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수난과 함께

 

○기미년 3.1 독립만세 운동의 안동지방 주역 담당
    안동지방의 3.1운동은 천도교, 유교단체가 참여했으나 극히 미약하였으며 주도적 역할을 한 것은 기독교인들이었고 특히 당시 안동읍내에 유일한 교회였던 안동교회 교인들이 선도적 역할을 감당하였다. 동경 유학생으로서 2.8 독립선언에 참여하였던 강대극이 안동군청 서기 김원진, 안동교회 김영옥 목사, 이중희 장로와 접촉하였고, 연희전문 의학도 김 재명의 정보제공으로 그의 아버지 김병우 장로를 비롯한 교회지도자 및 청년들이 비밀 모의하고, 교회 여성 지도자 김정숙, 김병규, 이권애 등은 계명학교 여학생 30여명을 동원하여 독립선언서 인쇄, 국기를 제작하여 3월 18일 안동장날에 독립만세를 부르게 되니 장꾼들도 합세하여 대규모의 만세 운동이 되었고이 일로 수 많은 사람들이 경찰에 체포되어 옥고를 치루었는데 본 교회 교인으로는 김병우 장로 2년, 김익현, 김명인 1년, 김재성, 김계한, 이인홍, 황인규, 권점필은 6개월씩 각각 복역하였다. 교인들이 주동이 되어 만세운동을 일으키자 지역 주민들에게 번져가서 일경이 총칼로 무자비하게 진압하게 되어 많은 사상자들이 생기게 되었다.

○일본 제국주의에 항거한 교회
    1936년에 들어서면서 일본은 교회의 강력한 민족 정기와 신앙의 진수를 해체 말소하려고 신사참배를 강요함으로 가혹한 박해를 하기 시작하였다. 신사참배를 거부하는 많은 기독교 학교들과 평양신학교가 폐교당하게 되고 교회에 「가미다라」라는 위패를 두게 해서 국민의례란 명목으로 신사참배를 강요함으로 이를 거부하는 교회는 수많은 시련과 고난을 당했다. 다행스럽게도 우리 교회만은 김영옥 목사가 일경의 지시와 간섭을 피해가면서 신사위패를 설치하지 않았다. 또한 1941년에 교회말살을 기도한 교회 통폐합 조치로 신세교회(현 동부교회), 안기교회(현 서부교회)와 시내 작은 기도실이 모두 안동교회로 통폐합되어 갖은 박해와 시련을 겪었다. 일제말엽에는 우리 예배당은 육군기지로 강제 점령되어 징발 당했고, 김광현 담임목사는 일경에 의해 예비 검속되어 안동경찰서에 수감 중 해방을 맞게 되었다.

○해방 후 사회 안정을 위한 교회의 역할  
    일제말엽 안동에서 민족지도자로 예비 검속되었다가 풀려 나온 인물들이 중심이 되어 치안 유지회를 조직하니 고문으로 김광현 목사가 선임되었다. 안동 주둔군 밀러 중위, 백태성 의사, 김광현 목사가 교회 하층에서 청년 200여명을 모아 영어강습을 실시하면서 우익 단체 결성을 위한 기초를 닦았고, 중졸 이상의 여성들로 애국부인 동지회를 조직토록하여 활동하게 하였다. 교인이 중심이 되었으나 일반 사회인을 많이 참여시켜 범시민운동으로 전개하였다. 미군정 장관의 자문역으로 우익 핵심 인물이 많이 선출되도록 하고 김광현 목사는 군고문 회장과도 고문으로 당선됨으로써 사회에 크게 영향력을 발휘하였고 1946년 3월에 독립촉성 국민회 안동군 초대 위원장에
당선되어 안동사회를 이끌어가는 주역을 담당하였다. 또한 1946년 11월 중순에 남조선 과도 입법의원에 피선되어 문교사회 분과에서 입법활동을 하였다.

▲제2회 경안남자
주일학교대회(1932년)

▲하계 아동 성경
학원(1939년) 

▲법상, 안기, 신세
3교회 제직일동(1945.6.15) 

▲역대 교역자 및 30년
이상 된 교인
(창립 40주년1949년)
 

 

 

 

 

▲대예배광경(1950년대)

▲ 제39회 총회시 기독
청년면려회 제5회
전국대회(1954회)

▲고등부 제4회
   졸업기념(1955)

▲본당 증축공사시
   초석(1959년)

 

 

 

 

 

 

 ▲본당증축공사(1959년)

 ▲김광현 목사 시무
30주년(1963년)

출처 : 안동교회, 그 아름다운 역사의 시작
글쓴이 : 안동교회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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