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교회의 예배당 변천사

 

시대순으로 되어 있습니다. 참 아득한 옛날의 모습과 현재의 안동교회의 건물 모습이 지나간 세월의 흔적을 말해주는듯 합니다.

 

1909년 Tent Church의 모습입니다. 이 사진은 선교사님이 가지고 계셨던 사진이며 사진 뒷면에 "tent church"라고 분명히 쓰여 있습니다.

 

 

 

 

 

 

 

 

 

 

 

 

 

출처 : 안동교회, 그 아름다운 역사의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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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수난과 함께

 

○기미년 3.1 독립만세 운동의 안동지방 주역 담당
    안동지방의 3.1운동은 천도교, 유교단체가 참여했으나 극히 미약하였으며 주도적 역할을 한 것은 기독교인들이었고 특히 당시 안동읍내에 유일한 교회였던 안동교회 교인들이 선도적 역할을 감당하였다. 동경 유학생으로서 2.8 독립선언에 참여하였던 강대극이 안동군청 서기 김원진, 안동교회 김영옥 목사, 이중희 장로와 접촉하였고, 연희전문 의학도 김 재명의 정보제공으로 그의 아버지 김병우 장로를 비롯한 교회지도자 및 청년들이 비밀 모의하고, 교회 여성 지도자 김정숙, 김병규, 이권애 등은 계명학교 여학생 30여명을 동원하여 독립선언서 인쇄, 국기를 제작하여 3월 18일 안동장날에 독립만세를 부르게 되니 장꾼들도 합세하여 대규모의 만세 운동이 되었고이 일로 수 많은 사람들이 경찰에 체포되어 옥고를 치루었는데 본 교회 교인으로는 김병우 장로 2년, 김익현, 김명인 1년, 김재성, 김계한, 이인홍, 황인규, 권점필은 6개월씩 각각 복역하였다. 교인들이 주동이 되어 만세운동을 일으키자 지역 주민들에게 번져가서 일경이 총칼로 무자비하게 진압하게 되어 많은 사상자들이 생기게 되었다.

○일본 제국주의에 항거한 교회
    1936년에 들어서면서 일본은 교회의 강력한 민족 정기와 신앙의 진수를 해체 말소하려고 신사참배를 강요함으로 가혹한 박해를 하기 시작하였다. 신사참배를 거부하는 많은 기독교 학교들과 평양신학교가 폐교당하게 되고 교회에 「가미다라」라는 위패를 두게 해서 국민의례란 명목으로 신사참배를 강요함으로 이를 거부하는 교회는 수많은 시련과 고난을 당했다. 다행스럽게도 우리 교회만은 김영옥 목사가 일경의 지시와 간섭을 피해가면서 신사위패를 설치하지 않았다. 또한 1941년에 교회말살을 기도한 교회 통폐합 조치로 신세교회(현 동부교회), 안기교회(현 서부교회)와 시내 작은 기도실이 모두 안동교회로 통폐합되어 갖은 박해와 시련을 겪었다. 일제말엽에는 우리 예배당은 육군기지로 강제 점령되어 징발 당했고, 김광현 담임목사는 일경에 의해 예비 검속되어 안동경찰서에 수감 중 해방을 맞게 되었다.

○해방 후 사회 안정을 위한 교회의 역할  
    일제말엽 안동에서 민족지도자로 예비 검속되었다가 풀려 나온 인물들이 중심이 되어 치안 유지회를 조직하니 고문으로 김광현 목사가 선임되었다. 안동 주둔군 밀러 중위, 백태성 의사, 김광현 목사가 교회 하층에서 청년 200여명을 모아 영어강습을 실시하면서 우익 단체 결성을 위한 기초를 닦았고, 중졸 이상의 여성들로 애국부인 동지회를 조직토록하여 활동하게 하였다. 교인이 중심이 되었으나 일반 사회인을 많이 참여시켜 범시민운동으로 전개하였다. 미군정 장관의 자문역으로 우익 핵심 인물이 많이 선출되도록 하고 김광현 목사는 군고문 회장과도 고문으로 당선됨으로써 사회에 크게 영향력을 발휘하였고 1946년 3월에 독립촉성 국민회 안동군 초대 위원장에
당선되어 안동사회를 이끌어가는 주역을 담당하였다. 또한 1946년 11월 중순에 남조선 과도 입법의원에 피선되어 문교사회 분과에서 입법활동을 하였다.

▲제2회 경안남자
주일학교대회(1932년)

▲하계 아동 성경
학원(1939년) 

▲법상, 안기, 신세
3교회 제직일동(1945.6.15) 

▲역대 교역자 및 30년
이상 된 교인
(창립 40주년1949년)
 

 

 

 

 

▲대예배광경(1950년대)

▲ 제39회 총회시 기독
청년면려회 제5회
전국대회(1954회)

▲고등부 제4회
   졸업기념(1955)

▲본당 증축공사시
   초석(1959년)

 

 

 

 

 

 

 ▲본당증축공사(1959년)

 ▲김광현 목사 시무
30주년(196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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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교회 탄생

 

1882년 한·미 수호조약을 맺게 됨에 따라 1884년 9월 20일 알렌 의료 선교사, 1885년 4월 5일 언더우드와 아펠셀라 두 분의 선교사가 제물포항에 상륙하여 이 한국땅에 복음의 씨앗을 뿌린 것을 시발점으로 부산 주재 배위량(Rev.W.M.Baird)선교사는 1893년에, 대구주재 안의와(Rev. James E.Adams)선교사는 1902년에 안동을 순행하면서 시장 전도를 하였고, 복음서를 팔기도해서 국곡교회와 풍산교회가 서게 되고, 1903년에 베럿(Rev.W.M.Berrett), 부해리(Rev.H.M.Bruen) 두 선교사의 순행으로 방잠(현 와룡면 나소동)에서 기독교 집회가 1906년에 개최되어 참석했던 사람들이 각기 자기 마을에 교회를 설립하게 됨에 영주 지곡에도 1907년에 교회가 세워졌다.

 안동 인근에 교회가 세워지고 안동시내에도 믿는 자들이 생겨남에 따라 1908년 안동 선교부가 설치되어 쑈텔(Rev.C.C.Sawtell)선교사가 주재 선교사로 임명되는 등 선교 활동을 활발히 전개하는 가운데 대구주재 선교부가 기다리던 교인이 안동에 생겨나고 심지어 지곡까지 내왕하며 예배한다는 사실을 알고 안의와 선교사가 내안하여 풍산교회 교인 김병우씨를 매서(당시 복음서를 짊어지고 팔러 다니는 사람)로 파송하여 서문외(현 대석동 대석상화 자리)에 있던 초가 5칸을 사들여 서원을 개점하고 교인들을 모아서 예배를 인도하게 했다. 1909년 8월 둘째 주일 처음으로 예배드린 감격스러운 이 날이 안동교회의 창립일이 되었다. 처음 예배드린 교인은 김병우 외에 강복영, 원화순, 원홍이, 권중락, 박끝인, 정선희, 김남홍 등이었다.  권찬영 선교사의 말에 의하면 처음에 7인이 모여 예배드린 것이 1년후에는 70인이 되었다고 한다. 안동교회는 처음에 매서 김병우씨의 인도로 서원에서 모이다가 그해 11월에 오월번(Rev.A.G.Welbon)선교사와 김영옥 조사가 내안하여 정착하게 됨으로 교회를 인도하기에 이르렀다.

선교사들의 임시주택에서 예배를 드리게 되니 (1910년) 장소가 현 교육관 자리에 있었던 한옥집이었다.
선교사의 임시주택에 따라 예배 장소를 옮겨서 동부동(구 교도소 자리)에 갔다가 다시 진영터(현 광석동 건영화물 자리)에 초가 기역자 집 16칸의 예배당을 지었다. 1909년 8월 18일에 최초의 학습교인 15인, 1911년 3월 2일에 최초의 세례교인 9인, 1911년 8월 17일에 최초의 유아세계 교인 3인을 세우고, 1911년 9월 김영옥 목사가 초대목사로 취임, 1913년 7월 20일 초대 장로로 김병우 장로가 장립함으로 경안노회에서 처음으로 당회가 조직되었다.




                       ▲목조함석지붕   예배당(1913년)

         

 

 

 

 

▲권찬영 목사 부부

   ▲제1회 경안주일학교
      대회 (1920년)

▲ 경안남자도사경회
 (1923년) 

    ▲현 석조건물
      신축모습(193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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