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한기

 

김필녀

 

소한 추위가 이름값을 하며 맹위를 떨친다. 큰집인 대한이 소한 작은집에 놀러왔다 얼어 죽었다는 옛말이 허투로 하는 말이 아니었다. 이런 날은 하루 종일 아랫목 차지를 하고 누워 창문을 흔들어대는 바람소리에 귀 기울이고 싶다.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나면 갓 내린 커피 한잔에 빵 한 조각이면 세상에 부러울 것이 없겠다.

 

해가 중천에 뜨도록 이불 속에서 꼼지락거리는 날이 많아졌다. 별을 보고 집을 나와 별을 보고 집으로 돌아오던 바쁜 농사철에 대한 보상이라도 하려는 듯이 한껏 늑장을 부린다. 천성이 부지런한 남편이 운동을 하고 들어와서 텔레비전 볼륨을 크게 올려놓고 부산을 떤다. 마지못해 일어나 부스스한 매무새로 아침상을 차린다.

 

농한기의 사전적인 의미는 농사일이 바쁘지 않아 한가한 시기라고 되어 있다. 가을걷이를 끝낸 11월 중순부터 이듬해 2월말까지로 농부들에게는 가장 한가롭다. 꿀맛 같은 휴식을 취하며 바빠서 돌보지 못했던 몸을 추스르기도 하고 다음해 농사를 위해 땅심을 돋우는 시기이기도 하다.

 

예로부터 농사꾼을 하농(下農), 중농(中農), 상농(上農)으로 구분하였다. 농사를 짓되 게을러서 알곡보다 잡초가 더 무성하게 농사를 짓는 농사꾼을 하농이라고 했다. 부지런히 농사일을 하여 논과 밭에 잡초를 없애고 알곡을 잘 거두는 농사꾼을 중농이라고 했으며 곡식을 가꾸기 전에 먼저 농사의 근본이 되는 땅을 비옥하게 가꾸는 농사꾼을 상농이라고 했다.

 

옛날 농촌에서는 혼사를 맺을 때에 상대 집안의 논밭을 먼저 둘러보고 혼인을 결정했다고 한다. 그 집안이 가꾸는 논밭에 잡초가 무성하면 하농 집안이라 여겨 혼사를 피했다. 바람직한 농사꾼은 물론 상농이다. 상농은 가을걷이가 끝나자마자 다음 해 농사를 준비한다. 이랑을 깊이 갈아엎고 두엄을 넉넉히 넣어 흙을 기름지게 가꾸어 놓는다.

 

다른 농사꾼들은 농한기라고 하여 화투놀이나 윷놀이에 열중하는 동안 상농은 논밭의 토질에 힘을 북돋우어 주는 일에 정성을 쏟았다. 그렇게 땅의 힘을 가꾸어 놓으면 그 해 농사는 이미 성공한 농사나 다름없다. 틈틈이 멍석과 가마니도 짜고 새끼도 꼬아가며 농사에 필요한 준비를 했다.

 

경력이 얼마 되지 않는 아정농원도 상농의 흉내를 내려고 무진장 애를 쓴다. 추수를 끝낸 밭에 비닐을 걷고 땅이 얼기 전에 초벌 밭갈이도 이미 해 놓았다. 작물마다 필요한 퇴비와 비료도 꼼꼼히 챙겨 신청해 놓고 따스한 날은 골골이 흩어져 있는 농장을 둘러보며 농사 계획을 짜느라 생각이 분주하다.

 

농사 중에서도 자식 농사만큼 중요한 게 있을까. 딸 하나 아들 하나, 많지도 않은 남매에게 바쁘다는 핑계로 너무 소홀했던 것 같아 밑반찬을 잔뜩 장만해서 시집간 딸이 사는 경주를 다녀왔다. 하루가 다르게 커가는 다섯 살배기 외손자의 재롱을 보며 모두들 함박꽃을 피웠다. 장인과 사위가 오랜만에 마주 앉아 술과 안주를 주거니 받거니 하는 모습이 행복 그 자체였다.

 

서울에서 공무원으로 근무하는 아들도 어찌 사는지 궁금해서 서울행 버스를 탔다. 모처럼 아들노릇을 한다며 거금을 주고 뮤지컬 프랑켄슈타인을 예매해 놓았다며 너스레를 떠는 모습이 믿음직스러웠다. 배우들의 연기와 노래는 물론 무대 스케일에 압도되어 세 시간이 금방 지나갔다. 좋은 짝을 만나 행복한 가정을 꾸리면 더 바랄게 없겠다는 말에 걱정하지 마란다. 어디 어여쁜 규수라도 숨겨둔 것일까. 궁금했지만 아들을 믿고 기다리기로 했다.

 

문학 활동을 함께하는 여류시인들 여섯 명이서 겨울여행도 다녀왔다. 오래전부터 계획했던 여행이었지만 농사짓는 나를 배려해서 농한기까지 기다려준 문우들이 너무도 고마웠다. 주부들이 집을 떠나 하룻밤을 함께 보낸다는 일이 쉬운 일이 아니었던 만큼 무척이나 들뜬 마음으로 길을 나섰다.

 

동해의 맑고 푸른 바다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멋진 펜션에서의 일박이일. 시낭송도 하고 돌아가며 합평을 하느라 밤을 꼬박 새우다시피 했다. 시인은 오감을 넘어 육감으로 시를 짓는다. 세상 만물에서 얻은 영감으로 언어의 함축과 기교, 단어를 조율하며 퍼즐을 완성해야 하는 언어의 연금술사. 저마다 숨겨두었던 촉수를 세우고서 수평선을 응시하는 눈빛이 예리했다.

 

작은 어선에 생명을 의지한 채 칠흑 같은 바다 위에 밤새도록 불을 밝히고서 고기잡이 하는 어부들의 삶을 고단하다고만 할 수 있을까. 오르지 못할 것을 알면서도 한없이 밀려왔다 밀려가는 파도 끝 하얀 포말이 스러지는 안타까움 속에 옛 추억이 잠시 떠오르기도 했다. 바닷가를 산책하다 만났던 해당화의 붉은 열매. 배를 반으로 잘린 채 과메기로 거듭나기 위해 주렁주렁 매달려 해풍에 얼었다 녹았다 하던 꽁치와 청어. 목이 마른 시인에게 겨울바다는 많은 글감들을 안겨주었다.

 

하룻밤 해방된 것으로도 감사했던 시인들은 갯바위에 올라 멋진 포즈로 사진도 찍었다. 따개비를 따고 조개껍질을 줍기도 하면서 단발머리 소녀들 마냥 깔깔대며 겨울바다의 낭만에 흠뻑 취했던 여행길. 동행은 같은 방향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같은 마음으로 가는 것이라고 한다. 여섯 명의 여류시인들은 동행이라는 한 배를 타고 힘을 합해 노를 저어가기로 손가락을 걸었다.

 

겨울 한가운데 선 들판이 텅 비었다. 온갖 생명들을 길러내던 논과 밭이 잠시 휴면을 취하는 중이다. 들판도 풀씨들도 겨울잠을 자고 농부들도 휴식을 취하는 동안 매서운 겨울바람만이 자유를 만끽하고 있다. 겨울이 깊을수록 봄도 멀지 않아 오리니, 그 때 다시 흙을 일구어 씨앗을 뿌리리라.(끝)

 

 

 

- 김필녀시인의 농장일기 / 향토문화의 사랑방 안동 2015년 9, 10월호(통권 160호)

- 사랑방 홈페이지 http://www.andongj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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