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시레

 

김필녀

 

 

숨이 턱턱 막힌다. 소나기라도 한줄기 내리면 더위가 한풀 꺾이련만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에 태양만 이글거린다. 장마철에 비가 오지 않으니 무더위가 더 기승을 부린다. 봄 가뭄에 이어 마른장마까지 겹치면서 곡식들의 갈증도 깊어만 간다.

 

농부는 아무리 더워도 자식 같은 농작물을 가꾸어야 한다. 곡식이 엄지손가락만큼 자랄 때 한 뼘씩 자라나는 풀과의 전쟁에서 이겨내야만 보람을 찾을 수 있다. 그래야 가을에 곳간을 풍성하게 채울 수 있으니 해가 뜨기 전에 집을 나서고 해가 진후에야 집으로 돌아오는 부지런함도 필수 덕목이다.

 

창밖은 아직 캄캄한데 경운기 소리가 단잠을 깨운다. 한낮은 너무 더워 일을 할 수 없는 터라 새벽에 일을 하기 위해 골목마다 분주하다. 눈을 비비며 냉동실에 얼려 놓은 물과 새참거리들을 대충 담아 농장으로 향하는 일도 이제는 익숙해졌다.

 

새벽안개가 짙은 것을 보면서 불볕더위가 기승을 부릴 것이란 예감까지 할 수 있으니 농부의 아내가 다 된 것도 같다. 밭고랑에 앉자마자 온몸이 땀으로 뒤범벅이 된다. 풀과 씨름을 하다보면 해가 뜨고 갈증과 함께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난다. 별을 보고 나왔으니 허기질 때도 되었다.

 

땀을 훔치며 시원한 그늘을 찾아 돗자리를 깔고 앉아 새참바구니를 뒤적거린다. 삶은 감자와 열무김치, 막걸리 한 병이 전부다. 배가 고프니 저절로 군침이 돈다.

 

막걸리 병을 흔들어 종이컵에 따른 남편이 큰 소리로 “고시레” 하며 밭고랑에 붓는다. 나도 삶은 감자 하나를 던지며 “올해도 풍년들게 해 주이소” 하며 따라한다. 부창부수가 따로 없다. 백지장도 맞들면 낫다고, 땅을 일구며 살다보니 저절로 힘을 합해서 살게 되었다.

 

자연을 섬기는 일에 격식이 필요하겠는가. 갈증으로 목이 타는 내 입으로 먼저 가져가기 전에 하늘이나 땅의 신에게 먼저 흠향하는 마음. 막걸리 반잔과 감자 한 개라도 그 정성을 알아주시리라. 배곯지 않고 먹고 살 수 있도록 지켜준 땅과 하늘에 그저 감사했던 우리 조상들의 정성과 순박함이 반만년 역사를 지켜왔던 버팀목이 되었으리라.

 

고시레는 고수레의 방언이다. 들이나 산에서 음식을 먹기 전에 먼저 조금 떼어 ‘고수레’ 하고 허공에 던지는 민간 신앙적 행위이다. 지역에 따라 다양한 유래와 함께 ‘고시래, 고씨네’라고도 하며 우리 조상들이 오래도록 지켜왔던 아름다운 풍속이기도 하다. 느지막한 나이에 땅을 일구면서 어릴 때 부모님으로부터 듣고 배웠던 기억들이 되살아나 스스럼없이 따라하게 되었다.

 

우리 조상들은 콩을 심을 때도 세알을 심었다. 한 알은 땅 속의 벌레 몫이고 또 한 알은 새와 짐승의 몫이고 나머지 한 알이 사람의 몫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가을에 감나무에 달린 감을 다 따지 않고 까치밥으로 몇 개 남겨두기도 했던 우리 조상들의 넉넉한 마음. 천(天), 지(地), 인(人)이 함께 어울려 살아가는 자연의 이치를 일치감치 깨달아 실천했던 것이다.

 

가마솥 같은 무더위도 곧 지나가리라. 푹푹 찌는 삼복더위가 있어야 들판의 곡식들이 무럭무럭 큰다는 것을 농부들은 익히 알고 있기에 인내하는 것이다. 곧 입추가 오고 말복이 지나면 아침저녁으로 서늘하게 불어오는 바람과 함께 들판의 곡식들도 단맛을 저장하리라.

 

불콰해진 얼굴로 다시 삽자루를 잡는 남편을 따라 날렵한 호미를 잡는 아내의 삶. 함께 살아온 날들만큼 서로의 마음도 잘 아는 터라 고단할 때마다 서로의 어깨를 내어주는 것이리라. 부모로서 훗날 내 자식들에게 어떻게 회자 될지는 알 리가 없지만 주어진 삶에 최선을 다한다면 후회는 없으리라.

 

별을 보며 농장으로 향하다보면 어부지리로 누리는 기쁨도 많다. 꽃봉오리를 오므린 낮에는 만날 수 없는 질리도록 새하얗게 핀 박꽃을 만나면서 어릴 적 고향집을 떠올릴 수 있는 서정적인 삶. 흙을 일구며 땀을 흘리고 자연에 동화되어 살며 시어를 찾는 내 삶을 사랑하리라.(끝)

 

- 격월간 ‘향토문화의 사랑방 안동’ 통권 157호(2015년 7,8월호) '김필녀시인의 농장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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