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물고추로 장아찌를 담그며

 

김필녀

 

가을이다. 물러서지 않을 것 같던 여름도 선들바람 앞에서는 슬쩍 꼬리를 내리고 말았다. 시작이 있으면 끝도 있는 법. 40도를 오르내리던 끔찍한 폭염을 견디어 낸 삼라만상이 그저 대견할 따름이다.

 

9월은 달빛이 곱다고 해서 가월(嘉月)’이란 예쁜 이름을 가진 달이다. 여름에서 가을로 계절이 바뀌는 철이며 우리 민족의 최대 명절인 추석이 들어 있어 더욱 풍성하게 다가온다. 여름이 제철이었던 곡식은 끝물이고, 가을이 제철인 곡식은 영양분을 차곡차곡 채워가고 있다.

여름작물인 고추도 이제는 끝물이다. 긴 가뭄과 폭염으로 목이 타들어갈 때마다 밤낮으로 물을 대던 주인의 발자국 소리를 들었던 것일까. 보답이라도 하려는 듯이 자고 일어나면 빨갛게 익은 고추를 화수분처럼 끊임없이 매달아 주었다.

 

시골로 이사를 와서 처음으로 고추 농사를 짓던 날들이 떠오른다. 넓은 옥상에서 태양초를 만들어 시집간 딸도 주고, 사돈댁에 선물도 하고, 형제들과 나눔을 하고 남으면 판매까지 하겠다는 희망에 부풀었다. 그저 빨간 고추를 따서 햇볕에 잘 말리기만 하면 되는 줄 알았다.

 

한 번도 고추를 심어본 경험이 없는 뿔농군 부부는 겁도 없이 300평이나 되는 밭에 고추를 심기로 결정했다. 고추 농사에 대한 대부분의 지식은 인터넷을 통해 터득하면서 박사가 다 된 듯이 일사천리로 진행시켰다. 안동장날, 품종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모종을 사와서 심기 시작했다.

 

인터넷으로 고추 심는 방법을 터득했으니 모든 과정이 어설펐다. 지주를 세우고 고추 대궁이 커갈 때마다 줄을 매는 일도 어려웠다. 삼복더위에 고추고랑에 앉아서 붉은 고추를 따는 일은 더욱 힘이 들었다. 약은 왜 그리 자주 쳐야하는지, 태양초를 만들겠다고 옥상에 고추를 널 때마다 비는 왜 그리 주기를 잘도 맞춰 오는지 짜증만 더해갔다. 고추밭에 가기만 하면 다투기 일쑤였다.

 

고추 농사가 얼마나 힘든지 실제로 농사를 지어본 뒤에야 깨닫게 되었다. 그 뒤로 5년 동안 고추를 심지 않았는데 농사를 지으면서 고추를 매년 사먹는 일이 마뜩찮아서 올해 재도전을 했다. 몇 년 동안 알게 모르게 농사에 대한 노하우가 많이 쌓였던 까닭인지 예전보다 많이 수월했다. 무엇보다 고추 가격이 좋은데다 풍년까지 들어 효자 작물이 되어 힘도 덜 들었다.

 

농사짓는 주변 여건도 5년 전보다 많이 좋아졌다. 붉은 고추를 딸 때 의자에 앉아서 앞으로 밀고 가면서 따는 고추 수확기도 개발되어 편리해졌다. 넓은 양산으로 햇볕도 가릴 수 있고 무거운 고추 포대를 일일이 들고 다니지 않아도 되어 일의 능률도 좋아졌다. 덕분에 연세 많은 할머니들도 앉아서 쉽게 고추를 딸 수 있어 일손 구하기도 쉬웠다. 그러나 고추 따는 일은 여전히 힘든 일이라서 품삯이 수월찮게 들어갔다.

 

머지않아 고추도 벼처럼 한 번에 기계로 수확하는 시대가 열릴 전망이라고 한다. 정부에서도 밭작물 기계화 촉진정책을 추진하고 있다고 한다. 기계수확에 적합한 품종을 선정하거나 기계수확을 위한 동시성숙 촉진 재배기술 등, 앞으로 많은 과제가 남아있지만 곧 이루어질 전망이라고 한다. 우리 민족에게 쌀만큼 고추도 꼭 필요한 양념으로 많이 소비하고 있으며 일손도 부족하니 빨리 선보일 것 같다.

 

기다릴 때는 안 오던 비가 가을 초입에 장마처럼 내리더니 고추대궁에 다시 물이 올라 꽃을 피웠다. 추석 연휴를 보내고 난 뒤에 고추 대궁을 뽑아 놓으면 빨리 붉어진다고 해서 뽑으려고 보니 꽃 진 자리마다 여린 끝물고추가 주렁주렁 달려 있는 것이 아닌가. 된서리 내리기 전에 붉어질리 없는 끝물고추는 또 다른 쓰임새로 우리 입맛을 돋운다.

 

장아찌와 고추부각, 삭히는 고추는 끝물고추로 만들어야 제 맛이 난다. 가을이 깊어지면 낮과 밤의 기온차가 많이 나면서 과육이 두툼해지고 단맛이 나며 아삭거려 씹는 맛이 일품이다. 고추 잎까지 훑어서 겨우내 먹을 밑반찬을 만들던 친정엄마의 손맛이 그리워서 장아찌를 담그려고 한 자루 따와서 손질을 했다.

 

마지막까지 버릴 것 없이 모두를 내어주는 고추의 쓰임새가 귀하기만 하다. 어쩌면 사람의 일생도 그 모습과 흡사하다는 생각을 해본다. 일생동안 나는 무엇을 남기고 갈 수 있을까. 내가 떠나고 없는 자리에서 남은 가족과 이웃이 부끄럽지 않는 좋은 기억으로 돌아볼지 두려움이 앞선다.

 

우리가 살아가는 날들도 가을 추수와 다를 바 없다. 들녘에서 사라져갈 하찮은 가을고추이지만 여러 가지 쓰임새의 가치를 남긴 것처럼 나의 일생도 그런 모습이고 싶다. 남아 있는 인생길에서 어떻게 자신을 이끌며 살아가야 할지 마음을 가다듬는다.

 

그냥두면 못쓰게 될 끝물고추도 사람의 손을 빌어 훌륭하게 탈바꿈 하는데, 하물며 만물의 영장인 사람으로서의 마지막 모습도 남은 자에게는 본보기가 되는 삶을 남겨야 하지 않겠는가. 무엇 하나 버릴 것 없이 알뜰히 주고 가는 끝물고추를 다듬으며 새로운 인생의 과제를 얻는다.()

 

 

- 격월간지 '향토문화의 사랑방 안동' 2018년 9,10월호(통권 173호)

- 김필녀시인의 농장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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