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곡재(외삼재)의 악동들
작곡재는 우리 마을에서 봉성장이나 학교에 갈려면 꼭 넘어야 하는 재의 이름이다. 봉성장터까지의 거리가 한 오리쯤 된다고 하는데 작곡재는 그 중간쯤에 위치하고 있다.
이 작곡재를 어릴 때 엄마 등에 업혀서 넘기도 했겠지만 그 기억은 없다. 그렇지만 여덟 살이 되면서 엄마 손을 잡고 왼쪽 가슴에 하얀 손수건을 달고서 봉성국민학교에 입학을 하면서부터는 공일이나 방학을 제외하고는 거의 매일 이 재를 넘나들기 시작했다.
학교를 갈 때는 양지마을 샘가에 모여서 언니들이나 오빠들과 함께 모여서 갔지만, 집으로 돌아올 때는 마치는 시간이 다르기 때문에 같은 동네에 사는 또레들끼리 모여서 오곤 했다.
그 시절에는 다 그랬겠지만 가방도 없이 책을 싸맨 보자기를 여학생들은 허리에 차고 다녔고, 남학생들은 한쪽 어깨와 겨드랑이 밑으로 엇비슷하게 메고 다녔다. 학교를 마치고 봉성지서를 지나면 쭉쭉 뻗은 미루나무가 양쪽으로 서 있는 신작로를 한참 가다가 왼쪽으로 난 산길로 해서 작곡재를 넘어 집으로 향하곤 했다.
학교를 오가는 길은 우리들에게 계절마다 다양한 모습으로 맞이해 주었기 때문에 그 먼 길을 마다하지 않고 열심히 다녀서 개근상을 타지 않았나 생각해본다.
봄이면 학교를 마치고 집에 오는 길 옆의 산길은 진달래와 오디, 산딸기 등 우리들에게 맛있는 먹거리를 제공해 주었다.
여름이면 신작로 미루나무 그늘에 앉아서 한낮의 뜨거운 햇빛을 피하기도 했으며, 땀을 뻘뻘 흘리며 작곡재 고갯마루에 올라와서는 허리에 차고 있던 책보자기를 풀어 놓고 작은 돌멩이들을 주워 모아서는 시원한 나무그늘에 앉아서 공기놀이를 하면서 쉬어 갈 때도 많았다.
들판이 누렇게 익어가는 가을에는 논둑에서 메뚜기를 잡으면서 시간가는 줄 몰랐고, 남의 무우밭에 몰래 들어가서 굵고 잘생긴 무우를 쑥 뽑아서는 손으로 껍질을 깎아 먹으면서 깔깔거리기도 했다.
그런데 추운 겨울이 제일 괴로운 학교 길이었다. 학교 갈 때는 작곡재를 넘어가면서 봉성에서 불어오는 맞바람 때문에 몹시 추웠고, 집으로 돌아올 때는 아침과는 반대방향으로 불어오는 맞바람 때문에 작곡재를 넘어 집으로 오는 길은 더욱더 옷깃을 꼭꼭 여미게 되었다. 옷을 몇겹이나 껴 입었지만 그 당시의 포플린과 얇은 무명옷으로는 매서운 바람을 이겨내기란 몹시 힘들었다. 그래서 겨울이면 누가 먼저 만들었는지 양지바른 산 밑으로 토끼 길처럼 작은 길이 새로 나 있기도 했다. 바람을 등으로 막기 위해서 뒤로 걷기도 하고, 눈이 얼어붙은 응달진 곳에서는 미끄러져서 엉덩방아를 찧기도 하면서 다녔던 학교 길이었다.
이렇게 계절마다 추억거리를 만들면서 다니던 학교 길이었지만 작곡재를 넘어가는 길은 늘 조마조마한 마음을 가지고 올라가곤 했다. 왜냐하면 여자아이들을 괴롭히는 악동 머스마들이 작곡재 위에서 기다리고 있을 때가 많았기 때문이다. 언제 먼저 와서 기다렸는지 악동들은 작곡재 이쪽과 저쪽 끝까지 어느새 금을 그어 놓고서는 나무 뒤어 숨어서 기다리고 있다가 넘어가지 못하게 앞을 가로막곤 했다.
그 금은 악동들의 허락 없이는 절대로 넘어가지 못하게 하면서 큰 막대기를 들고 엄포를 놓고서는 저희들끼리 산에 올라가서 실컷 놀다 오기도 했다. 순진한 여자아이들은 악동들이 금을 넘어가도 좋다는 허락이 있을 때까지 누구도 감히 그 금을 넘어가지 못하고 마냥 서 있어야만 했다. 그러다가 마음이 내키면 누구누구 넘어가고, 그 다음에는 누구하면서 애를 참 많이 먹이곤 했다. 그 악동들은 학교에서도 노는 시간이나 점심시간이면 여자아이들끼리 모여서 하는 고무줄을 끊어가며 애를 참 많이 먹이기도 했다.
지금은 그 작곡재도 많이 낮아지고 넓어졌으며 아스팔트가 깔려 있어서 고향 가는 길이 한결 쉬워졌다. 그리고 그 못된 짓을 즐기던 악동들도 모두 멋있는 중년의 신사가 되어 다들 잘 살고 있다. 동창회 때 가끔씩 만나서 이야기를 하면서 웃기도 하지만, 때 묻지 않았던 어린 시절의 추억이 있었기에 지금의 우리들의 우정이 이어지고 있다고 생각하면서 그리운 친구들 이름을 하나하나 다시 불러본다.
악당 우두머리 성대야, 그리고 우철아, 정흠아!지금은 우리 여자아이들한테 꼼짝도 못하지 그치!
어느덧 우리도 희끗한 머리가 더 어울리는 지천명을 넘기고 말았구나.
우리 건강하게 오래오래 멋있고 행복하게 잘 살자꾸나…….
070629 / 김필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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