고 나면 가을걷이를 하는 9월에는 동동거린다는 말이다.

 

어정 7, 건들 8이라는 속담처럼 지금쯤은 농부들도 조금은 여유를 찾을 시기다. 장맛비에 쑥쑥 커가는 곡식들을 흐뭇하게 바라보며 풀을 매거나 가끔씩 병충해 방제만 하면 되는 철이다. 그런데 소나기 한줄기도 내리지 않은 채 지속되는 고온으로 인해 타들어가는 곡식들을 건지기 위해 밤낮없이 악전고투를 하고 있다.

 

살인적인 가뭄과 폭염이 어디 농촌뿐이랴. 축산업 피해는 물론 바다 수온까지 높아져 양식업까지 피해가 심각하다고 한다. 이제는 우리나라도 날씨 탓만 하며 하늘만 올려다볼 것이 아니라 점점 아열대기후로 변해가는 날씨에 대한 연구와 대비를 철저하게 세워야 할 것 같다.

 

씨를 뿌리는 재미와 기르는 재미, 거두는 재미를 농부들의 세 가지 즐거움이라고 한다. 이른 봄에 땅을 곱게 갈아 정성껏 씨를 뿌릴 때의 즐거움이란 작은 텃밭이라도 일구어 본 사람이면 다 알 것이다. 무거운 흙을 밀고 올라오는 새싹을 지켜보노라면 삶의 희망이 저절로 솟기도 한다. 하루가 다르게 커가는 농작물을 둘러보며 키우는 재미가 어쩌면 농부들의 즐거움 중에 가장 크다고 할 수 있다. 황금들판에서 여름 내 땀 흘려 내손으로 키운 곡식을 거두는 즐거운 또한 더 말해 무엇 하랴.

 

농부의 세 가지 즐거움에 푹 빠져 살던 남편도 올 여름에는 지쳐가는 모습이 역력하다. 농사는 하늘이 도와줘야 풍년이 든다는 말을 실감하는 듯하다. 좋아서 하는 일이니 누굴 탓하랴. 백지장도 맞들면 낫다고, 부부가 함께 손발을 맞추어 가며 밤낮으로 물을 대며 땀을 흘리고 있으니 이 또한 지나가리라.

 

남편이 이야기하는 농부의 세 가지 즐거움과 함께 요즘에는 맹자의 군자삼락(君子三樂)에 빗대어 농자삼락(農者三樂)이라는 말이 유행이라고 한다. '정년 없는 평생직장의 즐거움, '미래 산업에 도전하는 즐거움, 농업 CEO로서 갑의 인생을 사는 즐거움'을 농자삼락이라고 한다.

 

홀대받았던 농업이 분야 간 상호 융합을 기반으로 하는 4차 산업혁명 시대를 맞아 새롭게 주목받고 있다. 다양한 아이디어로 무장한 젊은이들이 농업 분야로 속속 들어오고 있다. 정보기술(IT)과 새로운 마케팅 기법을 접목하려는 젊은 후계 농들도 늘어나고 있고 기존 농업에 신기술을 접목하거나 틈새시장을 파고들어 소비자들을 끌어들이는 노력도 이어지고 있다.

 

4차 산업혁명 시대를 맞아 농업은 기술과 자본이 결합한 형태로 변화하고 있다. 스마트폰 하나로 농장의 온도와 습도 등 생육조건을 조절할 수 있는 스마트팜 시장이 계속 성장하고 있다. 실제로 청년농업인 스마트팜 자금의 1호 대출자도 전남 담양에서 딸기 농사를 짓는 20대 여성이었고, 꼬마감자 하나로 63억 원의 연매출을 올리는 등 억대 소득을 올리는 분도 젊은 농업인이다.

 

2011년부터 귀농·귀촌 인구가 증가하고 있으며, 2016년에는 40세 미만 젊은 층이 50.1%를 차지할 정도로 농촌에서 자신의 인생을 개척하는 사람이 늘고 있다. 과거에는 농사가 '힘만 들고 소득이 적다'는 선입견이 많았으나 지금은 기술발전으로 남녀 구분 없이 누구나 노력만 하면 경쟁력 있게 농사짓고 고소득을 올릴 수 있게 된 점도 매력이다.

 

더욱이 65세 이상 고령화 율이 42.5%에 달하고, 40세 미만 청년 농가 경영주가 전체의 0.9% 남짓한 우리 농촌 현실에서 고령농(高齡農) 은퇴로 생기는 빈자리를 채우고, 도시민의 힐링공간으로 농촌을 아름답게 가꾸고 보전하기 위해서는 지금이야말로 청년들이 농업·농촌으로 갈 적기(適期)라고 생각한다.

 

무엇보다 식량안보 측면에서 농업·농촌은 블루오션이다. 식량생산이 늘었지만 여전히 지구촌에는 8억 명이 굶주림에 시달리고 있다. 유엔 식량농업기구(FAO)76억 명인 세계 인구가 205097억 명으로 늘어나면 식량 수요도 50% 이상 증가할 것으로 예측했다. 농업은 인류가 존재하는 한 사라질 수 없는 산업인 것이다.

 

어느덧 시골로 들어온 지 10년이 다 되어간다. 부지런함이 몸에 배이지 않으면 섣불리 갈 수 없는 농부의 길. 내 가족이 먹은 농작물은 내손으로 가꾸리라 생각하고 시작했기에 몇 억대 부농의 꿈은 바라지도 않는다. 시원한 나무그늘에 앉아 매미소리를 들으며 편안하게 살 수 있는 길을 두고 굳이 뙤약볕 아래서 물을 대며 비지땀을 흘리는 이유가 있을 터.

 

세상일은 한치 앞을 모르는 일인 만큼 훗날 아들이나 사위가 퇴직 후에 농부의 길을 갈지도 모르지 않는가. 아무 것도 모를 채 시작해서 시행착오를 많이 겪었기에 필요할 때 조금은 쉬운 길을 알려주기 위해 열심히 농장일기를 적어가고 있다.

 

오늘도 아름드리 느티나무에서 매미소리 요란하게 들려온다. 저 매미는 열흘을 위해 땅 밑에서 7년이란 세월을 묵묵히 기다린다고 하지 않던가. 어느 해 여름보다 끈기와 인내가 필요한 계절이다.()

 

 

- 격월간지 '향토문화의 사랑방 안동' 2018년 7,8월호(통권 172호)

- 김필녀시인의 농장일기

 

 

 

 

 

 

작약꽃에게 미안하다

 

김필녀

 

잎보다 먼저 피어 고운 자태를 뽐내던 봄꽃들. 연두색 이파리에게 자리를 내어주고 묵묵히 제 갈 길을 가고 있다. 계절이 소리 없이 바뀌듯이 우리 인생도 무한한 우주 속에 묻혀 속절없이 흘러가리라.

 

짧아서 더 아쉬웠던 봄. 파종을 하는 철이라 농부들은 더욱 바쁘다. 시기를 놓칠세라 때맞추어 심고 또 심다보면 꽃놀이 한번 제대로 즐길 여유가 없다. 벚꽃이 필 무렵에 안동주부문학회 시화전이 낙동강변 벚꽃길에서 열려 문우들과 함께 꽃비를 맞으며 걸어보는 호사를 누렸으니 이만하면 나의 봄날도 찬란하지 않았나 싶다.

 

뻐꾸기 소리와 함께 곤한 잠에서 깨어난다. 창문을 여니 아카시 꽃향기가 진동을 한다. 아직도 어둑한데 경운기와 농기계 지나가는 소리가 마을을 깨운다. 농번기를 맞은 농부들은 해가 뜨기 전에 들판으로 나가 부지런히 땅을 일군다. 모르는 게 더 많은 초보농군도 이웃 어르신들 흉내를 내어 일찍 들판으로 나간다.

 

입하를 지나면서 모내기가 시작되었다. 이팝꽃이 피어 그득한 논물 안에서 춤을 춘다. 하얀 이밥을 물에 말아 놓은 듯하다. 보릿고개가 있던 시절에는 저 쌀밥 같은 꽃을 쳐다보면 배가 더 고팠다고 한다. 풍족한 세상을 살아가는 세대들은 이팝나무 꽃을 쌀밥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터. 그 시절을 어렴풋이 들어 아는 세대들만이라도 배고픔을 참아가며 자식들을 먹이고 가르쳤던 부모님 세대의 은공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모내기를 하는 날은 온가족이 들판으로 나와서 일을 거든다. 이앙기로 모를 심지만 모판을 나르고 새참을 준비하고 논둑을 바르느라 분주하다. 연로하신 어르신들도 모내기 하는 날은 논둑에 나와 앉아 이런저런 참견을 하신다. 무거운 진흙을 삽으로 떠서 반지르르하게 닦아놓은 논둑이 할아버지의 성품을 말해주는 듯하다.

 

 

어린모가 논을 채우는 동안 논둑을 떠나지 않는 할아버지. 마을사람들끼리 품앗이를 하며 손으로 모를 심던 옛날을 생각하시는지 이앙기를 따라 저절로 고개가 움직인다. 귀하디귀한 쌀이 잡곡보다 제값을 못 받는 세상이지만 아직도 쌀농사를 최고로 여길 것이다. 구부정한 어르신의 뒷모습에서 30년 전에 돌아가신 친정아버지 모습이 떠오른다.

 

논농사는 없지만 아정농원의 5월도 바쁘다. 꽃이 피기 시작하는 감자밭에 잡초도 뽑아야 하고, 고구마순도 심어야 한다. 한시도 쉴 수 없는 일상이지만 심어 놓은 곡식들이 크는 재미에 흠뻑 빠져 즐기면서 농장을 오간다.

 

올해는 활짝 핀 작약 꽃구경을 못하게 되어 아쉬웠다. 뿌리를 약재로 쓰는 작약은 심은 지 4년 만에 수확을 한다. 뿌리가 튼실해야 좋은 가격을 받기 때문에 2년차부터는 꽃과 열매로 가는 영양분을 뿌리로 갈 수 있도록 봉오리가 맺히는 대로 따 줘야 한다.

 

꽃봉오리가 맺히기 시작하는 오월 초순부터 자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싹둑싹둑 가위소리가 날 때마다 너무 잔인하다는 생각이 들어 내 몸도 함께 움츠러들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양심은 간데없고 가위질하는 속도는 점점 빨라졌다. 내 배를 불리기 위한 잔인한 춤사위가 지나간 자리마다 채 피지도 못한 꽃봉오리가 목이 잘린 채 무참하게 땅에 떨어졌다.

 

꽃을 따는 일이 어디 작약뿐이겠는가. 사과를 비롯하여 대부분의 과수나무는 꽃솎기(적화)와 열매솎기(적과)를 해줘야 한다. 시기를 놓칠세라 일손을 구해서 하느라 꽃피는 시기가 되면 애를 먹는다고 한다. 사과 과수원을 하는 친구는 사과꽃 피는 것이 두렵다고 했다.

 

과수나무의 꽃과 열매솎기를 하는 이유는 맺힌 꽃이 모두 열매가 되면 제대로 자라지 못해 아주 작은 열매가 되기 때문이라고 한다. 또한 많은 열매가 달리면 나무가 에너지를 너무 허비해서 힘이 약해져 다음해에는 열매를 잘 맺지 않는다고 한다. 그래서 가장 먼저 온 꽃과 가장 빨리 핀 꽃을 남겨 두고 꽃솎기를 하고, 열매도 가장 굵고 튼실한 것만 남기도 모두 솎아주는 열매솎기를 해줘야 한다.

 

풀을 뽑으러 오랜만에 작약밭에 들렸더니 활짝 핀 꽃이 듬성듬성 눈에 뜨였다. 주인의 눈을 피해 숨어 있었거나 늦게 핀 꽃봉오리가 만개한 것이다. 색색으로 피어 반기는 꽃이 너무도 반가워서 밭을 누비며 사진으로 담았다.

 

용케도 살아남은 활짝 핀 작약꽃송이는 그냥 두기로 했다. 인연이 되어 내가 가꾸는 농장에서 꽃을 피웠으니 몇 송이쯤은 씨앗을 맺도록 두어야 하는 게 농부의 도리가 아니겠는가. 잘라낸 꽃봉오리 수만큼 내 곳간이 채워지겠지만 늦게 핀 작약꽃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오월의 신록이 눈이 부신다. 자연은 저리도 해맑은데 나의 욕심은 언제쯤 끝이 날까? 내년에도 이맘때 쯤 작약꽃봉오리를 따겠지만 올해보다는 조금 더 남겨서 활짝 핀 꽃구경에 취해 볼 요량이다.()

 

- 격월간지 '향토문화의 사랑방 안동' 2018년 5,6월호(통권 171호)

- 김필녀시인의 농장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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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당윷을 놀며 고향을 그려본다

 

김필녀

 

 

동네마다 마을회관이 떠들썩하다. 무릎이 시원찮아 평소에 조신하던 어르신들도 윷놀이를 하는 시간만큼은 젊은이들 못지않게 활기찬 몸놀림이다. 윷말을 쓰며 상대편과 잠시 언쟁도 하지만 같은 편에서 윷이나 모를 치면 덩실덩실 춤을 추기도 한다. 상품으로 탄 두루마리화장지 뭉치가 이긴 팀 보다 좀 작으면 어떠랴. 하루 종일 박수치며 한바탕 놀았으니 엔돌핀이 솟아 십년은 더 젊어지셨으리라.

 

안동을 비롯하여 경북북부지역에서는 설과 정월대보름 사이에는 서넛만 모여도 윷놀이를 한다. 큰 단체나 모임마다 윷놀이 예약이 많아 식당마다 반짝 호황을 보는 때이기도 하다. 안동으로 처음 이사를 왔을 때는 윷놀이는 물론 윷말도 쓸 줄 몰랐는데 30년 넘게 살다보니 몸에 배여 신명나게 즐기고 있다. 대부분 편을 짜서 놀기 때문에 내가 이겨도 내편이 지면 지는 것이 윷놀이다.

 

이육사문학관에서는 해마다 문학관 정회원들을 초대해서 세배도 하고 마당윷놀이를 하며 육사선생님의 정신을 기리고 있다. 올해도 어김없이 초대장을 받아들고 문우들과 함께 참석을 했다. 옥비여사님과 조영일관장님의 안내를 받으면서 새로 지은 육우당 마당으로 향했다. 볕이 잘 드는 마당에는 멍석이 깔려있고 중간에는 무릎 높이 정도 되는 줄이 양옆으로 쳐져 있었다. 싸리나무로 다듬어 놓은 윷도 제법 굵어 쳐놓은 줄을 넘길 수 있을까 싶어 미리 팔운동을 했다.

 

편이 짜이고 참석한 선생님들 모두 모야 윷이야하며 신이 났다. 윷말을 쓰느라 옥신각신하는 한쪽에서는 술을 좋아하는 선생님들끼리 막걸리 판도 벌어졌다. 연신 먹을거리를 내어 오시는 옥비여사님 치마폭에도 신명이 저절로 실린다. 윷놀이를 마치고 점심을 먹기 전에 맞절로 세배를 하며 한 해 동안의 무사안녕을 덕담으로 주고받았다. 이긴 편도 진편도 선물이 똑같다며 한바탕 웃기도 했다.

 

새로 증축한 문학관과 생활관을 둘러보고 돌아오는 길에 안동문협 선생님들과 함께 예안 예끼마을과 선성수상길을 걸었다. 고향이 물속에 잠긴 몇몇 선생님들의 감회가 남달라 보였다. 풍금이 놓여 있는 자리에 선 채, ‘여기가 바로 초등학교 자리고, 저기는 중학교가 있던 곳이고, 저 멀리 보이는 곳이 우리 집이 있던 자리라며 찰랑거리는 물위를 가리키는 음성이 떨리는 듯했다. 안동댐 수몰로 인해 고향을 잃어버린 분들의 아픔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동성마을이었던 내 고향에서도 이맘때쯤이면 남매 계를 모아 마당윷을 놀았다. 집집마다 매밀묵을 쑤고 손두부를 만들고 술을 거르느라 분주했다. 꼬맹이들도 먹을거리가 많으니 절로 신이 났다.

 

쉰둥이 막내였던 나도 손꼽아서 이 날을 기다렸다. 나보다 열일곱 살, 열아홉 살이 많았던 언니들이 예쁜 옷과 맛있는 음식들을 잔뜩 사가지고 오기 때문이었다. 딸 같은 처제였지만 형부들이 예법을 지킨다고 공손하게 인사를 건네던 모습도 기억이 또렷하다. 세뱃돈까지 두둑하게 받았으니 어찌 신이 나지 않으랴.

 

편을 짜서 마당윷을 놀 때는 딸과 아들이 한편이고, 사위와 며느리가 한편이 되었다. 윷말이 아무리 찾아봐도 없었지만 윷을 던질 때마다 뒷모도 앞모도니, 방여나 참먹이라며 머리로 윷말을 잘도 썼다. 몇날며칠을 징과 꽹과리를 두들기며 신명나게 놀던 그 분들도 이제는 거의 다 고인이 되고 고향마을도 텅텅 비어가고 있다.

 

수몰로 고향을 잃은 분들만큼은 아닐지라도 세월 따라 빈집이 점점 늘어가는 고향을 바라보는 내 마음도 허전하기 그지없다. 지척이 고향이지만 부모님이 안계시니 자주 찾지 못하고 내 고향 늪실. 어쩌면 마당윷놀이를 하며 토담 틔워 살갑게 지내던 고향의 정겨움을 잠시나마 느껴보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날이 풀리면 고향집 뒷산에 쌍분으로 묻혀계신 부모님 산소에라도 한번 다녀와야겠다.

 

윷놀이에 대한 유래는 다각적으로 이루어졌으나 아직 정설은 없고 삼국시대 이전부터 있었던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고 한다. 윷놀이의 도, , , , 모는 각기 돼지, , , , 말 등의 동물을 가리킨다. 이는 부여의 마가(), 우가(), 저가(돼지), 구가()에서 유래한 것이라고 한다.

 

윷놀이는 윷과 윷판, 윷말만 있으면 장소에 구애 없이 놀 수 있어 남녀노소가 함께 어울려 즐길 수 있는 친근한 서민적 놀이 문화다. 재미로도 하지만 농경사회에서 풍년농사를 기원하는 소망이 담겨 있다고 한다. 우리 선조들은 윷판을 농토로 삼고 윷놀이를 통해 윷말을 돌려 계절을 변화 시키면서 항구적인 풍년농사를 기원했다고 전해온다. 설날에 윷놀이로 즐겁게 새해를 맞이하였고 정월대보름까지 이어졌다고 한다.

 

봄비가 촉촉하게 내리는 날 겨우내 갈무리했던 종자를 점검했다. 용하게도 매서운 추위를 견딘 씨감자마다 작은 싹이 돋아나고 있었다. 땅을 일구는 농부에게 파종할 준비를 하라는 신호를 온몸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풍년을 기원하는 마당윷놀이도 신명나게 놀았으니 이제부터 부지런하게 농사 준비를 해야겠다.()

 

- 격월간지 '향토문화의 사랑방 안동' 2018년 3,4월호(통권 170호)

- 김필녀시인의 농장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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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풍처럼

 

김필녀

 

 

꽃샘추위 견디며

잎 피기 전에 살며시 피어나는

봄꽃도 아름답지만

 

인고의 세월 다 겪어내고도

힘들었던 만큼 저마다

곱디곱게 물들어

 

보고, 또 쳐다봐도

다시 보고 싶은 늦가을 단풍처럼

그렇게 익어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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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김필녀

 

 

서리 뽀얗게 내린 산길 서두르는

두루마기 자락이 바쁘게 펄럭인다

간신히 올라탄 완행열차

뿌옇게 김이 서린 차창 안에는

사람보다 짐 보따리가 더 많다

영동선에서 중앙선, 다시

대구선을 갈아타야하는 바쁜 여정

허리에 찬 전대가 마음 쓰여 빈속으로

어둑해진 동대구역 출구를 나오시던 당신

 

어린 나이에 객지에서 공부하는 막내딸이 안쓰러워 만날 때마다 예의범절이며 대소가大小家 소식 찬찬히 일러주시고 맞춤법도 넘어선 필녀야 바다보아라로 시작하는 다정다감한 편지글로 사람의 도리 빼곡하게 적어 보내주시던 인자한 모습 아직도 꿈속에서 뵙곤 합니다

 

먹고살기 힘든 시절 피땀으로 가꾼 아끼바리 쌀과 바꾸어 차곡차곡 모은 지폐 뭉치 어머니가 손수 짜서 만든 무명 전대에 꼭꼭 싸서 행여 잃어버릴까 허리에 진종일 차고 와서 활짝 웃으며 아낌없이 내어주시던 깊고 넓은 사랑 그저 받아쓰기만 했던 철부지였습니다

 

쉰에 얻는 셋째 딸 아들 대신 키우는 재미로 사셨던 당신의 깊은 뜻 이순을 넘기고서야 조금은 알 것 같습니다 철없던 막내딸이 아들 낳던 날, ‘딸 셋 시집보내 모두 아들을 두었으니 이제는 죽어도 여한이 없다고 하시던 말씀 아직도 귓전에 생생하게 남아 있습니다

 

퍼내어도 다시 솟는 샘물처럼 끝이 없었던 당신의 사랑 이 세상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을 너무 늦게 깨달은 불효녀 누렇게 익어 고개 숙인 벼이삭을 볼 때마다 더욱 그리운 것은 자식 둘 키워보니 당신의 사랑 감히 흉내 낼 수 없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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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물고추

 

김필녀

 

 

무서리 내린 아침

고추밭이 부산하다

긴 가뭄과 폭염에도

꿋꿋이 견디어내던 고추대궁

모질게 흔들어대던 태풍에도

주렁주렁 달린 식구들 온전히 지켜내더니

늦게 달린 끝물고추 걱정에

찬이슬 맞으며 밤을 새웠다

붉을 대로 붉어진 맏형은

아직 붉어보지 못한 여린 동생들에게

살아갈 길 일러주느라 바쁘다

붉으면 붉은 대로

푸르면 푸른 대로

쓸모없는 것은 없다는

오묘한 진리 깨달으며

지난여름 무던히도 참고 인내했던

농부의 아내도

상강 지나면 못쓰게 될

끝물고추로 장아찌를 담그며

가을걷이 걱정에 마음이 바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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