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도바람꽃/ 황구하

 


겨우내 잠복해 있다가 불쑥

꽃대궁 밀어 올리는 건

땅속 어둠 때문만은 아니리

 

은밀히 점령한 추운 기억들

그만 버리고 싶은 것

이렇게 먼 길 걸어오기까지

부은 발 따뜻이 씻어주지 못하리

 

자꾸만 욱신거리는 몸

결국은 스스로 제 살 찢고

신음소리 내는 것이리

 

전 생애를 다 바쳐

꽃숭어리 하나 펼쳐 보이는 길

얼마나 처절했기에

저리 환하게 맺혔단 말인가

 

세상살이 자주 꺾이던

바람은 연둣빛이었으리

무너지는 담장에 기댄

붉은 종양덩어리

 

너 사는 날까지만 살으리


- 시집 물에 뜬 달(시에,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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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람꽃이란 이름의 꽃이 있다는 것을 15년 전에야 알았다. 그것도 처음엔 꽃이 아니라 한 인터넷 동호회에서 ‘바람꽃’이란 별명을 가진 한 여성회원을 통해서다.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가 사랑한 아도니스가 죽을 때 흘린 피에서 탄생했다는 ‘아네모네’가 바람꽃의 다른 이름이란 사실을 안 것도 그 무렵이었다. 그 바람꽃이 우리나라에만도 각기 다른 이름으로 18종류가 서식한다. 변산바람꽃, 만주바람꽃, 바이칼바람꽃, 가래바람꽃, 꿩의바람꽃, 쌍동바람꽃, 외대바람꽃, 홀아비바람꽃, 회리바람꽃, 남방바람꽃, 나도바람꽃, 너도바람꽃......

 

 바람꽃의 피는 시기는 각기 다르다. 그중 ‘너도바람꽃’은 우리나라에 분포하는 모든 야생화 가운데서도 복수초 다음으로 일찍 피는 꽃이다. ‘절분초’란 다른 이름도 갖고 있는데 겨울과 봄의 계절(節)을 나누는(分) 풀(草)이란 뜻으로 그렇게 불렸다고 한다. 꽃이 작아 잘 보이지 않지만 이맘때면 대궁을 밀고 올라오는 꽃의 앙증맞은 아름다움을 볼 수 있다. 응달의 눈 속에서 버티는 걸 보면 대단한 생명력이 느껴진다. 저 작은 것의 ‘스스로 제 살 찢고 신음소리 내는’ 생명의 환희라니.  

 

 세상의 모든 봄기운이 총력을 기울여 꽃 하나 피우는 걸 돕고, 줄탁동시로 너도바람꽃 역시 ‘전 생애를 다 바쳐 꽃숭어리 하나 펼쳐 보이는 길’을 연다. 하지만 태생적으로 바람꽃은 연약하다. 바람이 조금만 불어도 파르르 잎을 떨고 날씨가 침통해지면 따라서 고개를 푹 숙인다. 그토록 애처롭게 보호본능을 자극하는 신분인 까닭일까. 한국과 만주, 아무르 등에만 분포한다는 이 꽃은 국내에서도 멸종위기 희귀종으로 지정되어 각별한 보호를 받는다. 그리고 그 연약함 뒤에 어떤 비의가 숨겨져 있는지 꽃말이 '사랑의 비밀' '사랑의 괴로움'이다. 

 

 그러고 보니 그 바람의 발음이 발암(發癌)으로 들린다. ‘무너지는 담장에 기댄 붉은 종양덩어리’에서 시한부 삶의 으스스함을 느낀다. 그런데 ‘너 사는 날까지만 살으리’는 누구의 목소리인가. ‘너도바람꽃’이 죽으면 ‘나도바람꽃’ 나도 같이 따라 죽겠다는 소리일까. 햐, 아도니스의 사랑인가. 여기에도 슬픈 ‘사랑의 괴로움’이 있구나. 뜨거운 사랑의 몸살이 있었구나. 생의 가치는 얼마나 오래 살았느냐에 있지 않고 어떻게 살아가느냐에 있다고 한다면 '너도바람꽃'이 피워올린 그 꽃길만큼 환하기도 어려우리라.      

 

 

권순진

 

출처 : 詩하늘 통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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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날/ 권영우

 

 

뒤뜰 청솔 더미에서 목욕한 해묵은 석양이

동쪽 하늘 붉은 때때옷으로 치장하고

대청마루에 새해 복(福), 한 광주리 걸어 놓는다

 

날마다 맞이하는 무덤덤한 햇살이

오늘 아침은

가난한 가슴에 부푼 꿈을 가득가득 안겨온다

 

섣달그믐 묵은 때를 열심히도 벗기시던

어머니는

밤새도록 지극 정성 차례상을 준비하셨다

설빔하는 어머니 무릎에 누워

자지 않으려 용쓰다 깜박 잠든

새해 새 아침 설날 어둑새벽

개구쟁이 동생이 찬물에 세수하고

할아버지 할머니께 넙죽 세배를 드린다

 

큰 누나가 지어준 색동 주머니에

깜박깜박하시는 할머니의

손때 묻은 무지개 알사탕이

주머니를 두둑하게 채우는 오늘은 설날이다

 

소식 없는 대처의 둘째형을 기다리는

어머니의 애끓는 정성이 담긴

떡국 한 그릇

삼신할미에게 공양 되는 오늘은 설날이다

 

동네 어귀를 들어오지 못해 망설이던

떠돌이새가

하얀 눈밭에 걸린 청솔가지에서 밤새 울다가,

일 년 365일 눈물로 지새운

어머니 치마폭에 용서를 비는 오늘은 설날이다

 

그렇다, 먹지 않아도 배부르고

모든 걸 용서해주고 용서받고

그리운 가족 사랑을 주고받으며

정겨운 희망의 닻을 올리는 오늘은 설날이다

 

- 시집『하루걸이』(그림과책,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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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린 시절 1년 365일 가운데 가장 기다려지는 날이 설날이었다. 운이 좋으면 헐렁한 운동화도 하나 얻어걸리는 횡재급 설빔에 가래떡이랑 강정 따위 평소 먹지 못했던 맛난 음식, 그리고 무엇보다 후훗 세뱃돈, 연탄재 구멍에 꽂아 쏘아 올리는 화약놀이, 그 하루만큼은 하늘이 두 쪼가리 나도 기쁘고 행복해마지 않아야할 가족들의 표정 그리고 우리들의 얼굴들. 이보다 더 즐거운 날이 어디 있으랴. “엄마, 몇 밤만 자면 설이고?” “딱, 한 밤 남았지!” 하루하루 손을 꼽고 툇마루의 기둥을 껴안고 빙글빙글 돌면서 기다렸던 설은 오고야 말았다.

 

 ‘날마다 맞이하는 무덤덤한 햇살이’ 이날을 기해 일제히 빛을 발하면서 ‘부푼 꿈을 가득가득 안겨온다’ 넉넉하지 않아도 넉넉했고 추워도 춥지 않았다. 미리 놋그릇을 말갛게 닦고, 수증기 가득한 방앗간 앞에서 떡살 담은 양은대야를 놓고 긴 줄을 설 때 쯤이면 설렘은 최대치로 고조된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가래떡이 하루 지나 적당히 굳어지면 예쁜 타원형으로 썰리고, 마침내 볶은 쇠고기, 계란지단, 김 등속의 꾸미가 수북 얹힌 떡국이 상 위로 올라와 한그릇 뚝딱 해치우면 삶의 진정한 행복이란 이런 것이구나 속으로 생각하며 꺽 트림을 했다.

 

 그러나 어느 동네 어귀에선 ‘들어오지 못해 망설이던 떠돌이새가 하얀 눈밭에 걸린 청솔가지에서 밤새 울’었고, 어느 집 가마솥에선 맹물만 오래도록 끊고 있었다. 같은 시간 '사평역'을 닮은 한 대합실 앞에선 '그믐처럼 몇은 졸고 몇은 감기에 쿨럭이고 그리웠던 순간들을 생각하며' 누군가는 '한줌의 톱밥을 불빛 속에 던져 주었'을 것이다. '할 말들은 가득해도 청색의 손바닥을 불빛속에 적셔두고 모두들 아무 말도 하지 않았'으리라. 아, 그러나 ‘모든 걸 용서해주고 용서받고’ 먹지 않아도 배가 불렀다면 그저 '정겨운 희망의 닻’ '설날' 때문이리라.

 

 

권순진

 

 

출처 : 詩하늘 통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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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피랑에 오면/ 이동훈

 

 

동피랑에 오면 통영이 보인다.

 

강구안을 내려다볼 것 같으면

서귀포 앞바다와 남덕이 그리운

이중섭의 봉두난발이 보이고.

 

항구에 철선이 닿을 때면

오르내리는 손님과 화물을 좇는

김춘수의 반짝이는 눈빛이 보이고.

 

서문고개와 세병관 사이

아버지 집을 멀찍이 돌아서 지나는

박경리의 가여운 자존심이 보이고.

 

길 건너 이층집을 보며

중앙우체국에 편지 부치러 가는

유치환의 은은한 연애가 보이고.

 

명정동의 난이를 잊지 못해

술에 취해 시장 거리를 헤매는

백석의 닿을 데 없는 유랑이 보이고.

 

통영에 오지 못하고

통영의 멸치와 흙 한 줌에 울었다는

윤이상의 서러움이 보이고.

 

벽마다 꽃 피는 동피랑에 오면

중섭과 중섭의 사랑이

통영과 통영의 사람이

다 보인다.

 

- 월간 <우리시> 2011년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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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세모 통영항 맞은편의 ‘동피랑’ 벽화마을을 찾았었다. 동피랑은 ‘동쪽 피랑(벼랑)’에 자리한 마을이란 뜻이다. 일제강점기시절, 통영 중앙시장에서 주로 일하던 인부들이 모여 살면서 자연스레 동네가 형성되었다. 현재 50여 가구가 살고 있는 이 마을은 원래 철거예정지인 달동네였다. 이곳은 조선시대 이순신 장군이 설치한 통제영의 동포루(東砲樓)가 있던 자리로, 통영시는 낙후된 마을을 철거하여 동포루를 복원하고 주변에 공원을 조성할 계획이었다. 딱히 이주할 곳이 마땅찮고 형편도 여의치 않아 마을주민들의 근심은 깊어만 갔다.

 

 이러한 사정을 접한 ‘푸른통영21’이란 시민단체가 혹시 아름다운 마을로 꾸미면 철거되지 않을 지도 모른다는 주민들의 소박한 바람을 담아 2007년 첫 벽화공모를 했다. 이렇게 해서 몇 차례 추가공모를 거쳐 초중고생부터 전국의 미대생, 전업화가까지 여러 팀들이 참가하여 낡은 담벼락에 색을 입혀왔다. 벽화로 꾸며진 마을에 대한 입소문이 나기 시작하면서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하고, 마을을 보존하자는 여론이 형성되자 통영시는 마침내 동포루 복원에 필요한 마을 꼭대기의 집 3채만을 헐고 마을 철거방침을 철회하였다. 개발을 둘러싼 자본의 야욕이 불러온 용산 철거민참사의 비극으로 온 나라가 들끓을 때였다.

 

 동네 전체가 색을 입은 동피랑은 통영의 새 명물로 거듭났다. 철거대상이었던 동네가 미술공공프로젝트에 힘입어 통영의 새로운 명소로 탈바꿈하고, 매스컴에도 소개되어 관광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전국에서 벽화열풍이 불고 있지만 동피랑 만큼 지형지물과의 절묘한 조화가 잘 구현된 곳도 없을 것이다. 동네가 시작되는 곳에서 가파른 계단을 오르기 시작하면 겨우 한 사람 지나갈 정도의 좁고 꼬불꼬불한 골목길은 마치 동화 속 작은 미로 같았다. 아름다운 통영 앞바다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지점에는 어린왕자와 장미 벽화가 그려져 있다.

 

 그리고 통영이 고향인 김춘수와 박경리, 유치환과 윤이상이 옹기종기 다 모여 있다. 인근 '중앙우체국에 편지 부치러 가는 유치환의 은은한 연애가 보이고' 고향은 아니지만 백석은 ‘남쪽 바닷가 어떤 낡은 항구의 처녀’를 찾아 몇 차례 통영나들이 후 통영을 시로 남겼고, 화가 이중섭은 서귀포와 부산에서의 피난생활을 거쳐 2년 남짓 통영에서 생활하며 작품 활동을 한 인연이 있다. ‘통영과 통영의 사람이 다 보이’는 ‘동피랑’은 작고 낡고 가난한 동네지만 큰 바다와 꿈과 희망이 함께 살아 숨 쉬는 마을이다.

 

 

권순진

 

출처 : 詩하늘 통신
글쓴이 : 제4막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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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흐름속에 

 

누군가를 정말로 좋아한다면 / 김춘경

 

사랑하고 싶은 사람들아
한 세상 살다가
누군가를 정말로 좋아한다면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라
속을 다 내보이지도 말고
속을 다 읽으려 하지도 마라
가까워 지고 나면
언젠가는 서로가 상처를 내어
가슴 아픈 인연이 되고 마니

한평생 살다가
누군가를 진실로 사랑한다면
적절한 관계를 형성하라
생을 다 바치지도 말고
생을 다 가지지도 말라
헤어날 수 없게 되면
언젠가는 서로의 흉터 때문에
가슴 허문 인연이 되고 마니

그래도 사랑은 해볼 만한 것
사랑을 하고 있는 사람들아

지나고 나면
돌이킬 수 없는 것이 시간
아직 기쁨이 진행 중일 때
적당한 거리와 관계를 정립하라
바라볼 수 있는 만큼
허물어지지 않을 만큼
꼭 그만큼만 차지하라
진정 누군가와 함께 하길 원한다면

 

 

 

♬Ocean Fly - Guido Negraszus


 

출처 : 碧波 藝術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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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에게

 

감태준

 

 

떠날 때가 왔다.

이 집에서 가장 먼 곳에

너의 집을 지어라.

 

새는 둥지를 떠날 때 빛나고

사람은 먼 길을 떠날 때 빛난다.

외투를 입어라.

바람이 차다.

 

길 곳곳이 얼음판이다.

겁 없이 미끄러지고

외투에 흙 남기지 마라.

외투란 먼지만 묻어도 누더기다.

 
앞이 어둡고 한기 들 땐

사람의 집을 찾아라.

마음이 불어가는 쪽에 있다.

 
마음이 불어가지 않으면

마음에 들어가 쉬어라.

 
길은 시련 속에 있다.

이제 도도히

갈 수 있는 데까지 멀리 가

너의 집을 지어라.

 

 


ㅡ시집『역에서 역으로』(문학수첩,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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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에게


김명인 

 

 

풍랑에 부풀린 바다로부터
항구가 비좁은 듯 배들이 든다
또 폭풍주의보가 내린 게지, 이런 날은
낡은 배들 포구 안에서 숨죽이고 젊은 선단들만
황천(荒天) 무릅쓰고 조업 중이다
청맹이 아니라면
파도에게 저당 잡히는 두려운 바다임을 아는 까닭에
너의 배 지금 어느 풍파 갈기에 걸쳤을까
한 번의 좌초 영원한 난파라 해도
힘껏 그물을 던져 온몸으로 사로잡아야 하는 세월이니
네 파도는 또박또박 네가 타 넘는 것
나는 평평탄탄(平平坦坦)만을 네게 권하지 못한다
섬은 여기 있어라 저기 있어라
모든 외로움도 결국 네가 견디는 것
몸이 있어 바람과 맞서고 항구의 선술로
입안 달게 헹구리니
아들아, 울안에 들어 바람 비끼는 너였다가
마침내 너 아닌 것으로 돌아서서
네 뒤 아득한 배후로 멀어질 것이니
더 많은 멀미와 수고를 바쳐
너는 너이기 위해 네 몫의 풍파와 마주 설 것!

 

 


―시집『꽃차례』(문학과지성사,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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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에게


최하림

 

 

영원할 것만 같았던
시간들을 본다
아무 생각 없이, 고통스럽게
지나가버린 시간들
다시 잡으려 해도 소용없는
시간 속으로
나는 되돌아갈 수 없으며
잃어버린 시간들을 다시 찾을 수도 없다
변해버린 사람과 깨어진 사랑
속에서 나는 걸음을 옮겨야 한다
남루한 저고리를 걸치고 모자를 쓰고
물푸레나무 우거진 길로, 물 속으로,
이슬비 내리는 둑에서 나는 보아야 한다
세상이란 좋은 것이다
서로 잘 어깨동무하고
서로 잘 조화를 이루며 산다
비 내리는 둑에서
나뭇잎들은 푸르고
산색은 살아나고
새로운 사람들이 슬픔 기쁨
으로 밤을 걸어가고 가끔 불켜진
창을 올려다보며 그리워하기도 한다
날이 깊어간다 모든 것이 변하고
모든 기억이 희미해지고 모든
사랑이 딱딱한 사물로 변해간다
내 손에서 따스했던 네 손이 사라진다
이제 나는 잃어버리게 될 시간들
을 생각하고 시간들을 그리워하며
시간 속으로 들어간다 물푸레나무가
우거져 있다 시간들이 우거져 있다

 

 

 

ㅡ시집『속이보이는 심연으로』(문학과지성사, 2001)

 

  

  한고조 유방은 항우와 백번 싸워 아흔아홉번을 지고 한번을 이겼다고 한다. 그 한번을 이긴 것이 마지막 싸움에서 이겨 천하를 얻었다고 한다. 이런 전력이 말하듯 유방은 항우와는 싸움에서 수많은 고초를 겪는다. 한번은 부모가 항우에게 사로잡히고 말았다. 항우는 유방에게 항복을 하지 않으면 네 부모를 팽형을 시킨다고 했다. 팽형은 솥에 물을 끓여 삶아 죽이는을 말한다. 이 말을 받은 유방은 끓이면은 나도 한 그릇을 퍼 다오 했다고 한다. 이 사건으로 항우는 유방에게 인질이 안 통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한번은 또 전세가 불리해져 자식들을 마차에 싣고 쫓기게 되었다. 뒤에서는 항우의 기병들이 점점 가까이 추격을 해오고 마차는 속력이 나지 앉자 다급해진 유방은 마차의 무게를 줄이기 위해 자식들을 밖으로 던져버렸다고 한다. 그 것도 한 번이 아니고 두 번씩이나. 내던져졌던 자식은 나중에 유방의 뒤를 이어 왕이 되지만 유방은 단순히 저 혼자 살기 위해 자식을 버린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의 어깨엔 수많은 백성과 대의라는 보다 큰 명제가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사가들이 그른 비난하지 않는 것은 당시의 시대적 사상이 자식을 중히 여기지 않았기 대문일 것이다.

 

  시대상황이 다르고 제왕이 전장에서 겪어야하는 불가피한 상황을 보통 시대에 평범한 아버지와 자식에게 비교하는 자체가 무리이긴 하지만 유방은 패륜의 불효자이며 박정하고 매정한 아버지임에는 틀림이 없다. 오죽하면 항우가 유방의 모진 성격을 가족들을 인질로 잡아보고서야 알았을까. 그렇다면 오늘날 아버지의 자식들 사랑은 어떠할까. 시대가 강한 아버지를 만들기도 하고 약한 아버지를 만들기도 하겠지만 이 시대는 좋은 아빠는 넘쳐난다고 한다. 다음이나 네이버 포털사이트의 검색에서 좋은 아빠를 한번 쳐보라 

 

  “좋은 아빠가 되는 법, 좋은 아빠의 자격, 좋은 아빠의 모임, 좋은 아빠가 되기육아 스쿨, 좋은 아빠 도전하기, 좋은 아빠 10계명, 좋은 아빠가 되었던 사례, 좋은 아빠의 7가지 비밀, 좋은 아빠 되기 프로젝트, 좋은 아빠 학교, 좋은 아빠 보고서, 좋은 아빠 테스트, 좋은 아빠가 되기 위한 1분 혁명등 등... 수도 없이 많다.

   

  좋은 아빠에게 권위란 것이 있을까, 오늘날의 아버지들은 아들을 이길 수가 없다. 직장 상사 같은 명령 하달식의 아빠는 이제 나쁜 아빠일 뿐이다. 아들을 위해 가진 것 다 내어주고 온갖 수발을 다하지만 아들이 보험이 아닌 시대에 더는 무엇을 기대할 수 있을까. 분신 같으면서도 분신이 아니어서 애증이 교차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식은 나이가 들어도 물가에 내 놓은 아이처럼 염려스럽고 바라보는 뒷모습은 애잔하기만 하다.

 

 


아들에게

 

문정희

 


아들아
너와 나 사이에는
신이 한 분 살고 계시나보다


왜 나는 너룰 부를 때마다
이토록 간절해지는 것이며
네 뒷모습에 대고
언제나 기도를 하는 것일까?


네가 어렸을 때
우리 사이에 다만
아주 조그맣고 어리신 신이 계셔서


사랑 한 알에도
우주가 녹아들곤 했는데


이제 쳐다보기만 해도
훌쩍 큰 키의 젊은 사랑아


너와 나 사이에는
무슨 신이 한 분 살고 계셔서
이렇게 긴 강물이 끝도 없이 흐를까?

 


 

―시선집『자연 속에서 읽는 한 편의 시 09』(국립공원,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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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뒤에서
―아들에게


서정윤

 


전생의 사랑을 지우려
오래 잠자고
또 다른 미움을 잊으려
울부짖는다.


그래도 나와는 인연이 있어
내 품에 안겨서는
뜻모를 웃음을 웃는다.


이제 시작된
사랑의 삶을 위해
나는 너의 뒤에 섰다.


고통과 아픔의 삶보다는
기쁨과 희망의 날이
더 많은 삶, 살기를
나는 바라고 있다.


내가 너에게 줄 수 있는 건
용기와 믿음 뿐


나는 너의 삶을
스스로의 힘으로 살아가야 한다.


나에게 남은 마지막 사랑을
너의 삶에 보낸다.

 

 

 

―시집『홀로서기 3』(문학수첩, 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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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가 아들에게 주는 시

 

랭스턴 휴즈

 

 

아들아, 난 너에게 말할 게 있다.
내 인생은 수정으로 된 계단이 아니었어.
계단에는 못도 떨어져 있었고
가시도 있었다.
그리고 판자에는 구멍이 있었지.
바닥엔 양탄자도 깔려 있지 않았다.
맨바닥이었어.
그러나 난 지금까지
멈추지 않고 계단을 올라왔다.
층계참에 도달하고
모퉁이도 돌고
때론 전깃불도 없는 캄캄한 곳까지 올라갔지.
그러니 아들아, 너도 돌아서지 마라.
주저앉지 말아라
왜냐하면 넌 지금
조금 힘든 것일 뿐이니.
너도 곧 그걸 알게 될 거야.
지금 주저앉으면 안 된다.
왜냐하면 애야, 너는 아직
그 계단을 올라가고 있단다.
나는 아직도 오르고 있어.
그리고 인생은 내게
수정으로 된 계단이 아니었지

 

 


―신현림 엮음『딸아,외로울 때는 시를 읽으렴』(걷는나무, 2011)

 

 

 

 

출처 : 시하늘
글쓴이 : 흐르는 물/정호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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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양연화(花樣年華)/ 이병률

 

줄자와 연필이 놓여 있는 거리

그 거리에 바람이 오면 경계가 서고

묵직한 잡지 귀퉁이와 주전자 뚜껑 사이

그 사이에 먼지가 앉으면 소식이 되는데

뭐 하러 집기를 다 덜어내고 마음을 닫는가

 

전파사와 미장원을 나누는 붉은 벽

그 새로 담쟁이 넝쿨이 오르면 알몸의 고양이가 울고

디스켓과 리모컨의 한 자 안 되는

그 길에 선을 그으면 아이들이 뛰어노는데

뭣 때문에 빛도 들어오지 않는 마음에다

돌을 져 나르는가

 

빈집과 새로 이사한 집 가운데 난 길

그 길목에 눈을 뿌리면 발자국이 사라지고

전봇대와 옥탑방 나란한 키를 따라

비행기가 날면 새들이 내려와 둥지를 돌보건만

무엇 하러 일 나갔다 일찌감치 되돌아와

어둔 방 불도 켜지 않고

퉁퉁 눈이 붓도록 울어쌌는가

 

- 시집『당신은 어딘가로 가려 한다』(문학동네,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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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양연화’는 '인생에서 가장 아름답고 행복한 순간'이라는 뜻을 담고 있는 왕가위의 영화 제목이다. 영화는 상해에서 홍콩으로 이주한 사람들이 주로 거주하는 한 아파트에 두 가구가 이사를 오면서 시작되는데, 서막의 분위기에서 이미 지루함을 예고하고 있다. 이 두 가구는 지역신문 데일리 뉴스 편집장 차우(양조위)부부와 작은 무역회사 비서로 일하는 리첸(장만옥)부부다. 남편이 사업상 일본 출장이 잦은 리첸과 아내가 호텔 근무로 자주 집을 비우는 차우는 아파트 주위에서 자주 얼굴을 부딪치면서 꽤 친근한 이웃으로 발전한다.

 

 그러던 어느 날 차우는 리첸의 핸드백이 아내의 것과 같음을 발견하고, 리첸 역시 차우의 넥타이가 남편의 것과 같다는 사실을 확인하면서 두 사람은 자신들의 배우자가 서로 사귀고 있는 사이임을 눈치 챈다. 배신감에 흐느끼는 리첸을 위로하면서 차우는 그녀에게 사랑의 감정을 갖게 되고, 리첸 역시 그런 차우에게 점점 마음이 기운다. 이쯤 되면 스토리는 뻔할 뻔자 노름인 듯싶지만 영화는 시종일관 느릿한 전개로 별다른 정점에 이르지 못한다. 시간이 흐를수록 자꾸만 뒤쳐지는 지친 마라토너의 시간과도 같아 보인다.

 

 이 작품은 왕가위 감독이 과거 '중경삼림'이나 '해피 투게더'에서 보여준 고속촬영 방식이 아닌 슬로 모션과 스톱 모션을 반복적으로 사용하여 늘어짐의 미학을 보여주는 듯하다. 또 주위의 모든 곁가지들은 걷어내고 오로지 두 인물에만 초점을 맞춘 거라든지 배경이나 심리 묘사 등에서 왠지 프랑스적인 분위기가 느껴졌다. 아니나 다를까 이 영화는 2000년에 프랑스와 합작하여 그해 칸영화제 남우주연상과 기술대상을 수상한 사실을 나중에야 알았다.

 

 영화에서 유난히 눈에 들어오는 장면은 바로 '치파오'라는 몸에 딱 달라붙는 스타일의 중국 전통 원피스를 입은 리첸의 모습이다. 이는 곡선미를 살려낸 개량 의상으로서 중국 기생의 옷에서 발전한 것이라 한다. 싱가폴 항공 여승무원의 제복으로도 유명한데, 한때 '싱가폴은 잊어도 싱가폴에어라인은 잊지 못한다'란 광고 카피는 이 옷을 입은 여승무원이 통로를 지날 때 슥 비벼대며 승객들에게 베푸는 스킨십 서비스가 유명해서 나온 말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 항공기를 이용하는 남성이 창가 쪽을 원한다고 하면 ‘촌놈’ 소리를 듣는다.

 

 장만옥이 입은 이 옷은 그냥 눈요기가 아니라 60년대 홍콩을 배경으로 한 이 영화에서 리첸이라는 인물을 형상화하고 왕가위식 화양연화를 표현하는 가장 중요한 매개체로 활용되고 있다. 영화에서 리첸이 입은 원색의 화려한 치파오는 전부 26벌에 달한다고 한다. 이 26벌의 원색 치파오를 통해 감독이 의미하고자 했던 화양연화란 결국 껍질뿐인 아름다움 혹은 행복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은유한다. 어두운 골목길을 배경으로 국수통을 들고 다가오는 화려하고 부드러운 곡선미의 치파오를 입은 리첸과 아내가 부재중이라고는 믿기 어려울 정도의 말끔한 정장에 역시 화려한 무늬의 넥타이 차림을 한 차우의 스침.

 

 ‘고독을 이기는 유일한 방법은 더 큰 고독에 빠져 드는 것’이라는 어느 시인의 말처럼 더 나은 화양연화를 위해 두 사람의 화려한 의상은 과연 그들의 외로움과 사랑을 도울 수 있을까? 두 사람의 사랑은 그들의 의복처럼 단정하고 격식을 차리면서 느리게 지속되긴 하지만 현실적 이유로 헤어질 수밖에 없다. 불가에서는 좋은 인연임에도 불구하고 지속되지 않는데서 오는 고통을 인간이 기본적으로 갖는 여덟 가지 고통중의 하나라고 했다. 이 영화는 바로 그런 고통을 아름답게 담고 있다.

 

 그리고 또 하나, 이 영화는 음악이 기가 막히게 딱 맞아떨어져 좋았다. 첸과 차우가 친해지기 전 계단을 올라가고 내려가면서 스쳐지나갈 때 나오는 테마음악은 이 영화의 분위기를 성격 짓는 것 같다. 발걸음마다 리듬을 주는 음악이 힘 있고 들뜨게 하면서도 쓸쓸하고 서럽고 안타까운 느낌을 주었다. (우리 영화 ‘접속’에서도 이런 느낌을 주는 대목이 있다) 첸과 차우가 처음으로 마주앉아 서로의 눈을 바라보며 식사를 할 때 흐르는 음악이 냇킹콜의 'Quizas, quizas, quizas'인데 많은 이들에게 영화를 두고두고 기억케 했다. 첸의 "잘못한 것도 없는데 죄지은 것 같아요"라는 대사도 오래 기억에 남는다.

 

 남들과는 다른 사랑임을 위안 삼으며 쿨한 이별연습을 해보지만 그들은 함께 울어버린다. 모든 것이 사랑이었고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때는 그렇게 지나갔다. 세월은 흘러 차우가 첸을 찾아가지만 '애 딸린 여자 하나'가 산다는 말에 그만 돌아선다. 감추고 싶은 비밀이 있을 땐 산에 가서 나무에 구멍을 뚫고 그 속에다 말을 하고 진흙으로 막았다는 옛이야기로 마음을 달랜다. 그리고 차우는 이국땅 캄보디아에 첸과의 비밀을 묻어둔다. 첸도 차우를 못 잊어 전화로 찾지만 아무 말도 못하고 수화기를 천천히 내려놓는다. 그의 목소리를 들은 것으로 다였다. 그것으로 아름다웠던 한 시절은 짙은 노을빛 신화로 물들어갔다.

 

 같은 제목의 시를 빌미로 영화이야기가 너무 길었나 보다. 이 시는 영화의 이미지를 차용하고 풍경의 일단을 스케치했을 뿐 스토리와 큰 상관없는 시인 개인의 기억과 인연의 퍼즐로 읽힌다. 시인은 인연을 생각하다가, 인연과 세월을 떠돌다가, 인연과 세월과 풍경을 바라보는 시간까지 왔다고 한다. 돌이킬 수 없는 것들을, 여전히 만져지지 않는 아름다움을, 스침으로 상처가 된 내력들을 다 내려놓지 못하는 것이 어찌 시와 영화뿐이고, 차우와 첸과 시인만의 추억일 수 있으랴.

 

 

권순진

 

  

출처 : 詩하늘 통신
글쓴이 : 제4막 원글보기
메모 :

세월처럼 무서운 건 없다 / 김동길

 

 

결혼을 결심하고
나에게 주례를 부탁하는 젊은 남녀에게
앞으로 50년 동안 꾸준하게 사랑할 수 있겠느냐”고
묻습니다. 물론 그들의 대답은 한결같이 “예” 입니다.

그러나 50년이라는 긴 세월, 한 남자와 한 여자가
변함없이 사랑하며 건강하게 사는 일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닙니다.

중국 송대의 대학자 주희가

어느 해의 가을을 맞아 이렇게 읊었습니다.

젊은이 늙기 쉽고 학문 대성하기 어려우니 일분일초도 가볍게 여기지 말라
연못가의 봄풀은 아직도 꿈속인데 계단 앞 오동나무 잎에는 가을바람 분다

세월은 계곡을 흐르는 물 같고 시위를 떠난 화살같이 빨리 달려갑니다.
세월 앞에 힘 센 사람이 누구입니까?

70년 전에 해방을 맞았습니다. 그 때 나이가 열여덟이었습니다.
60년 전에 청운의 꿈을 안고 미국 유학길에 올랐습니다.
50년 전에는 연세대학교의 교무 처장이었습니다.
50년 전에는 어머님, 아버님이 다 살아계셨고
나의 누님도 건강하였습니다.

50년 전에는 친구 이근섭과 저녁 먹고 나서는
함께 꼭 산책하였고, 제자 최영순은 건강하고
공부 잘 하는 대학생이었는데, 나만 두고 다들 떠났습니다.

낙엽을 밟으며” 돌아오지 않는 그들을
나는 이 가을에 그리워합니다.

산다는 것이 몹시 서글프게 느껴집니다.
찰스 램(Charles Lamb)과 함께 이렇게 읊조립니다.
“All, all are gone, old familiar faces”
['모두 모두 갔다 옛날의 그리운 얼굴들']

오늘은 여기 살아있지만

내일은 이곳을 떠날 겁니다.

그래서 나는 내 가까이 있는 소수의 사람들을
오늘 최선을 다해 사랑하리라 마음먹고 있습니다.

세월이 이렇게 빠르다는 것을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정말 무서운 건 세월입니다.

 

**********

찰스 램[Charles Lamb (1775~1834)]의 詩 '그리운 옛 얼굴들' 원문

The Old Familiar Faces  
그리운 옛얼굴들
 I have had playmates, I have had companions, 
같이 놀던 친구들도 있었고 동무들도 있었지.
In my days of childhood, in my joyful school-days
내 어린시절에, 내 즐거웠던 학창시절에 
 All, all are gone, the old familiar faces. 
그리운 옛 얼굴들이 모두, 모두 가버렸다네. 
 I have been laughing, I have been carousing, 
소리내어 웃었고, 흥청거리며 술도 마셨지
 Drinking late, sitting late, with my bosom cronies
절친했던 친구들과 밤 늦도록 마시고 어울려섯는데
  All, all are gone, the old familiar faces. 
그리운 옛 얼굴들이 모두, 모두 가버렸다네. 
I loved a Love once, fairest among women
한 때 눈부시도록 아름다운 여인을 사랑하기도 했어

Closed are her doors on me, I must not see her-- 그녀는 내게 문을 닫아버렸고 나는 그녀를 더 볼수가 없었지

 All, all are gone, the old familiar faces. 
그리운 옛 얼굴들이 모두, 모두 가버렸다네. 
I have a friend, a kinder friend hath no man
친구가 있었다네 누구도 그처럼 친절할 수 없었지.

Like an ingrate, I left my friend abruptly 그에게 보답하지도 못하고 난 그 친구를 갑자기 떠났지,

 Left him to muse on the old familiar faces. 
그리운 옛 얼굴들을 그저 바라보도록 그를 남겨두고
Ghost-like I paced round the haunts of my childhood, 
나는 유령처럼 내어린 시절의 놀던 곳을 배회했지 
 Earth seem'd a desert I was bound to traverse, 
내가 꼭 지나가야 했던 사막같은 땅을 
 Seeking to find the old familiar faces. 
그리운 얼굴들을 찾으려 애쓰면서
  friend of my bosom, thou more than a brother, 
 형제보다도 더 사랑햇던 나의 벗

Why wert not thou born in my father's dwelling? 왜 너는 내 아버지의 집에서 태어나지 않았는지?..

 So might we talk of the old familiar faces. 
그랬다면  그리운 옛얼굴들과 이야기할 수 있었을텐데..
How some they have died, and some they have left me, 
먼저 죽은 이들도 있고 나를 떠난 이들도 있지 
 And some are taken from me; all are departed
그리고 어떤 이들은 나로부터 빼앗아 갔어.  모두가 떠나갔지.  

All, all are gone, the old familiar faces. 그리운 옛 얼굴들이 모두, 모두 가버렸다네.

 

 

Longfellow (롱펠로우)
Art is long, and time is fleeting 예술은 길고 세월은 짧다

 

너는 그냥 마음 거두어 가도 / 김철진



바람은
그냥 스쳐 불어 가도
풀잎은
흔들리며 괴로워하고

별빛은
그냥 떨어져 내려도
들꽃은
꽃잎에 눈물을 단다

시간은
그냥 제 갈 길 가도
잎새는
낙엽되어 마른 땅 구르고

너는
그냥 마음 거두어 가도
나는
두고 긴 날 가슴 앓는다

 

- 시집『사랑가』(현대시단, 2009)

            李御寧의 아내, [文學思想]의 안주인 姜仁淑

 

김태완   

 

내가 만난 文人들

『1970~1980년대 서울 적선동 「문학사상」 사무실에서 만난 문우들이 大家로 성장.
金東里·徐永恩·金承鈺·崔仁浩·金春洙·孫素熙 선생과의 인연, 잊을 수 없어』


내 남편 李御寧

  

「얼마나 더 많은 길을 걸어야 인간이 되나?」
 
  姜仁淑(강인숙·73·건국大 명예교수) 선생은 이따금 밥 딜런의 「블로잉 인 더 윈드」를 부르면 그런 생각이 든다고 한다. 삶에는 이정표가 없다. 거칠고 험한 길을 걸어왔지만 도무지 얼마나 더 걸어야 할지 알 수 없다.
 
  李御寧(이어령)·姜仁淑 부부는 서울大 국문과 동급생으로 만나 평생을 의지하며 살아왔다.
 
  지난 11월4일 오후 姜선생이 관장으로 있는 서울 평창동 「寧仁(영인)문학관」을 찾았다. 「寧仁」은 두 사람 이름에서 한 자씩 따온 말이다. 고급 주택가를 꼬불꼬불 찾아가는 굴곡의 길이 낯설기만 했다.
 
  姜仁淑 선생은 남편을 「李御寧 선생」으로 불렀다. 그 말은 조금 미묘하고 담백하게 들렸다. 세월의 愛憎(애증)을 뛰어넘었다고나 할까. 그녀는 그렇게 곱게 물들어 가고 있었다. 그녀의 남편 李御寧 선생 이야기부터 꺼냈다.
 
  ―李御寧 선생의 성격은 어떤가요.
 
  『성격이 굉장히 급하고 완벽주의자입니다. 저는 이날 이때까지 야단만 맞고 살았습니다. 당신이 보기에 뭔가가 부족하니까 칭찬보다는 야단을 쳐요. 불완전함을 못 참는 분입니다. 하지만 저렇게 감각이 예민하시니 얼마나 고달플까 하는 생각도 들어요. 저렇게 살 수도 있구나 저 양반은 마지막까지 눈이 보이는 날까지 안 늙겠구나, 하고 감탄하고 있습니다』
 
  ―벌컥벌컥 화를 내기도 하십니까.
 
  『예민한 감각을 가지고 사시니 (제가) 사는 게 힘이 들어요. 마땅치 않은 게 많으니 전기 고치는 사람, 컴퓨터 고치는 사람들이 사흘 밤낮으로 드나들어요. 심지어 전자회사에서 신제품을 만들면 제일 먼저 우리 집에 가져와 시험을 합니다. 李선생이 첫 사용자로서 결함을 지적하면 고쳐서 팔 정도예요』
 

강인숙·이어령 부부.

  ―李선생은 식습관도 까다롭습니까.
 
  『된장찌개, 김치찌개, 김이나 김치 같은 것만 먹어요. 충청도 산골에서 사셨기 때문인지, 자반구이만 들고 육식도 별로예요. 그런 덕택에 충청도 음식만 얻어먹고 삽니다』
 
  언젠가 외국에 사는 손자들이 일주일간 머물고 갔는데 빈 숟가락을 물고, 『먹을 게 없다』고 하더란다. 李御寧 선생의 입맛은 유별나 외국 출장길에도 어김없다고 한다.
 
  『외국에 가셔도 한국음식만 드세요』
 
  ―외국에 있는 한국식당을 찾는다는 말인가요.
 
  『아뇨. 제가 택배로 보내 줘요. 일주일에 한 번, 어떨 때는 두 번씩 보내 준 적도 있어요. 요즘은 진공 반찬통이 있지만 예전에는 김칫국물이 샐까 봐 깡통에 땜질해서 담아 보냈어요. 얼마 전 건강검진을 했는데, 비타민 과잉 판정이 나왔어요. 과일도 별로 안 드시는데, 김치를 많이 드시니 그런 것 같아요』
 
  그러면서 李御寧 선생의 흉을 하나 더 봤다.
 
  『지하 서재에서 노상 시간을 보내요. 저는 허리 디스크가 있어 두 시간 이상 앉아 있질 못하는데, 아침부터 저녁까지 뻣뻣하게 앉아 있어요. 식탁에서 밥만 먹고, 다시 지하로 쏙 내려가요. 「저 양반 척추가 참 튼튼하구나」 하는 생각을 해요.
 
  하지만 지하실에 난방시설을 하지 않아 겨울 내내 감기가 안 떨어져요. 더우면 졸리고 자고 싶어 안 된다고 해요. 추워야 정신이 바짝 난다며. 어떤 의미에서 보면 사는 게 아니지요. 한 가지만 할 뿐이에요. 주변사람을 돌본다거나, 집안일에 손 대는 일은 없고 오로지 책 읽고 컴퓨터 들여다보고, 글쓰는 게 전부입니다』
  
 文學思想과 이어령, 강인숙
 

영인문학관은 개관 이후「문인 육필원고·애장품전」,「文人交信展」등 각종 전시회를 열었다. 강인숙 선생이 전시회를 둘러보고 있다.

  이야기는 「李御寧과 文學思想」 시절로 옮겨갔다. 李선생이 1972년 10월 「문학사상」誌를 창간한 뒤 1985년 주간에서 물러날 때까지 13년간의 이야기다. 그 시절은 그야말로 한국 현대문학이 본격 발화한 시기로 문학사상이 배출한 신인들이 굵직한 巨木이(거목) 돼 있다.
 
  李御寧이 만든 문학사상은 정실주의와 파벌주의를 철저히 배격했다. 李선생이나 姜선생은 예총이니 「민족작가회의」니 하는 그룹에 끼지 않았다.
 
  『문학사상은 세계적으로 손색없는 잡지라고 자부합니다. 다시는 그 수준까지 못 갈 것 같아요. 표지화, 작품 삽화를 그렸고 古典 발굴을 계속해 왔습니다. 李선생은 자기 派(파)가 없으신 분이에요. 그러니 굉장히 작품에 엄격했습니다. 작품이 좋지 않으면 아무리 개인적으로 친해도 싣지 않았어요. 작품이 좋으면 지나가는 사람도 데려다 쓰게 했어요.
 
  작품 위주의 독특한 심사가 특징인데, 그때 문학사상에 실린 글들이 지금 웬만한 작가의 대표작으로 통합니다. 장편소설로는 朴景利(박경리)의 「토지」나 朴婉緖(박완서)의 「도시의 흉년」이 애착이 갑니다』
  
 文人들의 사랑방
 

이어령│송정연 作.

  ―당시 문학사상 사무실이 문인들의 사랑방으로 통했다고 들었습니다.
 
  『서울 종로구 적선동에 있던 한옥이 마음에 들어 제가 구입했습니다. 한옥은 주간실로 쓰고, 옆 건물인 양옥은 편집실로 썼어요. 한옥이 편하니까 문인들이 죄다 주간실로 몰려들었습니다. 꼭 용건이 있다기보다 문인들이 지나가다 들르는 사랑방이었지요.
 
  1970년대 가난한 작가들이 주로 그 부근에 살았는데, 때가 되면 자장면을 시켜 잡숫고 문학논쟁을 벌이기도 했어요. 그때 나눈 이야기를 에밀 졸라의 「木曜談話」(목요담화: 목요일마다 모여 문인들의 얘기를 채록한 책)처럼 모아 두었다면, 대단한 재료가 됐을 거라고 생각해 봅니다』
 
  ―그때 자주 찾아오셨던 문인들은 누구입니까.
 
  『너무 많아 일일이 세기 어려워요. 崔仁浩(최인호) 선생이 계셨고, 劉賢鍾(유현종)·趙海一(조해일)·韓水山(한수산)·趙善作(조선작)·黃晳暎(황석영)·朴景利·朴婉緖·宋影(송영) 같은 분들이 자주 왔습니다.
 
  당시 그분들은 문학적으로 볼 때 어리고 애띤 「젊은 작가」들이었어요. 제가 가끔 주간실에 들르면 너무 재미있어 하루 종일 웃고 즐거웠어요. 하지만 李御寧 선생이 술을 못 하시니 술판을 벌이거나 서로 술주정하는 일은 없었습니다』
 

박완서│사진·한영희


   黃晳暎의 회고
 

서울 종로구 평창동에 있는 영인문학관 전경.

  소설가 黃晳暎에게도 「李御寧과 문학사상」 시절은 잊을 수 없는 추억이다. 1974년인가, 그의 나이 30代 초반으로 첫 창작집 「客地(객지)」를 출판한 직후였다. 그해 낳은 딸이 대학을 나와 시집 갈 나이가 됐다. 그의 말이다.
 
  『李御寧이 문학사상을 창간해 놓았는데, 나도 단편소설 몇 편을 발표하면서 그와 인사를 하게 됐다. 李御寧은 사람이 찾아가면 주위에 앉혀 놓고 담론하기를 즐겼다. 나는 그의 단순하고 솔직한 성격과 다변을 긍정적으로 생각했다. 그는 돌려서 나의 현실주의적 시선을 비꼬는 적도 있었지만 다른 벗들의 얘기를 들어 보면 언제나 내 재간을 인정해 주었다고 한다. 「버릇은 없지만 잘 쓰는데 어쩌느냐」 라고 했다나…』
 

시인 송수권의 커리커처│김영태 作.

  시인 宋秀權(송수권) 역시 문학사상을 통해 1975년 2월 등단했다. 宋秀權은 한 해 전 詩 14편을 투고했으나 소식이 깜깜했다. 詩人이 되긴 글렀구나, 하고 문학을 접고 시골로 돌아갔다. 그런데 꼭 1년 뒤 李御寧에게서 연락이 왔다. 그의 말이다.
 
  『당시 문예지가 별로 없어 작품을 보내는 이들이 얼마나 많았겠습니까. 시답잖은 작품들은 대체로 휴지통으로 직행을 했어요. 그런데 편집 책임자였던 李御寧 선생께서 어느 날 사무실 휴지통에 버려진 종이들을 보며 「저게 뭐냐」고 물으셨더니, 편집부 기자가 「원고지를 쓸 줄도 모르는 이들의 응모작입니다」라고 대답했답니다.
 
  아마 가엾게 보셨는지 그 원고지를 쓸 줄도 모르는 응모작들을 심사하셨는데 저의 작품이 눈에 들어왔던가 봅니다. 그러니 1년 전 응모작을 수소문해서 사람이 직접 찾아오게 된 거죠. 그때 저는 시골로 내려가 직장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휴지통에서 빛을 본 작품이 저의 데뷔작 「山門에 기대어」입니다』
  
  金東里와 徐永恩
 

소설가 김승옥.

문학사상에는 金東里(김동리)의 부인이었던 소설가 徐永恩(서영은)이 편집부장을 맡은 적도 있었다. 그래서 姜선생에겐 金東里와 徐永恩에 대한 기억이 많고 애틋하다.
 
  ―金東里와 徐永恩 선생님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金東里 선생은 경마와 화투치기를 좋아하셨어요. 돈도 손수 챙기고 열쇠도 간수하는 등 大家답지 않은 현실적인 측면도 있었습니다.
 
  박물관을 하려고 골동품을 살 때는 돈을 아끼지 않으셨는데, 일상에선 돈을 너무 아껴서 휴지 대신에 글을 쓰다 남은 화선지 쪼가리로 땀을 닦는 모습을 뵌 적도 있어요. 에어컨만 있었어도 쓰러지지 않았을 텐데…. 반면 손도 마음 씀씀이도 큰, 徐永恩씨는 캠코더 같은 물건을 자기 돈으로 사 버리는 분입니다.
 
  徐여사는 사람을 묘하게 끌어당기는 능력이 있어 친하게 지냈습니다. 金선생님이 쓰러지신 후 전처 자식들과 분쟁이 있었는데, 호랑이 같은 자식들 사이에 힘없는 젊은 아내를 놓고 가면서 보호 장치를 하나도 만들어 놓지 않았어요.
 
  그래서 徐여사만 보면 「악연이야. 잊어버려」하고 오금을 박곤했어요. 하지만 이 여인은 한 번도 「그 분」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 고난으로 인해 하나님을 만났다면서 환하게 웃는 거예요. 徐여사를 보고 있으면, 「사랑하였으므로 행복하였네라」 라는 말이 실감으로 다가와요』
  
 감금당해서 글 쓴 金承鈺
 

박경리│사진·한영희

  ―다른 문인들과의 에피소드가 있으면 들려주세요.
 
  『소설가 金承鈺(김승옥) 선생이 기억에 남습니다. 李御寧 선생은 金承鈺의 재주를 아깝게 여겨 소설 집필 기회를 여러 번 만들어 주었어요. 그 결과로 만들어진 작품이 바로 「서울 달빛 0장」입니다.
 
  李선생은 당시 최고급 호텔에 방을 잡아놓고 金承鈺을 감금하다시피 해 글을 쓰게 했습니다. 한 번은 장충단공원 근처에 있던 파크호텔에 방을 둘 잡아 놓고, 한 방에는 金承鈺에게 소설을 쓰게 하고, 다른 방에는 당시 문학사상 편집부장이던 徐永恩씨와 편집부 기자이던 이명자씨를 투숙시켜 도주를 막게 했어요』
 
  ―「서울 달빛 0장」은 호텔에서 쓴 작품이군요.
 
  『아닙니다. 金承鈺 선생은 또다시 도망쳤어요. 화장실에 간다고 나와 줄행랑을 친 겁니다. 그날 저녁 무렵 집으로 전화가 왔어요. 李선생은 안 받으려 하시더라구요. 제가 그랬죠. 「글을 안 썼더라도 전화를 걸 사람이니, 전화를 받아 보라」고 했어요. 아니나 다를까 못 썼다는 전화였어요.
 
  그런데 金承鈺 왈, 「선생님, 목소리가 너무 듣고 싶어 전화를 걸었어요. 원고가 안 써져요」 그래요. 하지만 그런 우여곡절을 몇 차례 거친 뒤 결국 작품을 썼습니다. 그 작품이 1회 李箱(이상) 문학상을 탔어요』
 

소설가 최인호

  ―소설가 崔仁浩의 글씨체를 두고 악필이란 소문이 많은데.
 
  『崔仁浩 선생의 글씨를 악필이라고 하는데, 그것은 틀린 말입니다. 악필이라면 글이 밉게 보이는데, 그의 글은 동글동글하고 회화적이기까지 합니다. 흘려 써서 그렇지 글씨의 선들은 범상해요. 1970년대 말인가 崔선생이 문학사상 편집실에 들렀는데 女기자가 그가 쓴 원고지 行間(행간)에 무언가를 쓰고 있더랍니다.
 
  崔선생이 「남의 원고를 마음대로 고치다니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거냐」는 생각이 들어 따졌다고 해요. 그러나 얼마 안 가 편집실이 웃음바다가 됐습니다. 그 기자는 崔선생의 원고 전담이었는데, 워낙 글씨를 알아볼 수 없어 인쇄소 조판공을 위해 원고 行間에 반듯하게 글씨를 다시 쓴 것이라는 얘기였어요』
 

청담동 자택에서 김동리(가운데)와 아내 서영은.

  사료 발굴 노력
 
  문학사상은 창간 초기부터 사료발굴에 적극적이었다. 전문가를 직원으로 채용, 국문학사적 가치가 높은 자료들을 적지 않게 모았다. 尹東柱(윤동주)·李箱·金素月(김소월) 등의 육필원고가 있으며, 「인목대비 술회문」 등 고전문학 자료가 많았다. 이와 함께 1970년대 작가들이 문학사상에 투고한 원고도 많았다. 당시엔 워드프로세서나 타자기가 없어 직접 원고지에 쓴 자필원고가 대부분이었다.
 
  ―尹東柱·李箱·金素月 등의 원고들은 어떻게 해서 모으셨나요.
 
  『어느 날 李선생의 차를 얻어 탈까 해서 사무실에 들렀어요. 그런데 직원들이 원고지를 차에 싣고 있더군요. 적선동 한옥엔 창고가 없어 그냥 파쇄기로 분쇄해 버린다고 해요. 아깝다는 생각이 들어 우리 집에 그때부터 갔다 놨지요. 아이들이 커서 하나둘씩 집을 떠나가 그 방에다 원고를 쌓아 두었어요. 그 달 그 달 원고가 몇 박스나 됩니다. 한 해만 모으면 방 한가득 원고가 가득합니다. 장편소설 원고 한 편이 사람 허리춤까지 됩니다』
 
  姜선생은 『가까이 모셨던 문인과 서예가들이 하나둘 돌아가셨다』며 문인들에 대한 추억을 꺼냈다. 그는 『한 분 한 분이 다 그렇다. 그냥 피로 맺어진 인연은 마디로 쉬는데, 문학으로 맺은 이들은 다 가족 같고 가슴 아프다』고 했다.  

시인 김상옥│김세환 作.

그러고 보니, 그의 나이도 이제 일흔이 넘었다. 영인문학관에서 현재 전시 중인 故 金相沃(김상옥·2004년 작고) 시인의 유묵에 대해 『선생님의 부채를 보고 있으면 눈물겹다. 詩와 글씨와 그림이 모두 어울려 만들어 내는 典雅(전아)한 세계가 무너져 가고 있는 것 같다』며 아쉬워했다.
 
  ―기억에 남는 문인들에 대한 얘기를 해주세요.
 
  『한국예술원 회원을 지내셨던 趙敬姬(조경희·2005년 작고) 선생은 지난해 가을까지도 뵈었어요. 몇달 전 편찮으시다고 해서 집에 찾아가 용돈을 조금 드렸더니, 굳이 안 받으시겠다고 해요. 당시 영인문학관일로 바빴어요. 일주일 후 연락을 드리니 불통이었어요. 혼자 사시는 노인이 전화를 안 받으시면 연락할 방도가 없었어요. 그땐 이미 병원에 입원해서 돌아가셨더라구요』
  
 세상 떠난 文人들과의 추억
 

강인숙 영인문학관 관장.

  그는 향년 75세로 지난 7월30일 별세한 徐基源 前 KBS 사장도 떠올렸다. 故人은 「암사지도」를 비롯해 「오늘과 내일」, 「잉태기」 등 다수의 작품을 남겼으며, 현대문학상·동인문학상을 수상했다.
 
  『徐基源 선생님은 우리 또래인데, 그 양반 생각하면 가슴 아파요. 돌아가시기 2주일 전인가 전화로 글을 청탁하니 기어드는 목소리로 「내가, 지금… 글을 못 써」 하시더라구요. 그렇게 갑작스레 저 세상으로 가실 줄 몰랐습니다』
 
  姜선생은 예술원 회원이자 여류문인회장을 역임한 소설가 孫素熙(손소희·1987년 작고)에 대해 「신세를 진 분」으로 기억했다.
 
  『그분은 가슴하고 입이 한데 붙은 양반이라, 칭찬도 하셨지만 누굴 야단도 잘 치셨어요. 제가 여류작가에 대한 30매짜리 짤막한 글을 썼는데, 孫선생님 이름을 빠트렸어요. 어느 행사장에서 뵈었는데, 「내가 살고 있는 것을 알고는 있어?」 그래요. 너무 놀랐어요. 「어떻게 자기감정을 저렇게 노출시킬 수 있나」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어요. 하지만, 제가 어려운 일을 당하니 발 벗고 나서 도우셨어요.
 
  나중에 암 투병을 하시는 모습을 보고 충격을 받았습니다. 병문안을 갔는데 일주일 전까지 멀쩡히 있던 머리칼이 모두 빠져 있더라구요. 같이 갔던 李御寧 선생을 병실에 들여보내지 않았습니다. 제가 孫선생께 「李御寧 못 들어오게 했어. 잘했지?」하니, 「그래, 아주 잘했어」 그래요. 제가 「I love you」 하니, 「me too」 라고 말하셨습니다. 그분에게 들은 마지막 소리가 「나도 사랑해」였어요』
 

김춘수│사진·한영희

  金春洙(김춘수·2004년 작고) 詩人에 대해선 진한 그리움과 아쉬움을 토로했다.
 
  『선생님의 팔순 잔치에 갔더니 문인들이 아무도 안 왔더라구요. 그분은 대구에 계실 때부터 사교적이지 않으셨어요. 하지만 문인들이 그러면 안 되는데….
 
  1982년인가 문학사상 10주년 행사를 李御寧 선생을 대신해 제가 맡은 적이 있어요. 당시 金春洙 선생님은 국회의원이셨어요. 그땐 직능 대표로 누군가 한 분은 맡아야 하는 자리였습니다. 사실 어느 누구도 하라고 하면, 안 할 사람이 있나요? 대부분 했을 거예요. 행사를 마치고 차량을 배정하니, 金春洙 선생이 탄 차에는 아무도 안 타요. 할 수 없이 제가 함께 타고 갔어요.
 
  이번에 영인문학관에서 작고 문인 코너를 만들어 金선생님의 유품을 전시했어요. 그걸 보고 있노라면, 하나의 왕국이 무너진 것 같아 쓸쓸하기 그지없습니다. 가깝게 모시진 않았지만 「과꽃」·「꽃밭에서」를 지은 아동문학가 魚孝善(어효선·2004년 작고)이나 趙炳華(조병화·2003년 작고) 선생 등도 여기 오셨던 분들이에요. 朴花城(박화성·1988년 작고) 선생도 외롭게 돌아가셨어요』
  
 「특질고」 필화사건

서영은│이현 作.

  문단의 요란한 필화사건의 하나였던 「特質考(특질고)」 논란도 빠뜨릴 수 없다. 소설가 吳永壽(오영수·1979년 작고)가 1979년 문학사상 1월호에 발표했던 「특질고」는, 여러 지방의 특질적인 성격을 묘사하면서 호남인들을 「표리부동하고 신의가 없다」고 폄하했다가 문인협회에서 제명당하고 절필선언까지 해야만 했다. 吳永壽는 그 충격으로 결국 그해 5월 사망했다.
 
  『사실 吳선생님은 李御寧 선생에게 굉장히 피해를 끼친 분입니다. 「특질고 사건」으로 사과문을 내는 데 이화女大 교수 10년 연봉이 들었습니다. 사건을 무마시키기 위해 그를 제명결정을 했어요. 하지만 제명은 그에게 사망선고와 마찬가지였어요. 가슴 아파하시더라구요. 제게 「내는 뭐가 제일 행복하냐면 서점에 가서 내가 쓴 책이 꽂혀 있는 게 제일 좋은데, 절필하라는 것은 내보고 죽으라 카는 것과 마찬가진기라」고 하셨어요.
 
  당신이 남에게 해를 끼친 것은 생각 안 하시고, 어린애처럼 자기가 입은 해는 너무 아픈 거예요. 그런 자기 중심주의가 문인이 되는 代價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걸 빼면 문인이 아니겠지요』
 
  ―文人들의 성품은 어떴습니까. 괴팍하고 고약하지 않습니까.
 
  『문인들이 대체로 다 까다로워요. 특히 草汀 선생(金相沃)이 까다로웠어요. 그 양반은 詩人이란 한국에서 阮堂(완당·김정희)·靑馬(청마·유치환)·未堂(미당·서정주)밖에 없다고 생각하시는 분입니다.
 
  생전에 서화를 받아 놓으려고 詩 10편을 보내드렸더니 세 분 작품만 빼고 다 던져 버려요. 자기가 좋아하는 詩人만 쓰고… 어찌보면 편협하셨어요. 漢詩(한시)도 좋아하는 구절이 있으면 그것만 둥글게 써봤다가 네모지게 써봤다가 할 뿐 많은 걸 안 쓰시더라구요. 그분이 인정하는 작품은 몇 개 안 돼요』
 
  ―외국작가보다 한국작가가 더 유별납니까.
 
  『성격이 못됐고 자기중심적이고 세상에 작품은 자기 것이 최고고, 거룩하기는 또 왜 그렇게 거룩한지 다 마찬가지예요. 작품이 좋은 사람일수록 까다롭고 고약해요. 하지만 뒤가 없고 순진합니다. 제가 아는 어떤 문인은 나이 쉰이 돼도 여자를 첫사랑같이 사랑하는 분이 있어요. 요새 그런 남자가 있나요? 적당히 놀고 마는데 정말로 사랑하시더군요. 어른이 됐는데 어른이 안 되니, 얼마나 대단한 일이에요』
  
 문학평론가 姜仁淑
 

조경희│조문자 作.

  姜仁淑 선생은 1965년 현대문학을 통해 등단한 문학평론가다. 건국大 국문과 교수로 재직하다 정년퇴직하고 명예교수로 있다. 그는 한국 근대문학의 思潮인 자연주의 연구에 천착해 왔다. 평론집 중에는 「자연주의 문학론1·2」, 「한국현대소설 정착과정 연구」, 「金東仁의 생애와 문학」 등 자연주의 연구서들이 많은 편이다.
 
  ―작가가 되지 못하고 평론가로 들어서게 된 계기가 있습니까.
 
  『소설을 쓰고는 싶었는데… 작가는 타고나야 합니다. 평론가는 머리로 하지만, 소설은 감성으로 하니 아무나 하는 게 아니지요』
 
  姜선생은 젊은 시절 「그에게서는 비누 냄새가 난다」로 시작되는 강신재의 「젊은 느티나무」를 읽고 작가의 꿈을 접었다고 한다. 비누 냄새가 상징하는 行間(행간)의 밀도에 압도됐다는 것이다.
 
  ―학창 시절 좋아하는 작가가 있었습니까.
 
  『도스토예프스키를 좋아했어요. 경기女高 1학년 때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을 읽었는데, 그게 문학에 눈뜨게 했어요. 물론 친구들끼리 풍속소설까지 서로 빌려서 읽곤 했는데, 도스토예프스키를 읽은 뒤론 다른 책을 못 보겠더라구요. 올해 다시 그 책을 읽었는데 이렇게 재미없는 글을 당시 어떻게 읽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어요. 군소리가 많잖아요. 가다가 딴 곳으로 빠지고(웃음).
 
  한국작가로는 朴景利·朴婉緖·徐永恩·최윤 선생의 글을 좋아합니다. 특히 朴婉緖는 평론집(「박완서 소설에 나타난 도시와 모성」)까지 냈어요』
 

강인숙│이종상 作.

  ―요즘도 평론활동을 하십니까.
 
  『논문은 자리에서 써야 하는데 10년째 주무르고 있어요. 일본에 교환교수 갔을 때 프로젝트가 모더니즘 연구였습니다. 일본에서 모더니즘을 연구하고 나서, 한국 모더니즘을 연구하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일본에서 이상하게 된 모더니즘이 한국에 와서 어떻게 변형됐냐를 아무도 연구하지 않아요.
 
  그런데 뇌에 뭐가 생겨 수술하느라 중도에 돌아왔어요. 일본 부분만 3분의 2 정도 썼는데 문학사상에 연재했습니다. 마지막 200매 정도가 남았는데, 잘 안 써지네요. 영인문학관을 하느라 쓸 수 없어요. 올 겨울엔 다시 펜을 들 생각입니다』
 
  그러면서 그는 다시 강단으로 돌아간 듯 목소리를 높였다.
 
  『참, 문제인 게 廉想涉(염상섭)의 자연주의는 「일본 자연주의」지, 「서구 자연주의」가 아니에요. 제가 두꺼운 연구서적을 두 권이나 냈는데, 교과서에서 서구 자연주의라고 해요. 최소한 일본식 자연주의라고 고쳐야 해요. 서구 자연주의는 한마디로 과학주의입니다.
 
  일본에선 고백체가 일본 소설의 본령이고, 그것이 고백체 소설이 된 것입니다. 고백체 자연주의는 全세계에 없습니다. 廉想涉·金東仁·에밀 졸라와 일본 고백체 소설을 비교 연구한 것인데 아직까지 고쳐지지 않았어요. 아직 못 쓴 모더니즘 논문을 끝내놓고 죽어야겠다는 생각입니다』
  

코드가 지배하는 평단
 
  ―요즘 평단을 어떻게 보십니까.
 
  『詩人이나 소설은 몰라도 평단은 문제가 많은 것 같아요. 소위 코드에 맞는 사람들이 평단을 잡고 있어요. 거의 양쪽이 아니라 일면적으로 다룬다는 느낌도 들어요.
 
  아닌 말로 별사람이 다 북한에 가는데 저나 李선생 같은 경우에는 빈말이라도 「북한에 같이 가자」는 사람 하나 없어요. 우리나라가 이렇게 돼 가고 있어요. 왜 그렇게 배타적인지 이해가 안 돼요. 문학인데, 정치가 아니고 문학인데』
 
  姜선생은 지난해 4월 「아버지와의 만남」이란 242쪽 분량의 에세이를 썼다. 책 서두에서 「나는 삶의 첫머리에서 아주 난해한 어른을 만났다. 아버지다」라고 쓰면서 「우리에게 삶의 이정표 읽기를 가르쳐 주는 것은 주변에 있는 어른들」이라고 했다. 칠순의 그가 평생의 삶을 되돌아보며 내뱉은 말이 「어른」에 대한 기억이라는 사실이 놀라웠다.
 
  그는 인터뷰 말미에 정지용의 「유리창」이라는 詩를 제일 좋아한다고 했다. 자식을 잃은 슬픔을 노래한 詩를 낮은 목소리로 읊었다. 먼저 간 부모의 마음을 더듬는 것일까.
 
  〈유리에 차고 슬픈 것이 어른거린다.
 
  열없이 붙어 서서 입김을 흐리우니
 
  길들은 양 언 날개를 파닥거린다.
 
  지우고 보고 지우고 보아도
 
  새까만 밤이 밀려나가고 밀려와 부딪히고,
 
  물 먹은 별이, 반짝, 보석처럼 박힌다.
 
  밤에 홀로 유리를 닦는 것은
 
  외로운 황홀한 심사이어니
 
  고운 폐혈관이 찢어진 채로
 
  아아, 너는 산새처럼 날아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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姜仁淑
1933년 함경남도 갑산 출생. 경기여고·서울大 국문과 졸업(문학박사). 문학평론가. 現 건국大 국문과 명예교수, 영인문학관 관장. 평론집으로 「자연주의 문학론 1·2」, 「박완서 소설에 나타난 도시의 모성」, 수필집으로 「언어로 그린 연륜」, 「아버지와의 만남」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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孤山 윤선도의 五友歌

 

  

나의 벗이 몇인가 하니 水石과 松竹이라

동산에 달이 오르니 그것이 더욱 반갑구나

두어라 이 다섯밖에 또 더하여 무엇하리 

 

 

(水)

 

구름 빛이 좋다하나 검기를 자주한다

바람 서리 맑다 하나 그칠 때가 하도 많다

좋고도 그칠 때 없기는 물 뿐인가 하노라

 

 

(石)

 

꽃은 무슨 일로 피면서 빨리 지고

풀은 어이하여 푸르다가 누르는가

아마도 변치 않는 것은 바위 뿐인가 하노라

 

 

(松)

 

더우면 꽃 피우고 추우면 잎 지거늘

솔아 너는 어찌 눈 서리 모르는가

구천에 뿌리 곧은 줄 그로하여 아노라

 

  

(竹)

 

나무도 아닌 것이 풀도 아닌 것이

곱기는 뉘 시키며 속은 어찌 비었는가

저렇게 사시에 푸르니 그를 좋아 하노라

 

  

(月)

 

작은 것이 높이 떠서 만물을 다 비추니

밤중의 광명이 너만한 것 또 있느냐

보고도 말 아니하니 내 벗인가 하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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