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암산스케이트장을 가다
김필녀
세상이 꽁꽁 얼어붙었다. 겨울이 깊을수록 봄이 가깝다고 하니 참고 인내하면서 따스한 봄을 손꼽아 기다리는 일이 땅을 일구어 가꾸는 농부의 겨울나기일 것이다.
겨울은 추워야 제격이라지만 맹위를 떨치는 추위가 이어지면서 독감 환자들로 병원마다 북새통이다. 늘 건강에 자신했던 나도 지독한 감기몸살로 여러 날을 앓았다. 입맛이 달아나면서 음식을 먹을 수 없어 더 고생을 한 것 같다. 바쁜 농사철에 몸을 너무 혹사했던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과 함께 이제는 건강에 신경을 써야 할 나이도 되었다는 것을 다시 한 번 깨달았다.
암산스케이트장을 오랜만에 찾았다. 겨울방학을 맞아 외갓집에 온 외손주에게 추억거리를 만들어주기 위해 꼭꼭 싸매고서 길을 안내했다. 우리 아이들이 초등학교 졸업을 한 이후 처음으로 찾았으니 25년의 세월이 훌쩍 지나갔다. 예전보다 주변 환경들이 잘 정비되어 있어 마음이 더욱 들떴다.
안동이 고향인 분이라면 한 번씩은 다 찾았을 추억의 장소인 암산스케이트장. 추운 날씨에도 겨울을 즐기려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어른아이 할 것 없이 스케이트와 썰매를 타며 즐거운 표정들이다. 스케이트와 썰매도 빌려주고, 주변에 매점과 카페도 있어 가족들이 겨울 한나절을 즐기기에 손색이 없었다.
시집간 딸도 오랜만에 스케이트를 타면서 사위와 외손주 앞에서 은근히 실력을 과시했다. 일곱 살짜리 외손주도 난생 처음으로 스케이트를 신고서 넘어지고 일어서기를 반복하면서도 즐거운 표정이다. 미끄러운 얼음 위에서 쩔쩔매는 어린 아들에게 스케이트 타는 법을 가르치는 딸과 사위 모습을 지켜보면서 아이들 초등학교 시절이 떠올랐다.
두 살 터울이었던 남매가 다녔던 초등학교에서는 겨울방학 때마다 교내 스케이트대회를 개최했다. 달리기를 잘해 운동회 때마다 일등을 도맡아 하던 남매는 스케이트도 다른 아이들보다 월등하게 잘 탔다. 아이들의 잠재능력을 일깨워주기 위해 스케이트 레슨을 시키면서 추위도 잊은 채 암산스케이트장을 오가며 열성적으로 뒷바라지 했던 시절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세월이 참으로 빠른 것 같다. 코흘리개였던 딸은 어느덧 시집을 가서 아들을 둘이나 두었고, 착하고 운동을 잘하던 아들도 공무원으로 근무하고 있으니 그저 감사할 따름이다. 그 세월만큼 내 나이도 더해져 스케이트를 타고 있는 외손주를 향해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며 행복에 겨워 어쩔 줄 모르는 외할머니가 되었다.
겨울방학이라 그런지 스케이트장에는 딸과 사위처럼 젊은 부모들이 대부분이다. 유치원이나 초등학생인 자녀들에게 스케이트를 가르치고, 썰매를 밀어주면서 마냥 행복한 모습들이다. 나도 저 나이 때는 내 인생에 꽃길만 펼쳐지리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인생길이 꽃길만 이어진다면 살아볼 가치가 있었을까. 울퉁불퉁한 자갈길을 만나 신발 끈을 다시 고쳐 매며 잠시 쉬어가기도 하다가, 진창길에 빠져 허우적대며 헤쳐 나가는 과정에서 더 큰 행복을 찾아 전화위복이 될 때도 있었다. 산전수전 다 겪으며 얻은 소중한 인생경험을 밥상머리에 앉아 잔소리처럼 하는 훈육이 자식들의 앞날을 위한 밑거름이 된다는 것을 나이가 들면 저절로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한국 철학계의 대부로 불리는 <백년을 살아보니>의 저자 김형석 교수는 “100세까지 후회 없이 건강하게 잘 살고 싶다면 인생의 황금기인 60~75세를 잘 보내야 한다”고 말한다. 인생의 가정 절정기가 청년시기가 아리라 인생의 매운맛과 쓴맛을 다 본 다음에 무엇이 중요한지를 진정 음미할 수 있는 60~75세가 우리 인생의 절정기라고 한다. 그 나이가 되어야 생각이 깊어지고 행복이 무엇인지, 세상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알게 된다고 한다.
세상에는 그저 얻어지는 것은 없다. 부모들은 자식을 위해 순간순간 최선을 다했을 것이다. 그런 헌신과 희생으로 한 세대가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것을 숙명처럼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내가 자식에게 정성을 다했듯이 내 자식들도 그러한 삶을 이어가리라 믿어본다. 김형석 교수가 말하는 인생의 절정기인 이순을 넘었으니 그 동안의 경험을 바탕으로 곧고 바른길을 걷도록 더욱 노력해야겠다.
배가 출출해서 매점으로 향했다. 웃음꽃이 핀 가족들로 테이블마다 만원이다. 겨우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라면과 어묵을 시켰다. 운동을 해서 그런지 평소에 입이 짧은 외손주도 볼이 미어터지도록 잘도 먹는다. 재미가 붙었는지 잠이 든 16개월짜리 둘째 외손주를 맡겨놓은 채 스케이트를 타러 가는 뒷모습이 그저 아름답기만 하다.
안동시 남후면에 위치한 암산스케이트장은 전국 최고의 천연빙질 스케이트장이다. 중앙고속도로 남안동 나들목에서 안동방면 약 7㎞ 지점에 위치한 암산유원지는 기암절벽을 끼고 도는 낙동강의 지류를 따라 봄, 여름, 가을에는 야영지와 보트장으로 사용되다가 겨울에는 강물이 꽁꽁 얼면서 천연 야외 스케이트장으로 탈바꿈한다.
유원지 뒤쪽으로는 18세기 유학자인 문경공 대산 이상정(李像靖, 1711~1781)선생을 추모하기 위해 세워진 경상북도 기념물 제56호 고산서원(高山書院)이 있고 앞쪽으로는 관목모양으로 자라는 측백나무 자생지가 있다. 이곳의 측백나무는 약 400여 그루가 암벽바위 사이에 자라고 있으며 1975년에 천연기념물로 지정됐다.
암벽 아래로는 주민들이 직접 바위를 뚫어 만든 자연 터널이 있다. 일제강점기인 1912년 주민들이 강제 동원돼 만들어 졌다고 알려져 있으며, 예전에는 안동 의성 간 국도로 사용됐으나 지금은 5번 국도가 4차선으로 확장되면서 추억의 옛길이 되었다.
지금 암산유원지 일원에서는 ‘2018 안동암산얼음축제’가 개최되고 있다. 추위가 맹위를 떨치는 절기인 소한과 대한 사이에 개최되는 암산얼음축제는 이상고온으로 얼음이 제대로 얼지 않아 3년 연속 축제준비 중에 취소되기도 했다. 올해는 안동시와 안동소방서, 안동시재난안전네트워크가 합동으로 실시한 빙판 안전점검 결과 행사장 얼음두께는 28∼42cm 수준으로 ‘적합’ 판정을 받음에 따라 축제가 열리게 되었다.
“어린이에게는 꿈과 희망을, 어른에게는 추억과 향수를” 안겨 준다는 캐치프레이스로 열리는 안동암산얼음축제는 가족형 겨울놀이 체험 이벤트라는 정체성에 걸맞게 빙어낚시와 송어낚시 체험, 스케이팅, 썰매타기, 팽이치기 등 대표적인 겨울놀이 위주로 운영되고 있다. 아울러 얼음빙벽 조성, 얼음조각 전시, 놀이단 ‘한(寒)식구’ 운영 등을 통해 겨울축제 분위기를 한껏 돋우고 있다.
일찍 다녀간 외손주는 이번 암산얼음축제에는 참석을 하지 못했다. 내년 겨울방학에는 얼음축제 기간에 맞춰서 다시 찾아야겠다. 온 가족이 함께 빙어 낚시도 해보고, 여러 가지 체험도 하면서 어릴적 추억을 많이 만들어주고 싶은 외할머니 마음을 꼭 전해주고 싶다.(끝)

- 격월간지 '향토문화의 사랑방 안동' 2018년 1,2월호(통권 169호)
- 김필녀시인의 농장일기
출처 : 마 캐는 시인, 김필녀 시인의 아정농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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