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사 지으랴, 멧돼지 쫓으랴

 

김필녀

 

가을은 하늘에서 내려온다고 했다. 올려다본 하늘이 푸른 물감을 풀어놓은 듯 눈이 부신다. 풀벌레 소리에서 가을이 익어가고, 아무리 가난한 사람도 구월에는 배가 부르다고 한다. 혀끝에서 느끼는 가을의 맛이 이렇듯 감미로운데 구월도 어느덧 끝자락이다.

 

가을의 전령사인 코스모스와 함께 백일홍이 가을볕을 즐기고 있다. 담장 높은 집보다는 허물어져가는 토담집 좁은 화단이 더 어울리는 꽃이다. 무더위가 한창일 때부터 피어 어설픈 우리 집 화단을 환하게 밝혀주더니 계절을 넘나들며 바쁜 주인의 마음을 어루만져주고 있다. 나의 삶도 화무십일홍이 아니라 화사하면서도 단아한 백일홍처럼 오래 피어도 시들지 않고 늘 곁에 두고 싶은 삶이었으면 좋겠다.

 

한가위를 앞둔 농촌풍경은 어디를 가도 풍성함으로 그득하다. 황금들판과 푸른 하늘이 맞닿은 곳곳마다 추수를 앞둔 농부들의 발걸음이 분주하다. 저 풍요로움 뒤에는 하늘과 땅의 조화로움과 농부들의 땀방울이 함께 하고 있음을 아는 이가 얼마나 될까. 나 또한 땅을 일구고 가꾸어 본 뒤에야 깨달았으니 농자지천하대본이라는 말이 구시대 유물이 되어버린 것이 어쩌면 당연한지도 모르겠다.

 

누구에게나 세상살이가 녹록하지 않겠지만 어느 해보다도 농부들의 삶이 힘든 한 해였다. 봄 가뭄과 늦장마로 인해 농작물 작황이 좋지 않은데다 얼마 전에는 돌풍과 함께 우박까지 내려 추석 대목을 앞둔 과수농가의 피해가 심각하다. 거기다가 멧돼지와 고라니 등 유해야생동물의 피해까지 잇따르면서 농부들의 한숨이 더욱 깊어지는 것 같다.

 

아정농원도 고구마 밭 일부가 멧돼지의 습격을 받아 적지 않은 피해를 보게 되었다. 우리뿐만 아니라 이웃 농가들도 자고 일어나면 수확을 앞둔 고구마 밭이 쑥대밭이 되어갔다. 면사무소에 신고를 했지만 별 뾰족한 대책이 없었다. 포수가 와서 잡는 방법과 전기울타리를 설치하는 방법뿐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명사수인들 울창한 숲속에 숨어 있는 멧돼지를 언제 잡을 것이며, 전기울타리 또한 금방 설치되는 일도 아니었다.

 

가뭄에 물을 주며 애지중지 키우던 고구마 밭을 가만히 앉아서 빼앗길 수만은 없었다. 총소리가 나는 기계와 라디오도 틀어놓고 전기 네온사인도 밝혀 놓은 채 밤낮으로 농장을 순찰했다. 어느 날 아침에는 고구마를 파먹고 있는 새끼멧돼지 다섯 마리와 마주치기도 했다. 아직 어려서 그런지 도망갈 생각도 하지 않고 빤히 쳐다보기만 했다. 쫓을 생각보다 어미 멧돼지가 덮칠까 겁이 나서 서둘러 농장을 빠져나오기 바빴다.

 

새끼멧돼지들과 마주친 얼마 후에 우리 지역 담당 포수에게서 어미 멧돼지는 잡히고 새끼들만 돌아다닌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천진난만한 모습으로 빤히 쳐다보던 새끼들 이 떠올랐다. 나도 어미고 할미여서일까, 어미 잃은 새끼들이 어떻게 살아갈까 하는 걱정과 함께 가엾다는 생각이 잠시잠깐 들었다.

 

소 잃고 외양간 고친다고, 남은 고구마 밭에 울타리를 치기로 했다. 전기울타리는 비용도 많이 들뿐 아니라 시간이 오래 걸려 당장 설치할 수가 없었다. 바다에서 김 양식을 할 때 쓰던 폐 그물망이 전기울타리보다 효과가 있다고 해서 물어물어 어렵게 구해서 농장마다 설치를 했다. 그 이후로는 발을 뻗고 잠을 잘 수 있었다.

 

멧돼지들이 파먹고 남은 고구마를 수확하면서 많은 생각이 스쳐갔다. 사람이 어쩌다가 동물들이 먹다 남긴 이삭줍기를 하고 있는 것일까. 사람이 동물보다 못난 세상인지, 동물이 사람보다 잘난 세상인지 해답을 찾을 수 없었다.

 

어릴 때 뽀얗게 서리가 내린 논바닥을 다니며 벼 이삭을 줍던 풍경이 아련하게 떠오른다. 지금이야 벼가 마르기도 전에 콤바인으로 추수를 하니 이삭이 떨어질 리도 없고, 설령 떨어진다고 해도 줍는 사람도 없다. 하지만 예전에는 논에서 바짝 마른 벼를 낫으로 베어 묶고, 지게로 날라서 타작을 했으니 이삭이 논바닥에 많이 떨어졌다. 이삭 줍는 일은 아이들 몫이었지만 메뚜기 잡는 일에 더 정신을 쏟았던 기억이 난다.

 

좀 넉넉한 집안에서는 가난한 이웃들을 위해 일부로 이삭줍기를 하지 않는 집도 있었다. 감자와 고구마도 대충 줍고 짧은 이랑은 그냥 두어 캐가도록 인정을 베풀었다. 모두가 가난하던 시절이었지만 배를 곯고 있는 이웃을 생각하는 마음 씀씀이가 진정한 노블리스 오블리제가 아닐까 싶다.

 

인과응보라고나 할까. 사람들의 욕심으로 말미암아 먹이사슬이 파괴되어 야생동물들의 개체수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고 한다. 그런데 산에는 먹이가 부족하니 민가로 내려와서 애써 지은 농작물에 피해를 주고 있다. 어쩌면 야생동물들도 위험을 무릅쓰고 민가로 내려오는 것이 생명을 유지하기 위한 마지막 몸부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본다.

 

알밤과 도토리가 익어 떨어지는 계절이다. 욕심을 앞세워 싹쓸이하지 말고 야생동물들 몫은 남겨두고 줍는 아량을 베풀어야 할 때다. 그래야 먹이사슬이 되살아나고 자연환경도 좋아진다. 더불어 삶의 질도 높아지고 건강하게 오래오래 살아갈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겠다.()

 

- 향토문화의 사랑방 안동지 2017년 9,10월호(통권 167호)

- 김필녀시인의 농장일기

 

 

 

출처 : 마 캐는 시인, 김필녀 시인의 아정농원
글쓴이 : 김필녀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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