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북자 김현주씨의 안동살이(글/김필녀_시인)

남한 추위는 추위도 아녜요

설날은 오래전부터 내려오는 우리 고유의 명절이다. 멀리 사는 일가친척이 한 자리에 모여 조상님께 차례를 지내고, 차례 상을 물린 다음 어른들께 세배를 드린다. 세배를 받은 어른들은 세뱃돈과 함께 덕담을 던지며 한 해의 운수대통을 축원해주는 아름다운 풍습을 가진 명절이다. 그런데 이런 아름다운 우리나라 고유의 명절인 설날이 북한에는 없다고 한다.


1월 1일인 신정을 쇠는 북한에서는 김정일 국방위원장 생일인 2월 16일에 이틀간의 연휴와, 4월 15일 김일성 생일날을 태양절이라고 하며 이틀간 쉬는 것이 명절이라고 한다.


남북분단 그 이전에는 삼천리금수강산에 살고 있는 우리 민족들은 다함께 설날을 명절로 보냈다. 그런데 한국전쟁이 끝나고 남북이 분단된 이후 60여년이라는 단절된 시간들이 명절도 이념도 다른 세계가 되어버린 것이다. 정말 가슴 아픈 일이 아닐 수 없다.


설을 며칠 앞두고 추위가 한 풀 꺾인 오후 웅부공원에서, 북한을 탈출해 안동에 와서 3년 째 살고 있는 김현주(가명. 47세)씨를 만났다. 작은 체구에 야무진 표정, 어디서 본 듯한 인상 좋은 중년 여인과 반갑게 인사를 나누었다.


“추운 겨울, 어떻게 지내세요?”


그녀는 여기 추위는 북한 추위에 비하면 추위도 아니라며 환하게 웃으며 대답한다.


“남한 사람들은요, 춥다고 하면서 내복도 안 입데요. 북한에서는 두껍게 솜 넣은 누빈 옷을 입고도 추워서 있는 대로 옷을 다 껴입어요.”


새로 단장한 월영교도 거닐어볼 겸 우리는 안동댐으로 향했다. 호젓한 찻집에서 마주 앉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시작했지만, 그녀에게서 시원스런 대답을 기대할 수는 없다는 것을 금방 알아차릴 수 있었다. 아직은 한국에 온지 3년밖에 되지 않아 조심해야 할 일들이 많은 탓이다. 물어보는 이도 대답하는 이도 조심스레 대화는 시작되었다.


죽을 고비 넘기며 도착한 남한 땅


대부분의 탈북자들은 배가 고파 살 수 없어 배를 곯지 않기 위해 북한 탈출을 시도한다고 한다. 죽이라도 먹을 수 있으면 다행인 현실에서 그녀는 최소한 굶지는 않고 살았다.


아버지의 외삼촌이 빨치산으로 참가해 북한에서는 영화로 만들어질 정도로 당에 충성한 유명인이었다. 아버지의 외삼촌은 6.25전쟁 당시 낙동강 전투까지 참가해 그때 입은 총상으로 영예군인이 되어 달마다 기름, 담배, 술을 공급받고 2월 16일과 4월 15일에는 중앙당으로부터 선물도 받곤 했다. 그러니 아버지를 비롯한 온 가족이 당에 충성하고 철저한 사상교육으로 무장한 터였다. 현주 씨도 그렇게 교육받았고 그렇게 사는 것이 일반적이라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녀의 삶에 큰 변화가 생긴다. 평안도가 고향인 그녀가 남편과 딸 하나를 두고 오붓하게 살다가 북한을 떠나 중국으로 넘어온 것이 2000년도다. 피치 못할 사정으로 중국으로 건너오면서 가족과 생이별을 했다. 그때 남편을 잃고 혼자 된 친언니와 함께 나왔다. 중국으로 겨우 탈출을 해서 몽골사막을 헤매면서 죽을 고비를 수도 없이 넘겼다고 했다. 탈출 도중에 바로 눈앞에서 함께 탈출하던 동료가 붙잡혀 가는 것도 보았다. 중국에서 붙잡히면 바로 북한으로 압송되어 갖은 고문을 받다가 죽기 때문에 죽을힘을 다해서 탈출을 했다고 한다.


“굶어죽으나 탈출하다가 붙잡혀 죽으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북한 주민들은 호시탐탐 탈출을 하기 위해 준비해요.”


6년 동안 중국에 숨어살면서 정말 많은 고생을 했다고 한다. 그렇지만 북한보다는 먹는 사정이 나았기 때문에 참았고 언젠가 고향 갈 날이 있겠지 기대하면서 살았다고 한다. 다만 호구(신분증)가 없고 말이 통하지 않아 잡히면 북송 당할까봐 숨어 살아야 했지만 자유롭게 지내는 사람들 때문에 놀랐고 조선말이 나오는 노래와 영화가 정말로 신기했다고 한다. 어떻게 조선말이 나오는 나라가 또 있느냐고 중국동포에게 물었더니 “한국이라는 나라가 조선말을 하는 나라”라는 설명을 듣고 한국이라는 나라가 있다는 것을 처음 알게 되었다고 했다. 당시에는 한국이 남조선인 줄은 몰랐고, 한국에 들어와서야 비로소 한국과 남조선이 같은 나라라는 것을 알았다고 한다.


“옛날 옛적부터 한 조상이며, 한 핏줄이면서도 남의 나라가 되여 버린 웃 동네, 내가 나서 자란 고향이 있고 선조의 무덤이 있고 사랑하는 부모님, 형제, 자매가 있고 아지랑이 피어나는 어린 시절 추억과 내 청춘이 있고 죽어서도 묻히고 싶은 내 고향이지만, 지금은 원망합니다. 이렇게 사람을 고생스럽고 힘들게 하다니. 나는 그저 우리 가족과 굶지 않고 사는 것이 소망인 평범한 사람입니다.”


굶주림, 그 참담한 현실


현주 씨가 북한을 탈출할 당시인 2000년도에도 굶어죽는 주민들은 수도 없이 많았다고 한다.


“나이 드신 부모님이 어쩌다 자식 집에 가셔도 먹을거리가 없으니 죽 솥에 물 한 사발 더 넣어야 하고 그것도 없어 온 집안이 굶어 죽는 것이 다반사였지요”.


94~95년에 죽으면 집(관)속에 묻히고, 96~ 97년에 죽으면 가마니에 말려 땅에 파묻혔고, 그 다음에 죽으면 직파한다는 얘기까지 있을 정도다. 직파란 강냉이를 밭에 심을 때 호미로 심는 것을 말하는데 너무도 많이 죽어나가니 사람을 그냥 묻어버리는 것이라고 했다. 특히 겨울에는 얼어 죽고 굶어죽은 사람이 하도 많아 실어다가 한꺼번에 묻어 버린다고도 했다. 한 부모는 너무도 앞날이 보이지 않아 속도전가루(강냉이를 전기로 익혀서 가루로 만든 것)를 한 되 구해서 거기에다 죽는 약을 섞어 아이들에게 먹였다고 한다. 한 끼 실컷 배불리 먹고 죽자고 먹였는데 죽을 목숨이 아니었는지 아이들이 다 토해내서 살게 되었다고 한다. 그 아이들 중 하나가 군대에 가게 되었는데 하필 강원도 전연 지대에 배치 받았다. 그때 그 엄마가 아들더러 ‘아들아 너만 살겠다고 남조선으로 도망하면 안 된다. 그럼 우린 다 죽는다.’ 그랬는데 그 엄마가 탈북자가 되어 남한으로 먼저 건너왔다고 한다.


이러한 상황을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를 거라는 현주 씨. 지금도 중국을 비롯한 다른 나라에서 방랑객으로 떠돌아 살고 있는 동포들이 헤아릴 수 없을 정도라고 한다. 신문이나 TV에서만 듣던 북한의 실상을, 북한에서 살다 온 현주 씨에게 직접 들으면서도 쉽게 믿기지가 않을 정도였다.




북에 두고 온 가족들

북한에 있는 부모형제를 생각하면 가슴이 얼어붙어 숨을 제대로 쉴 수가 없는 현주 씨. 언젠가 통일이 되어 만날 날이 있을 것이라는 희망도 불면의 밤을 이기지 못하는 게 사실이다. 북한에는 남편과 딸, 친정 부모님과 형제들이 살고 있다.


“솔직히 다른 누구보다도 딸은 꼭 남한으로 데려오고 싶어요.”


언젠가 시동생이 딸아이를 데리고 중국까지 온 일이 있었는데 딸을 두고 가라는 그녀의 부탁을 거절하고 그대로 다시 북한으로 들어간 적이 있었다. 하기사 조카와 같이 온 삼촌이 북한으로 들어갈 때 홀로 들어간다면 그 뒷감당을 어찌할까. 하지만 그렇게 놓친 딸 생각에 현주 씨는 피눈물이 났다.


남편이 북한에서 새 인생의 반려자를 만났다고 전해 들었다. 그를 원망하지 않는다. 세월이 그렇고 시절이 그러니까. 하지만 딸애만은 꼭 데려오고 싶은 그녀다. 이제 꽃다운 나이 스물인 딸애를 따순 밥 먹이며 예쁘게 키우고 싶다. 이렇게 몸 건강한 것도 감사하고 딸애를 데려올 생각에 더더욱 어금니 꽉 물고 일하는 그녀다.


한국에 와서 가족들에게 세 번 돈을 부친 적이 있다고 했다. 하지만 한 번도 제대로 전해지지 않았다. 여든이 다 된 부모님이 아직 살아 계시다는 기쁨에 언니와 아끼며 모은 돈을 보냈더니 보위부에서 다 떼어먹고 가족들에게는 전달도 되지 않았다고 한다. 그 문제로 언니와 의견이 갈리기도 했다. 


“한국의 한 달 월급이면 북한에서는 일 년을 먹고 사는 돈이라 북한의 가족들을 생각하며 악착같이 벌어서 보냈는데 세 번 다 떼이고 보니 이젠 신중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런데 언니는 떼일 때 떼여도 혹여나 조금이라도 들어갈까 싶어 계속 보내자고 해요. 전 좀 기다렸다가 확실하게 전달할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해보자고 했고요.”


어쨌건 마음 짠한 자매는 다시 돈을 보내볼 작정인 듯싶다. 부모 형제가 염소가 먹는 풀은 다 뜯어먹고 산다는 현실에 밤마다 눈물이 안 흐를 수가 있을까.


안동, 저랑 잘 맞을 것 같았어요


안동으로 오게 된 특별한 이유는 없었다. 한국으로 들어와 통일부 하나원에서 교육을 받은 후에 가고 싶은 도시를 탈주민들이 스스로 정하게 되어 있다고 한다. 젊은 사람들은 직장문제 때문에 대부분 수도권 지역을 택했다. 현주 씨는 청주와 안동 중에서 택하게 되었다. 그녀와 온갖 고생을 함께 하고 넘어온 친언니는 청주로 가서 함께 살자고 했지만 현주 씨는 왠지 안동으로 오고 싶었다고 한다.


“양반도시라는 인상 때문인지, 저는 점잖고 조용한 곳으로 오고 싶었어요. 막상 와보니 사람들이 친절하고 정도 많고 좋아요.”


언니와 함께 생활할 법도 하건만, 그녀는 남한 생활이 일상적인 삶에 대한 자유가 주어지는지, 그때만 해도 확신이 서지 않았던 모양이다. 안동에서 지내면서 이곳으로 오길 잘했다고 생각한 적이 한 두 번이 아니라고 했다. 청주에 사는 친언니에게 안동에서의 생활을 이야기하면 거짓말이라고 할 정도다. 탈북자들이 겪는 고통과 편견을 현주 씨는 이곳 안동에서는 거의 겪지 않는다고 했다. 같이 들어온 사람들 얘길 들어보면 상상 이상의 모욕을 당하는 이들도 많다고 한다. 현주 씨는 억양 때문에 조선족으로 오인 받기도 하고, 북한에서 왔냐고 호기심에 꼬치꼬치 사생활을 캐묻는 사람도 더러 겪어봤지만 그냥 그러려니 한단다. 대부분 사람들이 친절하고 가족같이 잘 대해주는데 특히 설날이나 추석 같은 명절이 되면 고향생각에 슬퍼할세라 시나 민간단체에서 햅쌀도 보내주고 아픈 가슴 다독여 주느라 문학상도 마련해 함께 시도 읊으며 감상하며 위로도 해주고, 몸도 마음도 단련하라고 등반대회도 조직해주고 연말 송년회도 조직해 주어 오히려 이렇게 도움을 받아도 될까, 송구스럽다고 한다.


“대한민국을 위해 벽돌 한 장 쌓은 적 없는 저를 받아주고 이끌어주고 또 어려운 이웃도 많은데 저희들을 격려해주시니 고마운 마음 어찌 다 표현할까요.”


나의 새 인생, 안동사람으로 성실하게 살터


이곳에 와서 겪은 일 중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를 묻자 그녀는 이내 미소를 보인다.


“처음 한국에 와서 TV에서 광고하는 것을 보고 모두 공짜로 주는 것인 줄 알았어요.”


저 많은 걸 다 받아서야 되겠냐는 큰 착각(?)을 한 그녀를 두고 하나원에 있던 동료들이 모두 박장대소를 했단다.


북한의 모든 실상들을 잊으려 애를 쓰지만 두고 온 가족들을 생각하면 가슴이 아려와 일을 마치면 곧바로 집으로 가서 아무 생각 없이 혼자서 문을 닫고 지낼 때가 많다고 한다. 그런 그녀를 지켜보기 안타까웠는지 주위에서 자꾸 사람을 소개 시켜준다고 한다. 거절하기도 여러 번, 미안하기도 해서 소개를 받았는데 마음이 가는 좋은 사람이 있어 지금은 계속 만남을 갖고 있다고 한다. 청주의 언니와도 자주 통화를 하는데, 서로 좋은 사람을 만나 남은 인생을 아름답게 꽃피우며 살았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하다고 한다.


현주 씨는 학창시절에 공부도 잘 했었고 춤도 잘 추고 노래도 참 잘 했었다. 대학교에 입학했으나 미처 졸업은 하지 못했다. 학교를 그만두고 기업소 경리로 일하면서 참 순진하고 명랑하게 살아왔다는 그녀. 예전보다 탈북자들에 대한 지원금은 줄었지만 일할 수 있는 것조차 행복하다는 현주 씨는 놀면서 지낸 적은 한 번도 없었다고 한다. 식당이며 여러 곳에서 일해 봤지만 내심 사무실 업무를 보고 싶다고 한다. 하지만 여력이 안 되니 이것저것 가리지는 않을 거란다. 다만 몇 년간은 4대보험이 되는 안정된 직장생활을 해야지 혜택을 받을 수 있도록 규정이 되어있어 성실히 일해서 돈을 모을 생각이다. 현재는 직업훈련원에서 컴퓨터관련 자격증도 따고 있다. 언제 필요할지 알 수 없기에 무엇이든 준비해놓을 참이다. 혼자 있을 때면 독서를 즐기는 그녀는 우체국에 앉아 있다가 우연히 ‘안동’지를 보게 됐다고 한다. 그 길로 집으로 와서 이것저것 글을 써보기도 했다는 그녀.


현주 씨는 내가 살고 있은 아파트와 이웃 아파트에 살고 있었다. 인터뷰를 마치고 아파트 앞에 내려주면서 문학에 남달리 관심이 있다고 하기에 차 트렁크에 실려 있던 안동문협, 안동주부문학, 샘문학 동인지와 육사시달력 등 필요한 여러 가지 물건들을 한 보따리 챙겨서 보내게 되어 마음이 뿌듯했다. 언니 동생 삼아 문학공부도 함께 하자고 권하니 그녀는 무척 기뻐했다.


옛날 어른들한테서 종종 들은 이야기 중에 ‘내 살아온 인생을 엮으면 소설책 몇 권은 될 것’이란 말을 많이 들었는데 김현주 씨 역시 지난 삶을 엮으면 소설책 몇 권은 될법했다. 아직 안동의 여러 곳을 다녀보지 못했다는 그녀에게 시간이 나는 대로 자주 만나서 안동의 주변도 구경시켜 주고, 문학이야기를 비롯하여 살아가는 이야기를 함께 나누며 좋은 인연으로 살아갈 수 있기를 소망해본다.


그녀를 만난 날, 새 직장에서의 출근을 앞두고 있었는데 어찌되었을까, 오늘쯤 전화 한통 넣어볼 참이다.  <안동>

통권120호 - 新 안동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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