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의 언덕에서

 

김필녀

 

 

내 안에 이는

무수한 바람 잠재우러

길을 나섰다

 

멀고 먼 길 휘돌아

발길 머문 바람의 언덕

 

끝없는 수평선에도

쉴 새 없이 파도가 치고

 

절벽 위 굽은 소나무도

거센 바람 앞에 한 세월

아찔한 현기증을 견디며 산다

 

파도 끝,

하얀 물거품으로 스러진다 해도

바람이 일어야

살아있는 목숨이려니

 

한숨으로 토해냈던 세상사

다시 들이키며

 

돌아오는 발걸음이

한결 가볍다

 

- 170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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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심도 동백

 

김필녀

 

 

바람 속에 피었다

거센 바닷바람 껴안은 채

시나브로 떨어져 누운

지심도 동백

 

세상과 맞서며 돌고 돌아

질박하던 육십갑자 완주 한 채

다시 정유년 새해를 맞은

내 삶을 닮았다

 

한 번은 가지에서

흔들리며 피를 토하고

덤으로 주어진 여생은 땅 위에서

붉게 물들이며 살고 싶어

 

돌아서면 잊을까

통째로 떨어져 누운 꽃 한 송이

꼭 쥔 채,

가슴 깊이 꽃물 들인다

 

- 170111

      

 

 

♬ Plaisir D`Amour (사랑의 기쁨) / Nana Mouskouri ♬

 

 

농산물값 하락, 직거래가 답이다

 

김필녀

 

 

상강(霜降)이 지나자마자 올해도 어김없이 된서리가 내렸다. 하얗게 내린 서리에 싱싱하던 호박잎이 푹 삶겨 맥없이 주저앉았다. 때를 맞추어 가고 오는 자연의 준엄한 섭리를 누가 감히 거스를 수 있단 말인가. 미처 수확하지 못한 농작물을 거두어들이느라 농부들 발걸음이 더욱 분주하다.

 

가을걷이를 끝내고 나니 겨울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일에 쫓겨 단풍구경 한번 제대로 못한 아쉬움에 집 앞에 있는 학교운동장을 찾았다. 까치집만 덩그러니 남겨 놓은 채 떨어져 내린 은행잎이 노란 융단을 깔아놓은 듯하다. 나이테를 한 겹 더 두른 은행나무는 서서히 물관과 체관을 막으면서 겨울 채비를 하고 있으리라. 은행잎을 한 움큼 쥐어 흩뿌리며 나의 가을도 미련 없이 떠나보내기로 했다.

 

참으로 숨 가쁘게 달려왔던 한해였다. 긴 가뭄과 고온으로 어느 해보다 힘들었던 농부들의 곳간. 비싼 퇴비와 비료 값과 인건비를 제하고 나면 얼마나 남았을까. 흘린 땀방울에 비해 농산물 가격은 올해도 헐값이다. 농사는 농부들이 짓는데 농산물 가격은 누가 매긴단 말인가.

 

새벽부터 힘들게 캔 생강을 농협에 수매하기 위해 털털거리는 경운기에 싣고 와서 몇 시간씩 줄을 서서 대기하는 어르신들. 가격이라도 제대로 받으면 좋으련만 작년보다 반값도 안 되니 허리가 더 구부정해진 것 같다. 생강 가격이 좋았던 때만 생각해서 너도나도 심어 과잉생산을 해서 그렇다고 하니 누구를 탓하랴.

 

인터넷을 할 줄 알고, 스마트폰을 활용할 줄 아는 아정농원은 직거래를 할 수 있어 다행이었다. 봄에 생강 종자를 보급할 때 생강 가격이 형편없을 것이라는 농협 직원의 말을 믿고 예년보다 절반으로 줄인 것도 운이 좋았다. 욕심 부리지 말고 우리 생강을 기다리는 단골 고객들에게 직거래 할 양만큼만 제대로 짓자는 계획이 딱 맞아떨어진 것이었다.

 

해마다 아정농원의 친환경 생강을 믿고 주문하는 고객들을 위해 최선을 다해 농사를 지었다. 종자를 심기 전에 밑거름을 많이 넣는 것은 모든 농사의 기본이다. 심은 후에도 화학비료 대신에 미생물(EM)과 목초액을 적절하게 뿌려주며 영양제와 살충제를 대신했다. 뽑고 돌아서면 돋아나는 풀도 제초제 대신에 일일이 손으로 뽑으며 아침저녁으로 물을 대고 정성을 다했다. 그래서인지 가뭄과 고온으로 생강농사가 흉년이라고들 했지만 우리 생강은 풍년이었다.

 

농사를 잘 짓는 것도 중요하지만 판매를 잘 하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 생강은 된서리를 맞으면 품질이 떨어지기 때문에 상강 전에 판매를 마치기로 계획하고 9월 말경부터 예약주문을 받았다. 예년처럼 받을 날짜를 지정해서 오전에 캐서 오후에 택배 발송을 하는 것을 원칙으로 최대한 싱싱한 생강을 받아볼 수 있도록 했다.

 

생강 농사를 지어서 직거래를 오래하다 보니 맞춤 판매를 할 수 있는 노하우도 터득하게 되었다. 생강청과 생강김치, 편강을 만들기 위해서는 결과 향이 연한 생강이 필요하고, 생강을 썰어 말리거나 양념이나 약제에는 굵고 향이 진한 생강을 선호했다. 또한 가격보다는 품질을 우선시 한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대부분 대도시에 사는 분들이 주 고객이다 보니 선별에도 더욱 신경을 썼다. 밭에서 1차로 캔 생강을 택배 상자에 담기 전에 다시 한 번 깨끗하게 손질을 해서 굵고 좋은 생강은 높은 값을 받고, 남은 생강은 알뜰형으로 저렴하게 판매를 했다. 핵가족 시대인 만큼 5키로, 10키로 단위로 소분해서 판매한 것도 적중했다.

 

예약주문 받은 생강 택배 발송을 10월초부터 시작해서 25일경에 판매를 다하게 되어 마감을 했다. 20여 일 동안 하루에 대략 40박스씩 발송을 했으니 10월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를 정도로 바쁘게 보냈다. 판매를 마감한 뒤에도 계속 주문이 들어왔지만 생강이 없어 판매를 하지 못했다. 10월 말경부터 생강값 하락으로 밭을 갈아엎는 농가들이 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미안한 마음이 들어 이웃에는 내색도 하지 않았다.

 

쌀과 생강을 비롯해서 농산물값 하락으로 농부들의 삶이 더욱 힘들어졌다. 그렇다고 가만히 앉아 있을 수도 없고, 농사를 짓지 않을 수도 없지 않은가. 욕심 부리지 말고 적당하게 지어 직거래를 할 수 있다면 생산자와 소비자가 서로 윈윈할 수 있는 좋은 방법이 되지 않을까 싶다. 물론 직거래 판매가 쉽지만은 않겠지만 노력하면 안 되는 일도 없을 것이란 생각에 생강 판매에 대한 사례를 나열해봤다.

 

올해 가을걷이를 마치면서 아정농원도 숨고르기에 들어갔다. 대농을 꿈꾸며 임대해서 짓던 땅은 대부분 돌려주고 우리 땅에만 농사를 짓기로 했다. 농사 규모가 크다고 해서 수입이 비례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기에 욕심을 내려놓을 수 있었다.

 

마음먹은 김에 봄에 지어 가을에 거두는 농사도 과감하게 줄이기로 했다. 일 년짜리 농사 대신에 심어 놓고 몇 년 뒤에 수확하는 약초 농사를 조금씩 짓기로 하고, 시험 삼아 올 가을에 작약을 조금 심었다. 쉬운 농사가 어디 있겠는가. 한 해 동안 짓는 농사도 버거운데 4년 동안 공을 들여야 하는 만큼 더 힘든 농사일 수도 있다. 그렇지만 느긋한 마음으로 해를 거듭해서 정성을 다한다면 안 될 이유도 없지 않겠는가.

 

내년 6월에는 탐스러운 작약꽃에 흠뻑 취해볼 수 있을 것 같아 벌써 가슴이 설렌다.()

 

- 향토문화의 사랑방 안동지 10,11월호(통권 165호)

- 김필녀시인의 농장일기

 

 

 

 

 

 

 

 

출처 : 마 캐는 시인, 김필녀 시인의 아정농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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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할머니

 

김필녀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다. 맹위를 떨치며 한발자국도 물러설 것 같지 않던 폭염도 처서를 지나면서 조금씩 물러나기 시작했다. 긴 가뭄과 폭염으로 타들어가던 농작물도 생기를 찾아가고, 아침저녁으로 불어오는 서늘한 바람에 농부들의 발걸음도 한결 가벼워졌다.

 

계절의 경계는 모호한 것 같지만 때를 맞추어 가고 온다. 한낮 당산나무 그늘에서 열정을 다해 토해내던 매미소리 잦아들자 귀뚜라미가 밤마다 세레나데를 불러준다. 하늘은 점점 높아가고, 산과 들에는 쑥부쟁이와 구절초, 코스모스가 피어 가을임을 실감나게 한다.

 

우리의 최대명절인 추석연휴도 끝이 났다. 자식들이 타고 온 승용차가 좁은 마당에 빽빽하게 들어차고, 골목마다 시끌벅적하던 마을은 다시 적막강산이다. 객지에 나가 살던 피붙이들이 왔다가 썰물처럼 떠난 자리에는 손주들이 남기고 간 흔적들만 오롯이 남아 있을 뿐이다. 한 세대가 서서히 저물어가면서 새로운 세대가 그 자리를 채워가는 것이 순리라고 하지만 어쩐지 쓸쓸하다. 나도 저물어가는 세대여서일까.

 

추석연휴를 지나자말자 우리 집에는 경사로운 일이 있었다. 둘째 외손자가 건강한 모습으로 세상을 향해 첫 울음을 터뜨렸다. 새 생명이 탄생하던 그 순간의 환희는 어떤 말과 글로도 표현할 길이 없다. 더군다나 지진으로 불안감이 최고조로 달하던 경주에서 무탈하게 태어났으니 그 기쁨은 몇 갑절로 더 컸다.

 

외손주가 태어나기 일주일 전에 천년고도 경주에서 큰 지진이 일어났다. 안동에서는 TV와 컴퓨터 화면이 조금 흔들렸을 뿐이었는데 속보를 통해 들려오는 지진 소식이 예사롭지가 않았다. 곧이어 딸한테서 전화가 왔다. 아파트에서 나와 경주공설운동장으로 피신해서 차 안에서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었다. 예상치 못했던 불안감으로 밤을 꼬박 새웠다.

 

언제 진통이 시작될지 모르는 산모가 얼마나 놀랐을까. 출산예정일이 얼마 남지 않아서 시댁에도 못가고 집에서 추석연휴를 보낸다는 소식에 좋아하는 음식을 장만해서 다녀오려던 참이었다. 친정엄마가 옆에 있으면 조금이라도 안심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날이 새자말자 경주로 향했다. 다행인 것은 태아도 엄마 뱃속이 안전하리라는 것을 알아차렸는지 출산예정일을 한찬 지난 후에야 건강한 모습으로 태어났다.

 

외할머니. 곱게 자란 딸이 시집을 가서 아이를 낳아야 들을 수 있으며, 아들만 있는 엄마들은 절대로 들을 수 없는 정겨운 호칭이기도 하다. 많은 사람들에게 외갓집과 외할머니에 대한 추억 한두 가지 쯤은 가지고들 있다. 방학이면 어머니 손을 잡고 가던 외갓집, 고방에 간직했던 맛난 주전부리를 아낌없이 꺼내주시던 외할머니의 따스하던 손길은 오랜 세월이 흘러도 잊을 수 없는 추억으로 남아 있을 것이다.

 

먼 훗날, 여섯 살과 이제 막 태어난 외손주에게 어떤 외할머니로 기억될까. 호미로 감자와 고구마를 같이 캐보고, 함께 들길을 걸으면서 작은 풀꽃들의 이름도 가르쳐주고, 여치와 잠자리를 잡으면서 자연의 소중함을 알려주고 싶다. 직접 체험한 일들을 일기로 남기고, 동시와 글짓기를 어떻게 쓰는지, 머리를 맞대고 앉아 동화책을 읽어주던 외할머니로 기억되었으면 좋겠다.

 

우리 아이들에게는 외할머니에 대한 정겨운 추억이 없다. 딸이 네 살이고, 아들이 두 살일 때 하늘나라로 가셨으니 너무 어려서 추억을 만들 시간이 없었다. 그래도 딸아이 태어났을 때, 일흔 중반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구부정한 허리를 꼽추 세워 가면서 산바라지를 해주셨다. 외할머니의 속 깊은 정을 마음껏 주지 못한 채 이 세상을 떠나리라는 것을 예감하셨기 때문이리라.

 

딸이 나이 들어가면서 엄마를 닮아가고, 엄마가 나이 들면서 외할머니를 닮아가기에 더욱 그리운 외할머니. 그런 외할머니에 대한 추억이 나에게도 없다. 내가 태어가기 전에 이미 돌아가셨기에 만날 수가 없었다. 어릴 때 어머니를 따라 나섰던 외갓집 가는 길. 낙동강 물줄기를 따라 나 있던 조붓한 길을 걷고 또 걷다가, 다시 머리에 닿을 듯한 오르막길을 오르고 또 올라갔던 기억만이 또렷이 남아 있다.

 

마을 입구에 커다란 느티나무가 있고, 모퉁이를 돌아서면 외갓집이 보였다. 외할머니 대신에 하얀 옥양목 앞치마를 두른 외숙모가 반갑게 맞아주던 외갓집에 가면 대추와 송이버섯을 마음껏 먹을 수 있었다. 봉화 청량산 하늘다리에서 내려다보이는 뒤실이 외가였다. 몇 해 전에 남편과 함께 찾았지만 느티나무만 자리를 지키고 있을 뿐, 마을은 텅 비어 잡초만 무성했다. 외할머니에 대한 애틋한 추억이 없기에 내 손주들에게는 많은 추억을 남겨주고 싶다.

 

가장 바쁜 철에 외손주 산바라지를 한다고 더욱 바쁘다. 그래도 요즘에는 산후조리원이 있어 한결 편해졌다. 딸은 아이를 낳으면서 비로소 친정엄마의 소중함을 실감한다고 했다. 그래서일까 산고를 치르며 신음하는 딸을 지켜보는데 어머니 모습이 떠올라 코끝이 찡해졌다. 친정이라고 와서는 철없이 기대기만 했는데 이제는 둘째 아들까지 낳았으니 더욱 성숙하고 알찬 삶을 잘 꾸려 가리라 기도해본다.

 

수확의 계절, 황금빛으로 물들어가는 들판을 바라보는 농부들의 구릿빛 얼굴에는 환한 미소가 떠나질 않는다. 폭염과 가뭄으로 고생하던 지난여름, 내년에는 절대로 삽자루를 쥐지 않겠다고 다짐하던 팔순의 이웃 할아버지도 고개 숙인 벼이삭을 보며 빙그레 웃고 계신다. 뿔농군 부부도 덩달아 웃어보는 참 넉넉한 계절이다.()

 

 

- 향토문화의 사랑방 안동지 9,10월호(통권 164호)

- 김필녀시인의 농장일기

출처 : 마 캐는 시인, 김필녀 시인의 아정농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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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단풀의 사랑 법

 

김필녀

 

 

그래,

사랑은 그런 거야

 

오직 한 사람을 위해

가장 낮은 자세로 베틀에 앉아

밤을 낮처럼 환하게 밝힌 채

한 올 한 올, 정성들여

비단옷을 짜 입히며

더없이 행복해 하는

 

사랑은,

그런 거야

 

- 160912

 

♬ I Just Fall In Love Again / Anne Murr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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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타리꽃

 

김필녀

 

 

흙먼지 일으키며

시원하게 쏟아지던 소나기도

길을 잃고 헤매던 지난여름

산 너머 무지개 마을로

소풍가던 소녀도 발길을 끊었고

쩍쩍 갈라져

바닥을 들어낸 시냇가에는

물수제비뜨던 소년도

더 이상 찾아오지 않았다

무엇이라도 되어주고 싶은

넉넉한 계절

갈꽃 사잇길로

더욱 성숙해진 그들이

두 손 꼭 잡고 찾아온다면

내 기꺼이 목숨 바쳐

우산이 되어 주리니

갈바람 불어오는 저기 저,

보일 듯 말 듯 한 산모롱이

연신 까치발 들고 기다리는

마타리꽃 순정

 

- 160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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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장화

 

김필녀

 

후텁지근한 장마철이다. 꿉꿉한 마음을 활짝 피어 웃고 있는 능소화가 달래준다. 너무 고와서 질투심 많은 이들이 지어낸 이야기였을 뿐. 주황색의 화려함 뒤에 숨겨진 소화의 슬픈 전설은 아무리 찾아봐도 없다. 통꽃으로 떨어져 누운 자태마저 넋을 잃을 만큼 아름답다.

 

장맛비 덕분에 쉬는 날이 많아졌다. 비오는 날이 농부들의 휴일인 만큼 이참에 푹 쉬면서 재충전을 할 참이다. 주인이 쉬고 있으니 농장에 나갈 때면 수족처럼 따라다니던 모자와 장화도 망중한을 달래고 있다.

 

농부의 아내가 되고부터 복장도 많이 달라졌다. 구두나 운동화보다는 장화를 신는 날이 많아지고, 햇빛에 노출되어 일을 하다 보니 챙이 넓은 모자는 필수품이 되었다. 처음에는 멋모르고 예쁜 것을 찾았지만, 일하기 편한 기능성 신제품이 출시될 때마다 사 모으다 보니 가짓수도 점점 늘어났다.

 

창고 농사용 신발장 윗간에는 예쁜 장화 한 켤레가 자리하고 있다. 잔잔한 꽃무늬와 굽이 높은 디자인이 비오는 날 멋쟁이들이 신고 다니는 패션장화다. 어쩌면 이 꽃장화가 매개체가 되어 땅을 일구는 농부의 아내로 살아가는 것이 아닐까 싶다.

 

시골로 이사를 해서 몇 년 동안은 학원에서 논술강사로 아이들을 가르치다 주말이면 농장에 나가 남편을 도왔다. 운동화에 흙을 잔뜩 묻힌 채 어설픈 자세로 풀을 뽑는 아내가 안쓰러웠는지 장화를 샀다며 불쑥 내밀었다. 실용성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여러 종류의 장화 가운데서 가장 예쁜 장화를 골라 선물했던 남편의 마음에 감동을 했었다.

 

레인부츠라 불리는 장화의 정확한 명칭은 웰링턴 부츠(Wellington boot). 웰링턴 부츠에서 웰링턴은 특정 인물의 이름을 따온 것이다. 18세기 워터루 전쟁에서 나폴레옹을 물리쳤던 웰링턴 공작이 세계1차 대전 때 영국군의 군화로 사용하면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고 한다.

 

애초에 웰링턴 부츠는 가죽으로 만들어졌지만 1852년 프랑스의 히람 허친슨이 고무 경화 과정을 개발해 타이어를 만들던 굿이어와 만나게 되면서 오늘날의 완벽한 방수가 되는 고무장화가 만들어졌다. 레인부츠는 각 나라마다 부르는 명칭이 따로 있는데 영국에서는 웰링턴 부츠, 웰리스 부츠라고 부르고 호주에서는 검 부츠(gum boots)로 불린다. 우리나라에선 통상적으로 레인부츠라고 한다.

 

요즘에는 레인부츠도 고가에 수입이 되어 멋쟁이들의 장마철 패션으로 인기가 많다고 한다. 농부들이 위생과 안전을 위해 신는 쓰임새와는 전혀 다르다. 머지않아 나에게도 여유로운 삶을 마음껏 누릴 날이 올 것이다. 그때가 되면 신발장에 잠자고 있는 꽃장화를 신고서 옛말하며 멋진 워킹을 해볼 요량이다.

 

사람의 욕심이 끝이 없듯이 농사도 마찬가지다. 처음 농사를 시작할 때는 텃밭을 일구어 우리 먹을 푸성귀만 가꾸기로 했는데 차츰 농사에 자신이 생기면서 대농이 되어버렸다. 바쁠 때는 일손을 사서 하지만 주인이 감당해야 할 몫이 몇 배로 더 커갔다. 바쁜 만큼 수입이 늘어났지만 그만큼 몸과 마음이 고되다보니 여유로운 전원생활과는 점점 거리가 멀어졌다.

 

누구보다 열심히 땅을 일구며 살았던 우리 부부도 너무 큰 욕심은 내려놓기로 했다. 둘이서 일에 쫓기지 않고 적당하게 땀 흘린 대가만큼만 거두기로 했다. 그동안 바빠서 미루어 두었던 여행도 하고, 좋아하는 책도 마음껏 읽을 생각을 하니 저절로 미소가 번진다.

 

결혼생활 삼십오 년 중에서 농사를 짓고 살았던 때가 우리 부부에게는 가장 한마음 한뜻이 되어 살았다고 할 수 있다. 농사에는 둘 다 왕초보였으니 서로의 뜻을 모을 수밖에 없었다. 살아가면서 두고두고 우려먹어도 남을 만큼 초보농사꾼 부부의 웃지 못 할 일화는 훗날 글로 쓸 계획이다.

 

모진 시집살이를 걱정하며 꽃가마를 타고 시집가는 신부는 없을 것이다. 땅을 일구는 일이 힘든 일인 줄 몰랐기 때문에 꽃장화를 신고 남편의 뜻을 따라 정성껏 씨를 묻었는지도 모른다. 바빠도 바쁘지 않게, 둘이서 오순도순 땀 흘려 가꾼 만큼만 거두어들여 이웃과 나누어먹을 줄 아는 여유로운 농촌생활을 그려본다.

 

잠시 비가 그친 사이 텃밭으로 나가 호박잎을 한 아름 따왔다. 이맘때쯤 어머니가 즐겨 드셨던 호박잎쌈. 푹 쪄낸 호박잎을 척척 접어 찐 감자와 날된장을 함께 싸서 입이 미어지도록 먹을 생각을 하니 입에 침이 고인다.()

 

 

- 향토문화의 사랑방 안동지 / 2016년 7,8월호(통권 163호)

- 김필녀시인의 농장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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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추

 

김필녀

 

 

한낮 당산나무 그늘에서

마지막 열정 불태우는 매미

 

열대야로 잠 못 드는 창가 기웃대며

밤새워 불러주는 귀뚜라미 세레나데

 

가는 여름이 못내 아쉬워도

오는 가을이 사뭇 설레어도

 

낮과 밤을

무언의 경계로 쳐 놓고서

 

너그러이 서로의 영역 넘나들며

부지런히 제 갈길 오가고 있다

 

- 160807

 

 

 

 

 

♬ A Comme Amour - Richard Clayderma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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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이 반

 

김필녀

 

 

진달래꽃 필 무렵

분가루 같이 곱에 갈아 놓은 밭에

정성스레 씨앗 묻고

잡초 몇 번 뽑아준 것밖에 없는데

서동과 선화공주가 심어 가꾸던

마 덩굴이 삼복더위에도 꿋꿋하게

서로를 의지한 채 휘감아 올라

작은 정글을 이루었다

햇볕과 바람과 비

농부의 발자국 소리가 이루어낸

땀방울의 힘이 얼마나 위대한지

귀가 순해지고

내면의 소리에 귀 기울일 줄 아는

나이가 되고 나니

조금은 알 것도 같다

시작을 하면

끝이 있기 마련인 것을

수십 번도 더 망설이다 덮어두었던

꼭 하고 싶었던 일들 꺼내

늦기 전에 시작해 볼 일이다

 

- 160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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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성기

 

김필녀

 

 

장맛비를 맞으며

숨고르기 하던 스프링클러

 

휴직 시간이 너무 길어

조바심이 난다

 

봄 가뭄으로

곡식들이 타들어가던 그 때

 

숨이 끊어질 만큼

돌고 돌아가던

 

그 시절이 전성기였음을

왜 깨닫지 못했을까

 

하늘을 향해 다시 한 번

하소연을 해 보지만

 

애꿎은 장맛비는 오늘도

하염없이 이어진다

 

- 160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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