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모든 강아지똥에게 민들레 홀씨를

 

권정생어린이재단 설립준비위원회

(760-130)경북 안동시 명륜동 317-1. (054)858-0808. artandong@hanmail.net

위원장 최완택. 사무처장 안상학(017-816-1962)


권정생 선생 귀천 1주기 추모의 정






◎행사 내용◎


■주제 : 권정생 선생님 가신 그 나라에서는


■전체 행사 개요

일정 : 2008년 5월 17일 ~ 18일

장소 : 권정생 선생 사시던 집. 빌뱅이 언덕. 권정생어린이재단.

      한티재 하늘 현장.

주최 : 권정생어린이재단 설립준비위원회


■전체 행사 주제

1. 추모식

2. 권정생 도서 및 유품 전시

3. 사시던 집 참배 및 권정생 소설 『한티재 하늘』 현장 답사



◎세부 행사 내용◎



1. 추모식


●행사 개요

장소 : 권정생 선생 사시던 집과 빌뱅이 언덕

일시 : 2008년 5월 17일 오후 2시

주최 : 권정생어린이재단 설립준비위원회


●식순

-방명 : 주소, 이메일, 전화번호, 선생님께 드리는 글, 재단에 바라는 말.(제책)

-분향 및 헌화

-개식 

-추모 묵념

-유족 대표 인사 : 권현웅

-추모사 : 어린이 편지 낭송

-추모사 : 박기범(동화작가)

-추모시 : 박남준(시인)

-권정생어린이 재단설립준비위 경과보고 : 박연철 변호사

-재단 사업 계획 소개 : 최완택 목사

-폐식

-빌뱅이 언덕 헌화


2. 권정생 선생 도서 및 유품 전시


●행사 개요

일시 : 2008년 5월 17일~18일(매일 오전 10시~오후 5시)

장소 : 권정생어린이재단 설립준비위원회 전시실

         (안동시청 주차. 예안방면 70미터 정도 우측 명륜주유소 마당 1층)


●행사 내용

-도서 전시(권정생 선생 저서)

-유품 일부 전시(안경, 친필 유고, 의류, 집필도구 등)

-내가 좋아하는 권정생 선생 글귀 가지기(어린이만)

 글씨 : 서예가 장종규


3. 사시던 집 참배 및 권정생 소설 『한티재 하늘』 현장 답사


●행사 개요

일시 : 2008년 5월 18일 오전 11시

집결지 : 안동시청

안내 : 안상학(권정생어린이재단 설립준비위원회 사무처장)

참여 : 어린이문학협의회, 일반시민


●답사 내용

사시던 집 방문-빌뱅이 언덕 참배-돌음바우골-바랑골-섶밭밑-계산골

유품전시장 관람.




출처 : 샘문학(안동문화원문창반)
글쓴이 : 김경숙(난우 蘭雨) 원글보기
메모 :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팝송40곡 ♬
 
 

1   Bridge Over Troubled Water - Simon and Garfunkel
2   Love Me Tender - Elvis Presley
3   Take Me Home, Country Roads - John Denver
4   Lost In Love - Air Supply
5   Rivers Of Babylon - Boney M

6   Midnight Blue - Electric Light Orchestra
7   Old And Wise - Alan Parsons Project
8   Stand By Your Man - Tammy Wynette
9   The Water Is Wide - Karla Bonoff
10   Rain - Jose Feliciano

11   San Francisco (Be Sure To Wear Flowers In Your Hair) - Scott McKenzie
12   It Never Rains In Southern California - Albert Hammond
13   Tie A Yellow Ribbon Round The Ole Oak Tree - Tony Orlando&The Dawn
14   We`re All Alone - Boz Scaggs
15   All By Myself - Eric Carmen

16   Happy Heart - Andy Williams
17   Blue Velvet - Bobby Vinton
18   Greenfields - Brothers Four
19   I Left My Heart In San Francisco - Tony Bennett
20   Moon River - Henry Mancini
 
21   Un Break My Heart - Toni Braxton
22   When A Man Loves A Woman - Michael Bolton
23   Goodbye - Jessica Folcker
24   True Colors - Cyndi Lauper
25   I`ll Be Over You - ToTo

26   I`ll Meet You At Midnight  -Smokie
27   Without You - Harry Nilsson
28   Longer - Dan Fogelberg
29   For The First Time - Kenny Loggins
30   You - Ten Sharp
 
31   Toy Soldiers - Martika
32   Manic Monday - Bangles
33   99 Red Balloons - Nena
34   Wake Me Up Before You Go Go - Wham
35   I Like Chopin - Gazebo

36   Together Forever - Rick Astley
37   You`re My Heart, You`re My Soul - Modern Talking
38   Sexy Music - Nolans
39   Wanted - Dooleys
40   It`s Raining Men - Weather Girls
 

 
 
 

출처 : 독서논술지도사 김필녀서재
글쓴이 : 김필녀 원글보기
메모 :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직지사에서

 

김필녀


오월 푸른 바람에 몸을 맡긴
직지사 풍경소리
일상의 잡다한 생각 거두어 가고
깨달음의 경지 모르는 중생들에게
삶이 곧 수행이라며 다가온
오색 연등 함박웃음으로 반긴다

인간사 백팔번뇌는
피할 수 없는 고행의 연속
고난과 시련의 연단 후에 비로소

이승의 번뇌 해탈할 수 있다며
비로전 천불상 천의 모습으로
피안彼岸의 세계 설법하고 있었다

 

080501 / 김천 직지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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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연합뉴스) 고미혜 기자 = '토지'와 '김약국의 딸들', '시장과 전장', '파시' 등 박경리(朴景利) 소설의 주요 테마 가운데 하나는 여인의 비극적인 운명이었다.

5일 향년 82세로 타계한 박씨는 자신의 작품 속 여인들만큼이나 굴곡 많은 생애를 살았다.

"내가 행복했다면 문학을 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박씨의 말처럼 파란만장한 삶은 그의 문학을 단련시킨 원동력이 되기도 했다.

1926년 10월28일 경남 통영에서 출생한 박씨는 진주여고를 졸업한 후 통영군청 공무원으로 일하다 1946년 전매청 서기였던 김행도(金幸道)씨와 결혼한다.

그러나 곧 이어 전쟁 중 남편과 아들을 잇따라 잃고 외동딸 영주를 홀로 키우며 녹록지 않은 20대를 보낸다.

셋방살이를 하며 은행에 다녔던 박씨는 친구의 도움으로 소설가 김동리를 찾아가 두세 편의 습작 시를 보여주는데 이때 시인은 "상은 좋은데 형체가 갖춰지지 않았다"고 평가했다고 한다.

이후 김동리는 박씨에게 "시보다 소설을 써보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권유했고 이를 받아들여 쓴 단편 소설 '계산'이 김동리의 추천으로 1955년 8월 '현대문학'에 실리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이듬해 8월 현대문학에 단편 '흑흑백백'이 추천 완료돼 본격적으로 등단한 후 한해 뒤인 1957년 단편 '불신시대'로 현대문학 신인문학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초기에는 주로 단편을 발표한 박씨는 1958년 첫 장편 '연가' 이후 '표류도', '성녀와 마녀', '김약국의 딸들', '파시', '시장과 전장' 등 굵직굵직한 소설들을 잇따라 내놓으며 내성문학상, 한국여류문학상 등을 수상하고 베스트셀러 작가의 반열에도 오르기 시작했다.

1969년에는 한국 문학 최대 걸작인 대하소설 '토지'를 현대문학 9월호에 연재하기 시작하는데 '토지' 1부를 집필할 무렵 그에게 시련이 잇따라 닥친다.

유방암 선고를 받고 암과 사투를 벌여야했던 것. 1971년 9월 유방암 수술을 앞두고 그는 "삶에 보복을 끝낸 것처럼 평온한 마음이었다"고 회고했다.

병마를 이겨낸 후에는 사위 김지하 시인의 투옥으로 또 한번 마음 고생을 겪는다.
그러나 어떤 시련도 창작에 대한 열정은 막지 못했다.
"글을 쓰지 않는 내 삶의 터전은 아무 곳에도 없었다. 목숨이 있는 이상 나는 또 글을 쓰지 않을 수 없었고, 보름 만에 퇴원한 그날부터 가슴에 붕대를 감은 채 '토지' 원고를 썼던 것이다. (중략) 나는 주술(呪術)에 걸린 죄인인가. 내게서 삶과 문학은 밀착되어 떨어질 줄 모르는, 징그러운 쌍두아(雙頭兒)였더란 말인가."(1973년 토지 1부 자서)

토지는 이후 '문학사상'(2부), '주부생활', '독서생활', '한국문학'(이상 3부), '마당', '정경문화', '월간경향'(이상 4부) 등 여러 매체를 전전하는 우여곡절 끝에 1994년 8월 문화일보를 통해 사반세기 만에 전 5부로 완간됐다.

3부를 마친 후 1980년부터는 마음을 다잡기 위해 강원도 원주로 근거지를 옮겨 마지막 순간까지 원주에 머물렀고, 1991년부터는 연세대 원주 캠퍼스에서 강의도 시작했다.

토지 완간 이후에는 간간이 산문을 기고하고 시집을 출간하는 것 외에는 작품 활동은 최소화한 채 토지문화관 건립과 환경에 대한 관심을 기울이기도 했다.

오랜 침묵 끝에 2003년 현대문학에 '나비야 청산가자'를 연재하기 시작했으나, 스스로가 마지막 작품이 될 것이라고 말한 이 소설은 건강 악화로 연재 세차례 만에 원고지 440여매 분량으로 중단돼 안타까움을 남겼다.

미완성 소설과 산문들을 묶어 지난해 13년 만에 새 작품집 '가설을 위한 망상'을 내놓은 박씨는 최근 현대문학 4월호에 '까치 설', '어머니', '옛날의 그 집' 등 신작시 3편을 8년여 만에 발표하며 시 창작 의욕을 밝히기도 했으나 그 세 편의 시는 결국 박씨가 생전에 발표한 마지막 작품이 됐다.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던 고인은 자신의 얼마 남지 않은 생애를 예측했던게 아닐까.

"그 세월, 옛날의 그집 / 그랬지 그랬었지 / 대문 밖에서는 / 늘 / 짐승들이 으르렁거렸다 / 늑대도 있었고 여우도 있었고 / 까치독사 하이에나도 있었지 / 모진 세월 가고 / 아아 편안하다 늙어서 이리 편안한 것을 /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옛날의 그 집' 중)

mihye@yna.co.kr
(끝)

*******************************************

'옛날의 그 집' 박경리 선생의 마지막 작품

중앙일보

[중앙일보 손민호] -박경리가 마지막으로 남긴 시편(2008년 4월 '현대문학' 발표).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란 마지막 행이 턱, 걸린다. 손민호 기자

옛날의 그 집

박경리
비자루병에 걸린 대추나무 수십 그루가
어느 날 일시에 죽어자빠진 그 집
십오 년을 살았다
빈 창고같이 휑뎅그렁한 큰 집에
밤이 오면 소쩍새와 쑥쑥새와 울었고
연못의 맹꽁이는 목이 터져라 소리 지르던
이른 봄
그 집에서 나는 혼자 살았다
다행이 뜰은 넓어서
배추 심고 고추 심고 상추 심고 파 심고
고양이들과 함께 살았다
정붙이고 살았다
달빛이 스며드는 차가운 밤에는
이 세상의 끝의 끝으로 온 것 같이
무섭기도 했지만
책상 하나 원고지, 펜 하나가
나를 지탱해주었고
사마천을 생각하며 살았다
그 세월, 옛날의 그 집
그랬지 그랬었지
대문 밖에서는

짐승들이 으르렁거렸다
늑대도 있었고 여우도 있었고
까치독사 하이에나도 있었지
모진 세월 가고
아아 편안하다 늙어서 이리 편안한 것을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

▶[J-HOT] 박완서 장례위원장 "평화롭고 곱게 돌아가셨다"
▶[J-HOT] "선생과의 추억 잊지 못할것" 애통한 원주
▶[J-HOT] '토지' 박경리, 흙으로 돌아가다
▶기자 블로그 http://blog.joins.com/center/journalist.asp

출처 : 藝術村
글쓴이 : 촌장 원글보기
메모 :

 

제20회 안동예술제 초청장

 

기간 : 2008년 5월 9일(금) ~ 5월 18일(일)

문의 : 한국예총안동지부(054-857-2767)

  홈페이지 : www.andong.org

 

안동문협에서는 5월 14(수) 18:30 ~ 18일(일)까지

안동시민회관 전시실에서

'시와 도자기의 만남' 시화전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많이 참석하여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경주 현대호텔에서 / 080505

 

경주 현대호텔에 근무하는 딸아이가

어버이날을 앞당겨 저녁 초대를 해서

경주 보문단지 산책길을 데이트도 하고

현대호텔 중식 코스 요리도 대접 받고 왔습니다.

 

경주 현대호텔

 

 

 

경주 보문단지 산책길에서

 

 

 

 

 

 

 ♬ 오월의 편지 / 소리새 ♬

 

안동주부문학회원 5월 나들이 / 080503


 

안동주부문학회의 아름다운 님들이

안동주부문학 17집에 실을 사진도 찍고

함께 하고픈 마음으로

계절의 여왕 5월을 맞이하여 나들이를 했습니다.

 

안동댐 월영교 앞에서

 

파이 사진은 밑에 슬라이드쇼로 보면 더 크게 볼 수 있답니다.

 
안동 농업기술센타에서



 

♬ 장미 / 사월과 오월 ♬

출처 : 안동주부문학
글쓴이 : 雅靜 김필녀 원글보기
메모 :

 
이별 연습 - 하나 
산수유 노랗게 부서지던 밤 
달빛 드리워진 꽃잎에 그리움 묻고
잊으리라 다짐했는데
차마 잊혀지지 않아
더욱 뜨거워진 신열로 
다가오는 그대
목련꽃잎 뚝뚝 떨어지던 날 
떨어져 누운 꽃잎에 서러움 묻고
잊으리라 마음먹었는데 
그 흔적 지우려할수록
더욱 거세고 짙은 향기로
밀려오는 그대
꽃 지기 전에
잊어야 하는데 
보내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이별 연습만 하다 봄 가고
꽃 진 자리에 그리운 얼굴
푸른 잎새 되어 나부낀다
080428 / 김필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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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진생 합동회갑연의 주인공들을 찾아서(글/김필녀-시인, 백소애-편집기자)

1988년 무진생 합동회갑연의 주인공들
1988년 4월 10일 길안면 복지회관에는 때깔 좋은 두루마기를 차려입은 길안, 임하에 사는 19명 무진생들의 합동회갑연이 열렸다. 1988년 무진생인 안동지는 1928년 무진생인 그들을 취재하여 당시 ‘어떤 잔치’라는 이름으로 소개를 했더랬다. 가족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밀어부쳐 전국에서도 보기 드문 행사를 진행했던 그들을, 20년이 지난 2008년 봄에 다시 만나보았다. 20년 만에 챙기는 근황인 터, 길안으로 나서는 길에서부터 기대감에 설레기 시작했다.


무진생 어르신들을 찾아 나선 날은 완연한 봄이었다. 마을 어귀마다 산수유가 노란 꽃등을 달고 인사를 하였으며, 양지 녘에는 개나리도 막 꽃망울을 터뜨리며 노란 웃음을 짓고 있었다. 논밭에는 거름을 내는 일손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으며 멀리 아지랑이 아른거리는 끝에는 봄나물을 뜯는 아낙들 모습도 무척 정겹게 다가왔다. 마침 간 날은 길안장날이었고 6.25참전유공자 모임이 있는 날이었다. 오전에 행사를 마치고 점심까지 함께한 어르신들이 말끔하니 양복차림으로 반갑게 맞아주었다.
“이리 추억해주고 오신다카는데 예의를 갖춰야죠.”
여든 나이에도 휴대전화 너머 쩌렁쩌렁한 목소리의 주인공 김홍대 할아버지가 무진생 계모임의 회장으로, 당시 멤버들을 한자리에 불러 모았다. 관절이 좋지 않아 억지로 왔다는 홍성학 할아버지의 안부도 챙기며 서로가 자리에 다 앉자 이야기는 세월을 넘어 왁자지껄 그칠 줄을 몰랐다.


열아홉이 각각 회갑연하면 농사나 짓겠어요?
당시 길안, 임하 무진생들은 모두 21명이었으나 안타깝게도 두 분이 참석을 하지 못하셨다. 한 분은 회갑연에 참석하기 위해 버스를 타고 오다가 교통사고를 당해서 참석을 못하셨고, 다른 한 분은 병원에 입원을 하고 있었다. 전출 간 이도 있고 해서, 현재는 아홉 분이 돌아가시고 열 분이 길안에 생존해 계신데 병원에 간 남오진 할아버지를 제외한 김홍대, 김주한, 탁상규, 김병희, 김두만, 배연호, 홍성학, 천병문, 정진하 이렇게 아홉 분이 자리를 함께 했다. 당시 유사를 하셨던 김서동 할아버지도 운명을 달리하셨다. 무진계 명단 앞에 적힌 “亡”자는 보는 이의 가슴을 먹먹하게 했다.
“이렇게 하나둘 떠나니 우리도 마음이 아픕니다.”


당시 회비와 경비, 그리고 회갑연에 참석해서 부조를 한 분들 성함이 빽빽하게 적힌 장부가 지금까지도 정갈하게 보관이 되어있다. 20년 전 부조 금액이 오천 원과 만 원이 대부분이었으니, 부조금액으로도 세월의 흐름을 가늠케 한다. 무진계 회장인 김홍대 할아버지는 길안유도회 회장으로도 있는데 그 꼼꼼함이 어디 갈까. 처음 합동 회갑연을 하자고 의견을 낸 분도 김홍대 할아버지였다.
“말 꺼낸 장본인이 내라. 저녁으로 가서 둘 내외 앉혀놓고 물으니, 하니 안하니 의견이 분분해. 열아홉이 한 가정에 회비를 백만 원씩 내기로 했는데 그게 안 쉬웠어요. 그래서 형편에 맞게끔 냈어요. 살림살이가 궁색해서 좀 덜 낸 이도 있어요.”
총 합계가 천7백3십3만6천원. 꽤 큰돈이었다. 돈이야 오늘 있다가 내일 없어지기도 하고, 오늘 없다가 내일 생기기도 하기 때문에 돈 때문에 오랫동안 친하게 지내오던 동갑계원 간에 의가 상할 것 같아 최종 결론은 가정 형편껏 내기로 하고 진행을 했다. 많게는 백만 원부터 적게는 십만 원을 정성껏 내어 경비로 썼다.
“그래도 당시 가족들이 큰돈 쓴다고 불만이 많았지요?”
“말도 마세요. 규합하는데 애를 먹었어요. 이래저래 갈그채는 일이 한정 없어요. 처음엔 두루마기 하나 맞춰 입는데도 말이 많았어요. 남자는 두루마기, 여자는 치마하고 저고리. 이래저래 애로가 많았죠. 그래 결과가 좋아서 나중에야 다들 흡족해했지만.”
“이봐, 홍대! 여 취재하시는 분들이 녹음도 하는데 우리 좋은 말만 하자.”
김홍대 할아버지가 솔직한 발언을 할 때면 걱정스런 추임새가 한마디씩 흘러나왔고 그때마다 모두들 ‘와’하고 웃고 말았다.
“생일은 해도 되고 안 해도 되지만, 회갑연은 꼭 해야 하기 때문에 스무 명 되는 인원이 회갑연에 돌아가며 다 참석을 하다보면 농사를 제 때 짓지 못해요.”
농사를 천직으로 여기고 살아온 분들이기에, 새벽에 일어나서 밤늦도록 부지런하게 일을 해야 곡식 한 톨이라도 더 건질 수 있었던 시기였다. 그러니 한 달에 두 명 꼴로 열리는 회갑연에 참석하다보면 농사에 지장이 많기에 합동회갑연을 하기로 하셨다. 따지고 보면 합리적인 방식이었다.




답례품은 수건 한장, 소주 한병, 음료수 한병
무진생 계가 50여 년 전에 모아졌다고 하니 20년 전인 그 당시에 벌써 30여년의 세월을 도타운 정을 나누며 지내신 분들이다. 처음 무진생 계를 만들 때는 위로는 어르신들께 효도하고, 아래로는 협동 단결하는 좋은 본보기가 되고자 하는 취지에서 만들었다. 계원 상호간에도 음력 정월 초사흘 날이 되면 모두 두루마기에 갓까지 갖춰 쓰고 모여서 서로에게 맞절을 하면서 덕담을 주고받았다고 한다.
“1년에 2~3차 내외가 합심해서 놀러 댕기고 설이 지나면 자연히 한복을 입고 함께 세배를 하고, 이웃에 모범이 되도록 행동하자고 늘 모이면 강조하고, 어느 누가 잘못을 하면 시정하도록 얘기하고.......옛날엔 그리 지냈어요.”


긴 세월동안 동고동락을 했으니 자녀들 보기에도 좋고 동갑끼리도 예의범절은 물론이고 경조사가 생기면 협동 단결하니 무진생 계를 부러워하는 이들이 많았다.
“회갑연을 하시긴 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무척 젊으셨을 때죠?”
“아~ 그때는 다 한창이었죠. 요새 되면 청년이었지. 하나부터 열까지 우리가 다 진행했을 정도로 청년처럼 뛰댕겼지. 계가 숱하게 많이 있지만 우리 무진생 계처럼 잘되는 데가 없었어. 우리가 합동회갑연 했을 당시에 와룡, 풍산서 다 배우러 왔었어. 자기네들도 그렇게 한번 해보겠다고 다 왔는데 뽄을 본다고 하긴 했는데 그리 못하는기라. 우리처럼 사정 빤히 알고 마음 잘 맞는 경우가 힘들지. 또 우리처럼 형편껏 회비를 모으는 게 딴 데선 가능치 않았어요.”
회갑 당일, 예상보다 많이 모인 사람들에게 잘 대접하지 못한 걸 아직도 모두들 아쉬워하신다.
“안동사람한테 벤또를 시켰는데 사실은 푸짐하게 해서 오신 분이 잘 자시고 가도록 준비했어야 하는데, 워낙에 많은 분들이 오다보니 그걸 잘 대접 못했던 게 그게 많이 아숩죠.”
답례품은 수건 한 장, 이홉들이 소주 한 병, 음료수 한 병에 점심 도시락도 줬다. 그때는 고생했지만 지나고 나니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드는 한편 제일 후회되는 일도 있다며 김병희 할아버지가 입을 연다.
“부조가 많이 들어와서 돈이 남았는 걸 갖고 가난한 학생들을 위해 ‘무진생 장학금’을 만들자고 했어요. 그랬으면 그때 합동연을 한 것도 더욱 빛이 났을 텐데 그러질 못했어. 좋은 일이긴 했지만 전부 넉넉한 형편도 아닌데 그것도 또 오지랖 넓은 일이 아닌가 싶기도 하고 맘처럼 쉽지가 않아서.......그런데 해를 거듭하며 어차피 그냥 우리 계모임에 쓰일 걸, 장학금으로 보내줬으면 더 좋지 않았겠나 하는 후회가 많이 들지요.”
회갑 당일 버스사고로 병원에 입원한 심의원 할아버지를 문병 가는 것으로 회갑연 이후의 일정이 시작되었다. 전체가 문병을 갔다가 오후에 서울로 떠났다. 3박 4일 동안 서울구경을 하고 온양온천에도 들렸다가 일주일동안 전국일주를 했다. 농사일에, 여러 가지에, 좀체 일주일간 짬을 내지 못했던 어르신들이 회갑연을 맞아 간만의 호강을 한 것이다.




환갑에는 전국일주, 칠순엔 제주도, 팔순 때는....
칠순 때는 동부인해서 제주도를 다녀왔다. 그 때는 ‘무진생 회고록’이라는 가사도 직접 써서 남겼다며 열네 쪽이나 되는 작은 책자도 보여주셨다. 가사를 쓰신 분은 김홍대 할아버지다. 책자에는 돌아가신 어르신들을 포함해서 계원 하나하나의 이름을 넣어서 노래한 가사가 소개 되어있다.
- 1번 친구 누구신고/ 동네정씨 진하친구 찾아보니/ 본적은 현하의곡 거주지는 천지일동/ 시조는 지자원자 후예로서/ 슬하에 오남매요 아들형제 딸삼형제라.....- 이렇게 무진계 친구들의 성품과 집안내력, 형편을 속속들이 아는 만큼 멋드러진 은율로 칠순을 기념했다. 그런데 작년 팔순 때는 여행을 다녀오지 못했다. 살아계신 어르신들 인원이 몇 명되지 않아서 관광버스를 맞추기도 어려웠고 기력도 예전 같지 않아 다들 참석하지 못한 때문이라며 아쉬워 하셨다. 사실 둘 내외가 가면 맘 편하고 좋은데 안으로 밖으로 홀로 되고 그러니 그게 또 쉽지가 않은 이유도 있다. 김홍대, 김주한, 김두만 할아버지도 내자를 먼저 보내시고 홀로 되셨다. 그렇지만 길안 장날만큼은 특별한 일이 생기지 않는 한 함께 모여서, 장 볼일도 보고 막걸리 한 잔 하시면서 지난날들을 회상하며 회포를 푸신다고.
“예전엔 신명도 있고 했지만 요즘은 그런 흥이 안 나시죠?”
“그래도 우리가 이만치도 근력을 갖고 장날 이리 모여서 술도 한잔하고 화투도 치고 다방커피도 마시며 댕기는 것도 다행이지.”


이날 모이신 분들은 모두 길안에 거주하는 분들이다. 가족과 함께 사는 분이 셋이다.
“자식을 데리고 있는 아비는 행하고 아비를 데리고 있는 자식은 불행하다는 말이 있어요. 옛날 같으면 부모에 대한 효심이 있어서 아침저녁으로 문 열어보고 별 불편함 없이 잘 지내나 들여다보고 그러는데 요즘 어디 그럽니까? 바쁜 세상이다보니 며느리가 어디 가면 ‘아버님요. 내가 오늘 어디 가이 반찬 꺼내서 밥 자시소.’ 이러고 가는 세상이에요. 사실은 부모 뫼시고 사는 자식들은 부담이 많고, 부모눈치 보고 맘껏 활동도 못하는 점이 있으니까 다 장단점이 있어요. 같이 살면 서로 의지되고 그런 좋은 면은 있지 않은가 싶어요. 부모자식이 떨어져 지내면 정이 덜 가는 것도 사실이고요.”
오랜 세월만큼이나 무진생 계도 변화를 겪고 있다.
“우리가 계축을 하면서 각자 집을 한 바퀴씩 도는데 그때마다 데리고 있는 자녀들끼리 은근히 경쟁이 되요. 어른 모시고 사는 자녀들은 어떻게 하면 ‘그 집 참 잘 준비 했더라’ 소리 들을까싶어 막 노력해요. 그래서 더 친목도 도모되죠. 요즘은 마구 핵가족이니 한 3~4년 전부터는 식당에서 총회를 하는데, 계에 남은 돈도 없고 이제는 유사하는 이가 부담을 해서 놀고 그래요.”
안동박물관에서 발간한 총서 <안동의 계>에는 무진생 계에 관한 이야기도 짧게 실려 있다. 끈끈한 정만큼 무진생 계에 대한 자부심도 남다르다.
“주위에 숱하 계가 많지만 마음적으로나 뭘로나 우리가 모범이 되려고 노력해요. 무진생들이 괜찮게 논다 그런 소리 들을라카고, 자력으로 뭘 하려고 노력하고, 단결도 잘 하고요.”




“격동의 세월 지나 좋은 세상에 살지요
일제 강점기를 거쳐 해방, 6.25 등 격동의 세월을 통과한 무진생 할아버지들.
“오늘 오전에 6.25참전유공자모임이 있어서 참석했는데, 우리 전부 다 전투에 참가했어요. 내 총알에 누가 죽었는지도 모르고 전쟁에 참가했던 그런 시절에 살았죠. 우리는 지금 열 번째 대통령을 맞이합니다. 세상이 참 많이 바뀌었어요.”
정은 옛날이 낫고 살기에는 지금이 낫다는 할아버지들. 촌에 가면 정이 아직 더 나고 장터만 해도 좀 덜하단다. 옛날보다 잘 살아도 콩 한쪽도 나눠먹는 옛날 인정만 못한 작금에, 글은 많이 못 배워도 남의 말 들을 줄 알고, 학력은 낮지만 실력은 높은 할아버지들이다.
“우리가 살 때는 우리도 농사를 많이 져 일꾼을 데리고 있었는데, 나락을 열닷말 주고 삼철 이복해주면 일년 보름을 살았어요. 일꾼들이 하루 종일 일해도 쌀 한 되를 못 가졌는데 그래도 일할 때가 없어서 주인한테 잘 뵐려고 죽을 동 살 동 모르고 일해 주는 그런 세상이었어요. 그 힘든 시절 다 지나고 요새는 얼마나 좋습니까?”
모두들 옳은 소리라고 무릎을 탁 치신다.
“시대를 우리가 못타고 났습니다. 가장 힘들 때 나서 배 다 곯고, 여 무진생 중에 중학교 나온 사람이 없어요. 대부분 무학입니다. 다믄 중학교라도 나왔으면 이보단 더 낫지 않았나 생각도 들곤 합니다. 길안면에 6.25참전자가 전부 무학입니다. 왜정 때 초등학교 나오면 그때만 해도 18살에 면 지도원도 해보고 경찰관 생활도 해보고 공무원 하는 사람이 많았어요. 고등학교 나와서 국회의원 못해먹으면 뭐 하러 가나, 이런 말도 나올 정도지요. 근데 요샌 대학교 나와도 취직도 못하고 결혼도 못하드라니까?”
아직 필혼 전인 이웃의 걱정을 많이 봐온 터라 씁쓸하게 웃으신다. 이렇게 좋아진 세상이라는데, 다시 태어난다면 해보고 싶은 일이 있냐고 여쭙자 모두들 유쾌하게 껄껄 웃으신다.
“그런 생각은 안 해봤네. 하하하! 그런 욕망은 감히 가질 수가 없지!”
길안에서는 대부분 사과농사를 짓는다. 지금은 힘에 부쳐 일선에서 물러나 거드는 편이지만 모두들 농사를 지으며 생활했다.
“길안하면 능금이죠. 길안사과가 유명하니까. 우리네가 농사지을 때는 부지런하기만 하면 먹고살았는데 요즘은 농사도 기업이래요. 과수원 농사 지어보면 기술도 요하고 돈도 많이 들어요. 그래서 실패하면 큰일 나죠. 예전엔 투자한 노동만큼 됐는데 요즘은 힘들죠.”
그래도 농사가 건강의 비결이었다. 요즘은 오후에 동네 한 바퀴 살피고 보건지소에 들러 운동도 하고 소일거리를 하며 하루를 보낸다.


무진생 어르신들 마음 속에 품은 소망 하나
“우리가 지금 나이 80이 돼서 돈 버는 것도 힘들고 그럴 수도 없고, 있는 동안 건강하고 가족들 편안한 거 그거 하나 바랍니다. 가정 화목하고 머지않아 죽을 때 죽는 복도 잘 타고 났으면 좋겠어요. 한 이틀 아프다가 갔으면 좋겠는데 모진 병 들어서 가족들 고생이라도 시킬까봐 걱정입니다. ‘구구팔팔삼사’라고 구십구 세까지 팔팔하게 살다가 삼사일만 아프고 편안하게 저 세상으로 가시는 것이 소망입니다.”
모두들 동감하는 와중에 김두만 할아버지가 개인적 소망 말고도 큰 소망이 있다고 하신다.
“예전부터 도청이전 때문에 말이 많잖아요?  조건이 좀 안 맞더라도 안동으로 도청이 유치되면 우리 살기가 더 안 낫나 그거 하나 소망해봅니다. 또 시골서 자꾸 사람들이 떠나니 사람들이 다시 오도록 만들었으면 좋겠어요.”
세상은 이렇게 좋은데 참 힘든 시절에 났다. 좀 살만하니 거동도 예전만 못하고, 그런 섭섭함도 있다. 그러나 섣부른 욕심은 나지 않는다. 그저 근력대로 소박하게 지내고 가족 건강하고 화목하길 바랄뿐이다.


격동의 한국사를 정통으로 살아온 아홉 분의 어르신들은 인터뷰 내내 딸 뻘인 우리에게 하대도 한번 않으시고 점잖게 말하셨다. 서로 간에는 오랜 친구들이라 편하게 이름을 부르며 지내면서도 “자는 다 있지만 그렇게 부르기 힘들고 서로 이름 부르며 지내요. 우리 정도 나이되면 사실 자를 부르는 게 점잖은데......”하며 민망해하신다.
“어르신들, 20년 후에도 만나 또 이런 자리를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인사치레를 가장한 진심을 말하자 모두들 파안대소. 자리를 물리며, 인터뷰를 무사히 잘 마쳤노라고 박수를 치신다. 대문 앞까지 나와 배웅하는 아홉 분의 어르신들의 말을 뒤로 하고 우리는 길안을 나섰다.
“나중에 또 와요. 그때 우리 또 다 모여서 탁배기 한 대 받아줄 테이.”
진심으로 즐거워하시는 어르신들의 순박한 모습을 끝으로 우리는 서로 보이지 않는 젖은 눈을 하고 다음을 기약했다. <안동>

통권115호 - 어떤 잔치 그후 20년 

출처 : 독서논술지도사 김필녀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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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낙화(落花) 이형기 가야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봄 한 철 격정(激情)을 인내한 나의 사랑은 지고 있다. 분분한 낙화(落花)…… 결별(訣別)이 이룩하는 축복에 싸여 지금은 가야 할 때, 무성한 녹음과 그리고 머지 않아 열매 맺는 가을을 향하여 나의 청춘은 꽃답게 죽는다. 헤어지자 섬세한 손길 흔들며 하롱하롱 꽃잎이 지는 어느 날 나의 사랑, 나의 결별(訣別), 샘터에 물 고이 듯 성숙(成熟)하는 내 영혼의 슬픈 눈. - 시집 '별이 물 되어 흐르고'(1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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