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 / 이성부
기다리지 않아도 오고
기다림마저 잃었을 때에도 너는 온다.
어디 뻘밭 구석이거나
썩은 물웅덩이 같은 데를 기웃거리다가
한눈 좀 팔고, 싸움도 한 판 하고,
지쳐 나자빠져 있다가
다급한 사연 들고 달려간 바람이
흔들어 깨우면
눈 부비며 너는 더디게 온다.
더디게 더디게 마침내 올 것이 온다.
너를 보면 눈부셔
일어나 맞이할 수가 없다.
입을 열어 외치지만 소리는 굳어
나는 아무것도 미리 알릴 수가 없다.
가까스로 두 팔을 벌려 껴안아보는
너, 먼데서 이기고 돌아온 사람아.
- 시집 『우리들의 양식』 (민음사, 19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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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년 전 2월28일 그해 봄을 보지 못한 채 고인이 된 시인은 “잃어버린 말 잃어버린 웃음 잃어버린 날들이 많을수록 우리는 끝내 더 큰 획득에 이르지 않았더냐!”며 또 다른 시를 통해 큰 기쁨을 예견한 뒤 “이제 또 봄이다. 아픔을 나의 것으로 찾아가는 사람만이 가슴 뛰는 우리들의 봄이다. 외로움을 얻어 돌아오는 길. 더 빛나는 우리들의 봄이다”라며 봄을 찬양했다. 이제 또 봄이 와서 온전히 봄을 찬양해도 될지 확실치 않으나 여느 해 봄과는 다른 기쁨의 봄을 믿고 싶다.
꿈은 노래되어야 하고, 정의는 반드시 실현되리라 믿으며, 승리는 머지않았다는 신념으로 줄곧 살아왔다. 98년 전 빼앗긴 봄의 3월, 사람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와 태극기 흔들며 만세를 외쳤을 때도 그러했고, 해방이후 봄이 위독한 지경에서 골골댈 때마다 민중의 노래로 봄을 흔들어 깨웠다. 봄이 짓밟힐 때면 ‘새날이 올 때까지 흔들리지 말자’며 어깨동무 하고 맹세했다. 그리하여 그 많은 기다림 끝에 봄은 기어이 오고야 말았다.
먼데서 몰고 온 희망과 환희와 영광. 빙판 위 연아의 스케이트 칼날처럼 미끄러지듯 거침없이 봄이 오기도 했었다. 하지만 대체로 그저 찾아온 봄이 아니라 숱한 인내와 반드시 오리라는 믿음, 그리고 가없는 노력으로 쟁취한 봄이었다. 올 봄도 아직은 더러 쿨럭이며 재채기를 하고 있지만 이처럼 실감나는 봄은 없었다. ‘한눈 좀 팔고, 싸움도 한 판 하고, 지쳐 나자빠져 있다가’도 우리들 마음에 기가 막히게 찾아온 봄이다.
한겨울 햇볕을 쬐지 못해 우울증에 빠진다는 북유럽 사람들처럼 지난겨울 잠시 소심하게 가라앉고 우울했던 적도 있었다. 그러나 남녘의 벙글 대로 다 벌어진 매화와 같이 봄의 순리를 거스르는 일은 없으리라. 퇴계 이황의 마지막 유언이 ‘저 매화나무에 물을 주라’였다고 한다. 물만 주면 매화나무는 어김없이 꽃을 피워 봄의 화신을 전한다. 서민의 지폐 천 원짜리엔 퇴계의 존영과 함께 도산서원의 매화나무가 그려져 있다.
매화의 꽃말은 ‘고결한 마음, 기품, 인내’이다. 우리는 고결한 마음으로 기품을 유지했으며 저들의 망동에도 인내했다. 이제 곧 밭가는 쟁기꾼의 노래가 들판 가득 울려 퍼지리라. 복사꽃 살구꽃 핀 우리의 고향 마을마다 사랑의 눈짓들로 가득하리라. 정의와 진리가 강물처럼 흐르는 산하에 서슬 퍼런 대립과 투쟁의 깃발은 내려지고 봄볕같이 따뜻한 타협과 상생의 봄을 맞을 것이다. ‘가까스로 두 팔을 벌려 껴안아보는 너’ 사람 사는 동네로 그가 돌아오고 있다. 나긋나긋한 봄의 백성이 되어 오늘은 ‘먼데서 이기고 돌아온 사람’을 마중가자.
권순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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