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량초과容量超過
김필녀
C드라이브가 용량초과容量超過로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고 멈췄다
고열과 오한으로 혼미해진 정신 가다듬어
디스크 정리를 해도 막무가내다
필요하지 않는 프로그램은 삭제를 하던지
업그레이드를 해야만 한다 
- 필수사양 -
부자도 못되면서 살기 위해 발버둥치는 현실
세상과 부대끼면서 묵묵히 견뎌야 하는 상처
혼기를 앞둔 딸 장래가 불확실한 아들 걱정
- 선택사양 -
꽃이 피고 지는 것에 대한 서러움
희끗해져 가는 내 머리칼을 바라보는 회한
희미해져 가는 첫사랑에 대한 추억
내 삶을 담아 시를 쓰기 위한 치열함 등…
장신구 같은 선택사양이 더 많아
중요한 사양만 남기고 삭제를 할까 망설이다
필수사양을 잘 견디기 위한 절실한 사양이라 
모두 끌어안고 살기로 했다
내 한계에 다시 도전하는 힘든 싸움이겠지만
업그레이드를 하기로 했다
080413
♬ Richard Clayderman - Wild Flowe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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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벚꽃 그늘에서 김필녀 흐드러지게 핀 벚꽃 봄 햇살과 어우러져 눈이 부신다 곳곳마다 꽃잔치 벌어지는데 꽃그늘에 기댄 채 나는 고독한 봄을 걷고 있다 내 곁에 있다고 있는 것도 아니지만 내 곁에 없다고 없는 것도 아니기에 꽃 피는 계절이면 더욱 그립다 어디선가 그대가 살고 있는 것만으로 나에게는 언제나 설레임일 수 있기에 꽃송이 송이마다 웃고 있는 너를 다시 내 품안에 가둔다 080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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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cafe.daum.net/anobasa
        할미꽃 다소곳한 자태 곱게 굽은 꽃대궁이 어머니를 닮아 살며시 꽃 옆에 앉아본다 쉰둥이 철없던 막내딸에게 어머니는 늘 모시 한복 곱게 입은 할머니셨다 어머니 사시는 그 나라에도 봄이 오면 우리집 앞뒤뜰에 만발하던 홍매화 복숭아꽃 앵두꽃 곱게 피겠지 그 숨결 그리워 눈물이 앞을 가린다 080411 / 김필녀
http://cafe.daum.net/anobasa (할미꽃) http://cafe.daum.net/anobasa 노랑할미꽃 http://cafe.daum.net/anobasa 보라색털 할미꽃 http://cafe.daum.net/anobasa 할미꽃 http://cafe.daum.net/anobasa 동강할미꽃 http://cafe.daum.net/anobasa 신종할미꽃 http://cafe.daum.net/anobasa 동강할미꽃 http://cafe.daum.net/anobasa 분홍할미꽃 http://cafe.daum.net/anobasa 꽃이 떨어지고 씨앗이 맺은 과정 http://cafe.daum.net/anobasa 석양에 비치는 술 http://cafe.daum.net/anobasa

♬ 할미꽃  / 박건호 작사, 이현섭 작곡, 박인희 노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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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동문화원 문창반 낙동강변 벚꽃길 나들이 사진 / 080408
          문창반 회원들과 함께 
          낙동강변 벚꽃길로 야외 수업을 다녀왔습니다.
          야외 수업은 삼삼오오 짝을 지어서
          흐드러지게 핀 벚꽃길을 한바뀌 돌면서
          각자 마음속으로 시상을 떠올리는 것이었지요.
          문우들과 함께했던 행복한 나들이었습니다.
          (문창반 지도선생님이신 조영일 선생님과 회원들)
          
          
          
          
          
          
          
          
          
          
          
          
          
          
          ♬ 목련화 / 엄정행 ♬
          
          

          한국 현대시 100년 시인 100인 추천시 제10편

           

           

           

          사슴

           

          노 천 명

           
          모가지가 길어서 슬픈 짐승이여

          언제나 점잖은 편 말이 없구나

          관이 향기로운 너는

          무척 높은 족속이었나 보다

          물속의 제 그림자를 들여다보고

          잃었던 전설을 생각해내곤

          어찌할 수 없는 향수에

          슬픈 모가지를 하고 먼데 산을 쳐다본다

          <1938년>
          ▲ 일러스트=잠산

          노천명(1911~1957) 시인은 어릴 때 홍역을 앓아 사경을 헤매다 다시 소생했는데 이 때문에 이름을 '천명(天命)'으로 바꾸었다. 하늘로부터 다시 받은 목숨으로 천수(天壽)를 누리라는 뜻으로 이름을 바꾸었으나 평생 독신으로 살다 1957년 타계했다. 노천명 시인은 고독의 차가운 차일을 친 시인이었다. 실제로도 고독벽이 있었다. 시 '자화상'에서 자신의 풍모를 "몹시 차 보여서 좀체로 가까이 하기 어려워한다"라고 썼고, "꼭 다문 입은 괴로움을 내뿜기보다 흔히는 혼자 삼켜버리는 서글픈 버릇이 있다"라고 썼다.

          이 시는 한 마리의 사슴을 등장시켜 자신의 모습을 투영한다. 시인은 사슴의 몸통과 다리를 배제한 채, 자화상을 그리는 화가처럼 사슴의 목 윗부분을 그려낸다. 관(뿔)을 쓴 '높은 족속'으로 스스로를 도도하고도 고고하게 표현하지만, 2연에서는 물리칠 수 없는 마음의 통증을 보여준다. 마음의 통증은 어디에서 연유할까. 노천명은 많은 시편에서 어릴 때의 평온했던 시간으로 귀소하려는 욕구를 드러낸다. "절편 같은 반달이 싸리문 우에 돋고", "삼밭 울바주엔 호박꽃이 화안한 마을"로 시인의 마음은 자주 이끌린다. 그 시간들은 화해와 무(無)갈등과 동화적인 세계이다. 그런 세계를 동경하는 화자와 현실 사이의 괴리가 마음의 결손을 유발한다. 그 괴리의 거리와 슬픔의 크기를 시인은 가냘프고 긴 사슴의 목에 빗대어 말하고 있다.

          삶은 고독과 갈등의 경전이다. 우리는 이 세상의 몸을 받을 때부터 고독의 의복을 입고 태어났다. 그러나 우리는 고독의 정면(正面)을 보고 싶어하지 않는다. 고독의 시간이라야 우리는 진정으로 우리를 만날 수 있고, 그때 참회와 기도가 생겨나게 되지만. 해서 모든 종교적인 시간은 고독의 시간이지만. 릴케의 표현처럼 "고독은 비와도 같은 것"이며, "(고독은) 서로 미워하는 사람들이 같은 잠자리에서 함께 잠을 이루어야 할 때"처럼 흔하게 찾아오는 것. 너무나 마음 쓸 데가 많아서 도무지 고독할 시간조차 없다고 말하지 말자. 이 시를 애송하는 시간에라도 우리는 우리의 근원적인 고독의 시간을 살자. 나의 자화상을 솔직하게 들여다보자. 고립감이 자기애로 나아가더라도. 설혹 자기애에 빠져 나르키소스처럼 한 송이의 수선화로 피어나더라도.

          남빛 치마와 흰 저고리를 즐겨 입었다는 노천명 시인은 한국시사에서 시적 대상을 시적 화자와 겹쳐 놓음으로써 현대 서정시의 동일성 시학을 선보인 최초의 여성 시인이었다.[문태준시인]
           
          출처 : 독서논술지도사 김필녀서재
          글쓴이 : 김필녀 원글보기
          메모 :

           

          한국 현대시 100년 시인 100인 추천시 제 9편

           

           

          한 잎의 여자 /오규원

           

           

           

          나는 한 여자를 사랑했네. 물푸레나무 한 잎같이 쬐그만 여자, 그 한 잎의 여자를 사랑했네. 물푸레나무 그 한 잎의 솜털, 그 한 잎의 맑음, 그 한 잎의 영혼, 그 한 잎의 눈, 그리고 바람이 불면 보일 듯 보일 듯한 그 한 잎의 순결과 자유를 사랑했네.

          정말로 나는 한 여자를 사랑했네. 여자만을 가진 여자, 여자 아닌 것은 아무것도 안 가진 여자, 여자 아니면 아무것도 아닌 여자, 눈물 같은 여자, 슬픔 같은 여자, 병신(病身) 같은 여자, 시집(詩集) 같은 여자, 그러나 영원히 가질 수 없는 여자, 그래서 불행한 여자.

          그러나 영원히 나 혼자 가지는 여자, 물푸레나무 그림자 같은 슬픈 여자.

          <1978년>


           

          ▲ 일러스트=권신아

          오규원(1941~2007) 시인은, 보통 사람이 호흡하는 산소의 20%밖에 호흡하지 못하는 '만성폐쇄성폐질환'을 앓다 작년 겨울에 타계했다. 임종 직전 "한적한 오후다/ 불타는 오후다/ 더 잃을 것이 없는 오후다/ 나는 나무 속에서 자본다"라는 마지막 문장을 손가락으로 제자 손바닥에 써서 남겼다.

          나는 이 시를 대학교 1학년 때의 여름, 한 남학생이 보낸 대학학보의 주소 띠지 속에서 처음 읽었다. 얼마나 많은 남자들이 얼마나 많은 여자에게 이 시를 옮겨 나르곤 했던가. 이 시는 시집 '왕자가 아닌 한 아이에게'(1978)에 실린 작품이다. 그러나 시집 '사랑의 감옥'(1991)에 3편의 연작시 중 1편으로 다시 실렸다. '언어는 추억에 걸려 있는 18세기형 모자'라는 부제가 첨가되었고, 2연의 끝 '영원히 가질 수 없는 여자'와 3연의 '영원히 나 혼자 가지는 여자'가 바뀌었다. 부제를 첨가하여 '여자'는 '언어'에 대한 은유이기도 하다는 것을, '영원히 가질 수 없는 여자'를 뒤로 배치하여 여자나 언어 모두 소유할 수 없는 존재임을 강조하였다.

          나무껍질을 벗겨 물에 담그면 물빛이 푸르스름해진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 물푸레, 이 시 덕분에 물푸레나무와 그 잎이 보고 싶었던 때가 있었다. 커다란 나무에 비해 여릿하고 포릇하고 정말 '쬐그만' 둥근 잎이었다. 천생 '여자'를 닮은, 이를테면 눈물 하면 떠오르는 글썽임이라든가, 슬픔 하면 떠오르는 비릿함이라든가. 병신 하면 떠오르는 어리숙함이라든가, 시집 하면 떠오르는 아련함이라든가….

          그런 '여자'를 반복해 나열하면 할수록, 묘사하면 할수록 '여자'의 실체는 사라지고 '여자'는 신비의 옷을 입는다. 세상의 절반이 여자다. 물푸레나무에 달린 '쬐그만' 잎처럼 하고많은 여자와 '여자'라는 보통명사를 이토록 입에 척척 달라붙도록, 혀에 휘휘 휘감기도록 구체화시켜 놓고 있다니!

          여자는 남자의 '여자'다. 남자의 엄마이고 누이이고 애인이고 아내이고 딸이다. 남자의 과거이고 미래이다. 남자의 부재이자 심연이고, 선물이자 폭력이다. 그러니 시작이고 끝이다. 그런 여자를 어찌 정의할 수 있으랴. 모두 가지지만 결코 가질 수 없는 그런 한 '여자'를 누가 가졌다 하는가.

           
          출처 : 독서논술지도사 김필녀서재
          글쓴이 : 김필녀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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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인女人
          김필녀 
          가쁜 숨 몰아쉬며 
          선홍색 꽃을 피워낸 영산홍이 
          땀으로 범벅이 된 채 웃고 있다 
          꽃망울을 싸고 있던 
          단단한 껍질 벗겨 낼 때마다 
          깊어지던 신음소리 
          첫 딸 출산하던 날의 
          내 아랫배가 아파 온다  
          꽃이 아픔이고 기쁨이듯 
          자식도 아픔이고 기쁨이다 
          어머니의 세월을 견디어 
          가장 아름답게 다시 피는 꽃
          여인女人 
          080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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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현대시 100년 시인 100인 추천시 제 7편

           

           

          사평역(沙平驛)에서

           

          곽재구


           

           

          막차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대합실 밖에는 밤새 송이눈이 쌓이고

          흰 보라 수수꽃 눈시린 유리창마다

          톱밥난로가 지펴지고 있었다

          그믐처럼 몇은 졸고

          몇은 감기에 쿨럭이고

          그리웠던 순간들을 생각하며 나는

          한줌의 톱밥을 불빛 속에 던져주었다

          내면 깊숙이 할 말들은 가득해도

          청색의 손바닥을 불빛 속에 적셔두고

          모두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산다는 것이 때론 술에 취한 듯

          한 두릅의 굴비 한 광주리의 사과를

          만지작거리며 귀향하는 기분으로

          침묵해야 한다는 것을

          모두들 알고 있었다

          오래 앓은 기침소리와

          쓴 약 같은 입술담배 연기 속에서

          싸륵싸륵 눈꽃은 쌓이고

          그래 지금은 모두들

          눈꽃의 화음에 귀를 적신다

          자정 넘으면

          낯설음도 뼈아픔도 다 설원인데

          단풍잎 같은 몇 잎의 차창을 달고

          밤열차는 또 어디로 흘러가는지

          그리웠던 순간을 호명하며 나는

          한줌의 눈물을 불빛 속에 던져 주었다.

          <1981년>
           

          ▲ 일러스트=권신아
          조그만 간이역에 눈은 푹푹 내려 쌓이고, 푹푹 내려 쌓이는 눈 때문에 막차는 오지 않는다. 사람들은 대합실에서 오지 않는 막차를 기다리고 있다. 부려둔 보따리나 꾸러미에 기대 누군가는 졸고, 누군가는 담배를 피우고, 누군가는 웅크린 채 쿨럭이기도 한다. 털모자에 잠바를 입은 사내는 간간이 난로에 톱밥을 던져 넣으며 깊은 생각에 빠져 있다. 난로 위 주전자는 그렁그렁 끓는 소리를 내며 수증기를 내뿜고, 시계는 자정을 넘어서고….

          시대적 아픔을 서정적으로 그려냈다고 평가되는 곽재구 시인의 데뷔작 '사평역에서'(1981)를 읽을 때마다 나는 울컥한다. 아름다우면서 서럽고, 힘들지만 따뜻했던 그때 그 시절의 풍경을 소중한 흑백사진처럼 남기고 있기 때문이다. 사진에는 지난 시절의 희망과 절망이 눈보라로 흩날리고 있다, 모래처럼 톱밥처럼. 그 울컥함이 소설(임철우 '사평역에서'), 드라마(TV문학관 '사평역', '길 위의 날들'), 노래(김현성 '사평역에서')로 장르를 달리하며 독자들의 공감을 얻게 했으리라.

          이십대에 쓴 시답게 감각과 묘사가 풋풋하다. 깜깜한 유리창에 쌓였다 녹는 눈송이들은 흰 보라 수수꽃(라일락꽃)빛이다. 사람들이 그믐처럼 졸고 있다는 표현은 절묘하다. 확 타올랐다 사그라지는 난로 속 불빛은 톱밥을 던져 넣는 청색의 손바닥과 대조를 이룬다. 간헐적으로 내뱉는 기침 소리는 '눈꽃의 화음'을 강조하고, 뿌옇게 피어올랐다 사라지는 담배 연기는 회억(回憶)처럼 떠올랐다 가라앉곤 한다.

          한줌의 톱밥을 던지는 '나'는 무슨 사연을 간직한 걸까? 기다리는 막차는 올까? 모든 역들은 어디론가 흘러가기 위한 지나감이고 경계이다. 하여 모든 역들이 고향을 꿈꾸는 것이리라. 사평은 나주 근처에 있는 조그만 마을이다. 그 사평에 사평역이 없다니, 그토록 울컥하게 했던 사평역이 어디에도 없다니, 그래서 더욱 우리를 울컥하게 하는 것이겠지만.[정끝별 시인]

           
          출처 : 독서논술지도사 김필녀서재
          글쓴이 : 김필녀 원글보기
          메모 :
           

           

           
          한국 현대시 100년 시인 100인 추천시 제 6편
           
           
           
          '冬天(동천)'
           
          서정주
           
           


          내 마음 속 우리님의 고은 눈썹을

          즈믄 밤의 꿈으로 맑게 씻어서

          하늘에다 옮기어 심어 놨더니

          동지 섣달 나르는 매서운 새가

          그걸 알고 시늉하며 비끼어 가네

           


           

           

          ▲ 일러스트 / 잠산

           
           
          겨울 밤하늘을 올려 본다. 얼음에 맨살이 달라붙듯 차갑고 이빨은 시리다. 문득 궁금해진다. 미당(未堂) 서정주 시인은 왜 한천(寒天)에 사랑의 일과 사랑의 언약과 사랑의 얼굴을 심어 두었을까. 손바닥으로 쓸어보아도 온기라고는 하나 없는 그곳에 왜 하필 사랑을 심어 두었을까. 매서운 새조차 '비끼어 가'는 사랑의 결기를 심어 두었을까.

          생심(生心)에 대해 문득 생각해본다. 처음으로 마음이 생겨나는 순간을 생각해본다. 무구한 처음을, 손이 타지 않아서 때가 묻지 않은 처음을. 부패와 작파가 없는 처음을. 신성한 처음을. 미당이 한천을 염두에 둔 것은 처음의 사랑과 처음의 연민과 처음의 대비와 처음의 그 생심이 지속되기를 바랐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심어 놨'다고 한 까닭도 생심 때문이 아니었을까. 심는다는 것은 생육(生育)한다는 것 아닌가. 여리디 여린 것, 겨우 자리 잡은 것, 막 숨결을 얻은 것, 젖니 같은 것 이런 것이 말하자면 처음이요, 생양해야 할 것들 아닌가. 미당은 초승달이 점점 충만한 빛으로 나아가듯 처음의 사랑 또한 지속되고 원만해지기를 기도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미당의 시에는 생명 없는 것을 생장시키는 독특한 영기(靈氣)가 서려 있다. 그는 시 '첫사랑의 詩'에서 '초등학교 3학년때 / 나는 열두살이었는데요. / 우리 이쁜 여선생님을 / 너무나 좋아해서요. / 손톱도 그분같이 늘 깨끗이 깎고, / 공부도 첫째를 노려서 하고, / 그러면서 산에가선 산돌을 줏어다가 / 국화밭에 놓아 두곤 / 날마다 물을 주어 길렀어요.'라고 하지 않았던가. 산돌을 주워 와서 물을 주어 길렀듯이 이 시에서도 미당은 '고은 눈썹'을 생장시키는 재기를 보여준다.

          미당의 시에는 유계(幽界)가 있다. 그는 '무슨 꽃으로 문지르는 가슴이기에 나는 이리도 살고 싶은가'라며 황홀을 노래했지만 그는 우주의 생명을 수류(水流)와 같은 것으로 보았다. 흘러가되 윤회하는 것으로 보았다. 이 운행에서 그는 목숨 받은 이들의 만나고 헤어지는 일을 노래했다. 목숨 없는 것에는 목숨의 숨결을 불어 넣었다. 미당의 시의 최심(最深)은 삶 너머의 이승 이전의 유계를 돌보는 시심에 있다. 이 광대한 요량으로 그는 현대시사에수많은 활구(活句)를 낳았다.[문태준시인]

           
          출처 : 독서논술지도사 김필녀서재
          글쓴이 : 김필녀 원글보기
          메모 :

           

          한국 현대시 100년 시인 100인 추천시 제 5편

           

           

           

          '꽃' 

           

          김춘수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香氣)에 알맞은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김춘수 시인은 릴케와 꽃과 바다와 이중섭과 처용을 좋아했다. 시에서 역사적이고 현실적인 의미의 두께를 벗겨내려는 '무의미 시론'을 주장하기도 했다. 교과서를 비롯해 여느 시 모음집에서도 빠지지 않는 시가 '꽃'이며 사람들은 그를 '꽃의 시인'이라 부르기도 한다.

          1952년에 발표된 '꽃'을 처음 읽은 건 사춘기의 꽃무늬 책받침에서였다. '그'가 '너'로 되기, '나'와 '너'로 관계 맺기, 서로에게 '무엇'이 되기, 그것이 곧 이름을 불러준다는 것이구나 했다. 그러니까 사랑한다는 것이구나 했다. 이름을 부른다는 게 존재의 의미를 인식하는 것이며, 이름이야말로 인식의 근본 조건이라는 걸 알게 된 건 대학에 와서였다. 존재하는 것들에 꼭 맞는 이름을 붙여주는 행위가 시 쓰기에 다름 아니라는 것도.

          백일 내내 핀다는 백일홍은 예외로 치자. 천 년에 한 번 핀다는 우담바라의 꽃도 논외로 치자. 꽃이 피어 있는 날을 5일쯤이라 치면, 꽃나무에게 꽃인 시간은 365일 중 고작 5일인 셈. 인간의 평균 수명을 70년으로 치면, 우리 생에서 꽃핀 기간은 단 1년? 꽃은 인생이 아름답되 짧고, 고독하기에 연대해야 한다는 걸 깨닫게 한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고 그가 나의 이름을 불러주면, 서로에게 꽃으로 피면, 서로를 껴안는 이유일 것이다.

          그러나 늦게 부르는 이름도 있고 빨리 부르는 이름도 있다. 내 꽃임에도 내가 부르기 전에 불려지기도 하고, 네 꽃임에도 기어코 네가 부르지 않기도 한다.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이름을 부르는 것의 운명적 호명(呼名)이여! '하나의 몸짓'에서,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는 것의 신비로움이여! 내가 본 가장 아름다운 꽃은 나를 보는 너의 눈부처 속 꽃이었으나, 내가 본 가장 무서운 꽃은 나를 등진 너의 눈부처 속 꽃이었다.

          세계일화(世界一花)랬거니,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세계는 한 꽃이다. 만화방창(萬化方暢)이랬거니,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세계는 꽃 천지다. 꽃이 피기 전의 정적, 이제 곧 새로운 꽃이 필 것이다. 불러라, 꽃!

          [정끝별]

          출처 : 독서논술지도사 김필녀서재
          글쓴이 : 김필녀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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