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그늘/ 신경림 

 
툭하면 아버지는 오밤중에
취해서 널브러진 색시를 업고 들어왔다,
어머니는 입을 꾹 다문 채 술국을 끓이고
할머니는 집안이 망했다고 종주먹질을 해댔지만,
며칠이고 집에서 빠져나가지 않는
값싼 향수내가 나는 싫었다
아버지는 종종 장바닥에서
품삯을 못 받은 광부들한테 멱살을 잡히기도 하고,
그들과 어울려 핫바지춤을 추기도 했다,
빚 받으러 와 사랑방에 죽치고 앉아 내게
술과 담배 심부름을 시키는 화약장수도 있었다.

아버지를 증오하면서 나는 자랐다,
아버지가 하는 일은 결코 하지 않겠노라고
이것이 내 평생의 좌우명이 되었다,
나는 빚을 질 일을 하지 않았다,
취한 색시를 업고 다니지 않았고,
노름으로 밤을 지새지 않았다,
아버지는 이런 아들이 오히려 장하다 했고
나는 기고만장했다, 그리고 이제 나도
아버지가 중풍으로 쓰러진 나이를 넘었지만,

나는 내가 잘못했다고 생각한 일이 없다,
일생을 아들의 반면교사로 산 아버지를
가엽다고 생각한 일도 없다, 그래서
나는 늘 당당하고 떳떳했는데 문득
거울을 쳐다보다가 놀란다, 나는 간 곳이 없고
나약하고 소심해진 아버지만이 있어서,
취한 색시를 안고 대낮에 거리를 활보하고,
호기있게 광산에서 돈을 뿌리던 아버지 대신,
그 거울속에는 인사동에서도 종로에서도
제대로 기 한번 못 펴고 큰 소리 한번 못 치는
늙고 초라한 아버지만이 있다.

 

- 시집『어머니와 할머니의 실루엣』(창비,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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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프카는 “나의 모든 글은 아버지를 상대로 씌어졌다. 글 속에서 나는 평소 직접 아버지의 가슴에다 대고 토로할 수 없는 것만을 토해냈다. 그건 오랫동안에 걸쳐 의도적으로 진행된 아버지와의 결별 과정이었다.”고 고백했다. 따라서 카프카 문학은 본질적으로 아버지로부터의 벗어남에 대한 욕구를 반영한다. 아버지란 존재 안에 도사린 상징성을 해독하지 않고는 무엇도 이해할 수 없는 하나의 수수께끼며 미궁이다. 법과 권위의 표상이며, 가족 내 모든 권력의 실체이기도 한 아버지는 성장하며 카프카를 억압한다. 그의 아버지는 카프카를 막대한 영향력으로 포획하고 일방적으로 가문의 DNA를 주입시키려 했다. 카프카는 이런 아버지의 권력에 저항하는데, 문학은 그 저항의 한 방법이며 응전이었다.

 

 이런 아버지로 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욕구는 가부장적 질서 아래 있었던 우리도 예외가 아니다. 신경림 시인은 과거 우리 현실에서 아버지와의 관계를 비교적 소상히 그렸는데, 마치 카프카처럼 저항하며 문학의 방식으로 대응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물론 다 그런 건 아니겠지만 시인의 아버지는 그 시대 아버지의 전형인 동시에 내 아버지의 모습과도 크게 다르지 않다. 그때의 아버지는 그 사회가 나에게 스며드는 하나의 방식이며, 내가 사회로 나가는 유일한 통로이기도 했다. '일생을 아들의 반면교사로 산 아버지'까지는 아니었으나, 나와 아버지의 관계도 늘 두려움과 적개심으로 가득한 불화였다. 세상 떠신지 어언 이십사 년. 내게 심심하면 쏘아붙였던 ‘머저리’란 함경도 사투리가 귀에 쟁쟁하다. 지금도 그때 드리워졌던 그늘에서 기를 펴지 못하는.

 

 

권순진

 



출처 : 詩하늘 통신
글쓴이 : 제4막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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