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마꽃

 

김필녀

 

계절의 여왕 오월도 끝자락이다. 연둣빛이 초록으로 덧칠하는 사이 찔레꽃이 피고 담장마다 넝쿨장미가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고 있다. 제철을 만난 뻐꾸기가 이산저산에서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면 농촌에서는 모내기가 한창이다.

 

가정의 달이기도 한 오월은 행사도 참 많았다. 어린이날, 어버이날, 부부의 날을 보내면서 가족의 끈끈한 정을 다시 한 번 확인하기도 했다. 그 중에서도 가장 감동을 준 일은 이제 막 한글을 읽고 쓰기 시작한 여섯 살배기 외손자로부터 편지를 받은 일이었다. 고사리 같은 손으로 꼭꼭 눌러서 쓴 편지에 대한 답장을 쓰면서 입가에 미소가 떠나지를 않았다.

 

짧아서 늘 아쉽기만 한 아정농원의 봄날도 여느 농가처럼 파종을 하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삼월 말경부터 씨감자를 시작으로 마와 생강 종자를 심고 마지막으로 고구마 순을 심고 나니 여름이 코앞에 다가왔다. 일찍 심은 홍감자는 어느덧 예쁜 꽃을 피웠다. 꽃이 피었으니 이제 한 달 후면 포근포근 분이 나는 빨간 감자가 곳간을 그득하게 채울 것이다.

 

올봄에는 비가 자주 내려 물 걱정 없이 농사를 지을 수 있었다. 특히 고구마는 순을 잘라 심기 때문에 비가 오기 전이나 후에 심어야 활착이 잘 된다. 다행히도 일기예보가 잘 맞아떨어져서 세 번에 걸쳐 고구마 순 백단을 사다 심었다. 한단에 백포기 씩 묶여 있으니 만포기를 내 손으로 심은 셈이다.

 

고구마 농사를 지은 지도 여러 해가 되었다. 처음 심을 때는 인터넷을 검색해서 얻는 얄팍한 지식으로 안동장에서 사온 고구마순 서너 단을 며칠 동안 끙끙대며 심었다. 농사도 해를 거듭하면 이력이 난다고, 올해는 만포기를 심는데도 그리 힘들지는 않았다. 한포기 씩 심을 때마다 무릎 꺾어 절을 하고, 북을 주면서 허리 굽혀 절을 했으니 족히 이만번은 넘게 정성을 들였다. 어찌 농심을 천심이라 하지 않겠는가.

 

너무나 친숙한 이름 때문에 고구마는 외래종이 아닌 먼 옛날부터 우리 땅에서 자란 토종 같은 작물이다. 중앙아메리카 멕시코가 원산지인 고구마는 주로 아시아에서 많이 재배되고 있다. 온대지방에서는 일년생이지만 열대지방에서는 해마다 묵은 뿌리에서 움이 다시 돋는 식물 중에 오래 사는 숙근성(宿根性) 풀로 분류된다고 한다.

 

고구마라는 이름은 일본말 고귀위마(古貴爲麻)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1600년경 중국에 전해진 후에 일본 유구(오키나와)에 전해졌는데 조선왕조실록에는 1663년 김여휘 등의 백성이 유구에 표착하여 껍질이 붉고 속은 희며 맛은 마와 같은 식품을 먹었다는 기록이 있다. 우리나라에 고구마가 들어온 시기는 조선 영조 때 이조판서를 지내기도 한 조엄이 1763년 통신사로 일본에 갔을 때 대마도에서 고구마 재배법과 저장법을 배워오면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사실 고구마처럼 남녀노소 모두에게 간식거리로 환영을 받는 작물도 드물다. 그래서인지 작은 텃밭이나 주말농장을 하는 도시농부들도 고구마는 한두 이랑씩 기본으로 심는다. 퇴비나 비료를 주지 않아도 되고, 척박한 땅에서도 잘 자라기 때문이다.

 

고구마꽃은 나팔꽃과 비슷한데 가장자리가 연보랏빛을 띄고 있으며 꽃말은 행운이다. 열대지방에서는 꽃이 매년 피지만 우리나라 기후에서 꽃을 보기는 아주 어렵다. 춘원 이광수는 백년에 한번 볼 수 있는 꽃이라고 회고록에 적었다고 한다. 그만큼 고구마꽃 보기가 쉽지 않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래서인지 고구마꽃이 피면 신문이나 TV에서도 떠들썩하게 보도를 했다. 꽃이 핀 농장을 직접 찾아 생방송을 하면서 백 년 만에 볼 수 있는 행운의 꽃이라고 소개하며 나라에 좋은 일이 있을 징조라고 방송을 하기도 했다.

 

우리 농장에도 2년 전에 고구마꽃이 핀 적이 있다. 꽃말처럼 집안에 경사로운 소식을 안겨주었기에 고구마를 심을 때면 그 때 일이 생각나서 더욱 정성껏 심게 되었다. 중등 임용공부를 하던 아들이 학생 수의 격감으로 교사를 거의 뽑지 않아 진로를 변경해서 도전했던 경찰공무원 시험에 최종합격 했다는 소식을 고구마꽃이 피었을 때 들었기 때문이다.

 

그 해 여름은 유난히도 무더웠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시절이 내 삶에서 가장 힘든 고비를 넘겼던 것이 아닐까 싶다. 신경성 원형 탈모가 생기기도 했고, 면역력이 약해지면 찾아오는 대상포진으로 병원에 입원을 하기도 했다. 퇴원할 무렵에 아들의 합격소식으로 그동안의 힘든 시간들은 봄눈 녹듯이 사라졌다. 동트기 전이 가장 어둡다는 말을 실감하던 때이기도 했다.

 

그냥 살아도 되는데 힘든 농사를 왜 짓느냐고 가끔 자문자답을 할 때가 있다. 부족한 내 삶에 대한 성찰과 가족들에 대한 염원의 한 방편이라고 대답할 수 있겠다. 한평생 가족과 자식들을 위해 헌신했던 어머니의 삶을 조금이라도 본받고 싶은 것이다.

 

나의 땀방울이 하늘에 닿아 행운의 고구마꽃이 우리 농장에 다시 피기를 소망해본다.()

 

    

- 향토문화의 사랑방 안동지 2016년 5,6월호(통권 162호)

- 김필녀시인의 농장일기 

- 향토문화의 사랑방 사랑방 안동지 홈페이지 주소 http://www.andongji.com/

 

 

출처 : 마 캐는 시인, 김필녀 시인의 아정농원
글쓴이 : 김필녀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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