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정과 오빠의 부재(不在)
뜸북뜸북 뜸북새 논에서 울고
뻐꾹뻐꾹 뻐꾹새 숲에서 울 제
우리 오빠 말 타고 서울 가시면
비단 구두 사가지고 오신다더니
오빠 생각이란 이 동요를 듣고 있노라면 왠지 눈물이 앞을 가린다.
서울로 떠나는 오빠를 동구 밖에까지 따라 나와 배웅하면서 비단 구두를 꼭 사 달라며 약속을 했던 오빠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 오빠라는 이름을 부르기만 해도 눈물이 날만큼 내 가슴속을 짠하게 젖게 하는 진한 감동을 주었던 멋진 친오빠가 있었던 것도 아니다. 그런데 이 노래를 들으면 가슴이 싸아하고 목구멍이 콱 막히면서 눈물이 난다.
나의 친정집은 아들이 없다. 내가 태어나기 전에 아들 딸 육남매를 낳았는데 어릴 때 병마로 다 잃어버리고 겨우 딸 둘만 건져서 두 살 터울로 언니 둘이서 크고 있었다.
그 시절에는 아들이 없으면 대가 끊어진다고 하여 양반집에서는 씨받이를 두기도 하고, 보통가정에서도 첩을 두면서까지 아들을 낳으려고 하는 집들이 많았다. 어머니도 아들을 못 키운 죄도 있고, 대를 이어야한다는 강박관념이 있어서인지 직접 여자를 물색해서 집으로 데려왔지만 아버님께서 마다하셨다는 이야기를 크면서 들었다.
그렇게 우리 집은 경제적으로는 부족함이 없는 집안이었지만 동네에서는 '아들 없는 집'으로 지목이 되어 있었다. 늘 양심 바르고 인품이 좋기로 소문이 났던 우리 아버지 택호는 '두암어른'이셨다.
세월은 흘러서 아버님이 쉰이셨고 어머님이 마흔 아홉이 되던 해에 삼신할매가 두암어른한테 쉰둥이를 하나 점지해 준 것이었다.
내가 태어나던 날은 늪실 양짓마을 집안 어른들께서 삼삼오오 모여서 '두암어른한테 느지막하게 삼신할매가 아들 하나 점지해 주나보다' 하면서 가슴 졸이며 기다렸다고 한다. 그런데 실망스럽게도 아들이 아닌 딸로 태어난 것이었다. 바로 위의 언니와 나이차가 열일곱 살이나 났다. 큰언니는 혼기가 차서 벌써 시집을 가고 없었고, 오매불망 기다리던 남동생은 아니었지만 열일곱 살이나 적은 자식같은 어린 여동생을 애지중지하며 키워주던 작은 언니마저 내가 세살 때 시집을 간 후에는 아들못지 않게 사랑을 듬뿍 받으면서 고명딸처럼 세상 부러울 것 없이 온갖 귀여움을 독차지하면서 자랐다.
하지만 형제가 없다보니 늘 외로웠다. 특히 국민학교를 들어가고 부터는 오빠와 언니가 있는 친구들이 너무도 부러웠다. 학교에서는 물론이고 왕복 십리가 되는 학교길을 오가면서 머슴애들한테 놀림을 당하거나 괴롭힘을 당할 때 친구들은 오빠나 언니를 데리고 와서 혼을 내주기도 하면서 어깨에 힘을 주곤 했지만 나는 늘 혼자서 눈물을 훔치면서 당하기만 했다. 물론 그 자리를 할머니 같은 어머니가 학교 길을 거의 동행하다시피 하면서 쉰둥이 귀여운 막내딸을 때린 머슴애들을 혼내 주면서 오빠 언니의 부재를 대신해 주기는 했지만 말이다.
지난 일요일이 열일곱 살 차이가 나는 언니의 생일이었다. 큰 언니마저 세상을 뜬 지금은 나에게 유일하게 남은 친정피붙이인 셈이다. 내가 늦게 태어났기 때문에 부모님 사랑도 많이 받으며 컸지만 그 대신에 내 나이 스물여덟에 아버님이 돌아가시고, 그 다음 해에 어머님마저 돌아가셨으니 친정 부모님을 일찍 여윈 셈이다. 그래서인지 언니가 된장, 고추장은 물론이고 가을이면 김장까지 담가 주면서 친정어머니 몫을 대신 해주고 있다.
언니의 생일을 조촐하게 보낸 후에 집으로 돌아오는 차에는 산나물김치며 깻잎김치, 매실김치 등 언니가 정성껏 싸준 밑반찬이 하나 가득 실렸다.
언니와 나는 만나서 헤어질 때마다 한마디씩을 꼭 주고받는 말이 있다. 언니는 나보고 늦게 태어나면서 하나 달고 나왔으면 친정 걱정 없이 잊어버리고 살 텐데 하고, 나는 언니가 오빠였다면 얼마나 든든하고 좋을까 하면서 서로 손을 잡고 허허로운 웃음으로 인사를 대신하면서 헤어진다.
지금도 나는 친정 부모님은 비록 돌아가시고 안계시지만 친정오빠가 친정을 지키고 산다면 얼마나 든든하고 좋을까 하는 생각을 많이 하곤 한다. 물론 여자는 시집을 가면 출가외인이라고 하지만 그래도 살다가 보면 시댁식구들과 부딪히는 일도 생기고 남편과 말다툼을 할 때도 있다. 그럴 때 친정에 든든한 오빠가 떡 버티고 있어준다면 내 편이 되어줄 것이고, 고개를 끄덕이며 내 하소연도 들어주고 하면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을 텐데 나는 늘 혼자서 그 외로움을 다 감당하면서 살아왔다.
세월은 유수같이 흘러서 철없던 쉰둥이 막내딸도 어느덧 귀밑머리가 희끗한 중년여인이 되고 말았다. 누구에게나 삶이라는 그 자체가 쉽지만은 않았겠지만 친정이라는 든든한 백그라운드가 없는 가운데서도 인내하면서 잘 견디어 온 세월인 것 같다. 그 세월 속에서 아이들도 어느덧 다 커서 제 나름대로의 삶을 열심히 잘 살아가고 있다. 나 역시 비록 이름 없는 시인이지만 학창시절부터 꿈꾸어 왔던 시인이 되어서 시를 쓰면서 나름대로의 여유를 즐기면서 살고 있다.
하지만 명절이나 친정 부모님 산소를 다녀오고 나면 가슴이 미어지고 아파서 며칠을 끙끙 앓곤 한다. 정답던 고향집은 헐리고 빈터만 남아서 집 주변에 외롭게 남아있는 감나무와 밤나무, 모과나무, 호두나무를 바라보면서 겨우 친정집 윤곽을 찾을 수가 있다. 세월이 흐를수록 친정이 없어진다는 것이 내 가슴에는 커다란 아픔과 한으로 남아 있다.
그러면서 이루어질 것 같지 않는 허황된 꿈을 하나 갖고 산다. 친오빠는 아니라 하더라도 ‘오빠 생각’의 노랫말처럼 나에게도 비단 구두를 사줄 수 있는 든든하고 멋진 오빠가 언젠가는 백마 타고 내 앞에 나타날 것이라는......,
070814 / 김필녀
♪ ♬ 오빠 생각(하모니카) - V.A.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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