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정아버지와 천수답(天水畓)
요즘이 농촌에서 제일 바쁜 모내기철이다. 겨울이 지나 해동이 되면서 군데군데 허물어져 있던 논둑은 모심기를 대비해서 깨끗하게 미리 손질이 된다. 부지런한 농부의 손은 논물을 가두고 어느새 써레질까지 해 놓았다. 써레질을 해 놓은 논물이 바람에 찰랑대면서 오월의 맑은 햇살이 반사되어 눈이 부신다.
휴일이면 남편과 함께 간단한 먹거리를 넣은 배낭을 하나씩 둘러메고 천년 고찰 봉정사가 자리한 천등산으로 산행을 자주 간다. 여름을 알리는 정겨운 뻐꾸기 소리가 귓가에 울리고, 하얀 아카시아 꽃과 찔레꽃 향기를 맡으면서 땀을 흘리며 한 시간 여 올라가면 천등산 정상이 나온다. 정상에 잠시 앉아 땀을 닦으며 따끈한 커피 한잔을 나누어 마시는 그 기분은 알 만한 사람은 다 알 것이다. 우리 부부는 이렇게 산행을 하면서 많은 대화를 나누곤 한다. 내려오는 길은 정상에서 개목사 쪽으로 돌아서 봉정사 영산암을 지나 일주문을 나서면 오른쪽으로 작은 샛길이 나온다. 주차장으로 가는 지름길이기도 하지만 구불구불한 논둑길을 걸으면서 어릴 적 고향에서의 추억을 떠올릴 수 있어서 늘 논둑길을 걸어서 주차장으로 향한다.
내 고향은 큰 강이나 냇가가 없는 경북 봉화 산촌마을이며, 마을이름도 정겨운 늪실 양지마을이다. 조상대대로 터를 잡고 오순도순 살아가는 씨족마을이기에 대부분이 일가친척이다.
옛날이나 지금도 논농사 중에 모심기는 가장 중요한 일 중 하나이다. 그 옛날 농사는 삶 그 자체였다. 사람손이 안 가면 되는 게 없던 시절이었기에 농사철만 되면 집안엔 사람 흔적 하나 찾을 수 없었고, 어린이의 손까지 필요했던 농사철에는 초등학교에서도 가정 실습이라는 제목 하에 짧은 방학을 했다.
고향마을의 대부분의 논은 천수답(天水畓)이었다. 비가 내리지 않으면 모내기를 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모내기철이 다가오면 집집마다 논물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우리 집은 그나마 다행이었다. 천수답 논배미 중 제일 위쪽에 있는 논의 한 귀퉁이에서 웬만한 가뭄에도 끊이지 않고 샘물이 솟아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모내기철이나 가뭄이 심할 때는 물이 나는 우리 논의 물꼬를 조금이라도 터놓아야 아래쪽에 있는 다른 집 논에서도 제 때에 모내기를 할 수가 있었다.
가뭄이 심할 때는 이 물꼬 때문에 아버지와 어머니께서 자주 말다툼을 하시곤 하셨다. 아버님께서는 “물꼬를 조금이라도 터줘야 아래쪽에 있는 다른 집 논에서도 모내기를 제 때에 할 수 있다”는 주장이셨고, 어머님은 “우리 논에 물도 모자라는데 남의 논물 걱정까지 할 일이 무어 있느냐”는 주장이셨다.
작은 물꼬 하나로 제 때에 모내기를 할 수 있도록 배려하시는 아버님의 깊은 뜻으로 우리 논두렁의 물꼬는 늘 조금씩 터져 있었다. 하지만 보릿고개 어려운 고비를 잘 넘겨야 하고, 자식들의 배를 곯지 않게 하기 위해서 빈곤한 곳간을 책임지고 있는 어머니께서는 모내기철이나 가뭄이 심할 때는 아버지 몰래 물꼬를 막아 놓았다가 아버지께 꾸지람을 들을 때도 있었다.
어릴 적 고향에서는 가뭄이 들어 기우제를 자주 지내던 기억이 난다. 그만큼 농사에는 물이 중요하였으며 큰 강이나 냇가가 없었던 산촌마을에서 물은 생명줄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논농사에서 물꼬관리는 매우 중요하다. 비가 오거나 가물면 더 바쁘게 돌아다보아야 한다. 적당량의 물이 논에 차도록 하는 것은 논농사에서 기본이 되는 일이었으며 농부가 물꼬를 조절하는 것이 아주 단순한 것 같지만 벼농사에 미치는 영향은 매우 크기 때문이다. 친정아버님께서도 물꼬를 돌보기 위해 날이 새기도 전에 삽을 들고 논으로 나가셨고, 해가 지고 어둑해질 때까지 논두렁에서 물꼬를 돌보곤 하셨다.
물꼬 때문에 이웃끼리 싸움이 일어날 때도 있지만, 모내기가 시작되면 서로 품앗이를 해서 일을 해야 되기 때문에 마을에는 한바탕 잔치가 벌어진다. 깨끗하게 써레질 한 논에서 못줄에 맞추어 모를 내면서 어른들이 다함께 부르는 구성진 노랫가락에는 정겨움이 넘쳐나고 흥이 배어있었다. 그리고 논둑에서 먹던 새참과 들밥은 아마 그 시절에는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음식이 아니었나 생각 된다.
농부의 딸이어서 그런지 농사를 짓고 살지는 않지만, 모내기철이나 들판을 지나다보면 나도 모르게 차를 세우고 바쁘게 일하고 있는 농부들의 손놀림과 들판을 한참 쳐다보곤 한다. 그럴 때마다 작은 물꼬 하나로 이웃을 배려하시던 친정아버님의 깊은 마음을 늘 되새겨 보게 된다.
친정 부모님 돌아 가신지도 20여 년이 지났다. 그리고 세상도 참 많이 변했다. 모내기철이면 많은 사람들로 떠들썩해야 할 들판이 기계소리로 요란하다. 써레질을 하는 트랙터 소리, 모판을 나르는 경운기 소리, 그리고 이앙기로 모를 내는 소리까지 들판에 기계음이 가득하다. 요즘엔 모내기철이나 가뭄이 들어도 들판 곳곳에 관정이나 지하수를 파서 옛날처럼 물 걱정을 하지 않는 것이 그나마 다행이다. 곳곳에 댐이 많이 건설되어 가뭄이나 장마에도 큰 걱정 없이 살아가고 있다. 이렇게 물 걱정을 하지 않고 살다보니 너도나도 물을 너무 낭비하는 것 같다. 내가 사는 안동은 안동댐과 임하댐이 있어 항상 물이 넘쳐흐르고 있으니 더더욱 물이 귀한 줄 모르고 살고 있다.
환경오염이 점점 심해져서 지구온난화가 계속되어 지구 곳곳에서 많은 피해가 일어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평균기온이 상승하고 집중호우와 태풍과 가뭄 등의 많은 피해가 일어나고 있다. 그리고 공장에서 몰래 버리는 폐수와 가정에서 무분별하게 남용하는 세제 때문에 수질오염이 심각해져서 머지않아 가정에서 먹는 물까지도 오염되어 물을 마음대로 마시지 못하게 된다고 한다. 신문이나 뉴스에서 수질오염에 대한 보도를 자주 접하다보니 물을 많이 쓰는 주부로써 걱정이 되는 게 한두 가지가 아니다.
우리가 마실 수 있는 물을 제일 많이 사용하고 있는 곳이 화장실이라고 한다. 손잡이를 누를 때마다 변기에는 약 20-25리터의 물이 사용되는데 변기 통 속에 물이나 돌을 채운 플라스틱 병을 넣어두면 손잡이를 누를 때마다 4-8리터의 물을 절약할 수 있다고 한다.
그리고 세수할 때 필요한 물의 양은 3리터 정도인데 수도꼭지를 틀어 놓고 세수를 하면 10리터의 물이 버려진다고 한다. 또 그릇을 닦으면서 물을 틀어 놓으면 113리터의 물이 낭비되는데 그 물로는 자동차 한 대를 닦을 수 있다고 하고, 라면국물 한 그릇을 깨끗한 물로 만들려면 욕조 물 5통이 필요하다고 한다.
위의 예를 보더라도 우리 주부들이 먼저 물을 절약하고 수질오염을 방지 하는 일에 솔선수범해야 할 것 같다. 세탁기를 사용할 때나 설거지를 할 때 적당량의 세제를 쓰고, 음식물 쓰레기를 줄이는 일을 철저히 해야 할 것 같다.
내 아들딸들에게 깨끗한 물과 아름다운 자연환경을 물려주기 위해서라도 물을 아껴 쓰고, 수질오염을 줄일 수 있는 ‘물사랑’을 몸소 실천해야겠다.
070520 / 김필녀
* 천수답(天水畓) : 물의 근원이나 물줄기가 없어서 비가 와야만 모를 내고, 기를 수 있는 논.
* 논물 : 논에 괴어 있는 물. 또는, 논에 대는 물.
* 논배미 : 논두렁으로 둘러싸인 논의 하나하나의 구획.
* 물꼬 : 논배미에 물이 흐르게 만들어 놓은 어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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