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눈 오는 날 만나자 / 정호승

 

첫눈 오는 날 만나자

어머니가 싸리 빗자루로 쓸어 놓은 눈길을 걸어

누구의 발자국 하나 찍히지 않은

순백의 골목을 지나

새들의 발자국 같은 흰 발자국을 남기며

첫눈 오는 날 만나기로 한 사람을 만나러 가자

 

팔짱을 끼고 더러 눈길에 미끄러지기도 하면서

가난한 아저씨가 연탄 화덕 앞에 쭈그리고 앉아

목장갑 낀 손으로 구워 놓은 군밤을

더러 사먹기도 하면서

첫눈 오는 날 만나기로 한 사람을 만나

눈물이 나도록 웃으며 눈길을 걸어가자

 

사랑하는 사람들만이 첫눈을 기다린다

첫눈을 기다리는 사람들만이

첫눈 같은 세상이 오기를 기다린다

아직도 첫눈 오는 날 만나자고

약속하는 사람들 때문에 첫눈은 내린다

 

세상에 눈이 내린다는 것과

눈 내리는 거리를 걸을 수 있다는 것은

그 얼마나 큰 축복인가?

첫눈 오는 날 만나자

첫눈 오는 날 만나기로 한 사람을 만나

커피를 마시고 눈 내리는 기차역 부근을 서성거리자

 

- 시집『풀잎에도 상처가 있다』(열림원,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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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제 내 눈에 의해 관측한 기준으로는 대구에서도 첫눈이 내렸다. 차를 운전해 한 문우의 출판기념회장을 가는 도중이었다. 잠시 흩뿌리다 말겠거니 생각했던 눈이 제법 쏠쏠하게 내리더니 장소에 도착하자 나뭇가지며 화단이며 아스팔트 바닥 위를 한 꺼풀 제대로 둘러져있었다. 이미 중부지방과 서해안 지역은 12월 초하루부터 내린 눈으로 몇 차례 대설주의보까지 발령된 터였다. 텔레비전에서 창경궁의 설경을 보도하며 ‘자랑질’할 때까지만 해도 이곳 대구는 뿌연 하늘에 눈 냄새가 실린 바람만이 조짐을 알렸을 뿐이었다.

 

 '첫눈 오는 날 만나자' 아직도 이런 고전적인 낭만이 물씬 풍기는 언사를 가동하는 사람이 있을까. 그런 순진무구한 낭만을 신뢰하는 사람이 있다는 말인가. 시인은 '아직도 첫눈 오는 날 만나자고 약속하는 사람들 때문에 첫눈은 내린다'고 했는데,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는다면 그런 맹랑한 사람들이 있기는 있는 모양이다. 하지만 꼭 사랑하는 사람들만이 첫눈을 기다리는 것은 아니다. 사랑을 알고 평화를 바라는 모든 사람들이 혁명 같은 그 첫눈을 기다린다. '첫눈 같은 세상이 오기를 기다린다.'

 

 어린 시절 눈은 순결과 신비, 설렘과 경탄의 대상이었다. 그런데 도시생활의 이기와 약삭빠름에 젖다보면 감흥은 차츰 떨어지고 때로 눈은 내 교통을 방해하는 성가신 강하물에 불과하다는 생각마저 든다. 나이를 먹는 자체만으로 서정이 낡아 감을 의미하지는 않지만 첫눈조차 무덤덤해진다면 우울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여전히 '세상에 눈이 내린다는 것과 눈 내리는 거리를 걸을 수 있다는 것은 그 얼마나 큰 축복인가' 그래서 눈이 오면 누군가가 더 그립고 보고파져서 그 마음은 눈송이처럼 불어난다.

 

 그러나 그리움은 쌓여 가는데 길은 막히고 기다리는 사람은 오지 않아 근심으로 동당거린다. 첫눈은 저토록 서로 얼굴에 뺨 부비며 포근하게 내리는데, 첫눈을 맞을 채비는 다 되었고 강아지까지 미리 꼬리를 흔든다. 나도 그런 미련한 약속을 한 적이 있었나. 첫눈이 오는 날 돌체에서 만나자고. 첫눈이 오면 온종일이라도 기다려서 꼭 만나야 한다고 약속한 적이 있던가. 그렇게 만나 눈 내린 밤거리를 밤늦도록 팔짱을 끼고 걸어본 적이 있었던가. 기억에 없이 그저 아슴할 뿐이다. 하지만 나는 지금도 밤새 서성거리며 첫눈을, 첫눈 같은 사람을 기다리고 있나니.

 

 

권순진

 

 

출처 : 詩하늘 통신
글쓴이 : 제4막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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