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춘/ 문숙


응달에 눈더미가 무덤처럼 쌓여 있다 

누가 길에서 들어내어 밀쳐버렸나

솜사탕처럼 부드럽던 느낌이 사라졌다

딱딱해진 눈더미엔 발자국만 깊게 새겨져 있다

환하게 세상을 밝히던 순백한 빛깔에도 때를 입었다

이미 굳어버린 가슴엔 어떤 발자국도 찍을 수가 없다

어쩌다 한 사람의 길을 덮어 장애가 되었던가

서로의 눈빛에 빠져들며 설레던 순간은 지났다

쉽게 얼룩져버린 믿음 앞에

부드러움을 굳혀 얼음산을 이루고 있는 저것

차갑게 덩어리진 상처에도 가늘게 봄햇살이 찾아들고 있다

마음을 풀어 강물처럼 반짝이며 흘러갈 시간이다

머지않아 촉촉한 시간을 만나 다시 사랑을 싹틔울 것이다


- 시집기울어짐에 대하여』(애지,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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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응달 곳곳에는 쓰레기처럼 방치된 눈덩이들이 있다. 대구의 경우 썩 보기 거북할 정도는 아니나 전봇대 밑에서 웅크린 것들이 있다. 지난 강설에 제설 대신 임시방편으로 밀쳐둔 눈들의 굳은 주검이다. 녹아 사라지지 못하고 썩지도 않은 채 도시의 온갖 먼지와 티끌 다 뒤집어쓰고 그대로 무덤이 되었다. 한때는 순백의 환호였을 미관의 장애들. 더 이상 매혹적이지 못한 것들. 이제 ‘어떤 발자국도 찍을 수’ 없으며, 더구나 ‘서로의 눈빛에 빠져들며 설레던 순간은’ 짧은 추억이 된지 오래다. ‘어쩌다 한 사람의 길을 덮어 장애가 되었던가’ 순수의 세계는 쉽게 얼룩지고 믿음은 속속 배반되었다. 비뚤어진 욕망으로 더렵혀진 관계를 되돌려보려 하지만, 한번 짓밟힌 순결에서 내뿜는 원망의 눈빛만 차갑다.

 

 하지만 ‘차갑게 덩어리진 상처에도 가늘게 봄햇살이 찾아들고 있다’ 저 눈덩이들의 찌그러진 입자 사이에도 봄기운 머금은 햇빛이 시나브로 스며들고 있는 것이다. 파티마병원 중환자실 창문 밖에서도 햇살 한 줄기가 안을 엿보고 있다. 이 숲속 어딘가에 슬어놓은 곤충의 알들이 꼼지락거릴 때, 자루에 담아두었던 마늘이 파란 싹을 틔우고 묻어둔 튤립 알뿌리도 꿈틀 할 것이다. 포커레인의 삽날이 열심히 강바닥을 핥는 동안에도 강물은 반짝이면서 흐르고, 강둑 모과나무 가지 끝에는 연둣빛 잎눈이 보인다. 먼 산 능선으로 넘어오는 긴장 풀린 바람들이 세상의 모든 나뭇가지와 풀잎들을 조용히 흔들고 있다. 대척점의 아직 풀리지 않은 언 땅 밑에도 살아있는 것들은 죄다 숨을 쉬고 있었던 것이다.

 

 마음속 빙점하에 웅크리고 있던 의기소침도 기지개를 펼 것이다. 뾰족한 마음자리 건너에서 누군가 손을 내민다. 허물어진 마음의 벽 속에서 내 사랑도 다시 반짝이길 기대한다. 그러자면 또 다른 누군가는 떠나야 하리라. 어차피 떠나야 할 것들은 때를 맞춰 떠나주어야 마땅할 것이다. 겨울 나그네가 외투의 깃을 세우고 서성거릴 날도 얼마 남지 않았다. 하지만 봄의 입질이 아무리 분답해도 여전히 딱딱하게 굳어 있는 집들이 있다. 내겐 언덕위의 저 하얀집마저도. 그러나 고르지 않은 햇살로 온기가 더디 오는 곳까지 오늘은 입춘, 입춘(入春)이 아니고 입춘(立春)의 햇살이 만방이다. 문만 열리면 대길(大吉)이고 문턱만 넘으면 건양다경(建陽多慶)이건만. ‘머지않아 촉촉한 시간을 만나 다시 사랑을 싹틔울' 날이 내게도 올까.

 

 

권순진

 

  

 In Stillness - David Lanz

출처 : 詩하늘 통신
글쓴이 : 제4막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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