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를 읽는다/ 박완서

 

심심하고 심심해서 왜 사는지 모르겠을 때도 위로받기 위해 시를 읽는다. 등 따습고 배불러 정신이 돼지처럼 무디어져 있을 때 시의 가시에 찔려 정신이 번쩍 나고 싶어 시를 읽는다. 나이 드는 게 쓸쓸하고, 죽을 생각을 하면 무서워서 시를 읽는다. 꽃피고 낙엽 지는 걸 되풀이해서 봐온 햇수를 생각하고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내년에 뿌릴 꽃씨를 받는 내가 측은해서 시를 읽는다.

 

- 박완서 산문집『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현대문학,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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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문에 연재될 당시 아침에 그것을 받아 읽을 때의 행복감이 생각나서 얼른 샀다는 '어느 가슴엔들 시가 꽃피지 않으랴: 애송시 100편(정끝별, 문태준 해설)'을 두고 선생께서 하신 말씀이다. ‘그 두 권의 책은 살 때도 행복했지만, 다시 읽어도, 아무데나 읽어도 내 정신은 조금은 깊고 높아지는 것 같은 기쁨을 맛본다.’ ‘멋모르고 그냥 느낌으로 좋아하던 난해한 시에 뛰어난 시인들의 웅숭깊고 친절한 해설이 붙은 것도 금상첨화였다.’면서 책상 가까이 눈에 잘 띄고 손만 뻗으면 수시로 뽑아볼 수 있는 자리는 시집들 차지라고 하셨다.

 

 박완서 선생의 시사랑은 문학소녀시절부터 시작되었지만 '애송시 100편'에 실린 시들을 신문연재 전에 거의 다 읽었고, 암송할 수 있는 시만도 100편 가까울 정도로 선생의 시에 대한 애정은 각별했다. ‘글을 쓰다가 막힐 때 머리도 쉴 겸 해서 시를 읽는다. 좋은 시를 만나면 막힌 말꼬가 거짓말처럼 풀릴 때가 있다. 다 된 문장이 꼭 들어가야 할 한마디 말을 못 찾아 어색하거나 비어 보일 때가 있다. 그럴 때도 시를 읽는다. 단어 하나를 꿔오기 위해, 또는 슬쩍 베끼기 위해. 시집은 이렇듯 나에게 좋은 말의 보고다.’

 

 이런 담백한 진술이 담긴 산문집 <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는 등단 40년을 맞아 선생이 작고하기 1년 전에 펴낸 선생의 마지막 저서였다. 표제산문의 마지막 문장은 ‘씨를 품은 흙의 기척은 부드럽고 따숩다. 내 몸이 그 안으로 스밀 생각을 하면 죽음조차 무섭지 않아진다.’ 이렇게 끝을 맺고 있다. 선생의 말씀처럼 죽음의 두려움을 초월한 여유로 가시는 길 아늑하고 편안한 자연과의 교감이었으리라. 하지만 4년 전 1월 22일 선생의 갑작스런 부음은 안타깝고 비통하기 그지없었다. 한국문학의 지분이 크게 줄고 한 축이 스르르 헐려나간 느낌이었다.

 

 현기영 선생은 <오래된 농담>을 읽고 ‘연로함이 이토록 총명하고 아름다울 수 있을까, 고갈되기는커녕 오히려 더 충만해진 이 영혼의 샘물이라니, 참으로 놀라울 일이다’라고 했다. 신경숙은 ‘정곡을 찌르며 생의 허위의식을 적나라하게 들춰내 보일 때면 글귀신을 본 듯하여 몸과 마음이 소름 돋는다’며 우리들의 생각을 고스란히 대변하였다. 뭔가 말하고 싶은데 표현할 방법이 없는 이야기도 선생의 수중에 들어가면 ‘쫀득하기 이를 데 없는 진경’을 이룬다. 그래서 ‘세상의 시시한 이야기들은 선생이 계셨기에 행복했을 것’이다.

 

 선생이 떠난지 4년이 흘렀지만 여전히 박완서를 그리워하는 독자들이 많은 것 같다. 소설은 물론이고 이렇듯 시를 사랑하는 향훈하며 맑은 웃음, 특유의 따쓰하고 진솔한 산문까지 공감과 감동을 얻고 있다. 어제 선생의 기일에 맞춰 <문학동네>에서 산문집 7권을 왕창 묶어낸 것도 독자의 기대에 부응키 위함일 것이다. '쑥스러운 고백' '나의 만년필' '우리를 두렵게 하는 것들' '살아 있는 날의 소망' '지금은 행복한 시간인가' '사라져가는 것에 대한 애수' '나는 왜 작은 일에만 분개하는가' 각권에 붙은 제목들이다. 구미가 돋지만 형편상 당장 책을 사들일 생각은 없다. 하지만 나도 글을 쓰다 막히면 서가 안쪽에 꽂힌 선생의 책들에서 슬쩍 그 유려한 감수성을 훔쳐올지는 모르겠다. 

 

 

권순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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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이나 알 테지/ 남재호

 

‘우물쭈물 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다‘는

금세 명문의 묘비명은 버나드쇼가 남겼고

중광은 ‘괜히 왔다 간다’는 묘비명을 남겼다지

 

엮어놓은 꿈을 좇아 말처럼 달렸어도

겹겹의 멍든 사연 헤아려보는 이즈음

한 마디 남기는 일도 내 몫은 아닌가보다

 

비바람에 모를 깎고 물살에 몸을 풀어

유유자적 자유로이 남은 생을 살다 가면

누군가 비석을 세워 몇 자라도 새길까

 

헤설픈 욕심으로 지난날을 회상해보고

자서전 말머리에 근사한 말도 얹어보다

아니다. 그마저 놓는 거다 바람이나 알 테지

 

- 시조집『바람이나 알 테지』(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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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묘비명의 의미는 당사자가 죽고 난 뒤 남은 사람들이 그 사람의 생애를 요약해서 표현하는데 있다. 이 땅에서는 ‘평범한’ 사람이 죽으면 그저 ‘고인’일 따름이지만 ‘출세’한 사람들은 본인의 관직을 새겨 넣는 것으로 묘비명을 대신한다. 이런 관습은 지금껏 남아있어 사무관 이상의 공무원인 경우 묘비에 직급을 표기하는 사례를 지금도 더러 본다. 그래서 정년을 앞둔 6급 주사들은 묘비명 때문에라도 기를 쓰고 승진하려는 풍조마저 있다.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는 말이 전해지듯이 그 욕망은 오래된 인류의 습속이라 하겠다. 비명에 글을 남기고자 하는 속뜻은 산 자의 기억 속에 영원히 존재하고픈 욕망 때문이다. 묘비명을 나무가 아닌 돌에다 새기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한편 서구에서는 고인이 죽기 전에 당부했던 말이나 고인을 기리는 좋은 말을 산 사람이 새겨 넣는 게 일반적이다. 대개 심오한 의미나 생애를 함축한 재치 있는 비문들이다. 그런데 ‘버나드쇼’의 비문은 지나치게 의역되었다는 주장이 있다. 실은 “오래 살다보니 이런 일을 당할 줄 알았다”로 해석하는 것이 타당하다는 견해들이 많다. 어쨌든 어영부영 하지 말고 후회 없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교훈만은 일맥상통한다. 근년에는 우리도 서양의 비문 형식을 본받아 짧은 시적 수사로 비명을 새기기도 하고, 삶의 성찰 수단으로 자신의 묘비명을 미리 써서 남기려는 사람들도 늘고 있다.

 

 지난 삶을 반추하고 앞날을 새롭게 설계하는 묘비명 써보기 강좌도 개설되어 있다고 들었다. 이는 자서전 쓰기, 유언장 작성처럼 수필 강좌에 연계해 유행하는 것과 같은 맥락으로 이해된다. 스스로 자신의 인생을 함축적으로 기록해 남기고, 알찬 삶의 마무리를 위한 준비과정으로 인식한다면 나쁘지 않은 문화 현상이다. 다만 남은 삶을 더욱 알차게 꾸려가기 위해서라기보다는 허명을 남기려는 욕망이 개입되었다면 그 의미는 반감될 수밖에 없다. ‘한 마디 남기는 일도 내 몫은 아닌’ 경우가 많다. 얼마 전 일부 퇴임 시장군수들이 송덕비를 세워 자신의 업적을 기리려다 세간의 입방아에 오른 일이 있었다.

 

 자신의 이름과 업적을 돌에 새겨 자손만대에 알리는 것보다 사람들의 가슴속에 훌륭한 사람으로 오랫동안 존경 받고 기억되는 것이 훨씬 명예롭고 자랑스러운 길일 텐데 말이다. 이름은 남기려 한다고 남겨지는 게 아니라 최선을 다해 잘 살다보면 남들이 자연스레 그 이름을 기억하고 새겨주기도 하는 것이다. 군자는 무릇 세속의 평가에 연연하지 않고 일희일비하지 않으며 스스로 묵묵히 길을 가는 모습이라야 아름다운 법이다. 노자도 무위가 자연스러운 도라고 가르쳤다. 우스개로 ‘도’ 가운데 으뜸인 도는 ‘내비도(그냥 내버려 둔다는 뜻의 경상도 사투리)’라는 말도 있다.

 

 시인 역시 ‘헤설픈 욕심으로 지난날을 회상’하며 깊은 성찰을 거친 연후에야 비로소 명욕을 놓았다. 사람의 입(口)이 돌(碑)보다 더 낫다(勝)는 뜻의 ‘구승비’가 있다. 사람들의 입에서 칭찬과 존경의 이름이 오르내리는 게 돌에다 새겨 넣은 명성보다 훨씬 의미가 크다는 뜻이다. 시인의 ‘바람이나 알 테지’라며 바람에 맡겨두는 태도가 바로 그 ‘내비도’이며, 뭇사람들에 의해 ‘구승비’를 세우도록 하는 일일 것이다. 부와 권력이란 독점과 경쟁을 통해 성취되는 속성이 있으므로 돈 있고 권세를 가진 사람의 허명까지 버젓이 허용한다면, 그건 동시대의 사람들로서는 굴욕의 다름 아니다. 그러나 폭넓은 지지와 존경을 받는 인물의 문학이나 사상의 산물을 남겨 기리는 사업까지 말릴 이유는 없다고 생각한다.

 

 

권순진

 

The Evening Bell(저녁종) / Sheila Ry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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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꼬마리씨 하나/ 임영조


멀고 긴 산행길

어느덧 해도 저물어

이제 그만 돌아와 하루를 턴다

아찔한 벼랑을 지나

덤불 속 같은 세월에 할퀸

쓰라린 상흔과 기억을 턴다

그런데 가만! 이게 누구지?

아무리 털어도 떨어지지 않는

억센 가시손 하나

나의 남루한 바짓가랑이

한 자락 단단히 움켜쥐고 따라온

도꼬마리씨 하나

왜 하필 내게 붙어 왔을까?

내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무작정 예까지 따라온 여자 같은

어디에 그만 안녕 떼어놓지 못하고

이러구러 함께 온 도꼬마리씨 같은

아내여, 내친 김에 그냥

갈 데까지 가보는 거다

서로가 서로에게 빚이 있다면

할부금 갚듯 정 주고 사는 거지 뭐

그리고 깨끗하게 늙는 일이다


- 시집 『귀로 웃는 집』(창작과비평사, 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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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사는 아파트 14층 거실에서 눈꺼풀을 조금만 내려 깔면 곧장 겨울강가다. 사람들이 많이 줄기는 했으나 동촌 강둑에는 드문드문 오가는 발길이 보이고 한갖진 습지강가에는 겨울철새들의 날개짓이 평화롭다. 창밖의 유혹으로 뛰쳐나가고 싶은 생각이 퍼뜩 들어 두터운 겉옷 하나를 더 걸치고선 집을 나섰다. 익숙한 길을 한참 걷는데 한 노인이 강가 마른 숲 덤불 사이에서 무언가를 열심히 채취하는 광경을 목격했다.

 

 노인께 다가가 물었더니 ‘창이자’라고 한다. 노느니 염불한다고 열매를 따다가 약재상에 가져갈 것이란다. 짙은 갈색의 바짝 마른 열매란 다름 아닌 여름철 강가에 지천으로 널려 성가시게 달라붙던 그 ‘도꼬마리’였다. 도꼬마리는 고약한 성질머리로 자주 시의 질료로 등장하는데, 특히 이 시처럼 부부관계와 그 인연을 말할 때 요긴하게 차용된다. ‘이게 누구지’ ‘왜 하필 나이고 당신인가’ ‘우연인가 숙명인가’ 라면서 사유를 이끌어낸다.

 

 결혼이란 전생의 원수가 다시 만나 한평생 함께 살면서 서로 원수 갚는 일, 빚 갚는 일이라는 기왕의 말이 있다. 허구한 날 지지고 볶으면서도 ‘이러구러 함께 온 도꼬마리씨 같은’ 그 운명을 받아들이며 살아가는 것이다. 문정희 시인의 ‘남편’이란 시에서처럼 ‘이 무슨 웬수인가’ 싶다가도 ‘지구를 다 돌아다녀도 내가 낳은 새끼들을 제일로 사랑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오늘도 저녁을 짓고 저녁밥을 맛있게 나눠먹는다.

 

 도꼬마리의 꽃말은 애교, 고집이다. 그리고 창이자는 알려진 약효만도 감기, 해열, 두통은 기본이고 종기나 뾰루지 치료에도 쓰인다. 그 밖에 항암과 노화방지에도 효과가 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제 아무리 만병을 통치한들 도통 효험 없는 불량종자도 있는 것이고, 촘촘히 박힌 가시손이 무지막지한 고집으로 내내 깔쥐어뜯으면 그만 안녕 떼어놓고 싶을 때도 있긴 있다. '깨끗하게 늙는 일'에 방해되고 성가시기만 한 도꼬마리 씨도 있는 것이다.

 

권순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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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정희성

 

아버지는 내가 법관이 되기를 원하셨고

가난으로 평생을 찌드신 어머니는

아들이 돈을 잘 벌기를 바라셨다

그러나 어쩌다 시에 눈이 뜨고

애들에게 국어를 가르치는 선생이 되어

나는 부모의 뜻과는 먼 길을 걸어왔다

나이 사십에도 궁티를 못 벗은 나를

살 붙이고 살아온 당신마저 비웃지만

서러운 것은 가난만이 아니다

우리들의 시대는 없는 사람이 없는 대로

맘 편하게 살도록 가만두지 않는다

세상사는 일에 길들지 않은

나에게는 그것이 그렇게도 노엽다

내 사람아, 울지 말고 고개 들어 하늘을 보아라

평생에 죄나 짓지 않고 살면 좋으련만

그렇게 살기가 죽기보다 어렵구나

어쩌랴, 바람이 딴 데서 불어와도

마음 단단히 먹고

한치도 얼굴을 돌리지 말아야지

 

- 시집『한 그리움이 다른 그리움에게』(창작과비평사,1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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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길’은 시인 자신의 인생 역정을 소재로 하여 세속적 가치가 아닌 진정한 삶의 가치를 추구하며 살겠다는 의지를 표현한 작품이다. 시인이 성장했던 시기엔 어느 집안이나 비슷한 분위기여서 부모님들은 권력이나 명예, 부를 얻을 수 있는 직업을 갖기를 원했다. 그러나 시인은 부모의 뜻을 거스르고 국어교사가 되어 가난한 시인으로 살다 몇 년 전 정년을 맞았다. 그가 바라는 삶은 스스로 자족하며 선하게 사는 것인데 그마저도 세상은 돕지 않는다. 세속화된 가치관이 팽배한 사회에서는 가난하지만 의롭고 선하게 산다는 것이 오히려 비웃음의 대상이 된다. 그래서 시인은 '그것이 그렇게도 노엽다'

 

 ‘없는 사람이 없는 대로 맘 편하게 살도록 가만두’는 세상이야말로 99%의 서민과 중산층이 주인 되는 자유민주주의 세상의 본령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여전히 '우리들의 시대'는 사회의 구조적 문제와 정치의 낙후로 그 세상을 맞이하지 못하고 있다. 사람은 누구나 잘 살고자 하는 욕망이 있고 기회를 갖길 원한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원하는 대로 골고루 잘 살기란 불가능하다. 경제적 평등의 실현은 어렵지만 열패감으로 위축되지 않을 수준은 유지되어야 한다. 자본주의사회에서는 시장을 방치하면 불평등이 심화되는 속성이 있기 때문에 구조적 불평등을 공적으로 수정할 필요가 있고, 그것은 국가의 존재 의미 가운데 하나다.

 

 지난 12월30일은 시인의 친구인 고 김근태 의원의 3주기였다. 김근태가 자신의 육신을 돌보지 않고 꼭 이루고자 했던 것은 무얼까. 그가 더 많은 사람들과 공감의 영역을 넓혀가고자 소망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는 생전에 ‘따뜻한 사장경제’란 신념을 갖고 있었다. 시장만능의 경제 시스템은 시장의 폭력성으로 인하여 결국 인간을 황폐화시킬 것이라고 예견한 그는 경제와 복지가 선순환하는 따뜻한 시장경제로 양극화문제를 해결하고 패자부활이 가능한 사회로 가야한다는 주장을 폈다. 시장만능주의, 경쟁의 논리만 있으면 패자부활전이 불가능하고 사회안전망에 숭숭 구멍이 뚫릴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3년 전 김근태의 장례 때 정희성 시인이 낭독한 조시에서는 “그대가 몸 바쳐 그토록 열망하던 자유와 민주주의를 향한 눈물겨운 꿈의 세포는 살아서 이 시대를 견디고 있는 우리의 기억 속에 남아 2012년 새해 아침을 탈환하리”라며 희망을 선포했지만, 그 희망은 결국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지금은 우리 모두 세상의 어떤 유혹이 닥쳐와도 '마음 단단히 먹고' 의롭고 선한 삶을 살아가겠다는 다짐과 결의가 어느 때보다 소중하다. 김근태의 영혼을 지키는 지성과 ‘희망의 근거’가 유효한 까닭이다. 필요하다면 ‘거짓 희망’에 맞서 싸우고 스스로에 대한 준열한 꾸짖음도 마다하지 않아야 하리라.

 

 

권순진

 

Eres Todo En Mi / Ana Gabri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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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아픈 사랑/ 류근

  

동백장 모텔에서 나와 뼈다귀 해장국집에서

소주잔에 낀 기름때 경건히 닦고 있는 내게

여자가 결심한 듯 말했다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다,

라는 말 알아요? 그 유행가 가사

이제 믿기로 했어요

 

믿는 자에게 기쁨이 있고 천국이 있을 테지만

여자여, 너무 아픈 사랑도 세상에는 없고

사랑이 아닌 사랑도 세상에는 없는 것

다만 사랑만이 제 힘으로 사랑을 살아내는 것이어서

사랑에 어찌 앞뒤로 집을 지을 세간이 있겠느냐

 

택시비 받아 집에 오면서

결별의 은유로 유행가 가사나 단속 스티커처럼 붙여오면서

차창에 기대 나는 느릿느릿 혼자 중얼거렸다

그 유행가 가사,

먼 전생에 내가 쓴 유서였다는 걸 너는 모른다

 

- 시집『상처적 체질』(문학과지성사,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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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년 전 1996년 1월 6일, 가수 김광석이 자기 집 거실 난간에서 목을 매어달기 불과 7시간 전, 모 케이블방송에서 공연을 하였고, 그때 마지막으로 부른 노래가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이다. 당시 김광석은 가수생활 11년차였으며, 라이브콘서트 1,000회 기록을 세운 뒤였다. 그러나 그는 더 이상 음악적인 발전을 이룰 수 없다며 자괴감과 허탈감에 시달렸다. 그로인해 조울증세가 심해졌고, 급기야 충동적인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는 것이 지금까지 일반적으로 알려진 자살의 동기이다. 하지만 스스로 목숨을 끊은 정확한 이유는 아무도 알지 못한다.

 

 그가 마지막으로 불렀던 노래의 분위기와 연결 지어 실연의 아픔을 견디지 못해 스스로 목숨을 끊었을 것이란 관측도 있긴 있다. 하지만 그는 죽은 그날에도 일을 마치고 돌아와서 아내와 다정히 맥주 4병을 나눠 마실 정도로 가정적인 문제는 별로 없는 사람이라 알려져 있다. 그리고 싱어송라이터 김광석이 곡을 붙인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은 자신이 쓴 가사가 아니라 당시 ‘류근’이란 덜 알려진 젊은 시인이 작시한 노랫말이었다. 노랫말에 배경이 있다면 그것은 김광석이 아니라 류근의 사연이었다.

 

 너무 사랑했기 때문에 그 사랑을 부정하고 싶은 심정으로,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라고 우기며 노래하는 모습이 애절하다. 여성 버전인 양현경의 목소리로 듣는 노래는 또 다른 느낌으로 가슴을 후벼 판다. 더 많이 사랑한 사람이 사랑의 패자가 된다는 사실을 다시금 일깨우는 노랫말이다. 류근은 군 복무시절 사귀던 여자를 선배에게 빼앗긴 경험이 있다고 한다. 전방GOP근무를 하면서 아침이면 매일 ‘오늘은 죽어야지’ 결심했다가 저녁노을이 밀려오면 ‘하루만 더 살아보자’ 마음 고쳐먹기를 몇 달이나 거듭할 만큼 고통스러운 시간이었다.

 

 이 노래에는 당시 쓰라린 실패의 기억이 고스란히 배어있고, ‘먼 전생에’ 그가 쓴 ‘유서’로 남았다. 류근은 김광석 보다 두 살 아래로 1966년 경상북도 문경에서 태어나 충청북도 충주에서 자랐다. 1992년 문화일보 신춘문예에 시가 당선되어 등단했으나, 이후 한 편의 작품도 발표하지 않다가 등단 18년 만에 첫 시집을 지난 2010년 펴냈다. 그는 이제 ‘너무 아픈 사랑도 세상에는 없고, 사랑이 아닌 사랑도 세상에는 없는 것’을 알 정도로 걸쭉해졌고, ‘사랑만이 제 힘으로 사랑을 살아내는 것’임을 터득할 만큼 성숙해졌다.

 

 그 결과물로 페이스북에 올렸던 글들을 모아 2년 전 '사랑이 다시 내게 말을 거네'란 산문집도 냈다. 그 인기의 확장으로 공영방송의 한 역사 프로그램에 고정 출연하고 페이스북 스타로 군림하던 그가 요즘 페북에는 좀 뜸한 것 같다  

 

 

권순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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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닥불/ 백석

 

새끼오리도 헌신짝도 소똥도 갓신창도

개니빠디도 너울쪽도 짚검불도 가랑잎도

머리카락도 헝겊조각도 막대꼬치도 기왓장도

닭의 ?도 개터럭도 타는 모닥불

 

재당도 초시도 門長늙은이도 더부살이 아이도

새사위도 갓사둔도 나그네도 주인도 할아버지도

손자도 붓장시도 땜쟁이도 큰 개도

강아지도 모두 모닥불을 쪼인다

 

모닥불은 어려서 우리 할아버지가

어미아비 없는 서러운 아이로 불쌍하게도

몽둥발이가 된 슬픈 역사가 있다.

 

- 시집 사슴1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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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석의 시는 민족주체성이 훼손된 시기에 꺼져가는 모국어의 명맥을 되살려내었다고 평가 받는다. 그의 모국어 정신은 방언주의로 나타나는데, 그를 일컬어 부족 방언의 마술사라 칭하는 이유가 이 시에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동화적 상상력으로 아름다운 토속어를 부려놓는 솜씨에 매료되지 않을 수 없다. ‘모닥불은 민족주체성의 확보와 모든 종족 사물들 간 관계 합일의 지향을 밀도 있게 담은 작품이라는 문학평론가들의 일반적 해석이 있다. 하지만 그에 앞서 뜻을 잘 알지도 못하는 시어에서 맴도는 묘한 운율, 얼핏 촌스러운 시어의 평범한 조합이 만들어내는 신선함과 정겨움이 오히려 세련된 감각으로 먼저 와 닿는다.

 

 모닥불에는 세상에서 버림받고 소외된 것들이 모여 작지만 따뜻한 불을 피우고 있다. 새끼 오리, 헌신짝, 소똥, 갓신창(부서진 갓에서 나온 말총으로 된 끈의 한 종류), 개니빠디(개의 이빨), 너울쪽(널빤지쪽), 짚검불, 헝겊조각, 개터럭(개털) 등 시 속에 등장한 모든 생물과 무생물들이 하나의 가족 개념을 이룬다. 모닥불은 세상으로부터 업신여김 당하고 쓸모없는, 그래서 더욱 보잘 것 없는 것들을 받아서 불을 피웠다. 그리고 모닥불 주위에는 버려진 물건들만큼이나 초라한 인간 군상들과 강아지까지 누구나 와서 따뜻함을 분배받으면서 온몸을 쬐고 녹인다. 모닥불은 어느 것도 거부하지 않고 받아서 타닥타닥 불을 피웠다.

 

 재당(재종. 육촌), 초시(초시에 합격한 사람으로 늙은 양반), 문장늙은이( 문중에서 항렬과 나이가 위인 사람), 더부살이 아이, 갓사둔(새사돈), 나그네, 주인, 땜쟁이, 큰개, 강아지 등 모닥불을 쬐고 있는 이들은 신분의 높낮이, 나이나 가족 나아가 인간과 동물간의 구분도 경계도 지웠다. 모닥불이라는 구심점을 향해 둥글게 모여 앉은 모두가 상하좌우 문턱 없이 평등하다. 얼어붙은 몸과 마음을 어루만져 주며 가슴 속의 서러움마저도 녹아내리게 하는 것이 바로 모닥불이다. 고통스럽고 서러운 몽둥발이(딸려 있던 것이 다 떨어져 나가고 몸뚱이만 남아 있는 사람)가 된 할아버지의 슬픈 역사마저 융숭깊은 내적 화해로 녹여버리는 것이다.

 

 

권순진

 

 

출처 : 詩하늘 통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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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신춘문예 당선작] 시

 

■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면(面) / 정현우


면과 면이 뒤집어질 때, 우리에게 보이는 면들은 적다

금 간 천장에는 면들이 쉼표로 떨어지고

세숫대야는 면을 받아내고 위층에서 다시

아래층 사람이 면을 받아내는 층층의 면

면을 뒤집으면 내가 네가 되고 네가 내가 되는

복도에서, 우리의 면들이 뒤집어진다

발바닥을 옮기지 않는 담쟁이들의 면.

가끔 층층마다 떨어지는

발바닥의 면들을 면하고,


임대 희망아파트 창과 창 사이에

새 한 마리가 끼어든다.

부리가 서서히 거뭇해지는 앞면,

발버둥치는 뒷면이 엉겨 붙는다

앞면과 뒷면이 없는 죽음이

가끔씩 날선 바람으로 층계를 도려내고

접근금지 테이프가 각질처럼 붙어있다


얼굴과 얼굴이 마주할 때 내 면을 볼 수 없고 네 면을 볼 수 있다 반복과 소음이

삐뚤하게 담쟁이 꽃으로 피어나고 균형을 유지하는 면, 과 면이 맞닿아 있다


어제는 누군가 엿듣고 있는 것 같다고

사다리차가 담쟁이들을 베어버렸다

삐져나온 철근 줄이 담쟁이와 이어져 있고

밤마다 우리는 벽으로 발바닥을 악착같이 붙인다

맞닿은 곳으로 담쟁이의 발과 발

한 면으로 모여들고 있다


▲1986년 평택 출생

▲경희대학교 국문과 졸업

▲현 KBS1라디오 작가


[심사평] ‘면’은 평면 측면 얼굴 경계선 바닥 방향성 등 다양한 의미를 함축하고 있는 면이란 단어를 활용하여 우리 시대 삶의 다양한 ‘면’을 성찰한 작품이다. 인간이든 건물이든 세상 모든 것은 결국 면들의 만남과 어긋남에 의해 이루어지며 그로부터 갖가지 문제가 발생한다고 이 작품은 들려주고 있다. 이 시에 담긴 지혜는 통속적 잠언을 훌쩍 뛰어넘은 것으로서 오래 되새길 만한 가치를 가지고 있다고 여겨졌다. (정호승·남진우)


■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쌈 / 조창규


나는 쌈을 즐깁니다

재료에 대한 나만의 식견도 있죠

동굴 속의 어둠은 눅눅한 김 같아서 등불이 살짝 구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낱장으로 싸먹는 것들은 싱겁죠

강된장, 과카몰리 등 다양한(쌈장 개발의 기원)


봄철, 입맛이 풀릴 때

나는 구멍이 송송, 뚫린 배추잎을 새로운 쌈장에 찍어 먹습니다

달콤한 진딧물 감로를 섞어 만든 장

어떤 배설물은 때로 훌륭한 식재료가 되죠


두꺼운 것들은 싸먹기가 곤란 합니다

스치면 베이는 얇은 종잇장에도 누명과 모함은 숨겨 있죠

적에게 붙잡히면 품속의 기밀을 구겨 한 입에 삼켜요

무덤까지 싸들고 가는 비밀도 있습니다


어둠의 봉지에 싸인 이 밤

구멍 난 방충망은 경계가 소홀 합니다

누군가 달의 뒷장에 몰래 싸놓은 알들

나는 긴 혀로 나방을 돌돌 말아먹는 두꺼비를 증인으로 세웁니다

사각사각, 저 달을 갉아먹는 애벌레들


수줍은 달을 보쌈해간 개기월식

삼킬 수 없는 과욕은 역류되기도 하죠

보름달을 훔쳤다는 나의 누명이 시간의 부분식으로 벗겨지고 있습니다


▲1980년 전남 여수 출생

▲경희대 국어국문학과 졸업


[심사평]  시를 쓸 때 응모자들은 자신의 내부로부터 어떤 간절한 욕구가 있었는가 아니면 어떤 경로로 시를 쓰는 과정에 입문하게 되어 습관처럼 시를 쓰고 있었던 것은 아닌가 질문해보고 싶었다. 그만큼 장식과 조립에 치중한 시들이 많았으며 재주나 재치에 기댄 시가 많았다. ‘쌈’은 쌈을 ‘동굴 속의 어둠’, ‘스치면 베이는 얇은 종잇장’, ‘어둠의 봉지에 싸인 이 밤’. ‘구멍 난 방충망’, ‘달의 뒷장’, ‘긴 혀’, ‘보쌈’으로 비유하고, 이 비유에 어울리는 쌈장을 ‘달콤한 진딧물 감로를 섞어 만든 장’으로 만들고 난 다음 이 모든 사물과 자연 현상을 흡입하는 나를 내세워 자연의 아름다운 변화와 삼투, 세월과 일식을 파노라마처럼 전개하고 있었다. 유쾌한 유머가 있고, 축소와 확장이 화자의 입을 통해 전개되는 재미가 있었다. 그렇지만 시 속의 ‘나’는 쌈을 멋지게 비유해낼 수 있지만, 과연 이러한 ‘쌈’의 현상들이 시적 화자의 감각들을 통과했다고 볼 수 있겠는가 하는 질문을 던지고 싶었다. (황현산/ 김혜순)


■ 서울신문 신춘문예 당선작


키워드 / 최은묵


죽은 우물을 건져냈다

우물을 뒤집어 살을 바르는 동안 부식되지 않은 갈까마귀 떼가 땅으로 내려왔다

두레박으로 소문을 나눠 마신 자들이 전염병에 걸린 거목의 마을

레드우드 꼭대기로 안개가 핀다, 안개는 흰개미가 밤새 그린 지하의 지도

아이를 안은 채 굳은 여자의 왼발이 길의 끝이었다

끊긴 길마다 우물이 피어났다, 여자의 눈물을 성수라 믿는 사람들이 물통을

든 채 말라가고 있었다

잎 떨어진 계절마다 배설을 끝낸 평면들이 지하를 채워나갔다

부풀지 못한 뼈들을 눕혀 물길을 만들면 사람들의 발목에도 실뿌리가 자랄까

안개가 사라진다 흰개미가 우물 입구를 닫을 시간이다

우물은 떠나지 못한 자의 피부다


▲1967년 대전 출생

▲충남대 기계설계공학 전공


[심사평] 당선작인 ‘키워드’는 우리 시대의 음화(陰畵)를 그려내고 있다. 이미지가 지나치게 모호해서 소통이 쉽지 않다는 지적도 있지만 고도의 암시성은 시에 있어서 결함보다는 장점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 시는 세월호를 비롯해 죽음의 사건들을 환기하면서 그것을 상징화된 제의로 감싸 안는다. 다른 시에서도 어딘가 깨지고 불구화되고 불모화된 존재들이 그려내는 고통과 폐허의 풍경은 하나의 세계를 이루었다고 할 만하다.(정호승/나희덕)


■ 한국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방의 전개 / 윤종욱


밤새 발밑에는 좁은 사막이 쌓였어요

새벽은 불투명하게 돌아왔고

매일매일 더 늙은 모습으로

우리는 입이 말라 버린 나무

조금씩 빠르게 허물어지는 어둠처럼

우리는 잎이 진 사람

침묵을 정확하게 발음해 보세요

턱 끝까지 숨이 막힐 만큼

우리가 창문이 없는 방이었을 때

내일을 열어 볼 수는 없었어요

우리가 방에서 갈라져 나온 뒤에

우리는 식탁의 높이에 맞춰 앉았어요

모래를 모두 쓸어 낸 몸으로

표백된 셔츠를 입고

찻잔의 깊이와 끓는 물의 부피를 재며

우리는 눈대중으로도 알고 있었어요

어둠이 얕은 곳에서는

언제 눈을 떠야 하는지를

어디에 눈을 둬야 하는지 말이에요

시계는 벽을 등지고 있었는데

시계는 무엇이든 가리키려 하고

우리는 익숙해질 시간이 필요해요

사막의 발단을 출발하여

가느다란 아가미가 발생하기까지

우리는 진화하는 걸까요

밖은 왜 여전히 어두운 거예요

우리의 아침을 활기차게 열어 보세요

분주한 아침이 지나고 나면

엄마가 시키는 대로 문을 닫고

우리는 방으로 들어갔어요


1982년 경북 예천 출생

▲강남대 국어국문과 졸업

▲서울예대 문창과 재학


■ 한국경제 신춘문예 당선작


비커의 샤머니즘 / 김민률


굴러다니는 돌 하나 주워 주머니에 넣고 숭배한다

소원을 돌에게 말하고 우물에 던진다


대낮의 우물은 하늘을 번제하는 제단

저녁의 우물은 마력이 기거하는 당집


아이를 바쳤다는 소문에 이끼가 끼어 있다

물의 나이테를 열고 바깥을 엿듣는 누가 있다

두레박을 내려 몇 번이나 얼굴을 퍼올려도

제단에 바쳐진 아이가 사라지지 않는다


비커는 어린 시절의 설화

눈금에 다다를 수 없는 기억이 웅크리고 있다


수년 동안 던진 크고 작은 돌들이

내 뒤통수와 등짝을 닮은 기억을 보글거리며……

눈금 바깥을 초월하고 있다


물이 기포로 기포가 증기로 변하는 것은

아이의 주먹을 펼치는 주술일까

모든 손마디를 다 펼치면 ‘아무것’이란 게 우글거리는


이미 기억을 개종한 내가

한 손에 다른 비커를 움켜쥐고 있다


▲1978년 강원 강릉 출생

▲서울예술대학 문예창작과 졸업


[심사평] ‘비커의 샤머니즘’은 구조가 튼실한 작품이다. 우물과 비커의 ‘이종교배 상상력’이 신선했다. 이 점이 새로운 서정성을 확보하게 했다. 우물-비커, 돌-눈금, 기억-개종의 자연스러우면서도 정확한 전개가 내용의 설득력을 갖게 했다. 절제된 감정의 언어를 가지고 있으니 보다 자유로운 시적 탐험을 시도해 보아도 좋겠다. 시인으로서 첫 호명을 축하한다.(김기택·권혁웅·이원)


■ 부산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탕제원 / 박은석


탕제원 앞을 지나칠 때마다 무릎의 냄새가 난다. 용수철 같은 고양이의 무릎이 풀어지고 있던 탕제원 약탕기 속 할머니는 자주 가르릉 가르릉 소리를 냈었다 할머니의 무릎에는 몇 십 마리의 고양이가 들어 있었다. 가늘고 예민한 수염을 달인 마지막 약, 잘못 쓰면 고양이는 담을 넘어 달아난다. 밤이면 살금살금, 앙갚음이 무서웠다. 고양이를 쓰다듬듯 할머니의 무릎을 만졌다 몇 마리의 고양이가 사라지고 보이지 않던 할머니들이 절룩거리며 나타났다 빗줄기가 들어간 무릎의 통증 등에 업힌 밭고랑 한가득 들어 있는 무릎 탕제원 오후는 화투패가 섞인다. 화투 패는 오래 달일 수가 없다 약탕기 안에 판 판의 끗발들이 성급하게 달여지고 있지만 가끔은 불법의 처방이 멱살을 잡기도 한다. 약탕기 속엔 팔짝팔짝 뛰던 용수철 몇 개 푹 고아지고 있는 탕제원, 가을 햇살은 탕제원 주인의 머리에서 반짝 빛난다. 무릎들이 무릎을 맞대고 팔월 지나 단풍을 뒤집고 있다.


▲1971년 광주 출생

▲웅진 홈스쿨 교사


■ 영남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신발 / 박진이


발 하나 들어 있지 않은 난전의 신발들

맨발보다 더 시려 보이는 저 표준의 사이즈들은

몇 번을 신어보고 몇 번을 돌아서 보고

몇 번을 벗어두고 나서야

발의 온도를 이해할까

오늘도 얇은 먼지와 흰 눈에게 제 크기를 내어준다

겨울, 한기를 견디던 힘으로 발을 기다리는 일

진열이 아닌 나열의 추운 발

그러나 아무도 저 시린 발은 사지 않겠다는 듯

지나가는 걸음들은 빠르다

맞춤이 아니어서 주인이 없는 발

몇 켤레의 신발을 신어 본 후에야

제 발의 온도를 고를 수 있나

나열의 난전 앞에서

고개를 갸우뚱거리는 내내

신발이 발을 믿지 못하는 것인지

발이 신발을 믿지 못하는 것인지

몇 켤레의 신발이 들렸다 놓였다 신겨졌다 벗겨졌다

뒤꿈치 똑똑 딛고 싶은 저녁 무렵

누가 나열의 난전에 놓인 신발을 사고 싶을까 생각하다가

아무래도 유리 너머 진열의 신발들에 눈이 흘리는 날

퉁퉁 부은 저녁의 발에 난전의 신발 한 켤레를 신겨 보는데

그새, 벗어놓은 헌 신발도 좋다는 듯

흰 눈발 내려앉고 있다

출처 : 碧波 藝術村
글쓴이 : viva 원글보기
메모 :

사소함에 대한 통찰

정목일

수필을 30여 년 넘게 써오면서, 자족과 불만족을 함께 공유하고 있다. 불만족에 대해 말한다면 아직 수필에 대한 문단과 일반인들의 아웃사이드문학, 비전문 문학 장르로 인식하여 폄훼하는 경향이 있는 점이고, 자족은 논픽션인 까닭으로 어찌 되었건 자신의 삶을 수필이란 그릇에 담아내고 있는 점이다.

나는 1975월간문학1976현대문학지의 수필 당선과 수필 천료를 통해 우리니라 최초의 종합문예지 등단 수필가가 되었지만, 그 때 기쁜 마음이 들지 않았다. 수필의 길을 갈 것인가, 진로를 수정해야 할 것인가? 번뇌와 방황이 있었다. 수필은 허약했고 진로도 막막했으며 신명이 나지 않았다. 누구나 쓸 수 있는 수필 따위에 눈길을 주거나 관심을 표명하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수필 첫 데뷔자라는 긍지와 부추김 때문에, 30여 년이 넘게 수필의 길을 걷고 있다.

 

 

소설은 픽션이므로 대개 특별, 비정상, 문제성, 불륜, 기적, 기상천외 등으로 독자들의 관심과 흥미를 유발시키고 있다. 상상의 창고에서 어떤 것이든지 기발하고 흥미로운 재제를 동원할 수 있다.

수필의 경우는 자신의 체험과 사실을 바탕으로 인생의 발견과 의미를 담는다. 자신이 주인공이고 작가다. 자신의 삶이 글의 재제가 된다. 생활인의 삶은 대개 사소하고 평범하다. 일상은 특별하지 않고 무덤덤하고, 누구나 대동소이(大同小異)하다. 하품이 나고 별 볼 일이 없고, 신날 것도 없는 삶이 지속되기도 한다.

소설은 가상의 세계에서 온갖 흥미로운 재제와 구성을 동원하여 독자를 사로잡을 수 있지만, 수필은 사소하기 짝이 없는 일상의 체험으로 독자의 마음을 어떻게 끌어당길 수 있을

? 이것이 수필의 화두다. 소설이 상상력과 테크닉에 의해 성패가 좌우된다면, 수필은 작자의 삶과 인생에 의해 성패가 좌우된다. 인생경지가 곧 수필경지가 된다. 수필쓰기는 인생의 토로와 고백성사(告白聖事)이기에 인생이 곧 악기이고 종()에 해당된다. 인생이란 악기가 훌륭하여야만 소리가 훌륭할 것이고, 인생이란 종이 좋아야만, 소리도 좋을 것이다. 인격에서 향기가 나야 문장에서 향기가 나며, 덕망이 있어야 문장에서 온기가 흐른다.

 

 

오늘날 수필인구의 폭발적인 증가세를 보고 있지만, 양적인 평창에 비해 질적인 발전이 없다는 게 일반적인 지적이고 문제점이다. 수필인구 증가와 더불어 주제, 재제, 테크닉 등에 있어선 다양성과 많은 개척을 보이지만, 정작 좋은 수필을 만나기란 쉽지 않다. 시와 소설에선 문제작가가 나타나 선풍을 일으키고 치열한 선두 다툼을 벌이지만, 수필 계는 정적 속에 파묻혀 있다. 좋은 수필 한 편을 만난다는 것은 좋은 인생과 고결한 영혼의 발견이며 만남이다.

현대엔 물질은 풍요하나 정신은 황폐하고, 지식은 충만하나 지혜가 부족하다. 재주는 범상하나 인격이 부족하고, 교사는 있으나 스승을 찾기 어려운 시대다. 인생 연마와 정신적인 수양을 위해 애쓰는 사람은 드물고 성공, 처세, 재테크 등에 열을 올리고 있다. 문장에서 매화 향기가 나고 깨달음의 종소리가 울리는 수필을 찾아보기 어려운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일기를 습관적으로 쓰기 어려운 것은 일상의 무 변화일 것이다. 별 다르지 않는 일상을 매일 기록한다는 것에 싫증과 짜증이 날 것은 분명한 일이다. 수필도 별반 다르지 않지만, 써놓지 않았다면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고 관심조차 갖지 않을 사소하기 짝이 없는 삶의 장면을 형상화해 놓음으로써, 비로소 의미와 가치를 얻게 됨을 느낀다.

모든 문학서의 내용을 한 문장으로 나타낸다면 사람이 나서 살다가 죽었다로 압축할 수 있다고 한다. 사소한 체험, 생각과 느낌, 발견과 깨달음을 글로 담는다는 것은 존재의식의 발로이며 한시적인 삶을 살 뿐인 인간이 영원을 수용하는 유일한 장치가 아닐 수 없다.

수필쓰기는 특별함, 기발함, 흥미로움에 대한 것이 아닌 사소함, 평범, 일상에 대한 발견이고 의미 부여다. 사소함 속의 위대함, 평범 속의 비범, 일상 속의 특별함을 발견하는 일이다. 삶 속에서 개성과 새로움에 대한 발견이며 탐색인 셈이다. 사소함 속에서 남들이 발견하지 못하는 보석들을 찾아내는 일이다. 자신 만의 모습, 빛깔, 향기로 인생이라는 꽃을 피워내는 일이다.

 

 

금아 피천득 선생은 수필은 청자연적이다. 난이요, 학이요. 청초하고 몸맵시 날렵한 여인이다고 그의 수필에서 쓰고 있다. 수필이 인생을 담는 그릇에 비유한다면, 나에겐 청자연적은 맞지 않다. 내 인생을 담는 그릇은 가야토기가 적합하다. 인생을 화초에 비유하자면 난, 장미, 국화, 모란과 같은 꽃과는 거리가 멀어, ‘호박꽃’, ‘박꽃‘ ’민들레‘ ’풀꽃을 맞아들였다. 사소하고 소박하고 눈에 띄지 않지만, 나만의 생각과 느낌과 발견을 꽃피워내는 것은 소중한 일이다. 사소하고 평범하여 글로 담아내지 않으면 망각 속에 퇴색되어 자취조차 없어져버릴 것들, 사실은 그런 것들로서 인생이 이뤄지고 마침내 사라질 존재가 아닌가. 자신의 사소한 삶과 인생을 수필이란 그릇에 담고 싶은 마음이 여기에 있다.

사람들은 자신의 삶과 인생이 위대하고 화려하고 특별하길 바라지만, 대개는 사소하고 평범하다. 초라하고 가여워 보이는 삶과 일생일 지라도, 의미와 가치의 빛깔과 향기를 내고 싶어 한다. 눈에 띄지 않는 삶과 체험들을 제재로 어떻게 독자들의 호기심을 불러일으킬 수 있을 것인가? 나는 수필을 쓰는 데 항상 염두에 두는 말이 있다.

보이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에 닿아 있고, 들리는 것은 들리지 것은 것에 닿아 있고, 생각나는 것은 생각나지 않는 것이 닿아 있다.’ <노발리스(1772~1801) 독일의 낭만주의 시인>

 

 

보이는 것, 들리는 것, 생각나는 것을 글로 쓴다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고 평범하다. 문학적인 사고나 표현은 보이는 것, 들리는 것을 그대로 그려내는 것이 아닌, 보이지 않는 것과 들리지 않는 것을 보고 들을 줄 알아야 한다. 마음의 눈과 마음의 귀를 가져야만 보이지 않는 것과 들리지 않는 것을 보고 들을 수 있다.

오늘날 지식정보시대를 맞아 문학작품에도 지식의 홍수가 넘치고 있다. 수필에도 지식의 나열과 과시를 본다. 지식이란 바깥에서 들어온 앎이다. 처음엔 경탄과 경이의 눈길을 보내지만, 시간이 지나면 퇴색되고 목이 마르게 된다. 지식이란 과거의 소산이고, 자신의 것이 아닌 공동의 것이며 상식성에 속한다. 지혜란 자신의 내부에서 체험을 통해 얻은 깨달음의 꽃이다. 지혜는 일생에 한 번 피울 수 있는 귀중한 꽃이다. 문장에 지식과 정보의 나열이 많은 것보다, 체험을 통한 발견과 지혜가 담긴 수필이 되길 원한다.

 

 

생전에 스승으로 섬겼던 피천득 선생 댁에 일 년에 두 세 번씩 들러 인사를 드리곤 했다.

선생께선 50년 전에 절필하시고, 자신에 대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 노력해 왔다고 말씀하셨다. 종전 작품보다 잘 쓰지 않으면 더 쓸 필요가 없다는 생각을 지니셨다. 완벽한 문장쓰기로 명작을 내놓으신 대가다우신 태도가 아닐 수 없다.

절필이란 작가에게 폐업이나 다름없는 일이고, 작가로서의 생명을 끊는 일과 마찬가지가 아닌가. 그럼에도 독자들은 왜 50년간 한 편의 수필을 쓰지 않았던 금아 선생의 옛 수필을 사랑하여 오늘날까지도 변함없이 애독하고 있는 것인가. 피천득 수필이 국민적인 사랑을 받고 있는 것은 다작에 있음이 아닌, 질 높은 작품에 대한 관심과 애착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금아 선생의 말을 듣고 절필에 대한 생각을 가져보았다. 종전보다 잘 쓰거나 못 쓰거나 하는 문제가 아니라, 작가의 사명은 쓰는 데 있을 것이다. 절필의 단호성을 강조하시는 금아 선생께 그렇더라도 선생님의 60, 70, 80대의 삶과 표정이 담긴 글을 독자는 그리워합니다라고 말씀드렸다.

나는 깨달음의 종소리가 들리고 향기가 나는 수필을 바란다.

 

 

에밀레종’ ‘상원사종이라 불리기도 하는 성덕대왕신종(聖德大王神鍾)의 종명(鐘銘)일승(一乘)의 원음(原音)’이란 말이 나온다. ‘종소리를 한 번 울려서 듣는 모든 사람에게 깨달음을 얻게 하려는 것을 말한다.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종소리를 가진 이 종이 울리면 음파가 길고 그 속에 은은히 떨며 퍼져가는 맥놀이의 긴 여음이 들릴 듯 말듯 영원 속으로 닿아간다. 상원사 종은 중생들에게 깨달음의 종소리를 들려주기 위해 신라인들이 마음을 모아 주조한 종이었기에, 그 소리는 더 없이 맑고 신비롭다. 수필은 개개인이 들려주는 에밀레종이어야 되지 않을까 싶다. 수필의 재제는 일상과 신변잡사에서 얻어진 것이지만, 종소리처럼 깨달음이 울려나오는 것이라야 한다.

수필은 고백의 문학, 고백성사의 문학이란 말을 한다. 마음속에 거울을 달아두어서 자신의 영혼을 비춰 들여다보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마음의 거울에 묻은 이기 집착이라는 때, 화냄이라는 얼룩 어리석음이라는 먼지를 깨끗이 닦아내지 않으면 안 된다. 마음속에 샘을 파두어서 언제나 마음을 깨끗이 씻어내지 않으면 안 된다.

 

수필이 주는 혜택 중엔 고해 성사로 마음속에 박힌 못을 빼어내고, 상처, 대립, 갈등을 치유할 수 있는 일도 즐거움이자 깨달음이다. 수필은 한정적인 삶을, 보다 의미 있고 보다 아름답고 보다 가치롭게 해준다. 사소한 일상도 의미라는 빛깔과 향기를 입히게 되면 생명을 지닌다는 것이 수필쓰기의 큰 성과가 아닐까 한다. 모든 것들이 덧없이 다 사라지고 말 것이지만, 시간이 뿌려대는 망각의 바이러스를 오래도록 예방할 수 있는 유일한 영원 장치가 삶의 기록이 아닐까 생각한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나의 수필, 무명이 피우는 풀꽃일지라도 그 빛깔과 향기와 모양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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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정목일 문학관
글쓴이 : 정목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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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 첫 기적 / 반칠환

 

황새는 날아서

말은 뛰어서

거북이는 걸어서

달팽이는 기어서

굼벵이는 굴렀는데

한날한시 새해 첫날에 도착했다

 

바위는 앉은 채로 도착해 있었다

 

- 시집『웃음의 힘』(지혜,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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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해를 날고뛰었던 사람이나 태평하게 팔자걸음을 걸었거나 엉금엉금 기었던 사람이거나 똑 같이 새해를 선물로 받았다. 잘 나고 힘센 사람이라고 새해의 근수가 더 나가고 못나고 게으른 사람이라고 해서 그 무게가 가벼운 건 아니다. 시간이 주는 선물은 참으로 공평하여 살아있는 모든 것들은 누구나 고루고루 새해를 안았다. 이럴 때 살아있다는 그 사실 하나만으로 벅찬 기적이란 말에 격하게 공감한다. 살아가는 방식은 저마다 다르겠지만 모두 제 깜냥으로 제게 주어진 형편껏 살다가 똑 같이 새해를 맞았다.

 

 우주의 손바닥 안에서는 모두가 뛰어봤자 벼룩이다. 오로지 인간만이 새해니 각오니 소망이니 분답하다. 황새, 말, 거북이, 달팽이, 굼벵이들은 서로 견주거나 따지며 순위를 매기지는 않는다. 인간들의 공연한 취미로 경주를 붙여보기도 하는데 애당초 의미 없고 판가름이 날 승부는 아니었다. 심지어 바위조차도 가만 앉은 채로 새해를 맞았지만 결과는 그들과 다르지 않다. 오히려 묵묵한 결가부좌의 자태가 의젓하여 돋보인다. 이렇게 어느 누구도 낙오하지 않고 을미년 새해 벽두에 당도하여 이제 막 새 출발을 했다.

 

 이 시는 2012년 12월부터 2013년 2월까지 광화문 교보빌딩 벽에 대형 걸개로 내걸려 화제가 되었었다. 황새나 말처럼 용빼는 재주를 가졌다고 우쭐할 것도 없고, 달팽이나 굼벵이처럼 느려 터졌다고 침울할 이유도 없이 우리 모두 각자 최선을 다해 살아온 결과 이렇게 살아 존재하는 것이므로 새해 첫날을 다함께 겸허히 맞이하고 새롭게 시작하자는 의미를 담아 시를 채택했으리라. 하지만 우리 인간에겐 새로이 펼쳐진 무대에서 첫 순간의 가지런한 카펫을 밟는 소감이 다른 존재와 달리 엄숙하고 존엄한 것이다.

 

 생각이란 걸 할 줄 아는 인간이기에 다른 생물이나 무생물과는 다를 수밖에 없다. 시간의 균질성을 알고 오늘의 해가 어제와 다르지 않다는 사실도 잘 인식하고 있지만 새해 첫날에 의미를 부여하며 산뜻한 기분으로 맞는 것은 오로지 사람만이 가능한 태도이다. 다만 지금까지 날고, 뛰고, 걷고, 기고, 굴렀던 모든 걸 잊고 기득권을 지우는 일 또한 사람의 지혜라 하겠다. 서로 덕담을 건네며 복을 비는 것도 자연스런 일이다. 그렇다면 자신의 지난 성과와 과오를 포맷 하듯 깔끔하게 털어버리고 누구에게라도 편견 없이 겸손하게 대함이 옳지 않으랴.

 

 촐싹대지 않고 바위의 묵직함을 배우며, 잔잔한 범사에 감사하고 조화로운 삶을 소망할 일이다. 진정한 기적은 아직 살지 않은 날들 가운데 잠복되어 있다. 내 생애 가장 아름답고 달콤한 사랑의 샴페인도 아직 뚜껑이 열리지 않은 상태이리라. ‘가장 넓은 바다는 아직 항해되지 않았고, 가장 빛나는 별은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는 믿음으로 새해 새날들의 여행을 시작하는 것이다.

 

 

권순진

 

 

출처 : 詩하늘 통신
글쓴이 : 제4막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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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의 기도/ 이성선

 

새해엔 서두르지 않게 하소서

가장 맑은 눈동자로

당신 가슴에서 물을 긷게 하소서

기도하는 나무가 되어

새로운 몸짓의 새가 되어

높이 비상하며

영원을 노래하는 악기가 되게 하소서

 

새해엔, 아아

가장 고독한 길을 가게 하소서

당신이 별 사이로 흐르는

혜성으로 찬란히 뜨는 시간

나는 그 하늘 아래

아름다운 글을 쓰며

당신에게 바치는 시집을 준비하는

나날이게 하소서

 

- 이성선 시선집 (시와시학사,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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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흔히 ‘시간이 흘러간다.’라고 하지만 정작 움직이고 변하는 것은 시간이 아니라 우리들 자신이다. 지구가 태양을 중심으로 공전하는데 걸리는 기간이 지구 스스로 365번 자전하는 시간과 맞먹는 우주현상을 두고 우리는 '1년'이라고 한다. 새해를 맞이했다는 의미는 어느 한 기점에서 출발한 지구가 태양을 한 바퀴 돌고 다시 공전을 위해 출발했다는 의미이다. 새해를 인식하는 것은 인간만이 갖는 범우주적인 담대한 사유라 하겠다.

 

 이런 새해에 우리가 새로이 길을 가고, 새롭게 뜻을 세우고, 새로운 기대를 갖는 것이야말로 살아있는 자의 특권이자 축복이다. 새 눈으로 보면 낡은 것도 새 것이 되리라는 믿음 또한 엄청난 각성이고 발견이다. 새해엔 새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성숙한 자아를 다짐하는 자체만으로 새 사람으로의 거듭남이 아니고 무엇이랴. 새해 첫날 아침 찬물로 세수하면서 먹은 첫 마음이 변치 않는다면 1년 내도록 이성의 햇살을 받은 정신은 깨어있으리라.

 

 새해엔 누구나 각오를 새롭게 하고서 그 소망을 위해 기도한다. 그러나 내가 새로워지지 않으면 새해를 새해로 맞이하기 힘들 것이다. '새로운 몸짓의 새가 되어 높이 비상하며' '영원을 노래하는 악기가 되게'해 달라는 소망은 시인으로서 매우 합당한 기도이다. 그러자면 먼저 허둥대거나 서둘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가장 맑은 눈동자'를 가져야 하며, 지금보다 더 '고독한 길을' 가야 한다. 그런 다음에야 '당신 가슴에서 물을 긷게' 될 것이다.

 

 '당신이 별 사이로 흐르는 혜성으로 찬란히 뜨는 시간' '그 하늘 아래 아름다운 글을 쓰며 당신에게 바치는 시집을 준비하는 나날'은 반드시 시인이 아니라도 유효한 기도일 수 있다. 그 기도를 위한 구체적인 실천 방안으로 책을 더 가까이 하는 한해로 삼는 것은 어떠한가. '돈은 신을 축복할 기회를 준다'며 탈무드에서도 은근히 탐욕을 꼬득이지만, 돈은 원한다고 손에 쥐어지는 게 아닐뿐더러 이제 돈이라면 신물이 올라올 때도 되지 않았는가.

 

 책을 읽으면 머리가 아프다는 이들이 있는데 그들을 위해서도 독서는 나쁘지 않다. 어떤 이의 독서 명언에 '때때로 독서는 생각하지 않기 위한 기발한 수단'이란 말도 있듯이 세상사에 찌든 마음과 번뇌를 벗고자 할 때도 독서에 빠져드는 것은 퍽 괜찮은 방법이다. 독서의 즐거움과 유익으로 날마다 새 소식을 듣는다면, 가장 비현실적인 방법으로 어쩌면 가장 현실적인 꽃을 피울 수도 있지 않을까.

 

 

권순진

 

출처 : 詩하늘 통신
글쓴이 : 제4막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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