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걷이

 

김필녀

 

 

곳간이 그득하다. 봄 가뭄과 마른장마를 견디며 39도를 넘나들었던 지난여름에 흘렸던 땀방울의 대가다. 넓은 비닐하우스 안에 캐서 쌓아놓은 안동참마 더미가 작은 구릉만한 것이 세 무더기나 된다. 저 많은 것을 다듬고 선별하는 일은 잠시 미루어둔 채 그저 가슴이 벅차 미소만 번진다.

 

전쟁 같던 가을걷이도 끝이 나고 이제 곳간열쇠를 넘겨받았으니 곳간지기로의 역할이 중요할 때다. 농작물은 아무리 풍년이 들어도 가격을 제대로 받고 팔아야 수지타산이 나온다. 농산물공판장이나 농협 수매가에 의존하다가는 비싼 농약이나 퇴비, 품값을 제하고 나면 남는 게 별로 없다.

 

카페와 블로그를 개설해서 인터넷 직거래로 농작물을 판매하기 시작한지도 어느덧 4년째다. 그동안 믿음으로 맺어진 고객들이 꾸준하게 늘어가면서 우리 농장에서 생산되는 감자와 고구마, 생강과 마는 대부분 직거래로 팔려나간다. 날이 갈수록 SNS의 위력을 실감하면서 작년에는 통신판매신고와 사업자등록증을 내어 본격적으로 판매를 시작하기에 이르렀다.

 

아정농원. 나의 아호를 따서 이름도 짓고, 밤낮을 가리지 않고 누구라도 찾아와서 구매할 수 있는 무한한 공간에 사무실도 내었으니 어엿한 여사장이 된 셈이다. 농산물을 직접 눈으로 확인하지 않고 인터넷이라는 가상공간에서 사고파는 직거래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믿음이다. 물론 중간마진을 줄인 저렴한 소비자 가격도 인기를 끌만하다. 믿음과 저렴한 가격으로 한번 맺어진 고객은 서로 가족 같은 훈훈한 정을 사고팔게 되어 주변으로 소개가 이루어지면서 기하급수적으로 고객이 늘어나게 된다.

 

세상살이가 그렇듯이 무슨 일이든지 그저 되는 일은 없다. 나의 삶을 글이나 사진을 통해 진솔하게 알려 마음을 움직이도록 애쓰기도 했다. 씨를 뿌리고 추수를 하기까지의 전 과정을 사진과 함께 농장일기 형식으로 글을 써가며 하나둘 믿음을 쌓아나갔다. 삼복더위에도 뿌리고 돌아서면 누렇게 죽는 독한 제초제 대신에 손으로 일일이 잡초를 뽑아가며 친환경 농산물을 고집하기도 했다.

 

직거래로 자리를 잡기까지 시행착오도 참 많았다. 처음에는 덤을 많이 줘서 결산을 하고 나니 남는 것이 없던 해도 있었다. 농촌에서는 흔하지만 도시에서는 귀한 푸성귀를 택배 상자에 그냥 얹어 보내다가 물러져서 감자가 썩기도 했다. 햇생강을 판매할 때는 향이 좋아 여러 가지로 활용되는 생강잎과 줄기를 얹어 보내면서 고객들의 환심을 끌기 위해 머리를 쓰기도 했다.

 

친환경 농산물이 대세인 요즘에는 비료나 농약은 줄이고 퇴비나 목초액, 미생물발효액을 활용해서 농사짓는 일도 중요하다. 그러나 무농약과 친환경 농산물을 원하면서도 굼벵이 먹은 감자나 고구마는 싫어하는 아이러니도 있는 만큼 농사짓는 일도 쉽지만은 않다. 우리나라가 아열대 기후로 바뀌면서 가뭄과 예기치 못한 기후변화에 대한 대비도 단단히 해야 한다.

 

올해 가을 날씨만 해도 그렇다. 추수가 끝나지 않은 늦가을에 장마라니, ‘가을비는 빗자루로도 피한다’는 속담이 무색할 지경이었다. 입동 무렵부터 내리기 시작하던 비는 계절을 망각했는지 장맛비처럼 내렸다. 하늘도 무심하시지, 그렇게 간절하게 기다릴 때는 오지 않더니 반갑지 않은 철에 내려 부지런한 농부들을 애타게 했다.

 

가을볕에 바싹 말려 타작을 하려던 콩은 밭에 선 채 줄기가 시커멓게 썩어 들어가고 콩깍지에 곰팡이가 피고 싹이 나서 추수할 콩이 없다고들 한다. 일찍 수확해서 곳간에 쌓아둔 곡식도 눅눅해져 선풍기와 온풍기를 돌려가며 자식 같은 알곡을 지키느라 난리들이다. 곶감 농가들은 깎아 매달아 놓은 감꼭지가 빠져 떨어지고 곰팡이가 피어 폐기처분을 하며 울상이라고들 한다.

 

다행히도 우리는 가을걷이를 서둘러 해서 비 피해는 입지 않았다. 그렇지만 수확해서 그대로 쌓아 놓은 마가 썩을까 싶어 아래위를 치환하며 다듬느라 어깨가 빠질 지경이다. 예기치 못한 천재지변 앞에서 하늘을 원망하기보다는 빨리 대처하는 일이 우선이다. 어쩌면 반갑지 않던 이 비가 땅속으로 스며들어 고였다가 내년 봄에 파종할 때는 금비로 바뀔 수 있으니 말이다.

 

농작물은 적기에 파종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추수하는 시기도 중요하다. 가을은 자고 나면 일거리가 하나씩 줄어든다고 하더니 가을걷이도 끝이 났다. 꿈은 이루어진다고, 억대 농부의 꿈이 점점 현실로 다가오고 있다. 남편이 퇴직을 하고 느지막한 나이에 시작한 뿔농군의 곳간이 이렇게 두둑해질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그저 주어진 일에 최선을 하다 보니 더불어 얻어진 결과물이다.

 

한 장 남은 달력이 예전처럼 그리 아쉽게만 느껴지지 않는다. 다가올 새봄에 다시 밭을 갈고 씨앗을 뿌려 가꾸리라는 희망이 보이기 때문이리라. 무더기로 쌓아둔 아정농원의 곳간 위에도 머지않아 하얀 눈이 축복처럼 내릴 것이다.(끝)

 

 

- 김필녀시인의 농장일기 / 향토문화의 사랑방 안동 2015년 11, 12월호(통권 159호)

- 사랑방 홈페이지 http://www.andongj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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