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티나무

 

김필녀

 

  아침마다 부엌에 난 창문을 열면서 느티나무와 인사를 나눈다. 지난밤에도 우리 집과 동네를 무탈하게 지켜주고 있다는 고마운 마음이 들 때면 두 손을 모으기도 한다.

  곱게 물들었던 단풍잎이 나무 아래 수북이 쌓여 있다. 잎을 떨군 가지 사이로 가을 햇살이 드문드문 비집고 들어와 앉아 숨바꼭질을 한다.

  장날인가 보다. 느티나무 아래 어르신들이 삼삼오오 모여 버스를 기다리신다. 장에 내다 팔 곡식이 든 보퉁이를 들고 기다리는 모습이 정겨워 버스가 떠난 후에도 물끄러미 창밖을 내다보고 섰다.

  느티나무는 높고 넓어 삼라만상을 포용할 만큼 넉넉하고 편안한 나무이고, 그래서 더없이 친숙한 나무이다. 아름드리에 걸맞게 민족이 겪어낸 내력이나 민초들이 살아낸 삶을 고스란히 간직한 역사의 나무이기도 하다.

  당산나무나 신목으로서 추앙을 받는 것은 결이 곱기도 하지만 무늬가 아름다워 생활 곳곳에서 다양한 쓰임새로 활용되었기 때문이리라. 예로부터 나라님의 시신을 보관하는 영광을 누렸는가 하면 이름난 고찰의 건축재로 큰 역할을 담당하기도 했다. 백성들의 탁자나 뒤주, 가구에 이르기까지 계층을 초월하여 두루 활용되기도 했다.

  내 고향은 오백 년 전에 영양김씨 11세손이었던 옥봉곡 김극행 할아버지가 개척할 당시에 큰 연못과 늪이던 곳이어서 늪실[淵谷}이라 불렸는데, 이 마을에 아름드리 느티나무가 마을 앞을 지키고 서 있다. 보통 마을을 개척하면서 느티나무를 심어 신목으로 섬겼으니, 오백 년은 족히 되는 수령의 느티나무이다.

  내가 어릴 적에는 당나무라 불렸으며, 이 나무 아래 당집이 있었다. 매년 정월 열나흘 저녁이면 마을 어른들이 모여 당고사를 지냈다. 아버지도 목욕재계한 다음 도포를 차려 입고 고사를 지내러 가셨다. 그러나 나는 나무에 쳐진 금줄 때문에 가까이 다가가지 못하고 늘 멀리서 지켜보던 느티나무였다.

  중학교를 다니던 여름방학에 고향에 돌아갔을 때 당집이 없어졌다. 불이 나서 전소가 되어 마을의 변고라며 아버지는 무척이나 안타까워하셨다. 새마을운동이 한창이었던 시대라 농촌에도 의식개혁 운동이 확산되면서 방화를 했을 것이라는 이야기를 훗날 들었다. 지금은 당집이 있던 자리에 교회가 들어서 있어, 고향에 들려 느티나무를 지나칠 때면 그 당집이 떠오르곤 한다.

  아버지께서는 집안의 대소사에 참여하시거나 멀리 출타하실 때는 늘 갓을 쓰고 두루마기를 입으셨다. 당고사나 시제 등의 큰 일이 있을 때는 도포를 입기도 하셨다. 지금도 긴 수염에 갓을 쓰고 도포를 입은 모습이 문득문득 떠오른다.

  대구에서 중학교를 다닐 때의 일이다. 공납금 납부할 때가 되면 아버지께서 고향 봉화에서 기차를 타고 직접 돈을 가지고 오셨다. 그 때도 두루마기를 입고 갓을 쓰시고, 돈을 잃을까 염려되어 저고리 안에 광목으로 만든 전대를 차고 오셨다. 학교에 찾아오셔서 공납금을 납부하신 후에 내가 공부하는 교실까지 찾아오셔서 잡비를 주고 가셨다.

  허연 수염에 갓을 쓰고 오신 아버지 모습은 그 당시 학교에서 빅뉴스가 되었고, 아버지를 보고 쑥덕이는 친구들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6학년 때 전학을 와서 촌티를 벗지 못한 채 학교생활에 적응하느라 힘들던 시절이라 집에 와서 놀림 받은 이야기를 하며 서럽게 울었다. 그 후에 아버지는 학교에 발걸음을 끊으셨고 대구 나들이할 적에는 멋진 중절모를 쓰셨다.

  아버지는 쉰둥이로 태어난 막내딸을 시집이나 보내고 눈을 감을 수 있을까 싶어 늘 안쓰러워하셨다. 방학에 집에 가면 조상에 대한 내력이나 예법에 대한 이야기를 귀가 닳도록 해 주셨다. 촌수 따지는 법과 제사 진설하는 방법 등을 직접 한지에 그려서 가르쳐 주시기도 하셨다.

  일흔다섯이 드신 아버지의 손을 잡고 예식장에 들어설 때 눈물이 한없이 쏟아졌다. 그 모습이 결혼사진 속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결혼을 하고 사 년이 되던 해에 아버지께서 전방에서 근무하는 셋째 사위를 불러 당부를 하셨다.

  “늦게 낳은 막내딸이 시집가서 외손자까지 봐서 여한은 없네. 그러나 내가 죽고 나면 친정에서 돌봐줄 오래비 하나 없으니 걱정일세. 박 서방이 오래비처럼 잘 좀 챙겨주게나.”

하는 유언을 남기시고 한 달 만에 세상을 뜨셨다.

  어느덧 세월이 흘러 아버지 돌아가신 지 스물일곱 해가 흘렀다. 고향집도 헐리고 토담 틔워 드나들던 마을에도 빈집만 늘어 쓸쓸하기 그지없다. 저녁이면 사랑방에서 들려오던 아버지의 책 읽는 소리와 기침 소리만 환청으로 들릴 뿐이다. 사는 게 바빠 가르쳐 주신 예법은 가물거리지만 그리운 마음은 세월만큼이나 더해간다.

  느티나무를 보면 언제나 내 편이 되어 든든한 버팀목으로 지켜주시던 아버지가 그리워 눈시울이 붉어진다. 막내딸이 아직도 안쓰러우신지 가끔은 도포자락을 펄럭이시며 꿈속에 나타나서 어깨를 도닥여 주신다. 낙엽이 지고 가을걷이가 끝나갈 무렵이면 아버지 제삿날이 다가온다. 올 가을에는 왜 그런지 사랑방에서 들려오던 아버지의 담뱃대 소리가 몹시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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