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대/ 마종기
바람 센 도로변이나 먼 강변에 사는
생각 없는 갈대들은 왜 키가 같을까.
몇 개만 키가 크면 바람에 머리 잘려나가고
몇 개만 작으면 햇살이 없어 말라버리고
죽는 것이 쉽게 전염되는 것까지 알고 있는지,
서로 머리 맞대고 같이 자라는 갈대.
긴 갈대는 겸손하게 머리 자주 숙이고
부자도 가난뱅이도 같은 박자로 춤을 춘다.
항간의 나쁜 소문이야 허리 속에 감추고
동서남북 친구들과 같은 키로 키들거리며
서로 잡아주면서 같이 자는 갈대밭,
아, 갈대밭, 같이 늙고 싶은 상쾌한 잔치판.
- 시집『모여서 사는 것이 어디 갈대들뿐이랴』(문학과지성사, 19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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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대의 순정이 아니라 갈대의 평등을 노래한 시다. 바람이 불면 금세 한쪽으로 쏠리는 속성 때문에 쉽게 마음이 바뀌는 변절과 연약함의 상징처럼 알려져 있지만 뜻밖에 갈대의 꽃말은 신의와 믿음, 그리고 지혜라고 한다. 베르디의 오페라 ‘리골레토’중에 “바람에 날리는 갈대와 같이 항상 변하는 …”으로 시작되는 ‘여자의 마음’도 그 속성을 표피적으로만 관찰한 노랫말이다. 그리고 마종기 시인은 갈대에게서 더불어 살아가는 지혜를 보았다. 잘난 사람은 잘난 대로 살고 못난 사람은 못난 대로 살아간다지만 갈대는 잘난 사람 못난 사람 함께 잘 사는 세상을 보여주고 있다.
아무리 잘 나고 잘 나가는 사람이라도 저 혼자의 탐욕으로 둘레를 무시한 채 돛대처럼 살 수는 없다. 가지런하게 서로 머리 맞대지 않으면 ‘죽는 것이 쉽게 전염되는’ 것을 갈대는 안다. ‘몇 개만 키가 크면 바람에 머리 잘려나가고’ ‘몇 개만 작으면 햇살이 없어 말라’버린다는 사실을 갈대는 잘 알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서로 신뢰하는 가운데 상생의 지혜로 공존할 줄 안다고 해서 붙여진 꽃말일는지 모른다. 시인의 또 다른 시 ‘갈대의 피’에서는 ‘내가 갈대를 좋아하는 이유는 죽은 듯 살아 있고 살아 있는 듯 몸을 흔들며 죽어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죽고 사는 것이 같이 잘 섞여서 죽은 갈대가 산 것과 같이 노래하고 산 갈대가 죽은 갈대를 안고 춤추’는 것까지 시인은 보았다.
갈대의 삶에는 그 어디에서도 오만을 찾아볼 수 없다. 자연과 다른 생명은 물론 인간의 인간에 대한 오만을 시시때때로 목격하는 현실과 견주어볼 때 갈대는 참으로 속 깊고 의젓하다. 언제나 생의 쓰라림은 차별과 소외에서 비롯되었고. 인간의 경박한 오만이 갈등을 심화 확산시켰다. 대한민국은 1년 내내 정치와 재난, 가십과 찌라시가 술을 먹이고 안주가 되어 사람들을 핏발선 대폿집 우국지사로 만든다. 하나의 이슈가 불판에서 노릿하게 익어갈 즈음 또 다른 안주가 뜨겁게 달궈진다. 의혹이 증폭되고 그 의혹에 맞선 대항논리가 준수할수록 그 사이로 침이 튀기고 안주는 제대로 구워진다.
하지만 공동의 책임은 무책임이 되고, 서툰 노변정담은 화로 속의 재로 남아 달라지는 것은 없다. 힘없고 가난한 사람들이 뱉어낸 가난한 낱말들만이 차가운 식혜 위의 밥알처럼 동동 떠다닐 뿐이다. 그리고 안주감은 늘 새로운 메뉴로 다시 바뀐다. 대한항공 부사장의 땅콩 횡포까지 겹쳐 비애와 상실감이 목구멍까지 차오른다. 가지고 배웠고
누리는 자들이 좀 더 겸손할 순 없는 걸까. 예의와 염치는 가자지 못한 사람들의 몫인가. 정치는 겉돌고 최악의 버전으로 치닫고 있다. 시민사회도 무기력하기만 하다. 능력과 철학 없는 정권에 대안 세력도 눈에 띄질 않는다. 텅 빈 그릇이면서 가득 찬 광장 같은 대폿집에서 누구의 이름을 부를까. ‘같이 늙고 싶은 상쾌한 잔치판’은 언제나 올지.
권순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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