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나무 집 셋째 딸
김필녀
한 움큼 퍼서 꼭 쥐면 코발트빛 물이 뚝뚝 떨어질 것 같은 가을하늘. 아침저녁은 선선한데 한낮은 볕이 따갑다. 그래야 곡식이 제대로 여문다.
화살나무에 빨간 단풍이 물들기 시작하면 농장으로 향하는 새벽길이 안개로 자욱하다. 밤과 낮의 기온차가 심해지면서 물안개가 몽글몽글 피어오르는 낭실저수지의 환상적인 풍경에 잠시 넋을 잃기도 한다. 한여름 시원한 그늘을 만들어주던 밤나무 밑을 오가며 알밤 줍는 재미도 쏠쏠한 계절이다.
농사는 하늘이 칠 할을 짓고 나머지는 농부들의 부지런함으로 결실을 맺는다고 한다. 봄 가뭄과 마른장마에 이어 가을 가뭄까지 이어지고 있지만 추수를 기다리는 들판은 황금물결로 출렁인다. 흘린 땀방울만큼이나 그득하게 채워질 곳간을 생각하는 구릿빛 얼굴에는 저절로 미소가 번진다.
맑은 이슬이 맺힌다는 백로(白露)를 지나면서 기세등등하게 돋아나던 풀도 기력이 쇠하여 저절로 눕는다. 농부들이 힘든 농사일에서 조금은 여유로워지는 시기다. 예전에도 삼복더위를 무던하게 넘긴 며느리에게 커다란 떡 바구니를 들려 근친을 보낼 만큼 한숨 돌리던 철이었다고 한다.
바쁜 농사일로 돌보지 못했던 조상님 산소에 벌초를 하는 시기도 이 무렵이다. 봉제사를 중요한 덕목으로 여겼던 유교문화의 미풍양속이 최첨단 시대에도 이어지고 있어 흐뭇한 마음이다. 전국에 흩어져 살던 일가친척들이 추석 차례를 모시기 전에 산소에 모여 풀 베는 소리로 떠들썩하다.
친정 부모님 산소에도 벌초를 했으리라. 아들이 없어 큰집 조카를 양자로 삼아 족보에 올려 대를 이었던 친정집. 요즘이야 딸도 친정 부모님 제사를 모시지만 외손봉사를 하면 안 된다는 집안어른들의 성화와 가풍을 따를 수밖에 없었던 시절이었으니 어쩌랴. 오는 추석 연휴에는 산소로 직접 찾아뵙고 절을 올려야겠다.
고향집 뒷산에는 밤나무가 셀 수 없이 많았다. 이맘때쯤이면 밤송이가 벌어지면서 알밤이 후두둑 소리를 내며 떨어진다. 주전부리할 것이 없었던 시절이라 밤 서리를 하던 동네 악동들이 부모님께 들켜 혼비백산하던 고향의 정겨운 풍경들이 눈앞에 아른거린다.
기다란 장대로 밤나무 가지를 털면 가시 달린 밤송이와 함께 머리 위로 쏟아지던 알밤. 굵고 토실한 밤은 뒤안 토굴에 보관해 두었다가 조상님 제사상에 오르기도 하고 대도시로 나가 학교를 다니던 쉰둥이 막내딸의 공납금이 되기도 했다. 알이 작고 못생긴 쭉정이 밤만 삶아 먹게 했던 어머니의 깊은 뜻을 그 때는 왜 몰랐을까.
한 알의 밤이 땅속에 들어가면 뿌리를 내리고 싹이 나서 줄기와 가지, 잎이 되어 성숙한 나무를 이룬다. 여기까지는 여느 식물과 다를 바가 없다. 보통 식물의 경우 나무를 길러낸 최초의 씨앗은 썩어 없어지지만 밤은 아름드리나무가 되어도 썩지 않고 남아 있다는 이야기를 아버지로부터 들었다.
밤은 나와 조상의 영원한 연결을 상징한다. 자손이 헤아릴 수 없이 대를 이어 내려가더라도 조상은 언제나 나와 영적으로 연결된 채 함께 있는 것이다. 지금도 조상을 모시는 위패와 신주(神主)는 반드시 밤나무로 깎는다. 특별히 결이 좋거나 향이 있는 것도 아닌데 그렇게 하는 이유는 바로 밤나무의 상징성 때문이라고 한다. 대추와 감과 함께 제사상에 빠져서는 안 되는 과일도 밤이다.
오랜만에 주어진 여유로움을 그냥 보낼 수 없어 강원도 태백으로 향했다. 버스를 타고 오가는 길의 초가을 풍경도 좋았지만 낯선 길을 혼자 찾아다니며 기웃거리는 설렘이 더 좋았다. 민족의 영산인 태백산 자락에 위치한 황지연못. 영남평야의 젖줄인 낙동강 천삼백 리의 발원지를 세세하게 둘러보며 형체가 없는 물도 근원이 있다는 것을 가슴 깊이 새겼던 여행길이었다.
추석을 쇠고 나면 본격전인 가을걷이가 시작된다. 농작물은 농부의 발자국 소리를 듣고 자란다고 했으니 가장 정직한 직업이라고 할 수 있다. 내 부모님과 조상들이 농부였으니 땅을 일구며 살다 흙으로 돌아가는 것은 당연한 이치이리라. 내 아들딸도 훗날 퇴직을 하고 난 후에는 자그마한 텃밭이라도 일구며 정직한 삶을 이어가리라. 서둘러 곳간 청소를 말끔하게 해야겠다.(끝)
- 김필녀시인의 농장일기 / 향토문화의 사랑방 안동 2015년 9, 10월호(통권 15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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