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사랑 / 고정희
그 한번의 따뜻한 감촉
단 한번의 묵묵한 이별이
몇 번의 겨울을 버티게 했습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벽이 허물어지고
활짝 활짝 문 열리던 밤의 모닥불 사이로
마음과 마음을 헤집고
푸르게 범람하던 치자꽃 향기,
소백산 한쪽을 들어올린 포옹,
혈관 속을 서서히 운행하던 별,
그 한번의 그윽한 기쁨
단 한번의 이슥한 진실이
내 일생을 버티게 할지도 모릅니다
- 시집『아름다운 사람 하나』(푸른숲,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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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퇴출된 엄마가 좋나 아빠가 좋냐 식의 심심하고도 통속하기 짝이 없는 질문들, 그런 걸 하릴없이 묻고 답했던 시절의 '미팅'에선 어떤 계절을 좋아하냐는 간지러운 질문도 흔히 주고받았다. 아니 지금도 순진무구한 학생들 사이엔 사소하게 유통되고 있다. 마치 그 대꾸에 따라 그 사람의 성격을 간파하고 간이나마 볼 수 있으리라 믿으면서. 그럴 때 겨울이 좋다고 하면 꽤나 이성적이고 냉철하면서도 낭만적인 사람이라고 여기는 경향이 있었다. 그런데 면밀하고 포괄적인 계량에 의한 선호라기보다는 대개는 한두 가지 대수롭지 않은 이유로 즉흥적으로 내뱉는 경우가 많다. 이유를 따질 필요도 없이 그저 좋은 순백의 강하물 때문에, 혹은 방학이 있어서, 그리고 겨울스포츠를 즐길 수 있다는 점 등이다.
하지만 무엇보다 겨울의 가장 깊은 매력은 그 차가움으로 뜨겁게 사랑을 촉진시킨다는 데 있지 않을까. 고정희 시인과는 성만 다른 문정희 시인도 '겨울사랑'에서 ‘눈송이처럼 너에게 가고 싶다/ 머뭇거리지 말고/ 서성대지 말고 숨기지 말고/ 그냥 네 하얀 생애 속에 뛰어들어 따스한 겨울이 되고 싶다/ 천년 백설이 되고 싶다’고 했다. 고양된 격정은 고정희 시인의 ‘겨울사랑’과 다를 바 없다. 확실히 겨울은 그 '따뜻한 감촉'으로 커피의 맛이 깊어지고 라면과 김치찌개도 더 맛있어진다. 그리고 역사는 밤에 이루어진다는 말도 있듯이 겨울밤은 사랑의 역사가 무르익기 딱 좋은 계절이다. 고슴도치의 겨울나기 방식으로 연인은 가급적 밀착, 밀착 또 밀착이다. 이 겨울은 연인들 사이의 거리를 물리적으로 좁혀준다.
이십대를 고스란히 통금에 묶여 보내야 했던 겨울 밤. 유일하게 성탄전야와 한 해를 갈아치우는 날만 사슬이 풀렸다. 넘쳐나는 명동의 인파, 그리고 광복동과 동성로와 충장로는 젊은이와 나이든 이가 함께 점령한 거대한 주둔지였다. 고성과 교성 뜨거운 홍소 그럴 때 눈이라도 내리면 혼자라는 것은 죄악이고 수치였다. 하지만 사랑이 뜨거워지면 이별의 미학이 완성되는 계절 또한 겨울이다. 누구에겐들 이 겨울 그런 사랑과 아린 추억의 필름 한 컷 없으랴. 고정희 시인도 못 잊을 사랑 하나 품고서 몇 번의 겨울을 버티며 온 생을 떠받들었다고 하는 걸 보면 '이슥한 진실'의 더운 사랑 하나는 가졌나 보다. 지상에 없는 그녀는 지금 '치자꽃 향기 푸르게 범람하는' 어느 별에서 이 겨울과 입맞춤할 런지.
권순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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