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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다목적댐 보조댐의 야경.

 

예와 전통을 중시하는 선비의 고장 안동에도 [팔경]이 있다 
  
그러면 안동팔경은
[仙漁暮帆], [歸來朝雲], [西岳晩鐘], [臨淸古塔], [鶴駕歸雲], [燕尾細雨], [陶山明月], [河回淸風]
등 여덟 군데 명승지를 일컬음이다.
  
안동 고산서원[高山書院 : 안동시 南後面 소재. 1789년(정조 13)에 이상정(李象靖)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하여 이 지방 사림(士林)에서 건립.]에 소장된 [와혈(窩穴)](이완규 지음)이라는 책에 安東八景歌라는 한시가 수록되어 있는데, 누가 지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일설에 의하면 대산(大山) 이상정(李象靖. 1710-1781) 선생이 지었다고도 한다.
   
仙漁臺下銀魚肥 선어대 아래에 은어들은 살쪘고
歸來亭上白雲遊 귀래정 위에는 흰구름 노니는데
西岳寺樓前日樂 서악사 누 위에서 즐거웠던 지난날
臨淸閣軒古時愁 임청각 마루에서 옛시름 겨워하네

鶴駕山影照三郡 학가산 그늘은 세 고을에 드리우고
燕尾園名傳萬秋 연미원 이름은 만세에 이어지니
西厓祠前松竹綠 하회마을 앞에는 송죽이 푸르고
退溪門下洛江流 도산서원 아래는 낙동강이 흐르누나
   
<1경> 선어모범(仙魚暮帆) / 선어대 저문 날의 돛단배
   
(좌 : 1960년대, 우 : 1990년대 사진)
   
선어대는 안동시 용상동에 소재한 자연 경관이 뛰어난 곳이다.
낙동강의 지류인 반변천(半邊川)이 깎아지른 듯한 단애를 휘돌아 흐르면서 그 깊이를 알 수 없었다는 소(沼)를 이루는 청정 경관은 도시 개발과 하천 정비라는 근대화 바람으로 지금은 그 모습이 많이 바뀌었다.
   
<2경> 귀래조운(歸來朝雲) / 귀래정의 아침 구름
   

(좌 : 1960년대, 우 : 1990년대 사진)
   
안동시 정상동에 있는 귀래정은 고성 이씨 안동 입향조 이증 선생의 둘째 아들인 낙포 이굉 선생이 지은 정자이다. 이굉 선생은 사헌부 지평, 상주목사, 개성유수 등의 직을 지내던 중, 갑자사화에 연루되어 삭탈관직되었다가 중종반정 때 다시 기용되었으나, 연로하여 벼슬을 사양하고 이곳으로 내려와 건너편 낙동강이 합수되는 경승지에 정자를 짓고 자신의 처지가 도연명의 '귀거래사'와 너무나 흡사해서 정자 이름을 [귀래정]이라 지었다고 한다.
   
이중환의 '택리지'에는 안동의 수많은 정자 가운데 귀래정을 비롯하여 임청각, 군자정, 하회의 옥연정을 으뜸으로 꼽고 있다.
정면 4칸 배면 2칸 규모의 T자형으로 팔작지붕 건물이다. 기둥은 마루 주위에만 둥근 기둥을 사용하였고 그외는 모두 사각기둥을 썼다. 창문에 중간설주가 남아잇는 것이 특징이다.
     
<3경> 서악만종(西岳晩鐘) / 서악사의 저녁 종소리
   
(서악사)

       

안동시 태화동에 위치하고 있는 대한불교 조계종 서악사는 원통전, 요사채의 2건물로 된 사찰로 신라 말기 도선국사가 창건하였다.
옛 안동부에는 사악(四嶽)이 있었는데 그 중 서악에 지은 절이 바로 서악사이다. 사악은 동의 동악사, 서의 서악사, 남의 남산 순천사, 북의 금학산 수정사 등이다.
법당 안의 동종은 근년인 1933년 3월에 조성되어 오래 되지는 않았으나 조선시대 범종 양식을 충실히 재현한 유물이라는 가치가 있다고 한다.
   
<4경> 임청고탑(臨淸古塔) / 임청각과 오래된 전탑
   
(우 : 임청각 주건물. 좌 : 7층 전탑)
   
임청각은 우리 나라에서 현존하는 살림집 중에서 가장 큰 규모로 500년간의 유구한 역사를 지닌 안동 고성 이씨의 대종택 이다.
세칭 99칸 기와집으로 알려진 이 집은 안채, 중채, 사랑채, 사당, 행랑채는 물론 아담한 별당(군자정)과 정원까지 조성된 조선 시대의 전형적인 상류주택이었다. 일제시대 철도 부설 때 50여 칸의 행랑채와 부속건물을 철거당하고도 이런 규모를 보여주는 99칸 집이었다.
   
조선 세종때 영의정을 지낸 이원(李原, 1368∼1429)의 여섯째 아들인 영산현감 이증(李增)이 이곳의 아름다움에 매료되어 여기에 자리잡음으로써 입향조가 되었고 이증의 셋째 아들로 중종 때 형조좌랑을 지낸 이명이 지은 별당형 정자이다.
   
'임청각'이라는 당호는 도연명의 '귀거래사' 구절 중 ‘동쪽 언덕에 올라 길게 휘파람 불고, 맑은 시냇 가에서 시를 짓기도 하노라.’라는 싯구에서 ‘임(臨)자’와 ‘청(淸)자’를 취한 것이다.
이중환의 '택리지'에 의하면 '임청각은 귀래정, 영호루(映湖褸)와 함께 고을 안의 명승이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안동시 법흥동에 위치하고 있으며 보물 제182호로 지정되어 있고, 임청각 앞의 7층전탑은 국보 제16호로 지정되어 있다.

   

<5경> 학가귀운(鶴駕歸雲) / 학가산으로 몰려드는 구름
   
(학가산)
  
학가산은 경북 안동시 북후면과 서후면, 예천군 보문면에 걸쳐 있는 산으로 해발 870m이다.
각 지방에서 보이는 모양에 따라 다르게 부르기도 하는데 안동에서는 울퉁불퉁하게 보인다고 '문둥이봉', 영주에서는 평평하게 보여 '선비봉', 예천에서는 모습이 수려하다 해서 '인물봉'이라 한다.
가장 높은 봉우리가 국사봉인데 정상에 서면 예천, 안동, 영주 일대가 한눈에 들어온다.
   
이 산의 남쪽면에는 고려 공민왕이 홍건적의 난을 피해 몽진(蒙塵, 먼지를 뒤집어쓴다는 뜻으로, 임금이 난리를 피하여 다른 곳으로 자리를 옮김을 의미함) 때 쌓은 것이라는 학가산성이 남아 있다. 성 위에서 내려다보면 낙동강 줄기가 보인다.
학가산은 숲이 울창하고 등산로가 조용할 뿐만 아니라, 유서 깊은 오지 마을과 경승지를 품고 있어 당일 산행코스로 알맞은 산이다.
   
<6경>연미세우(燕尾細雨) / 제비원에 내리는 이슬비
   

(제비원 석불)

   

안동시 이천동 제비원에 있는 고려시대 마애불로, 정식 명칭은 [안동이천동마애불입상]이며, 보물 제 115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 불상은 옛 연미사(燕尾寺, 속칭 제비원) 터로 전하는 곳의 서향한 바위면에 새겨져 있다.
몸체는 넓은 천연암벽에 새기고, 머리는 다른 돌로 조각하여 올려놓았다.
11세기 경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이 불상은, 머리의 뒤쪽은 파손되었으나 앞쪽은 완전하며, 육계(肉 실사 변에 介 = 부처의 32상 중 하나로 정수리 부분에 혹 모양으로 솟아 있는 것)가 높고 소발(素髮)이며, 얼굴형은 갸름하다.
   
이목구비는 크고 조각수법이 예리하며, 특히 옆으로 길게 뻗어 깊게 팬 눈과 높은 콧날은 얼굴의 단순한 윤곽과 어울려 위압감을 준다. 또한 입술의 굴곡진 형태가 사실적으로 완벽하게 묘사되어 얼굴에 생동감을 준다.턱 밑에는 목걸이가 도드라지게 표현되어 있고, 목에는 삼도(三道)가 새겨져 있다. 양쪽 어깨에까지 직선으로 내려오는 법의 주름과 가슴을 가로지르는 내의의 띠를 간략하게 선각으로 표현했으며, 양쪽 손은 얕게 부조하여 부드러운 곡선으로 처리했다.
   
오른손은 배에 대고 왼손은 가슴 앞에서 장지와 엄지를 맞대고 있는데, 아미타구품인 중품하생인(中品下生印)인 듯하다. 발 밑에는 커다란 단판(單瓣) 연꽃무늬가 음각되어 대좌를 이루고 있다.
이와 같이 머리를 별석으로 조각하여 올린 거대한 마애불로는 경기도 '파주용미리마애불입상(보물 제93호)'과 공주 계룡산의 마애불이 있는데, 고려시대의 거석불(巨石佛)이 괴체화(塊體化)되는 현상의 한 줄기를 이룬다.
   
<7경> 도산명월(陶山明月) / 도산서원의 밝은 달
   
(좌 : 도산서원 경내. 우 : 서원 앞으로 흐르는 낙동강)
   
도산서원은 퇴계 이황((1501∼1570) 선생이 도산서당을 짓고 유생을 교육하며 학문을 쌓던 곳이다.
선생은 주자학을 집대성한 유학자로 우리나라 유학의 길을 정립하면서 백운동서원의 운영, 도산서당의 설립으로 후진 양성과 학문 연구에 전력하였다.
   
도산서원은 1574년(선조 7년), 그의 학덕을 추모하는 문인과 유생들이 상덕사(보물 제211호)란 사당을 짓고 전교당(보물 제210호) 동·서재를 지어 서원으로 완성했으며, 이듬해 국왕에게 이름을 받아 한석봉이 쓴 편액을 하사받은 사액(賜額) 서원이 되면서 영남지방 유학의 중심지가 되었다.
   
이 서원의 건축물들은 민간인들의 집처럼 전체적으로 간결, 검소하게 꾸며 퇴계의 품격과 학문을 공부하는 선비의 자세를 잘 반영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안동시 도산면 토계리에 위치하고 있으며 1969년에 사적 170호로 지정되었다.
   
<8경> 하회청풍(河回淸風) / 하회마을의 맑은 바람
   

(하회마을 전경)

   

경상북도 안동시 풍천면 하회리에 있는 민속마을로 중요민속자료 제122호이다.
예로부터 유림의 고장이었던 이곳은 한국의 대표적 동족 부락으로, 국보를 비롯해 보물, 중요민속자료, 중요무형문화재 등 값진 문화유산을 간직하고 있어 1984년 1월 민속보존마을로 지정되었다.
   
동쪽은 태백산의 지맥인 화산(321m)이 감싸고 있으며, 낙동강이 서·남·북 경계를 따라 마을 전체를 태극형으로 감싸 흐른다. 이는 풍수지리적으로 산태극수태극(山太極水太極)을 이루는 길지(吉地)로 임진왜란 때는 전화를 입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서북쪽으로는 울창한 노송림대가 있으며, 마을 중앙에는 600여 년 된 느티나무가 있어 삼신당나무로 삼고 있다. 강 건너의 부용대는 천연의 병풍과 같은 형태를 자아내며, 이 일대는 백사청송이 어울려 경승을 이룬다.
   
과거 신분제 사회의 생활을 엿볼 수 있는 300~500년 된 130여 호의 유서깊은 대·소 가옥들이 보존되어 있는데 이 중 유운룡의 종택인 안동양진당(보물 제306호)과 서애 유성룡을 모신 종가인 충효당(보물 제414호)을 비롯해 하회북촌택(중요민속자료 제84호)·하회원지정사(중요민속자료 제85호)·하회빈영정사(중요민속자료 제86호)·하회유시주가옥(중요민속자료 제87호)·하회옥연정사(중요민속자료 제88호)·하회겸암정사(중요민속자료 제89호)·하회남촌택(중요민속자료 제90호)·하회주일재(중요민속자료 제91호) 등이 국가지정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또한 이곳의 오랜 민간전승놀이로 하회별신굿탈놀이(중요무형문화재 제69호)와 강상유화(江上流花) 놀이인 줄불놀이가 있다. 하회별신굿탈놀이에 쓰이던 하회탈은 국보 제121호로, 안동시 풍천면 병산리 소재 병산서원은 사적260호로 지정되었다.

 

 

오늘이 초복인데 삼계탕 드시고 여름 건강하게 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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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단법인 이육사 문학관 창립총회 / 080715

 

 

안동시청에서 관리하던 이육사 문학관을

이육사 문학관의 활성화를 위해서

사단법인을 설립해서 관리하기로 하고

여러가지 바쁘게 준비를 하고 있답니다.

이육사 문학관이 하루속히 활성화 되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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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가 최유근안과 원장님께서 이사장님으로 선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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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단법인 이육사 문학관 초대 관장으로 선출되신 조영일시인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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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우 안동문협 지부장님 이사로 선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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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육사를 사랑하시는 분들이 전국에서 많이 참석하셨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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샘문학 회원님들도 참석했지요...^^

(김필녀, 김정미, 김연희, 강영옥, 박애자, 김경숙회장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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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줄에 이육사님 따님 이옥비여사와 조영일시인님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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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주부문학회원 김필녀시인, 김명자회장님, 김경숙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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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김경숙, 편집 / 김필녀 

 

 

 

 

 


      천국 천국이 무엇인가. 천국은 결과가 아니라 과정 속에서 마음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스스로 구하고, 즐겁게 봉사하며, 그 천국을 위한 봉사를 후회하지 말아야 진짜 천국을 얻을 수 있다. - 이청준의《당신들의 천국》중에서 - * 세상 사람 모두가 천국에 있다 해도 자기 혼자 지옥에 머물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천국은 다른 사람이 가져다 주지 않습니다. 오직 자기 마음 안에 있습니다.
      출처 : 김필녀시인과 풍기인삼이야기
      글쓴이 : 김필녀 원글보기
      메모 :

       

       

         

      노을 / 김필녀

       

       

      아쉬움으로 소멸 되는 오늘
      네가 있어 지친 가슴 설레게 한다
      긴 기다림 끝 어디쯤서 
      너와 나

      다시 사랑할 수 있다면
      붉게 타는 노을빛
      으로 물들이고 싶다

      같은 하늘 아래 어디선가 서성이며

      그리워 할
      아직 떨고 서 있는 기다림의 빛
      한 순간 스러진다 해도

      그 속에 흠뻑 물들고 싶다

       

      080710

       

       


            
          

        제3회 육사 시 낭송 경연대회 개최 요강 및 참가 신청서입니다.

        많은 신청 바랍니다.

      첨부파일 제3회육사시낭송경연대회개최요강.hwp

      출처 : 한국문인협회 안동지부 카페
      글쓴이 : 이대걸 원글보기
      메모 :

       

      홈페이지 http://www.andongmbc.co.kr/
      마감일 08.07.26
      세부분야 시부문, 수필, 청소년, 어린이, 백일장
      주최 안동MBC
      구분 백일장
         

      제29회 육사 백일장

      제 29회 육사 백일장

       -대회요강-



           - 대 회 명 : 제 29회 육사백일장 09:30-

           - 일    시 : 2008. 07. 26(토) 09:30-

          - 장  소 : 안동국제탈춤 공연장    

           - 참가자격 : 초등학생, 중학생, 고등학생, 일반인(대학생 포함)  -지역제한 없음

           - 준 비 물 : 필기도구  * 원고지는 당일 주최측에서 배포

           - 작품내용 및 규격

      구분

      운문부문

      산문부분

      작품내용

      당일 현장에서 발표

      작품규격

      400자 원고지 (주최측 배부용지)

      출품편수

      총 1인 1편




           - 참가신청 및 접수 : 당일 현장에서 접수

                                ▶ 접수 및 원고지 배부 : 오전 10시부터

                                ▶ 작품 제출마감: 오후 2시까지

           - 입상자발표 : 2008년 8월 1일 (금) 안동MBC 뉴스, 학교, 개인별(일반부) 통보,

                         ▶ 안동MBC 홈페이지 참조

           - 시   상 :

              가. 시상내역

      구분

      내용

      운문부문

      산문부문

      초등부

      중등부

      고등부

      일반부

      초등부

      중등부

      고등부

      일반부

      대상

      상장 및 부상

      1

      장원

      상장 및 부상

      1

      1

      1

      1

      1

      1

      1

      1

      차상

      상장 및 부상

      2

      2

      2

      2

      2

      2

      2

      2

      차하

      상장 및 부상

      3

      3

      3

      3

      3

      3

      3

      3

      참방

      상장 및 부상

      5

      5

      5

      5

      5

      5

      5

      5


              

              나. 시상식

                2008년 8월 7일 (목) 14:00 안동 MBC홀 (변경시 개별통보)



           - 문의

              안동문화방송 광고사업부 ☎ 054) 851-7024

              한국문인협회 안동지부   ☎ 054) 851-0825

          청포도 / 이육사 내 고장 칠월은 청포도가 익어가는 시절 이 마을 전설이 주절이주절이 열리고 먼 데 하늘이 꿈꾸며 알알이 들어와 박혀 하늘 밑 푸른 바다가 가슴을 열고 흰 돛단배가 곱게 밀려서 오면 내가 바라는 손님은 고달픈 몸으로 청포(淸袍)를 입고 찾아온다고 했으니 내 그를 맞아 이 포도를 따먹으면 두 손은 함뿍 적셔도 좋으련 아이야 우리 식탁엔 은쟁반에 하이얀 모시 수건을 마련해 두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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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하나의 사랑 / 추성훈
      2   Timeless  / SG워너비
      3   사랑앓이 / 에프티 아일랜드
      4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 (With 바이브, M To M) SG워너비
      5   정(情) / 씨야
      6   Untouchable / (With 김종국,M To M,바이브) SG워너비
      7   슬픈 다짐 / 다비치
      8   반쪽사랑 ( 숙명 O.S.T ) / 조관우
      9   보고싶어 / SG워너비
      10 あいたい (보고싶어) / SG워너비
      11 The Day / 씨야 ( See Ya )
      12 넌 감동 이였어 / 성시경
      13 깊은 밤을 날아서 ( 못 말리는 결혼 O.S.T ) / 남규리
      14 Remember ( 숙명 O.S.T ) / 가비 앤 제이
      15 Super Star / 초신성
      16 천둥 / 에프티 아일랜드
      17 사랑가 (With 김종국) / SG워너비
      18 편지 / 김종국
      19 잔소리 / 이효리
      20 보고 싶은 날에 / V.O.S 박지헌
      21 눈물이 흐른다 / 에프티 아일랜드
      22 좋은걸 어떻해 / 블랙 펄 ( Black Pearl )
      23 같은세상 / 신혜성
      24 내게 오는 길 / 성시경
      25 미워도 사랑하니까 / 다비치
      
      



      퇴계(退溪) 이황(李滉)

       

      이황은 사림이 훈구의 공신 세력으로부터 심한 수난을 겪었던 조선중기인 연산군 7(1501)년 12월 25일 안동 도산 온계동에서 태어났다. 공의 휘는 황(滉)이며 자는 경호(景浩)이다. 아호는 향리의 시내 이름을 따서 퇴계(退溪)라 하였으나 이외에도 도옹(陶翁), 계옹(溪翁) 등 여러 가지로 불리었다.



      이황의 본관은 진보(眞寶) 곧 진성(眞城)이다. 이 진보 이씨는 고려말에 입문한 씨족이다. 진보 이씨의 시조는 석(碩)으로 밀직부사를 지냈으며 2세 자수(子脩)는 홍건적 토벌로 공을 세워 송안군으로 봉작을 받으신 분이다. 3세 현후(玄候)는 군기시부정을 지냈고, 뒤에 증 통훈대부 사복시정이 되었다. 증조 정(禎)은 선산도호부사로 또한 증 가선대부 호조참판으로 추증을 받았다. 조 계양(繼陽)은 진사로 증 자헌대부 이조판서 겸 지의금부사가 되었다.

      진보 이씨가 안동으로 이주한 것은 송안군 자수로부터이다. 그 뒤 이황이 태어난 도산의 온계리에 터전을 잡은 것은 조부 계양으로부터이며 부 식(埴)를 거쳐서 황에 이르렀다. 곧 이황은 도산십이경(陶山十二景)으로 이름난 안동의 도산 온계리에서 아버지 식과 춘천 박씨 사이에서 태어나 영남학파의 사종이 되었다. 아버지 식은 소과인 사마시에 합격한 정도의 글 읽는 집안이기는 하였으나 한미한 편이었다.

      이황의 생애는 편의상 세 단계로 구분해 보면 다음과 같다
      제 1 기, 수학기 (1 - 33)
      제 2 기, 출사기 (34 - 49)
      제 3 기, 치사 강학기 (50 - 70)

      수학기는 무려 33년간이다. 그러나 33년 동안 스승을 모시고 글을 배우고 익혔던 기간이라기보다 출사를 위한 준비 기간이다. 곧 33세에 진사시에 합격하기 이전으로 학문을 닦고 수기(修己)하던 시절을 말한다. 이황은 이 시절에 비록 부친은 없었으나 어머니의 엄하고도 따뜻한 사랑을 받으며 도산의 자연 속에서 영특한 자질을 길렀다.

      이황은 생후 일곱달만에 아버지가 병으로 죽자, 홀어머니 슬하에서 엄한 교육을 받으면서 만고풍상을 다 겪었다. 퇴계의 어머니는 8남매의 많은 아이들을 데리고 일찍이 미망인이 되고서는 집안을 잘 유지하고, 아이들을 전부 결혼시킬 수 있을지의 여부를 깊이 걱정하고 더욱 더 농업과 양잠의 일에 힘�다.

      아이들이 성장하자 가난 속에서도 학자금을 변출하여 아이들을 취학시켰다. 그리고 항상 학문에 힘쓸 뿐만 아니라 자제심을 가지고 생활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훈계하였다. 구체적인 사물을 가지고 친절하게 가르치며 타이르는 것을 잊지 않고 언제나 엄하게 경고하였다.

      “세상 사람들은 모두 과부의 자식은 배운 것이 없다고 조소하니, 너희들은 남보다 백 배 더 힘쓰지 않으면 어떻게 조소를 면할 수 있겠는가.”라는 식으로 매우 엄하게 교육했다. 그래서 퇴계 선생은 검소함을 중히 여기고, 또 누구에게나 친절하게 대하는 태도를 어릴 적부터 몸에 익힌 것이다.

      고관대작은 내 하고자 하는 일 아니니        高蹈非吾事
      흔들리지 말고 항리에만 있고 싶어            居然在鄕里
      바라노니 착한 사람 많이 만드는 것           所願善人多
      이게 천지의 덕 갚는 도리 아닌가              是乃天地紀
                               和陶淵明飮酒二十首中其十九

      위와 같이 어려서부터 겸손 미덕이 철저하게 몸에 배어 성장했음을 알 수 있다. 위 시에서도 본 바와 같이 퇴계는 고도(高蹈)를 예사로 하지 않았다. 고도란 고거(高擧)와 같은 뜻인데 ‘속세를 탈출하여 은거하다, 또는 높은 자리에 오른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어느 쪽이든 퇴계는 원하지 않고 있으며, 조용히 향촌에서 자기 사업을 하고자 했다. 하는 일이 없으면 바로 이것 자체가 은거라고 한다. 그러나 퇴계의 소망은 선한 사람을 많이 만드는 일이었다. 그것은 퇴계 스스로가 지니고 있는 사명감이기도 했다.

      선생은 영남에게 빼어난 분이외다        夫子嶺之秀
      문장은 이백과 두보와 같으시며           李杜文章
      글씨는 왕희지와 조맹부를 비기리다     王趙筆

      이황이 반궁(泮宮)에서 고향으로 돌아가자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가 전송하며 지은 송별시에 있는 내용이다. 이황의 인품과 재주가 극명하게 표현되어 있다. 이황은 이미 수학기에 그의 인품과 재주를 주위 사람들로부터 인정받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황의 출사기는 34세부터 시작된다. 이황은 중종 23(1528)년 진사시를 거쳐 중종 29(1534)년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승문원권지부정자에 임명되었으며 성균관 전적에 올랐다가 호조좌랑(당 36세)으로 전임되었다. 육품관이 되어서부터 대부인을 위해 현의 수령을 얻어 봉양을 편케 하려 하였으나 그렇게 하지 못해 평생에 한이 되었다.

      중종 31(1537)년에 모친상을 당했다. 홍문관수찬, 사간원정언 사헌부지평을 거쳐 형조좌랑에 임명되었다. 사간원에 있을 때의 사소한 일 때문에 그의 동료들과 함께 파면되었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형조정랑에 제수되었다. 그 후 홍문관교리, 사헌부지평, 홍문관수찬, 부교리, 사헌부지평, 의정부검상을 거쳐 시강원문학을 겸임하였다. 또 사인에 승임되었다가 사헌부장령에 개임되었다.

       >> 혼천의

       

       

       

       

       

       

       

       

       

       

       

       

       

      병으로 사임하였다가 종친부전참, 장령, 성균관사예를 거쳐 시강원필선을 겸하였다가 사성에 승임되었다. 이 때의 나이는 43세였다. 예빈시부정, 홍문관교리를 거쳐 시강원문학을 겸임하였고 사헌부장령으로 전임되었다. 또 병으로 사임했다가 성균관직강에 제수되었고 홍문관응교로 옮겼는데, 다시 휴가를 얻어 고향으로 내려갔다가 조정으로 돌아왔다.

      이 해(44세) 7월에 “갑진걸물절왜사소(甲辰乞勿絶倭使疏)” 라는 외교, 국방론의 탁월한 의견을 제출하였다. 이 상소는 왜사들이 친화을 바라는 뜻을 저버리지 말라는 내용으로서, 그 길이만도 2216언(言)이나 되는 장문일 뿐만 아니라, 그 간절하고 미래를 헤아리는 혜안이 진실로 사표를 삼을 만했다. 이 소(疏)의 주장은 하나같이 멀리 백년 앞을 내다보는 높은 시각이라 아니할 수 없다.

      갑진년 11월에 중종 임금이 재위 39년 만에 승하하고 인종이 즉위하였다. 선생이 명나라에 부고와 청시(請諡: 시호를 청하는 일) 두 표문을 만들어 보냈는데 사신이 명에 도착하자 예부상서 등의 관원들이 환복(歡服)하여 말하기를, “표문이 좋은데다가 서법 또한 묘치가 있다.”라고 하였다. 돌아와 이 사실을 임금께 고하니 선생께 말 한 필을 하사하셨다.

      또 45세에 군자감검정, 홍문관응교, 전한으로 옮겨졌다가 9월에 사옹원정으로 전임되었고 겸직은 전과 같았다. 이 해에 을사사화가 있었다. 인종이 승하하고 명종이 즉위하니 이기(李?) 등이 나라를 맡아 정권을 멋대로 행사하여 사류를 배척 모함하던 때라, 선생 역시 관작을 삭탈 당했다. 그러나 다시 서용하기를 청하니, 그것은 이기의 조카 원록(元祿)이 평소 선생의 학생을 존경하였기 때문에 각별히 권고한 덕분이었다. 서용되어 11월에 통훈대부가 되고 영접도감낭청에 임명되었다.

      46세에 부인 권씨가 세상을 떠났다. 선생은 두 아들들에게 계모 권씨의 상을 친 어머니같이 하라고 당부하였다. 이 해 11월에 건지산(?芝山) 기슭 동암 곁에 양진암(養眞菴)을 지었다. 31세에 건지산에 와사(蝸舍)를 지은 지 14년 만에 조금 격식을 차린 서재를 갖게 된 것이다. 그리고 토계(兎溪)라고 불리던 집 앞 시내 이름을 퇴계라고 고쳐 부르고, 가끔 이를 호로 사용하였다. ‘퇴계 선생’이라 함은 이 때부터 쓰는 것이 정당하다.

      48세에 단양군수로 임명되었고, 그 해 9월 풍기 군수로 전임되었다. 49세에 비로소 서원 운동을 전개하면서 백운동서원에 사액과 서책을 하사하도록 상소하여 뜻을 이룬다. 그리고 사직을 위한 상소를 세 번 올렸으나 해답을 얻지 못하고 이듬해 정월에 결연히 임소를 떠나버린다. 그로 인해 고신(告身) 2 등을 삭탈 당했다.

      이황의 치사(致仕) 강학기는 50세부터 시작된다. 귀향을 결단하고 홀연히 떠나 왔으나, 그렇다고 완전히 초야에 묻힐 수 있는 몸이 아니었다. 이 시기에도 실직이든 산직이든 가릴 것이 없이, 끝까지 벼슬하는 몸일 수밖에 없었다.

      이황은 이즈음 상계 서편에 한서암(寒栖庵)을 짓고, 당을 정습(靜習)이라 이름하고, 못을 파서 광영당(光影堂)이라 하여 5년여를 거처하다가 도산 남쪽 산수 좋고 그윽한 곳에 터를 마련하여, 정사년으로부터 신유년에 이르기까지, 5년 역사 끝에 도산서당(陶山書堂)을 지었다. 이로부터 학문을 연찬하고 후학을 기르는 데 전념하게 되었다.

      노경에 접어든 선생은 인생과 학문 그리고 진리에의 구도 등에서 달관의 경지를 이루었다. 65세에 ‘도산십이곡발(陶山十二曲拔)’을 지었으며, 이 무렵 제자들에게 계몽(啓蒙)과 심경(心經)을 강의하였다. 66세에 동지중추부사의 소명이 있었으나 사면장을 올려도 허락되지 않아 상경하다가 병으로 지체하여 왕(명종26년)이 내의(內醫)를 보내 진료케 하였으며, 홍문관, 예문관 대제학을 제수하였으나 사퇴하자, 왕이 독서당 선비들에게 ‘초현부지탄(招賢不至嘆)’이란 제목으로 시를 짓게 하는 한편, 도산도(陶山圖)를 그리게 하고, 그 위에 선생의 ‘도산기(陶山記)’와 ‘도산잡영(陶山雜詠)’을 써서 병풍을 만들어 방에 비치하도록 하였다.

      68세에 선생은 마지막 상경을 하였다. 모든 벼슬의 명을 사퇴하기를 수없이 반복하고, 그 해 8월에 ‘무진육조소(戊辰六條疏)’와 “성학십도(聖學十圖)” 및 차자를 올렸으니 무진육조소는 선생의 정치사상의 요약이요, 성학십도는 철학사상의 금자탑이다. 선생은 평생토록 정치에 무관심한 것은 절대로 아니었다. 다만 시의에 맞는 정책들이 방해를 받았으며, 정치적 상황이 그를 정치에 무관심한 듯 보이게 했을 뿐이다.

      마침내 선생이 조정을 마지막으로 떠나는 날이었다. 69세 기사년 3월 3일 밤에 입궐하여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을 허락 받게 되었다. 이승에서 마지막 해인 70세에 선생은, 도산서당과 역동서원(易東書院)에서 강의하면서 마지막 정열을 바쳤다.

      선생은 12월 8일 아침에 매화분에 물을 주라 하셨고, 이날 날씨는 맑았다. 유시(酉時)초에 갑자기 흰 구름이 지붕 위에 모여들고 눈이 한자쯤 내렸다. 잠시 뒤에 선생은 이부자리를 정돈하라 하고 부축하여 몸을 일으키라 하여, 앉은 채로 칠순의 평생을 마치시니 구름이 흩어지고 눈이 개였다.

      * 김성규선생님은 <안동, 결코 지워지지 않는 그 흔적을 찾아서> 등 의 저자이며, 현재 안동공업고등학교에 한문선생님으로 재직중이다.


      2008-06-04 오전 9:32:46 / 김성규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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