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외할머니
김필녀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다. 맹위를 떨치며 한발자국도 물러설 것 같지 않던 폭염도 처서를 지나면서 조금씩 물러나기 시작했다. 긴 가뭄과 폭염으로 타들어가던 농작물도 생기를 찾아가고, 아침저녁으로 불어오는 서늘한 바람에 농부들의 발걸음도 한결 가벼워졌다.
계절의 경계는 모호한 것 같지만 때를 맞추어 가고 온다. 한낮 당산나무 그늘에서 열정을 다해 토해내던 매미소리 잦아들자 귀뚜라미가 밤마다 세레나데를 불러준다. 하늘은 점점 높아가고, 산과 들에는 쑥부쟁이와 구절초, 코스모스가 피어 가을임을 실감나게 한다.
우리의 최대명절인 추석연휴도 끝이 났다. 자식들이 타고 온 승용차가 좁은 마당에 빽빽하게 들어차고, 골목마다 시끌벅적하던 마을은 다시 적막강산이다. 객지에 나가 살던 피붙이들이 왔다가 썰물처럼 떠난 자리에는 손주들이 남기고 간 흔적들만 오롯이 남아 있을 뿐이다. 한 세대가 서서히 저물어가면서 새로운 세대가 그 자리를 채워가는 것이 순리라고 하지만 어쩐지 쓸쓸하다. 나도 저물어가는 세대여서일까.
추석연휴를 지나자말자 우리 집에는 경사로운 일이 있었다. 둘째 외손자가 건강한 모습으로 세상을 향해 첫 울음을 터뜨렸다. 새 생명이 탄생하던 그 순간의 환희는 어떤 말과 글로도 표현할 길이 없다. 더군다나 지진으로 불안감이 최고조로 달하던 경주에서 무탈하게 태어났으니 그 기쁨은 몇 갑절로 더 컸다.
외손주가 태어나기 일주일 전에 천년고도 경주에서 큰 지진이 일어났다. 안동에서는 TV와 컴퓨터 화면이 조금 흔들렸을 뿐이었는데 속보를 통해 들려오는 지진 소식이 예사롭지가 않았다. 곧이어 딸한테서 전화가 왔다. 아파트에서 나와 경주공설운동장으로 피신해서 차 안에서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었다. 예상치 못했던 불안감으로 밤을 꼬박 새웠다.
언제 진통이 시작될지 모르는 산모가 얼마나 놀랐을까. 출산예정일이 얼마 남지 않아서 시댁에도 못가고 집에서 추석연휴를 보낸다는 소식에 좋아하는 음식을 장만해서 다녀오려던 참이었다. 친정엄마가 옆에 있으면 조금이라도 안심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날이 새자말자 경주로 향했다. 다행인 것은 태아도 엄마 뱃속이 안전하리라는 것을 알아차렸는지 출산예정일을 한찬 지난 후에야 건강한 모습으로 태어났다.
외할머니. 곱게 자란 딸이 시집을 가서 아이를 낳아야 들을 수 있으며, 아들만 있는 엄마들은 절대로 들을 수 없는 정겨운 호칭이기도 하다. 많은 사람들에게 외갓집과 외할머니에 대한 추억 한두 가지 쯤은 가지고들 있다. 방학이면 어머니 손을 잡고 가던 외갓집, 고방에 간직했던 맛난 주전부리를 아낌없이 꺼내주시던 외할머니의 따스하던 손길은 오랜 세월이 흘러도 잊을 수 없는 추억으로 남아 있을 것이다.
먼 훗날, 여섯 살과 이제 막 태어난 외손주에게 어떤 외할머니로 기억될까. 호미로 감자와 고구마를 같이 캐보고, 함께 들길을 걸으면서 작은 풀꽃들의 이름도 가르쳐주고, 여치와 잠자리를 잡으면서 자연의 소중함을 알려주고 싶다. 직접 체험한 일들을 일기로 남기고, 동시와 글짓기를 어떻게 쓰는지, 머리를 맞대고 앉아 동화책을 읽어주던 외할머니로 기억되었으면 좋겠다.
우리 아이들에게는 외할머니에 대한 정겨운 추억이 없다. 딸이 네 살이고, 아들이 두 살일 때 하늘나라로 가셨으니 너무 어려서 추억을 만들 시간이 없었다. 그래도 딸아이 태어났을 때, 일흔 중반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구부정한 허리를 꼽추 세워 가면서 산바라지를 해주셨다. 외할머니의 속 깊은 정을 마음껏 주지 못한 채 이 세상을 떠나리라는 것을 예감하셨기 때문이리라.
딸이 나이 들어가면서 엄마를 닮아가고, 엄마가 나이 들면서 외할머니를 닮아가기에 더욱 그리운 외할머니. 그런 외할머니에 대한 추억이 나에게도 없다. 내가 태어가기 전에 이미 돌아가셨기에 만날 수가 없었다. 어릴 때 어머니를 따라 나섰던 외갓집 가는 길. 낙동강 물줄기를 따라 나 있던 조붓한 길을 걷고 또 걷다가, 다시 머리에 닿을 듯한 오르막길을 오르고 또 올라갔던 기억만이 또렷이 남아 있다.
마을 입구에 커다란 느티나무가 있고, 모퉁이를 돌아서면 외갓집이 보였다. 외할머니 대신에 하얀 옥양목 앞치마를 두른 외숙모가 반갑게 맞아주던 외갓집에 가면 대추와 송이버섯을 마음껏 먹을 수 있었다. 봉화 청량산 하늘다리에서 내려다보이는 뒤실이 외가였다. 몇 해 전에 남편과 함께 찾았지만 느티나무만 자리를 지키고 있을 뿐, 마을은 텅 비어 잡초만 무성했다. 외할머니에 대한 애틋한 추억이 없기에 내 손주들에게는 많은 추억을 남겨주고 싶다.
가장 바쁜 철에 외손주 산바라지를 한다고 더욱 바쁘다. 그래도 요즘에는 산후조리원이 있어 한결 편해졌다. 딸은 아이를 낳으면서 비로소 친정엄마의 소중함을 실감한다고 했다. 그래서일까 산고를 치르며 신음하는 딸을 지켜보는데 어머니 모습이 떠올라 코끝이 찡해졌다. 친정이라고 와서는 철없이 기대기만 했는데 이제는 둘째 아들까지 낳았으니 더욱 성숙하고 알찬 삶을 잘 꾸려 가리라 기도해본다.
수확의 계절, 황금빛으로 물들어가는 들판을 바라보는 농부들의 구릿빛 얼굴에는 환한 미소가 떠나질 않는다. 폭염과 가뭄으로 고생하던 지난여름, 내년에는 절대로 삽자루를 쥐지 않겠다고 다짐하던 팔순의 이웃 할아버지도 고개 숙인 벼이삭을 보며 빙그레 웃고 계신다. 뿔농군 부부도 덩달아 웃어보는 참 넉넉한 계절이다.(끝)
- 향토문화의 사랑방 안동지 9,10월호(통권 164호)
- 김필녀시인의 농장일기
출처 : 마 캐는 시인, 김필녀 시인의 아정농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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