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상 일기/ 이해인
아플 땐 누구라도 외로운 섬이 되지
하루 종일 누워 지내면
문득 그리워지는 일상의 바쁜 걸음
무작정 부럽기만 한 이웃의 웃음소리
가벼운 위로의 말은 가벼운 수초처럼 뜰 뿐
마음 깊이 뿌리내리진 못해도
그래도 듣고 싶어지네.
남들 보기엔 별것 아닌 아픔이어도
삶보다는 죽음을 더 가까이 느껴보며
혼자 누워 있는 외딴 섬
무너지진 말아야지
아픔이 주는 쓸쓸함을
홀로 견디며 노래할 수 있을 때
나는 처음으로 삶을 껴안는 너그러움과
겸허한 사랑을 배우리.
- 시집『희망은 깨어 있네』(마음산책,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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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인 수녀님의 동백 가지 꺾는 소리’라는 제목으로 쓴 손택수 시인의 시가 있다. “어떤 꽃가지들은 부러질 때 속 시원하게 부러진다/ 가지를 꺾는 손이 미안하지 않게/ 미련을 두지 않고 한 번에 절명한다/ 꺾는 손이나 꺾이는 가지나/ 고통을 가능한 가장 적게 받도록/ 아니, 기왕에 작심을 하였으면/ 부러지는 소리가 개운한 음악 소리를 닮을 수 있도록/ (중략)/ 암 투병 중인 수녀님이 선물로 동백가지를 끊는다/ 뚝, 아무런 망설임 없이,/ 마치 오랜 동안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세상 뜰 때 내 마지막 한 마디도 저와 같았으면(후략)”
수녀님은 모진 추위에도 시들지 않는 희망의 꽃 동백을 각별히 좋아한다고 들었다. 손택수의 이 시는 한 잡지사 취재진이 부산으로 찾아갔을 때 수녀님으로부터 예뻐서 선물로 꺾어왔다며 그윽한 미소와 함께 붉은 동백을 건네받은 일화를 모티브로 삼았다. 수녀님이 그 산다화를 꺾으며 느낀 심정이 바로 그러했을 것이라며 시에서는 말하고 있다. ‘뚝’ 동백나무 부러지듯이 아무런 망설임 없이, 마치 오랜 동안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그렇게 세상을 떠나는 모습은 누구나 갖는 바람일지도 모른다.
"비록 두려움에 떨다가도 어느 순간 가장 크고 부드러운 손아귀 속에서 뚝 꽃보다 진한 가지 향을 뿜어낼 수 있었으면” 격이 좀 떨어지는 비유이긴 한데 ‘998833’이라 했던가. 99살까지 88하게 살다 딱 3시간만 아프다가 3분 안에 꼴깍 가고 싶다는. 병상에 누운 모든 병자들은 죽음을 더 가까이에서 느끼면서도 맥없이 무너지진 말아야겠다는 다짐과 함께 무엇보다 고통스럽지 않기를 바란다. 그러면서도 만약에 정말로 죽을 수밖에 없다면 최소한 누추하게는 보이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생명 가진 것들의 질서를 고분고분하게 받아들이면서 순하게 소멸하고 싶은 마음이다. ‘툭’ 동백가지 부러지는 소리의 맑은 음악처럼, 아름다운 마침표를 찍고 싶은 것이다. 그저께 2월11일이 ‘세계 병자의 날’이었다. 그런 날도 있나 싶겠지만 병으로 고통 받는 환자와 이들을 돌보는 의료 종사자들에게 특별한 사랑과 관심을 보여주고자 1992년 당시 교황 요한 바오로께서 루르드의 복되신 동정녀 마리아의 기념일을 병자의 날로 제정하여 우리나라에도 가톨릭계 병원을 중심으로 매년 소소하게 행사를 해오고 있다.
병의 치유 못지않게 그 고통을 품위 있게 견디는 것 또한 중요하다. ‘아픔이 주는 쓸쓸함을 홀로 견디며 노래할 수 있을 때’ ‘겸허한 사랑’을 배울 수 있다는 말씀은 그래서 솔깃하다. 깊은 신앙으로 사람들이 겪는 고독과 슬픔, 고뇌와 갈등을 진솔하게 나누면서 많은 사람에게 감동을 주었던 수녀님도 2008년 대장암3기 판정을 받고 수술 이후 도리 없이 ‘외로운 섬’이 되었다. ‘가벼운 위로의 말은 가벼운 수초처럼 뜰 뿐’이어도 ‘그래도 듣고 싶어’진다는 수녀님의 솔직한 마음이 오히려 더 진한 사람의 체취로 다가온다. 고통 가운데 불안해하는 모든 병자들과 함께 수녀님도 내 어머니도 민들레 솜털 같은, 산다화 붉은 꽃잎 같은 희망으로 견디시기를...
권순진
Winter Light - Sasha Alexeev
출처 : 詩하늘 통신
글쓴이 : 제4막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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