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십견/ 김재진

 

나는 오십견이

쉰 살 된 개인 줄 알았다.

오십에도 사랑을 하고

오십에도 눈물이 있는지

비릿한 나이에는 알지 못했다.

오십에 기르게 된 어깨 위의 개들을

풀어놓아 먹이려고 침을 맞는다.

어깨에 꽂힌 이 바늘은

우주와 교신하는 안테나다.

고슴도치처럼 온몸에 피뢰침 세워놓고

웅크린 채 앉아 있는 이 짐승은

못돼먹은 성깔에 내린 벼락일지 모른다.

벼락 치듯 가버린 친구 한, 둘 늘어나는

쉰 살 된 몸 안에 개들이 살고

부글거리는 속 지그시 눌러 앉히며

양념 센 국그릇에 소 떼가 산다.

오십에도 그리워할 것이 있고

오십의 하늘에도 별이 돋는지

들끓는 나이에는 알지 못했다.

 

- 시집『누구나 혼자이지 않은 사람은 없다』(시와,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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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오십견이 쉰 마리의 개를 말하는 줄 알았다. 쉰 마리의 미친개들이 등짝과 어깨에 올라타서 마구 찍고 까불며 들쑤셔대는 듯한 질병이라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 생각했다. 5년 전 내 몸 안에도 그 불청객이 찾아들었다. 설상가상으로 같은 시기에 ‘대상포진’이란 몹쓸 병까지 덤으로 얻었다. 내과적 질환인지 외과적 질환인지 아니면 피부과 보살핌을 받아야할 성질의 질병인지도 분별 안 되는 통증이었다. 왼쪽 겨드랑이에서 등 쪽으로 이동하는 부위의 기분 나쁜 욱신거림. 그때 나의 소망은 돈도 명예도 사랑도 아닌, 민족의 번영과 통일은 더욱 아닌 치사한 내 한 몸의 안위였다.

 

 그즈음 모든 것이 조금씩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몸도 마음도 푸석푸석 풍화되어 가는 느낌이었다. 마주 달려오는 차의 헤드라이트 불빛이, 대책 없이 꼬여가는 일과 삐걱거리는 내 의자의 마찰음이 두려웠다. 둘레의 사람들이 내 삶의 금 밖으로 하나 둘 사라지자 나의 생도 난처해져갔다. 늙은 어머니의 입 벌리고 자는 모습이 불현듯 무서웠다. 화장실 변기 위의 공상이 겁나고 느닷없이 울리는 전화벨 소리에 깜짝깜짝 놀란다. 베개를 가랑이에 끼고 자는 잠버릇이 슬퍼져 주룩 눈물을 흘린다. 뒤돌아보지 마, 곧장 앞만 보고 가라고 했지! 누군가의 협박에 가위눌려 잠이 깬 새벽 세시가 두려웠다.

 

 사람들은 대개 현안의 내 손톱 밑 가시로 인한 고통이 남의 팔 잘린 고통보다 더 참을 수 없어하고 아파한다. 그렇지만 남의 고통에 앞서 내 아픔을 먼저 돌아본다고 무조건 부끄러워하거나 스스로 이기적이라 책망할 수는 없으리라. 우리들이 겪는 생의 힘들고 기막힌 아픔은 누구든지 모양과 색깔만 좀 다를 뿐 다 겪고 있고 가슴에 품으면서 살아간다. 산다는 것은 빛과 그림자처럼 어느 한 면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세상에는 나보다 사정이 나은 이도 수없이 많지만 나보다 더 힘들고 고통 받는 사람도 수두룩하다. 우리는 다만 그들과 같은 하늘아래서 그리고 빛과 그늘 아래서 함께 살아갈 뿐이다.

 

 겨우내 움츠렸던 어깨를 무리하게 펴다 오십견이 찾아올 수 있다. 어깨관절 내 염증으로 통증과 함께 어깨 사용이 불편해지는 오십견은 추운 겨울에 많이 생길 것 같지만 실제로는 봄철에 환자가 더 많다고 한다. 3월에는 기온 변화가 심하고 꽃샘추위로 혈액순환이 원활하지 못해 근육과 관절의 유연성이 떨어지는 게 원인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주로 오십줄에 오십견이 찾아오는 이유가 무얼까. '오십에도 사랑을 하고 오십에도 눈물이 있음'을 증명해보이기 위함인가. '오십에도 그리워할 것이 있어' 기지개를 펴긴 하지만 무리하지 말라는 메시지와 더불어 면역기능을 높여주려는 비의는 아닐까.

 

 

권순진

 

출처 : 詩하늘 통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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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당화    

 

-한용운

 

당신은 해당화 피기 전에
오신다고 하였습니다.
봄은 벌써 늦었습니다.
봄이 오기 전에는 어서 오기를 바랐더니
봄이 오고 보니 너무 일찍 왔나 두려합니다.

철모르는 아이들은
뒷동산에 해당화가 피었다고 다투어 말하기로
듣고도 못 들은 체하였더니
야속한 봄바람은 나는 꽃을 불어서
경대 위에 놓입니다그려.

시름없이 꽃을 주워서 입술에 대고
"너는 언제 피었니"하고 물었습니다.
꽃도 말도 없이 나의 눈물에 비쳐서
둘도 되고 셋도 됩니다.

 

 

 

 

 

 

출처 : 碧波 藝術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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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해현의 문학산책]

禪雲寺(선운사) 동백꽃으로 가슴을 문지르면

박해현 문학전문기자  

탄생 100년 故 서정주에게 酒母 육자배기 떠올리게 하고
김용택에겐 傷心의 치유를, 구효서에겐 救援을 매개해 준 3~4월 만개하는 봄의 전령
그를 안 품어본 中年 있으랴


	박해현 문학전문기자
박해현 문학전문기자

올해는 미당 서정주(1915~2000) 시인의 탄생 100주년이다. 미당이 남긴 절창(絶唱) 중에서 '선운사 동구(禪雲寺 洞口)'는 한국인의 애송시로 꼽히고 있다. '선운사 골째기로/ 선운사 동백꽃을/ 보러 갔더니/ 동백꽃은 아직 일러/ 피지 안했고/ 막걸릿집 여자의/ 육자배기 가락에/ 작년 것만 상기도 남었읍디다/ 그것도 목이 쉬어 남었읍디다'.

미당은 1967년 고향인 전북 고창의 선운사를 떠올리며 이 시를 처음 쓴 뒤 퇴고(推敲)를 거듭했다. 시의 끝부분 '작년 것만 상기도 남었읍디다'는 여러 차례 수정됐다. 처음엔 '상기도'가 아니라 '아직도'라고 썼다. 나중에 '오히려'라고 고쳤다가, 새로 시집을 내며 '시방도'로 바꾸었다. 그러나 1974년 고창 주민들이 선운사에 서정주 시비(詩碑)를 세울 때 돌에 새긴 시엔 미당이 '상기도'로 바꾸었다. 국립국어원이 낸 사전엔 '상기'가 '아직'의 강원·함경 방언으로 적혀 있다. 미당은 말년에 민음사에서 시 전집을 새로 낼 때 '상기도'를 '오히려'로 고쳤다. 고운기 시인은 "미당이 고쳤을까? 자타가 공인하는 시의 장인(匠人)이 손댄 것 치고는 패착이 아닐 수 없다"라고 지적했다. "막걸릿집 여자의 쉰 목소리에서 희미한 기억의 지난 봄 동백꽃을 떠올리는 시인의 가슴을 '상기도'라는 말 이상으로 표현해 줄 단어가 없었을 텐데"라고 아쉬워했다.

시 해설집 '미당과의 만남'을 낸 평론가 이숭원은 "문맥의 어감으로 볼 때 '상기도'가 더 어울리지만 시집 '동천'에 실린 표기에 따라 '아직도'로 놔뒀다"고 했다. 인터넷의 '디지털 고창문화대전'은 '오히려' 판본을 올려놓았다. '오히려'가 문법적으로 부자연스럽지만 묘한 울림을 낳는다고 했다. 미당의 시에서 동백꽃은 아직 일러 피지 않았는데 시인이 '작년 것만 오히려' 남았다면서 과거 동백꽃 핀 풍경을 여자의 육자배기 가락 속에서 음미하게 한다는 것이다. 올해 미당 탄생 100주년을 맞아 스무 권짜리 전집이 은행나무 출판사에서 새로 나온다고 한다. 출판사 담당자는 "편집위원들이 '선운사 동구'의 시어(詩語) 선택을 아직 결정하지 못했다"고 전한다.

미당은 생전에 '선운사 동구'에 얽힌 슬픈 사연을 시 '아버지 돌아가시고'로 들려줬다. 1942년 시인은 부친이 세상을 뜨자 고향에 내려간 길에 선운사에 들렀다. 어느 이슬비 내리는 가을 오후에 '길가의 실파밭 건너 오막살이 주막'에 들어가 약주를 찾았다. '나이 40쯤의 꼭 전라도 육자배기 그대로의 여인'이 나와 '그렇잖아도 오늘은 한번 개봉해 볼까 하는 꽃술이 한 항아리 기대리고 있는디라우'라고 했다. 시인과 주모(酒母)는 한 도가니를 '눈 깜짝할 사이' 비워버렸다. 얼얼해진 주모가 육자배기를 들려줬다. 주모는 떠나는 시인에게 '동백꽃이 피거들랑 또 오시오 인이…'라고 했다. 시인은 그 '인이…'의 'ㄴ' 발음에 취해 독일 시인 하인리히 하이네를 떠올렸다. '시악시 입맞추며 우리 독일말로 '이히 리베 디히'…그 소리 얼마나 듣기 좋은지 님이야 알라더냐? 했던 그 '이히 리베 디히'보다 몇 갑절은 더 이쁘게 들렸네'라고 감탄했다. 세월이 한참 흘러 시인이 그 주막을 다시 찾았더니 6·25전쟁 통에 그 주모와 가족이 빨치산에게 학살당했다고 한다. 빨치산 토벌에 나선 경찰들에게 밥을 지어 먹인 죄목으로 죽임을 당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시인은 "선운사 동구라는 시에 그 육자배기 소리를 담아보았지"라고 했다.


	[박해현의 문학산책] 禪雲寺(선운사) 동백꽃으로 가슴을 문지르면
/일러스트=이철원 기자
미당의 시 덕분에 선운사는 후배 문인들에게 창작의 샘물 역할도 한다. 김용택 시인은 시 '선운사 동백꽃'을 썼다. '여자에게 버림받고/ 살얼음 낀 선운사 도랑물을/ 맨발로 건너며/(…)/ 눈물을 감추다가/ 동백꽃 붉게 터지는/ 선운사 뒤안에 가서/ 엉엉 울었다'. 미당은 '무슨 꽃으로 문지르는 가슴이기에 나는 이리도 살고 싶은가'라고 노래한 적이 있다. 최영미 시인도 실연(失戀)의 쓰라린 가슴을 선운사 동백꽃으로 문질렀다. '꽃이/ 피는 건 힘들어도/ 지는 건 잠깐이더군'이라고 했다. 소설가 구효서의 '나무남자의 아내'와 윤대녕의 '상춘곡'은 선운사를 무대 삼아 미당에게 바친 중편 소설이다. 구효서 소설은 '침향(沈香)'을 찾아 선운사에 온 사내가 영혼의 구원을 얻는 이야기다. 윤대녕 소설은 선운사를 사랑이 승화되는 공간으로 그려냈다.

선운사 동백꽃은 3월 말에서 4월 사이에 핀다. 때를 맞춰 동백꽃 보기가 쉽지 않다. 봄마다 동백꽃 보러 선운사에 꼭 들러야지 벼르지만 번번이 때를 놓친다. 설령 동백꽃을 안 보면 또 어떠하랴. 중년을 넘긴 사람이라면 미당의 시를 펼칠 때마다 목 쉰 육자배기 가락이 제각각으로 울릴 터이니 가슴속에 제 동백꽃 한 송이 피워보지 않은 경우가 어디 있겠는가.

 

출처 : 碧波 藝術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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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용의 춘설(春雪)

  

춘설 (春雪) / 정지용

     

문 열자 선뜻!
먼 산이 이마에 차라

雨水節 들어

바로 초하로 아츰,

새삼스레 눈이 덮힌 뫼뿌리와
서늘옵고 빛난
이마받이 하다.

어름 글가고 바람
새로 따르거니
흰 옷고롬 절로
향긔롭어라.

웅숭거리고 살어난 양이

아아 끔 같기에 설어라.

미나리 파릇한 새 순 돋고
옴짓 아니긔던
고기입이 오믈거리는,

꽃 피기전 철아닌 눈에
핫옷 벗고 도로 칩고 싶어라.

 

- 시집 「백록담(白鹿潭)」(1941編) 중에서

  

 

다시 읽는 한국시 / 이어령

정지용「春雪」

 

봄추위를한자말로는「춘한」(春寒)이라 하고 순수한 우리 토박이말로는「꽃샘」이라고 한다. 손이 안으로 굽어서가 아니다. 詩的인 감각으로 볼 때「춘한」과「꽃샘」은 분명 한 자리에 놓일 수 없는 차이가 있다.

 

「꽃샘」은 어감도 예쁘지만 꽃피는 봄을 샘내는 겨울의 표정까지 읽을 수가 있어 미소를 자아내게 한다. 계절까지도 이웃 친구처럼 의인화하며 살아왔던 한국인의 유별난 자연감각이 이 한 마디 말 속에 축약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한 꽃샘추위의 한국적 정서를 보다 시적인 세계로 끌어올린 것이 정지용의「春雪」이다. 그리고 지용은 그 시에서「문열자 선뜻! 먼 산이 이마에 차라」라는 불후의 명구를 남겼다.「시는 놀라움이다」라는 고전적인 그 정의가 이처럼 잘 들어맞는 시구도 드물 것이다. 우리는 반복되는 시간과 공간의 관습 속에서 살아간다. 그래서 굳은살이 박힌 일상적 삶의 벽이 무너질 때 비로소 나타나는 것이

「놀라움」이며「詩」이다.

 

「春雪」의 경우에는 그것이 아침에 문을여는 순간 속에서 출현된다. 밤사이에 생각지도 않은 봄눈이 내린 것이다. 겨울에는 눈, 봄에는 꽃이라는 정해진 틀을 깨뜨리고 봄 속으로 겨울이 역류(逆流)하는 그 놀라움이「春雪」의 시적 출발점이다. 그것이 만약 겨울에 내린 눈이었다면「선뜻」이라는 말에 느낌표가 붙지 않았을 것이다. 그것은 그냥 차가움이 아니다. 당연히 아지랑이나 꽃이 피어날 줄 알았던 그런 철(시간), 그런 자리(공간)에 내린 눈이었기 때문에 그「선뜻」이란 감각어에는「놀라움」의 부호가 요구된다.


그리고 그러한「놀라움」은 손발의 시러움같은 일상의 추위와는 전혀 다른「이마」위의 차가움이 된다.「철 아닌 눈」에 덮인 그 山은 눈으로 바라보는 시각(視覺)의 산이 아니라 이마에 와 닿는 촉각적(觸覺的)인 山이며, 이미 멀리 떨어져 있는 산이 아니라「이마받이」를 하는「서늘옵고 빛난」거리가 소멸된 산이다. 그렇게 해서「면 산이 이마에 차라」의 그 절묘한 시구가 태어나게 된다.

 

「이마의 추위」는 단순한 눈 내린 山頂의 감각적 묘사에서 그치지 않고「춘설」과「꽃샘추위」에 새로운 詩的 부가가치(附加價値)를 부여한다.「춘설이 분분하니 필동말동하여라」의 옛시조나 「春來不似春」같은 漢詩의 상투어들은 봄눈이나 꽃샘추위를 한결같이 봄의 방해자로서만 그려낸다.


  그러한 외적인「손발의 추위」를 내면적인「이마의 추위」로 만들어 낸 이가 시인 지용인 것이다. 그에게 있어서「꽃 피기전 철도 아닌 눈」은 어느 꽃보다도 더욱 봄을 봄답게 하고 그 감각과 의미를 새롭게, 그리고 진하게 하는 작용을 한다. 그래서 봄눈이 내린 산과「이마받이」를 한 지용「흰 옷고름 절로 향긔롭어라」라고 노래한다.


꽃에서 봄향기를 맡는 사람은 시인이 아니다. 일상적 관습 속에서 기계적으로 봄을 맞이하는 사람들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지용과 같은 詩人은 오히려 봄눈과 같은 겨울의 흔적을 통해 겨울옷의 옷고름에서 봄향기를 감지한다.「새삼스레……」라는 말에 잘 나타나 있듯이 지용에게는 시간을 되감아 그것을 새롭게 할 줄 아는 상상력이 있기 때문이다. 얼음이 금가고 파릇한 미나리의 새순이 돋고 물밑에서 꼼짝도 않던 고기입이 오물거리는 그 섬세한 봄의 생동감을 느끼기 위해서는, 그리고 겨울과 봄의 그 미세한 차이를 알아내기 위해서는「이마의 추위」(꽃샘추위)가 필요한 것이다. 왜냐하면 활짝 열린 봄의 생명감은「웅숭거리고 살아온 겨울의 서러운 삶」을 통해서만 서로 감지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봄눈이야말로 겨울과 봄을 동시에 바라볼 수 있게 하고, 체험할 수 있게 하고, 끝내는 새로운 시간과 공간의 그 차이화를 보여주는「놀라움」이 되는 것이다.

 

봄의 시는 꽃 속에 있는 것이 아니다. 지용의 상상력에 의하면 그것은 봄눈에 덮인 서늘한 뫼뿌리에 혹은 얼음이 녹아 금이 간 그 좁은 틈사이에 있다.


그래서 지용의 시「춘설」은「핫옷 벗고 도로 칩고 싶어라」로 끝나 있다. 달리는 자동차 속에 있을 때에는 우리가 달리고 있다는 것을 모른다. 갑자기 브레이크를 밟는 순간 우리의 몸은 앞으로 쏠리게 되고 그 충격을 통해 비로소 달리는 속도를 느낀다. 봄눈이 바로 봄의 브레이크와도 같은 작용을 하는 것이다.

 

그러나 봄눈은 밤낮 내리는 것이 아니잖는가. 그러므로 꽃샘이나 붐눈을 통하지 않고서도 스스로 겨울의 흔적을 만들기 위해서는 두꺼운 솜옷을 벗고 도로 추위를 불러들여야 한다.「새삼스레」「철 아닌」「도로」와 같은 일련의 詩語들이 환기시켜주는 것은 시간의「되감기」이다. 그래서「핫옷 벗고 다시 칩고 싶다」라고 말하는 지용의 逆說 속에서 우리는 스위스의 산 골짜구니 깊숙이 묻혀살던  드퀸시 의 오두막집을 상상하면서 쓴  보들레르 의 글 한 줄을 생각하게 한다.

 

시인의 방과 그 나날들을 생각하게 된다. 그것은「문열기」이전의 닫혀져 있던 방, 핫옷을 입고 있는 좁은 공간이다. 그리고 그 시간은「雨水節 들어 바로 초하루 아침」이전, 지용 자신의 표현대로 하면「웅숭거리며」사는 겨울 시간이다. 바깥이 추울수록 그 내부의 공간은 한층더 아늑하고 따뜻하며 눈보라가 치는 긴 밤일수록 그 시간은 더욱 고요하고 천천히 흐른다. 

 

이렇게 외부와 단절된 닫쳐진 공간과 그 시간 속에서 살고 있는 사람만이 문을 열고 바깥 세상과「이마받이」를 하는 행복한 충격을 얻을 수가 있다. 그리고「핫옷 벗고 도로 칩고 싶다」는 지금껏 어느 누구도 느끼지도 말하지도 못하던 소원을 품게 된다. 그러한 소망의 원형이 바로「봄눈」이며「꽃샘추위」라는 것은 두 말 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지용에 의해서 한국 시의 역사상 처음으로「봄의 훼방꾼」이었던「봄눈」과「꽃샘」이 봄을 발견하고 창조하는 詩學의 주인으로 바뀌게 된 것이다.

 

(이 글은 다시읽는 한국시에 실린 이어령 교수님의 한국시 해설 부분을 옮겨 적은 것입니다.)

 

 

 

 

출처 : 마 캐는 시인, 김필녀 시인의 안동마농장
글쓴이 : 김필녀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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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향기] 그저 거기 있는 것만으로도 눈부신 사람 

                       

 

정여울 문학평론가

 

그 사람이 거기 있다는 것만으로 왠지 안심이 되는 순간이 있다. 아파트를 매일 반짝반짝 윤이 나게 청소해 주시는 아주머니와 마주칠 때마다 반갑게 인사하게 되고, 해마다 부지런히 신간을 내며 잊지 않고 빠짐없이 책을 보내 주시는 작가들에게는 뜨거운 동지애를 느낀다. 부모님 댁에 찾아갈 때마다 어린 시절 자주 드나들던 문방구가 아직 남아 있음에 안도하고, 배탈이 나거나 머리가 아플 때마다 찾아갔던 오래된 약국이 아직 건재함에 가슴이 따뜻해진다. 이렇듯 익숙한 자리를 묵묵히 지켜 주시는 오랜 이웃들은, 매일 볼 수는 없지만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 삶을 지탱해 주는 기억의 주춧돌이다.

 그가 사라지고 나서야 그의 소중함을 깨달을 때도 많다. 생선구이와 청국장이 참 맛깔스럽던 홍대 근처 밥집이 사라졌을 때 오랫동안 가슴이 아팠고, 스파게티와 리조토가 일품이었던 이탈리아 레스토랑이 없어졌을 때는 요리사 아저씨의 슬픈 얼굴이 꿈에 나타날 정도로 그곳이 그리웠다. 얼마 전에는 단골미용실의 헤어스타일리스트가 갑자기 사라졌다. 몇 년간 정들어 버린 그녀가 없어지자 가슴 한구석이 시려 왔다. 언제나 말이 없던 그녀가 참 좋았는데, 막상 그녀가 사라지자 ‘이야기라도 좀 나눠 볼걸’하는 후회가 밀려 왔다. 어린 시절 정든 골목길을 떠난 후 ‘이제 나는 이웃이 없어졌구나’ 하고 생각했는데, 그것이 아니었다. 매일 볼 수는 없지만 ‘마음 속 인연의 별자리’를 이루고 있는 모든 이가 내게는 소중한 이웃이었다.

 몇 달이 지나 다시 미용실에 가보니 놀랍게도 그녀가 돌아와 있었다. 나는 얼굴 가득 반가움을 숨기지 못했고, 내 머리를 다듬어 주는 그녀의 따스한 손길을 다시 느낄 수 있었다. “그동안 어디 계셨어요? 보고 싶었어요.” 나의 갑작스럽고 격한 애정표현에 그녀는 깜짝 놀라며 흥미로운 모험담을 들려주었다. 고교 시절부터 가위를 잡아 또래보다 일찍 헤어스타일리스트가 된 그녀는 10여 년 일하면서 한 번도 긴 휴가를 가져본 적이 없다고 한다. 생애 처음으로 석 달의 휴식기를 갖는 동안 그녀는 필리핀에서 다이빙 자격증을 땄고, 함께 간 친구는 아예 다이빙 트레이너가 되어 필리핀에 눌러앉았다는 것이었다. 그녀도 살짝 유혹을 느꼈지만 자신이 결국 가장 원하는 것은 이 길임을 깨달았다고 한다. 그녀는 처음으로 천직이라 믿었던 일을 놓아봄으로써 백 번을 생각해 봐도 그 일이 진정으로 자신의 천직임을 깨달은 것이다.

 나는 그녀가 예전보다 훨씬 밝아지고, 활기차고, 씩씩해진 것이 좋았다. 무엇보다 그저 그녀가 돌아와 주었다는 사실이 기뻤다. 그녀는 내게 ‘익숙해져 버린 존재들에 대한 감사’를 다시금 일깨워 주었다. 그저 늘 거기 있을 것만 같은 정든 사람들이 사라져 버렸을 때 우리는 깊은 상실감을 느낀다. 상실감이라는 질병에 대비하기 위한 최고의 예방접종은 바로 ‘감사’다. 평소에 더 많이 더 깊이 감사할수록 우리는 갑작스런 상실감에 시달리지 않을 수 있다. 감사는 당연하다고 믿었던 존재들에 스민 무한한 축복을 일깨워 준다.

 옛사람과 현대인의 가장 큰 차이도 바로 ‘감사의 의례’일 것이다. 비가 오면 비가 와서 감사하고, 해가 뜨면 해가 떠서 감사하고, 한가위에는 ‘오늘만 같아라’고 감사했던 옛사람과 달리 우리는 끝없이 ‘더 잘난 남들’과 비교하며 불평과 불만에 휩싸인다. 뭔가 대박이라도 터져야 감사를 느끼고, 대박이 터져도 더 큰 대박에 투자하느라 감사할 겨를이 없는 현대인들과 달리 옛사람들은 그저 살아 있는 오늘 자체에 감사하는 마음챙김의 기술을 지니고 있었다. 늘 ‘더 나은 내일을 향해’ 미친 듯이 질주하는 삶에는 감사의 여백이 깃들지 않는다. ‘더 높이, 더 빨리’만 외치는 삶에서는 사소한 불상사도 치명적인 장애물이 되거나 우울증의 근원이 된다. 차라리 ‘인생은 고(苦)’임을 꾸밈없이 긍정하는 것이 아주 작은 기쁨에도 감사할 수 있는 길이다. 오늘도 나는 ‘그저 거기 있는 것만으로도 눈부신 존재들’에 대해 생각해 본다. 감사는 평범한 식사를 위대한 만찬으로 만들고, ‘지긋지긋한 집구석’을 천상의 쉼터로 만들며, 쳇바퀴처럼 똑같은 일상을 단 한 번의 눈부신 기적으로 만든다.

정여울 문학평론가
출처 : 碧波 藝術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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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디슨 카운티의 다리/ 김경수

 

"메디슨 카운티의 다리"라는 영화 안의

빨간 나무 지붕이 있는 메디슨 카운티의 다리에서

극중의 한 기혼 중년여인과 한 중년 독신남자가

처음으로 사랑을 느꼈네.

그리고는 메디슨 카운티의 다리에서 헤어졌다네.

불륜의 사랑이었으므로

그러나 그것이 생(生)의 첫 번째 진정한 사랑이라는 데 문제가 있었네.

일생 중에 진정한 사랑은 단 한 번밖에 오지 않는다는 사실 때문에

그 남자는 늙어 죽기 전에 그 여인에게

일생 중에 진정한 첫사랑이었노라는 마지막 편지를 보내고

편지를 품에 고이 안던, 이젠 백발이 성성해진 그 여인도

죽고 나서야 남겨둔 편지로 자녀들에게 고백했다네.

아름다운 불륜을

일생에 단 한 번밖에 오지 않는다는 진실한 사랑을 위해

죽기 전까지 가슴 깊숙이에 간직하고만 살았던 그들

 

메디슨 카운티의 다리에 내가 서 있네.

일생 단 한 번의 진실한 사랑을 위해

우리 사랑을 방해하던 검은 운명과 대결하러 가네.

하지만 거대한 힘의 운명에 형편없이 매만 맞고서

내 사랑과 메디슨 카운티의 다리에서 헤어지고

함께한 시간들만 추억하며 한없이 쪼그라드네.

그런 사랑은 끄기 위해 켜둔 촛불

밝지만 서러운 그 빛 안에서 피었다 지는 수선화였네.

사랑했던 마음들이 땅으로 추락한 여름 과육처럼 멍이 드네.

 

메디슨 카운티의 다리가

일생 단 한 번밖에 오지 않는

진실한 사랑을 만나기 위해 서 있네.

그러나 단지 나무라는 이유만으로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의 운명 때문에

내부 깊은 곳에서부터 서서히 썩어가고 있네.

메디슨 카운티의 다리가 아프고 그 남자와 여자가 아프고

내가 아프고 내 애인이 아프고

그 사랑이 범인이고 세월이 공범이고 삶이 방관자였네.

영화 안에서나 영화 밖의 세계 속에서도

그 남자와 그 여자와 나와 내 애인과 메디슨 카운티의 다리가

숨겨진 투명 끈으로 연결되어 있었네.

그러나 나는 아직 메디슨 카운티의 다리에 가 본적이 없네.

 

- 시집『하얀 욕망이 눈부시다』(문학세계사,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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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메디슨 카운티의 다리’를 국내에 맨 먼저 소개한 것은 1993년 출간된 소설이었다. 전재국 씨가 대표로 취임한 ‘시공사’는 이 소설로 국내 최단기 100만부 판매 돌파 기록을 세우며 대박을 쳤다. 그로부터 2년 뒤인 1995년 영화가 상영되었고, 이듬해인 1996년에는 MBC에서 유동근, 황신혜가 주연한 '애인'이란 드라마가 방영되었다. 당시 그 드라마의 인기에 편승해 모 여성잡지사에서 전국의 기혼여성 1000명을 상대로 설문조사를 했다. ‘만약 당신 앞에 마음에 드는 남편 아닌 다른 남자가 나타난다면 연애를 할 용의가 있느냐’라는 물음이었다. 65%의 여성이 주저 없이 ‘오케이바리’라고 답했고, 20%는 경우에 따라 가능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 안 될 일이라며 손 사레를 친 여성은 15%였다.

 

 그로부터 20년의 세월이 지난 뒤 간통죄가 위헌이라는 뉴스를 들었을 때 퍼뜩 이 영화가 떠올랐고 마침 저녁엔 ‘로즈만 다리’를 연상케 하는 대구 아양기찻길 지붕이 있는 다리 안에 마련된 ‘아양뷰’란 공간에서 1시간 동안 팔공문화원이 주최한 교양강좌를 했었다. 주섬주섬 아무렇게나 지껄이며 시간을 때웠지만 실은 이 영화 이야기부터 하려고 마음먹었었다.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그들만의 사랑을 나누게 할 수 있었는지에 대하여. 그리고 로버트가 프란체스카에게 고백했던 “살아오면서 그 많은 곳을 다녔던 것은 당신을 만나기 위함이며, 이처럼 확신에 찬 감정을 느껴본 것은 생애 처음이자 마지막일 것”이라는 그 작업멘트의 진정성에서부터 자신의 뼈를 로즈만 다리 위에 뿌려달라는 프란체스카의 유언까지.

 

 하지만 내 인식수준의 범위를 넘어선 주제이기도 하거니와 무엇보다 ‘간통’이니 ‘불륜’이니 '행복추구권'이니 하는 말들을 영화이야기와 결부시켜 공개적으로 입에 담는 것이 거북했고 싫었다. 까닥하다가 말의 스텝이 꼬여 예기치 않은 방향으로 논지가 빗나가게 될까도 염려되었고, 내 ‘신분’이 탄로날까봐 두렵기도 했다. 그러나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신비로운 일인 동시에 신의 축복임이 분명하다. 기혼, 미혼, 돌싱의 신분을 떠나 '용기'가 있다면 누구든 사랑을 거부할 이유는 없다. ‘사람과 사랑은 동질’이라는 논리도 있듯이 사람이기에 사랑할 수밖에 없고 사랑하기에 또한 사람인 것이다. ‘일생 단 한 번의 진실한 사랑’이 올 수도 아니 올수도 있는 것이지만, 그리고 나도 이젠 배터리가 거의 닳아가고 ‘아직 메디슨 카운티의 다리에 가 본적이 없’지만 ‘숨겨진 투명 끈’까지 스스로 끊을 이유는 없지 않은가. 

 

 

권순진

 

 
The Song Of Wandering Aengus - Donovan

출처 : 詩하늘 통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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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봄나물/ 고재종

 

얼어붙었던 흙이 풀리는 이월 중순

양지바른 비탈언덕에 눈뜨는 생명 있다

아직도 메마른 잔디 사이로

하얀색 조그만 꽃을 피운 냉이와

다닥다닥 노란색 꽃을 피운 꽃다지와

자주색 동그란 꽃을 층층이 매단 광대나물

저 작은 봄나물들이 첫봄으로 푸르다

저 작은 것들이 지난 가을 싹을 틔워

몇 장의 작은 잎으로 땅에 찰싹 붙어

그 모진 삭풍의 겨울을 살아 넘기고

저렇듯 제일 먼저 봄볕을 끌어모은다

저렇듯 제일 먼저 봄처녀 설레게 한다

냉이 꽃다지 광대나물, 그 크기 워낙 작지만

세상의 하많은 것들이 제 큰 키를 꺾여도

작아서 큰 노여움으로 겨울을 딛고

이 땅의 첫봄을 가져오는 위대함의 뿌리들.

 

- 시집『새벽들』(창작과비평사, 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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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이 농촌 현장을 지키고 있을 당시에 쓴 것이라 짐작되는 시다. 당시 시인은 농촌의 내밀한 정서를 시로 옮겨 담으면서 생명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을 드러낸 시를 많이 발표하였다. 고재종 시인은 담양농고 1년 중퇴로 제도권 교육을 마감했지만 도시 빈민으로 떠돌면서 문학의 꿈을 키워 1984년 ‘실천문학’으로 등단하였고, 이후 고향인 담양으로 돌아와 농사일을 하며 발표한 시들은 20세기 후반 한국 농촌의 자화상을 다룬 민중시로 평가받았다.

 

 ‘첫 봄나물’은 변화무쌍한 자연의 법칙에 순응하며 추운 겨울을 견디고선 ‘얼어붙었던 흙’을 뚫고 가장 용감무쌍하게 ‘눈뜨는 생명’들이다. 이런 끈질긴 생명력의 현상을 두고 얼른 민초(民草)를 떠올리기도 하는데 꼭 그럴 필요는 없겠다. 사실 民草라는 말은 일본식 조어이기도 하지만 순리에 따라 주어진 위치에서 최선을 다해 뿌리내리고 싹을 틔우는 자연의 생명력이기에 달리 은유할 필요도 없는 것 아닌가.

 

 냉이와 꽃다지와 광대나물 중에서도 가장 익숙한 냉이는 봄을 맨 먼저 알려주는 봄나물이다. 아직은 봄을 시샘하느라 쌀쌀한 기운도 감돌지만 양지 바른 곳에는 이미 냉이가 쑥쑥 자라고 있다. 잎이 있는 상태로 겨울을 이겨내는 냉이는 향긋한 향으로 사람의 식욕을 돋우어 봄철의 춘곤을 이기게 한다. 비실비실 봄 타는 사람을 냉큼 깨우는 봄나물이 냉이다. 한방에선 혈압을 안정시키고 간의 해독을 돕는 식물로도 알려져 있다.

 

 환절기 감기엔 그만이라는 꽃다지 등 ‘작지만’ ‘위대함의 뿌리들’은 이제 곧 지천으로 널릴 것이다. 쑥, 씀바귀, 민들레, 달래... 봄이 깊숙이 오기 전에 들로 나가 봄을 캐고 싶다. 봄나물을 먹어야 봄이 온다 하지 않았던가. 그 푸르고 질긴 생명력이 담긴 봄나물에 희망과 꿈을 버무리는 것이다. 동네 재래시장 어귀에서 키 작은 할머니가 앉아 파는 작은 소쿠리의 냉이라도 보게 된다면 일단은 그것으로 오늘 저녁 된장국을 끓이는 거다.

 

 

권순진

 


 

출처 : 詩하늘 통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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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노래/ 정태춘

 

 

아주 오래된 나무 그늘 아래

지친 걸음 쉬어가는 나그네처럼

나도 내 생 어느 길목에서 그런 널찍한

나무 그늘을 만날 수만 있다면

아주 멀고 먼 옛날이야기에 흠뻑 취해버린 아이처럼

나도 때때로 소낙비에 젖듯

너무나 조용해서 행복한

너의 노래 속으로

젖어 들어갈 수만 있다면

 

높은 절벽과 그 너머 바다와

그 위로 해와 달과 어우러지는 노을과

그 모든 걸 품고 떨리는

너의 노래 속으로

 

아주 기나긴 상념을 털어내고 벽을 향해 돌아눕는

한 시인처럼

나도 가끔씩은 그렇게 깊고 허망한 잠을 청할 수만 있다면

 

짙은 안개와 그 너머 바람과

억새 흩날리는 길들을 따라

흘러 흘러만 가는 노래로

 

멀리 높은 강둑길로

삽 들고 제 논 나가는 농부처럼

나도 그렇게 무심하게

저들의 거리로 나설 수만 있다면

너의 조용한

조용한 노래를 부르며.

 

- 시집『老獨一處』(실천문학사,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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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 시를 써야겠다. 황지우처럼 시를 써야겠다.”고 중얼거리고선 정말로 시를 쓰고 시집을 낸 가수 정태춘의 시다. 아시다시피 정태춘은 아내 박은옥과 함께 지난 8,90년대 내내 한 번도 시대의 아픔을 외면하지 않고 가난하고 억눌리고 짓밟히고 빼앗긴 사람들의 편에서 노래해온 가객이다. 그의 노래는 생생한 리얼리티의 현장성과 서정성이 함께 녹아있다. 음악성과 서사가 하나 된 감동으로 그의 노래는 노래 이상이었다. 그의 노래는 시였고 깃발이었고 진혼의 나팔소리였다. 그의 노래에는 늘 힘과 아름다움과 위안과 온기가 버물어져 있다.

 

 여기서 ‘너의 노래’는 특정한 이의 노래를 지칭할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어쩌면 그 자신의 노래일지도 모르겠다. ‘그 모든 걸 품고 떨리는 너의 노래 속’은 얼마만큼 매운 연기 속일까. 사람을 빠져들게 하는 깊은 늪일까. 우리는 그렇게 노래하는 가수들을 음유시인이라고 부른다. 음유시인하면 당장 정태춘 말고 김민기 정도의 이름을 추가로 떠올릴 뿐이다. 이들의 공통점인 중저음으로 울리는 깊은 서정과 한 편의 시처럼 조탁된 노랫말은 싸구려 감상의 가락과 가사와는 그 격이 다른 진정성이 느껴진다.

 

 하지만 생각을 좀 너그럽게 수정해야겠다. 요즘 새로 부활한 프로 '나는 가수다'는 번번이 놓쳐 제대로 보지 못하지만 한때 '본방 사수'해가며 즐겨 본 프로였다. 그런데 감동과 감흥이 전에 비해 많이 떨어진 것 같다. 언젠가 조용필은 가끔 노래 부르면서 가사를 음미하다 보면 눈물이 날 때가 있다고 했다. 그럴 땐 무지 참으며 일부러 가사에 집중 안 하고 허공을 딱 보며 아무 생각 없이 노래한다고 토로했다. 관객의 얼굴을 타고 내리는 눈물과 그들 혼신의 열창을 보고 듣노라면, 비록 음유시인이 아니더라도 그들의 노래는 고스란히 한 편의 시가 된다. 짙은 서정의 사회적 발언이 시보다 우위에 있음을 느낄 때도 간혹 있다. 

 

 

권순진

 


출처 : 詩하늘 통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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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가 별이라면/ 이동순

 

 

그대가 별이라면

저는 그대 옆에 뜨는 작은 별이고 싶습니다

그대가 노을이라면

저는 그대 모습을 비추어주는

저녁하늘이 되고 싶습니다

그대가 나무라면

저는 그대의 발등에 덮인

흙이고자 합니다

오, 그대가

이른 봄 숲에서 우는 은빛 새라면

저는 그대가 앉아 쉬는

한창 물오르는 싱싱한 가지이고 싶습니다

 

- 시집『그대가 별이라면』(시선사,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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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상의 모든 사랑시와 연가는 다 그게 그것 같고, 어디서 한번은 들은 듯해서 도무지 새로울 게 없어 보입니다. 이 시만 해도 먼저와 나중을 떠나 왠지 낯이 좀 간지러우면서도 처음 읽는 시가 아닌 듯 생각됩니다. 그대를 별에 비유해 그 배경으로 노을을 그려놓으면 얼른 이동원의 ‘이별노래’가 떠오릅니다. ‘그대 떠나는 곳 내 먼저 떠나가서 그대의 뒷모습에 깔리는 노을이 되리니’ 정호승 시인의 시가 노랫말이 된 것입니다. 나무도 마찬가지죠. ‘그대가 나무라 해도 내가 내가 잎새라 해도’ 한경애가 부른 ‘옛 시인의 노래’가 포개어져 읽힙니다.

 

 결국 진부한 사랑타령임에도 ‘됐네, 됐어’라며 손사래 치지 못함은 어인 까닭인지요. 콧방귀는커녕 오히려 귀가 솔깃해집니다. 사랑은 아무리 퍼 올려도 바닥이 드러나지 않는 화수분이고 처음부터 길들여진 목마름이 아닐까요. 내남없이 사랑을 찾아 생애를 바쳐 헤매는 선천성 중독자들이니까요. 여전히 갈망하는 정신의 금강석이니 말입니다. 그런데 이 시에서의 사랑은 자신을 당당한 주역으로 전면에 내세우질 않네요. 마주하고 어깨를 나란히 하지 않습니다. 조건 없는 아가페 사랑인가 싶습니다만 그게 다는 아닌 것 같습니다.

 

 그대가 1등성 왕별이라면 자신은 그 옆의 별 볼일 없는 작은 5등성별 정도나 되면 족하다고 토로합니다. 사람들이 그대 아름다운 노을을 보며 감탄할 때 자신은 그 배경일 따름인 하늘이고자 합니다. 그대가 우뚝한 나무라면 자신은 드러내지 않고 그대 나무뿌리에 덥힌 흙이기를 소망합니다. 사람들은 나무에 주목하여 칭송하고 고마워하지만 흙에는 눈길조차 주지 않습니다. 하지만 흙 없이 나무가 자랄 수 있겠는지요. 자신은 아름드리 굳건한 나무 아래 흙으로 만족하고 보람이라 여깁니다. 사랑의 이름으로 기꺼이 한 줌 흙이고자 합니다.

 

 그동안 주춤거리며 은밀하게 유포되던 봄 기운이 설을 기점으로 공공연하고 파다해졌습니다. 봄이 오는 길목에 사랑도 기지개를 켭니다. 지금도 있는지 모르지만 오래전 가야산국립공원 백운동 관리소 앞에 이 시를 새긴 목판을 보았습니다. 대개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고, 봐도 못 본 척 냉큼 고개를 돌려버리더군요. 잠시 눈길이 머물렀어도 건성건성이었으며, 사랑에 대한 생각 한 모금 머금고 산을 오르는 이는 거의 없어 보였습니다. 그러나 저울에 올려놓고 눈금만 살피는 빠삭한 사랑만이 세상에 존재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사랑은 세상의 모든 것을 수식하면서 모든 것의 은유이기도 합니다. 고정희 시인의 ‘그대 생각’이란 시가 있습니다. “너인가 하면 지나는 바람이어라/ 너인가 하면 열사흘 달빛이어라/ 너인가 하면 흐르는 강물소리여라/ 너인가 하면 흩어지는 구름이어라/ 너인가 하면 적막강산 안개비여라/ 너인가 하면 끝모를 울음이어라/ 너인가 하면 내 살 찢는 아픔이어라” 너인가 하면 내 살 찢는 아픔이기도 한 그대 생각의 바람이 ‘한창 물오르는 싱싱한 가지’끝으로 불어와 물관부에 차오르고 있습니다. 그대여, 가지 위에 앉아 아름다운 노래를 부르시기만 하면 됩니다.

 

 

권순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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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사랑의 눈동자 곁으로 / 강은교

 

봄이 오고 있다

그대의 첫사랑 곁으로

그대의 첫사랑의 눈동자 곁으로

그대의 첫사랑의 눈동자의 맨발 곁으로

그대의 첫사랑의 맨발이 밟은 풀잎 곁으로

그대의 첫사랑의 맨발의 풀잎이 나부끼는 바람 곁으로

그대의 첫사랑의 맨발의 풀잎의 바람 위의 아침 햇빛이 꿈꾼

그대의 첫사랑의 맨발의 풀잎의 바람 위 반짝이는 소리

곁으로 곁으로 맴도는 그대의 첫사랑의 맨발의

풀잎의 바람의 아침 햇빛의 꿈 엷은 살 속

으로 우리는 간다. 시간은 맨머리로

간다, 아무도 어찌할 수 없다.

그저 갈 뿐, 그러다 햇빛이

되어 햇빛 속으로 가는

그대와 오래 만나리

만나서 꿈꾸리

첫사랑 되리

 

- 시집『등불 하나가 걸어오네』(문학동네,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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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은 호르몬에 의한 일시적 정신이상 상태라고 쇼펜하우어는 말했다. 그렇다면 첫사랑은 정신질환의 첫 증세에 해당한다. 일시적으로 정신줄을 놓아버린 상태가 첫사랑이라니, 그 우연과 허방이 평생을 질질 이끌고 가다니, 추억하거나 기억되거나, 그리워하거나 한숨짓거나, 어느 봄날 아롱대다가 꿈결에 빨려들기도 하는 것이 첫사랑의 질환이긴 하다. 그러나 특별한 경우 아니면 죽을 때까지 그 증세가 지속되지는 않는다. 말 만들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남자에게 특히 강열한 기억으로 존재한다지만 잘 모르겠다.  

 

 이루어지지 않은 첫사랑이 오랜 기간 기억되는 현상을 심리학적으로 '자이가르닉 효과'라고 한다. 러시아의 심리학자인 자이가르닉이 1927년에 발표한 이론이다. 사람들이 어떤 일을 하다가 중간에 그만둘 경우 계속해서 머릿속에선 찝찝하게 남아있다. 그때 남아 있는 일을 마치려고 하는 동기가 작용하기 때문에 기억을 잘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일단 일을 끝내고 나면 그 일과 관련된 기억들이 쉽게 사라지는데, 뭔가 해결되지 않은 상황이 오랫동안 기억에 남아있는 현상을 '자이가르닉 효과'라고 한다.

 

 어떤 일에 접했을 때 사람들은 그것에 적응하기 전에는 인지적 불균형 상태가 된다. 바짝 긴장한다는 것인데, 그 긴장은 일이 해결될 때까지 계속되고,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긴장 상태도 지속되므로 관련 기억이 생생히 남게 된다. 심리학의 이론에 기대어 첫사랑을 설명하기에는 얼마간 무리가 있다. 어쩌면 남성의 정복욕구나 성취욕구가 개입되어 작용했을 수도 있다. 그렇듯 이루어지지 않은 첫사랑도 그 ‘첫’의 엄청난 설렘과 긴장에도 불구하고 끝내 성사되지 않았다면 당연히 오래오래 기억 속에서 머물게 될 것이다.

 

 실은 딱히 첫사랑뿐 아니라 모든 옛사랑을 망라하여 더 애틋하고 미련이 남아 진하게 생각나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 이렇게 이른 봄비가 촉촉히 내리는 날이면 '창문 넘어 어렴풋이' 옛 생각도 나는 것이다. 하지만 시간에 깎이고 물기도 빠져나가 서럽거나 간절하지는 않다. 다만 찬바람 물러가고 아지랑이와 함께 봄기운이 오를 때면, 그의 눈동자와 맨발과 그의 맨발이 밟은 풀잎과 풀잎의 바람과 풀잎의 바람 위의 아침 햇빛이 꿈꾼 바로 그 자리에서 그 첫사랑이 다시 맨발로 겅중겅중 다가오는 걸 어쩌랴. 몽환적으로...

 

 

권순진

 

 

As time goes by/ nat king co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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