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농자삼락(農者三樂)
김필녀
여름은 더워야 제격이라지만 올 여름은 더워도 너무 덥다. 비다운 비 한번 내리지 않았던 마른장마에 이어 폭염이 보름 이상 지속되면서 사람도 산천초목도 축 늘어져 헤어나지를 못하고 있다. 연일 폭염경보 문자가 오고, 한낮에는 농장이나 외출을 자제해 달라는 마을 이장님의 방송이 매일 울려 퍼진다.
연노하신 어르신들은 냉방장치가 되어 있는 마을회관 무더위쉼터로 일치감치 출근을 하신다. 시원한 에어컨을 쐬며 ‘이래 살기 좋은 세상이 오리라고 꿈에나 생각했겠느냐’며 삼삼오오 모여앉아 어렵던 시절 이야기와 함께 십 원짜리 고스톱도 치면서 더위를 피하신다. 가끔 자제분들이 수박이라도 한통 사다주고 가면 어깨에 힘이 잔뜩 들어가는 어르신들. 집에도 에어컨이 설치되어 있지만 전기요금이 아까워 못 틀고 먼 거리를 걸어서 마을회관으로 모이신다.
우리 속담에 ‘깐깐 5월, 미끈 6월, 어정 7월, 건들 8월, 동동 9월’이라는 말이 있다. 바쁜 농번기 5월은 매사 깐깐하게 살펴야 하고, 일하다보면 6월은 미끈하게 지나가고, 어정거리다 7월, 건들거리다 8월 농한기를 보내고 나면 가을걷이를 하는 9월에는 동동거린다는 말이다.
‘어정 7월, 건들 8월’이라는 속담처럼 지금쯤은 농부들도 조금은 여유를 찾을 시기다. 장맛비에 쑥쑥 커가는 곡식들을 흐뭇하게 바라보며 풀을 매거나 가끔씩 병충해 방제만 하면 되는 철이다. 그런데 소나기 한줄기도 내리지 않은 채 지속되는 고온으로 인해 타들어가는 곡식들을 건지기 위해 밤낮없이 악전고투를 하고 있다.
살인적인 가뭄과 폭염이 어디 농촌뿐이랴. 축산업 피해는 물론 바다 수온까지 높아져 양식업까지 피해가 심각하다고 한다. 이제는 우리나라도 날씨 탓만 하며 하늘만 올려다볼 것이 아니라 점점 아열대기후로 변해가는 날씨에 대한 연구와 대비를 철저하게 세워야 할 것 같다.
씨를 뿌리는 재미와 기르는 재미, 거두는 재미를 농부들의 세 가지 즐거움이라고 한다. 이른 봄에 땅을 곱게 갈아 정성껏 씨를 뿌릴 때의 즐거움이란 작은 텃밭이라도 일구어 본 사람이면 다 알 것이다. 무거운 흙을 밀고 올라오는 새싹을 지켜보노라면 삶의 희망이 저절로 솟기도 한다. 하루가 다르게 커가는 농작물을 둘러보며 키우는 재미가 어쩌면 농부들의 즐거움 중에 가장 크다고 할 수 있다. 황금들판에서 여름 내 땀 흘려 내손으로 키운 곡식을 거두는 즐거운 또한 더 말해 무엇 하랴.
농부의 세 가지 즐거움에 푹 빠져 살던 남편도 올 여름에는 지쳐가는 모습이 역력하다. 농사는 하늘이 도와줘야 풍년이 든다는 말을 실감하는 듯하다. 좋아서 하는 일이니 누굴 탓하랴. 백지장도 맞들면 낫다고, 부부가 함께 손발을 맞추어 가며 밤낮으로 물을 대며 땀을 흘리고 있으니 이 또한 지나가리라.
남편이 이야기하는 농부의 세 가지 즐거움과 함께 요즘에는 맹자의 군자삼락(君子三樂)에 빗대어 농자삼락(農者三樂)이라는 말이 유행이라고 한다. '정년 없는 평생직장의 즐거움, '미래 산업에 도전하는 즐거움, 농업 CEO로서 갑의 인생을 사는 즐거움'을 농자삼락이라고 한다.
홀대받았던 농업이 분야 간 상호 융합을 기반으로 하는 4차 산업혁명 시대를 맞아 새롭게 주목받고 있다. 다양한 아이디어로 무장한 젊은이들이 농업 분야로 속속 들어오고 있다. 정보기술(IT)과 새로운 마케팅 기법을 접목하려는 젊은 후계 농들도 늘어나고 있고 기존 농업에 신기술을 접목하거나 틈새시장을 파고들어 소비자들을 끌어들이는 노력도 이어지고 있다.
4차 산업혁명 시대를 맞아 농업은 기술과 자본이 결합한 형태로 변화하고 있다. 스마트폰 하나로 농장의 온도와 습도 등 생육조건을 조절할 수 있는 스마트팜 시장이 계속 성장하고 있다. 실제로 청년농업인 스마트팜 자금의 1호 대출자도 전남 담양에서 딸기 농사를 짓는 20대 여성이었고, 꼬마감자 하나로 63억 원의 연매출을 올리는 등 억대 소득을 올리는 분도 젊은 농업인이다.
2011년부터 귀농·귀촌 인구가 증가하고 있으며, 2016년에는 40세 미만 젊은 층이 50.1%를 차지할 정도로 농촌에서 자신의 인생을 개척하는 사람이 늘고 있다. 과거에는 농사가 '힘만 들고 소득이 적다'는 선입견이 많았으나 지금은 기술발전으로 남녀 구분 없이 누구나 노력만 하면 경쟁력 있게 농사짓고 고소득을 올릴 수 있게 된 점도 매력이다.
더욱이 65세 이상 고령화 율이 42.5%에 달하고, 40세 미만 청년 농가 경영주가 전체의 0.9% 남짓한 우리 농촌 현실에서 고령농(高齡農) 은퇴로 생기는 빈자리를 채우고, 도시민의 힐링공간으로 농촌을 아름답게 가꾸고 보전하기 위해서는 지금이야말로 청년들이 농업·농촌으로 갈 적기(適期)라고 생각한다.
무엇보다 식량안보 측면에서 농업·농촌은 블루오션이다. 식량생산이 늘었지만 여전히 지구촌에는 8억 명이 굶주림에 시달리고 있다. 유엔 식량농업기구(FAO)는 76억 명인 세계 인구가 2050년 97억 명으로 늘어나면 식량 수요도 50% 이상 증가할 것으로 예측했다. 농업은 인류가 존재하는 한 사라질 수 없는 산업인 것이다.
어느덧 시골로 들어온 지 10년이 다 되어간다. 부지런함이 몸에 배이지 않으면 섣불리 갈 수 없는 농부의 길. 내 가족이 먹은 농작물은 내손으로 가꾸리라 생각하고 시작했기에 몇 억대 부농의 꿈은 바라지도 않는다. 시원한 나무그늘에 앉아 매미소리를 들으며 편안하게 살 수 있는 길을 두고 굳이 뙤약볕 아래서 물을 대며 비지땀을 흘리는 이유가 있을 터.
세상일은 한치 앞을 모르는 일인 만큼 훗날 아들이나 사위가 퇴직 후에 농부의 길을 갈지도 모르지 않는가. 아무 것도 모를 채 시작해서 시행착오를 많이 겪었기에 필요할 때 조금은 쉬운 길을 알려주기 위해 열심히 농장일기를 적어가고 있다.
오늘도 아름드리 느티나무에서 매미소리 요란하게 들려온다. 저 매미는 열흘을 위해 땅 밑에서 7년이란 세월을 묵묵히 기다린다고 하지 않던가. 어느 해 여름보다 끈기와 인내가 필요한 계절이다.(끝)
- 격월간지 '향토문화의 사랑방 안동' 2018년 7,8월호(통권 172호)
- 김필녀시인의 농장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