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약꽃에게 미안하다
김필녀
잎보다 먼저 피어 고운 자태를 뽐내던 봄꽃들. 연두색 이파리에게 자리를 내어주고 묵묵히 제 갈 길을 가고 있다. 계절이 소리 없이 바뀌듯이 우리 인생도 무한한 우주 속에 묻혀 속절없이 흘러가리라.
짧아서 더 아쉬웠던 봄. 파종을 하는 철이라 농부들은 더욱 바쁘다. 시기를 놓칠세라 때맞추어 심고 또 심다보면 꽃놀이 한번 제대로 즐길 여유가 없다. 벚꽃이 필 무렵에 안동주부문학회 시화전이 낙동강변 벚꽃길에서 열려 문우들과 함께 꽃비를 맞으며 걸어보는 호사를 누렸으니 이만하면 나의 봄날도 찬란하지 않았나 싶다.
뻐꾸기 소리와 함께 곤한 잠에서 깨어난다. 창문을 여니 아카시 꽃향기가 진동을 한다. 아직도 어둑한데 경운기와 농기계 지나가는 소리가 마을을 깨운다. 농번기를 맞은 농부들은 해가 뜨기 전에 들판으로 나가 부지런히 땅을 일군다. 모르는 게 더 많은 초보농군도 이웃 어르신들 흉내를 내어 일찍 들판으로 나간다.
입하를 지나면서 모내기가 시작되었다. 이팝꽃이 피어 그득한 논물 안에서 춤을 춘다. 하얀 이밥을 물에 말아 놓은 듯하다. 보릿고개가 있던 시절에는 저 쌀밥 같은 꽃을 쳐다보면 배가 더 고팠다고 한다. 풍족한 세상을 살아가는 세대들은 이팝나무 꽃을 쌀밥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터. 그 시절을 어렴풋이 들어 아는 세대들만이라도 배고픔을 참아가며 자식들을 먹이고 가르쳤던 부모님 세대의 은공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모내기를 하는 날은 온가족이 들판으로 나와서 일을 거든다. 이앙기로 모를 심지만 모판을 나르고 새참을 준비하고 논둑을 바르느라 분주하다. 연로하신 어르신들도 모내기 하는 날은 논둑에 나와 앉아 이런저런 참견을 하신다. 무거운 진흙을 삽으로 떠서 반지르르하게 닦아놓은 논둑이 할아버지의 성품을 말해주는 듯하다.
어린모가 논을 채우는 동안 논둑을 떠나지 않는 할아버지. 마을사람들끼리 품앗이를 하며 손으로 모를 심던 옛날을 생각하시는지 이앙기를 따라 저절로 고개가 움직인다. 귀하디귀한 쌀이 잡곡보다 제값을 못 받는 세상이지만 아직도 쌀농사를 최고로 여길 것이다. 구부정한 어르신의 뒷모습에서 30년 전에 돌아가신 친정아버지 모습이 떠오른다.
논농사는 없지만 아정농원의 5월도 바쁘다. 꽃이 피기 시작하는 감자밭에 잡초도 뽑아야 하고, 고구마순도 심어야 한다. 한시도 쉴 수 없는 일상이지만 심어 놓은 곡식들이 크는 재미에 흠뻑 빠져 즐기면서 농장을 오간다.
올해는 활짝 핀 작약 꽃구경을 못하게 되어 아쉬웠다. 뿌리를 약재로 쓰는 작약은 심은 지 4년 만에 수확을 한다. 뿌리가 튼실해야 좋은 가격을 받기 때문에 2년차부터는 꽃과 열매로 가는 영양분을 뿌리로 갈 수 있도록 봉오리가 맺히는 대로 따 줘야 한다.
꽃봉오리가 맺히기 시작하는 오월 초순부터 자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싹둑싹둑 가위소리가 날 때마다 너무 잔인하다는 생각이 들어 내 몸도 함께 움츠러들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양심은 간데없고 가위질하는 속도는 점점 빨라졌다. 내 배를 불리기 위한 잔인한 춤사위가 지나간 자리마다 채 피지도 못한 꽃봉오리가 목이 잘린 채 무참하게 땅에 떨어졌다.
꽃을 따는 일이 어디 작약뿐이겠는가. 사과를 비롯하여 대부분의 과수나무는 꽃솎기(적화)와 열매솎기(적과)를 해줘야 한다. 시기를 놓칠세라 일손을 구해서 하느라 꽃피는 시기가 되면 애를 먹는다고 한다. 사과 과수원을 하는 친구는 사과꽃 피는 것이 두렵다고 했다.
과수나무의 꽃과 열매솎기를 하는 이유는 맺힌 꽃이 모두 열매가 되면 제대로 자라지 못해 아주 작은 열매가 되기 때문이라고 한다. 또한 많은 열매가 달리면 나무가 에너지를 너무 허비해서 힘이 약해져 다음해에는 열매를 잘 맺지 않는다고 한다. 그래서 가장 먼저 온 꽃과 가장 빨리 핀 꽃을 남겨 두고 꽃솎기를 하고, 열매도 가장 굵고 튼실한 것만 남기도 모두 솎아주는 열매솎기를 해줘야 한다.
풀을 뽑으러 오랜만에 작약밭에 들렸더니 활짝 핀 꽃이 듬성듬성 눈에 뜨였다. 주인의 눈을 피해 숨어 있었거나 늦게 핀 꽃봉오리가 만개한 것이다. 색색으로 피어 반기는 꽃이 너무도 반가워서 밭을 누비며 사진으로 담았다.
용케도 살아남은 활짝 핀 작약꽃송이는 그냥 두기로 했다. 인연이 되어 내가 가꾸는 농장에서 꽃을 피웠으니 몇 송이쯤은 씨앗을 맺도록 두어야 하는 게 농부의 도리가 아니겠는가. 잘라낸 꽃봉오리 수만큼 내 곳간이 채워지겠지만 늦게 핀 작약꽃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오월의 신록이 눈이 부신다. 자연은 저리도 해맑은데 나의 욕심은 언제쯤 끝이 날까? 내년에도 이맘때 쯤 작약꽃봉오리를 따겠지만 올해보다는 조금 더 남겨서 활짝 핀 꽃구경에 취해 볼 요량이다.(끝)
- 격월간지 '향토문화의 사랑방 안동' 2018년 5,6월호(통권 171호)
- 김필녀시인의 농장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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