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자꽃이 피었다

   

김필녀

 

 

물이 뚝뚝 떨어질 것 같은 신록이 눈부시다. 연둣빛이 초록으로 짙어가는 사이 뻐꾸기가 울고 찔레꽃이 피고 감자에 꽃도 피었다. 논물이 찰랑거리는 논에서는 모내기를 하는 이앙기 소리와 함께 농부들 발걸음이 분주하다.

 

입하와 망종 사이에 드는 소만(小滿)은 벼농사를 주로 짓던 우리 조상들이 모내기를 시작하는 기준으로 삼았던 절기다. 먹고 살기 어려웠던 시절에는 보릿고개로 양식이 떨어져 힘겹게 연명하던 철이기도 했다. 이맘때쯤이면 보리밭도 누르스름해지고 감자밭에 꽃이 피기 시작한다.

 

감자는 꽃이 피면서 땅속 덩이줄기에 알도 굵어지기 시작한다. 꽃으로 가는 영양분을 땅속줄기로 가게 하기 위해 감자꽃을 따주어야 한다고들 한다. 내 배를 불리기 위해 순박하게 웃고 있는 꽃을 싹둑싹둑 잘라 버릴 수가 없어 꽃 보는 재미로 포만감을 채운다.

 

순박하면서도 정갈하게 느껴지는 감자꽃. 무명 수건을 머리에 쓰고 감자를 캐던 어머니 모습이 떠올라 더욱 정감이 간다. 오디가 익어가는 뽕나무 그늘에 앉아 감자밭을 보고 있노라면 어릴 적 추억들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내 고향에서도 구황작물로 집집마다 감자를 재배했다. 쪄서 먹기도 하고 큼지막하게 썰어 수제비에 넣어 먹거나 떡을 해 먹기도 했다. 넓은 마당에 매캐한 모깃불을 피워 놓고 멍석 위에 온가족이 오순도순 둘러 앉아 먹던 감자 맛을 어찌 잊을 수가 있겠는가. 부른 배를 두드리며 멍석에 누워 은하수와 북두칠성과 견우직녀성을 찾아 밤하늘의 별을 쫒던 시절이 내 정서적 밑바탕이 되었다.

 

친구들과 시원한 느티나무 아래 모여앉아 감자를 긁던 일도 아득한 그리움으로 다가온다. 바쁜 어머니를 대신해서 감자 깎는 일을 도맡아 하던 순박한 친구들은 서로 빨리 긁기 내기를 하며 잘도 긁었다. 팔이며 얼굴에는 하얀 감자녹말이 튀어 점으로 박히고 손톱 밑도 까매졌지만 감자라도 배불리 먹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 행복했던 시절이었다.

 

감자를 깎는 편리한 도구가 없었던 시절에는 집집마다 놋수저로 된 감자 깎는 수저가 있었다. 감자 껍질을 얇게 벗기기 위해 한쪽이 닳아버린 놋수저. 오랜 세월 닳고 닳아서 초승달처럼 오목하게 일그러진 숟가락은 칼로 벗기면 감자의 살이 많이 깎이는 것을 막아주기도 했지만 쉬이 깎을 수 있어 바쁜 일손을 덜어주기도 했다.

 

감자꽃이 지고 나면 알이 굵어지면서 이랑이 팽팽하게 부풀어 오른다. 감자 줄기도 누렇게 변해가며 옆으로 눕는다. 하지 무렵 장마가 오기 전에 영글어 분이 파근파근하게 나는 감자를 수확하느라 농촌은 다시 바빠진다.

 

누렇게 변한 감자 줄기를 뽑으면 허연 햇감자가 주렁주렁 매달려나온다. 올망졸망한 햇감자 중간에는 허물만 남은 씨감자가 자식들을 품어 안고 있다. 모든 자양분을 다 내주고도 더 줄 것이 없을까 혼으로 남아 버팀목으로 지키고 있는 것이다. 마치 내 어머니처럼 말이다.

 

시골로 이사를 온지도 어느덧 7년째다. 늦은 감이 있지만 흙을 일구면서 조금씩 사람이 되어가는 듯하다. 뙤약볕에 앉아 호미로 잡초를 뽑다보면 등줄기로 흘러내리는 땀방울을 온몸으로 느끼게 된다. 언제 내가 비지땀을 흘리며 열심히 살아본 적이 있었는지 지난 삶을 반성하며 어머니의 위대한 삶을 닮으려 애를 쓴다.

 

감자꽃이 피면 하늘에 계신 어머니를 만나는 것처럼 반가워서 해마다 감자 농사를 짓는다. 눈이 움푹한 씨감자를 잘라 설레는 맘으로 이랑에 묻고 나서 잊어버린 듯 기다리면 무거운 흙을 밀고 새싹이 뾰족하게 올라온다. 여린 싹이 힘이 센지 흙이 길을 열어주었는지 무지한 나로서는 알 수는 없지만 자연의 오묘함에 감탄을 하며 더불어 산다.

 

감자꽃이 한 송이씩 져 내린다. 만화방창의 봄이 가고 녹음방초의 여름이 왔음이리라. 이름 봄부터 갈고 또 갈아 분가루 같은 밭에 심은 감자를 수확하면 소꿉친구들을 초대하고 싶다. 하얗게 분이 나는 햇감자를 쪄서 먹으며 고향의 봄을 함께 불러보고 싶다.(끝)

 

 

- 26년동안 한번도 거르지 않고 격월간으로 발간되었던 ‘향토문화의 사랑방 안동’이 2014년 12월호로 종간되었다가 잠시 숨을 고른 후에 2015년 6월에 다시 복간이 되었습니다. 통권 156호부터 고정 필진으로 '김필녀 시인의 농장일기'를 맡아 글을 쓰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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